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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J어록 2009/08/23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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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김대중 전 대통령,,“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따른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역한 자는 망한다고 했는데, 하늘이 바로 국민인 것입니다. 유일하게 현명하고, 유일하게 승리할 수 있는 국민에게서 배우고 국민과 같이 가는 사람에게는 오판도 패배도 없습니다.(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좌익 독재뿐만 아니라 우익 독재도 똑같은 적이다. 히틀러도, 도조(東條)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음모에 의한 1인 독재도 민주주의의 적인 데는 다름이 없다.(1969년 7월19일 ‘3선 개헌 반대’ 시국 강연회에서)

    힘이 있어도 남을 침략하지 않고 그러나 내 주체성은 꼭 지키고,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문화, 독자적인 의식 구조, 독자적인 정치·경제·학문, 제도를 유지해 가는 그러한 평화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이 위대한 민족이라면, 우리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1987년 9월10일, ‘독재를 이겨낸 위대한 우리 민족’ 연설문 중에서)

    정치는 심산유곡에 핀 한 떨기의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다. 연꽃을 피게 하고 정치를 예술화하는 것은 국민의 예지와 책임감과 결단에 있다고 할 것이다.(1993년 출간된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병행시키겠다.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199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인류 역사 이래 사람이 있는 곳에 인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있는 곳에 반드시 인권의 침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권의 침해가 있는 곳에는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투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1998년 4월16일 ‘세계인권선언 50주년’ 메시지)

    나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희생할 수 있다’는 ‘아시아의 도그마’를 일관되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국의 위기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이 지금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그런 나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1998년 4월23일 ‘서울경제국제회’의 연설 중에서)

    자유는 지키는 자만의 재산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자유는 방종도 아니고 모든 원리에 대한 거부도 아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고 전인적 완성을 이룩하는 데 필요한 제약과 조건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2000년 발간 저서 <옥중서신> 중에서)

    오늘의 영광은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 간의 평화와 화해 협력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국민들의 성원 덕분입니다. 이 영광을 우리 국민 모두에게 돌리고자 합니다. 우리 국민과 더불어 이러한 노력을 성원해 준 세계의 민주화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인권과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아시아와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계속 헌신하고자 합니다.(2000년 10월13일 ‘노벨 평화상 소감문’ 중에서)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억압과 고립화, 이런 것으로써 성공한 일이 없다. 그러나 개방으로 유도하고 대화를 하고 이렇게 해서 성공 안 한 적이 없다. 햇볕정책은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2002년 12월30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어느 누구의 인생이 되었건 모든 것이 순풍에 돛단 듯 잘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좌절시에도 포기하지 않고 원칙을 지켜내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이 결국은 성공한다.(2004년 5월3일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 당선자 간 환담’ 중에서)

    정치의 중요한 요체는 국민과 같이 가야 합니다. 국민의 손을 잡고 반 발 앞으로 가야 합니다. 국민과 같이 나란히 서도 발전이 안 되고, 손 놓고 한 발 두 발 나가도 국민과 유리되어서는 안 됩니다.(2004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 58주년 기념 특별대담’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 간 화해?협력을 이룩하고,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2004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 58주년 기념 특별대담’에서)
  • yoon 2009/08/2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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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켠씨
    인천에 윤원식입니다.
    몇 년째 눈팅으로 많이배우고 있습니다.
    한번 만나 차나 한잔...
    아래 멜로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mooloom@naver.com
  • 민족자주 민족대단결 2009/08/25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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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시론> ‘민족주의자 김대중’을 보내며
    <통일시론> ‘민족주의자 김대중’을 보내며


    2009년 08월 24일 (월) 16:04:03 데스크 tongil@tongilnews.com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이 23일 엄수됐다. 이제 그는 국립 현충원에 안장돼 영면(永眠)에 들어갔다. 인간 김대중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그의 일기의 한 구절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의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세속적 가치로만 보면 그는 이 나라의 15대 대통령이었다. 아울러 세계적 권위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고 국난(國難)이라 불린 IMF를 조기에 극복했으며 또한 2000년에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근본적으로는 부박한 이 땅에 민주화의 씨앗을 뿌려 어느 정도 과실을 맺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또한 민족화해 입장에서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 그는 한때 ‘권력의 화신’, ‘대통령병 환자’로 비쳐지기도 했지만 민주주의와 민족화해에 관한 확고한 신념이 더 우월해지면서 단순한 권력자의 이미지를 뛰어 넘는데 성공했다.

    그래도 어쨌든 그는 정치인이 맞다. 그런데 그를 단순히 정치인으로만 한정지을 수는 없다. 일개 정치인이라면 정치생명이 끝나는 순간 모든 걸 잃는다. 숱한 정치인이 정치무대에서 부침과 명멸을 거듭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름을 날렸다가 나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정치인 군상(群像)이 수두룩하다. 이 나라의 굴절된 정치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김대중은 일개 정치인은 아니었다. 살아생전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또 세상을 뜨면서도 일반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사실이 반증한다.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있을까? 당대가 그랬듯이 젊은 날의 그는 사회주의자일 수 있고 또 혁명가일 수도 있다. 이같은 이념적 표현을 굳이 회피한다면 그는 풍운아였다. 1970년대 유신시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항쟁, 2000년 남북정상회담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고비마다 그는 꼭 나타났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다. 아울러 그는 분단된 현실에서 남한 실정에 충실했다.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자 국제적 노벨상 수상자라는 차원을 뛰어 넘는다. 분단된 나라의 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한 정객일 수 있다. 노벨상을 받았다면 한 국제적인 인물일 뿐이다. 물론 대통령과 노벨상 수상자라는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영예롭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무엇일까? 대통령이 되고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세속적 대업이 그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 두 가지 세속적 영예가 그의 삶의 끝도 아니다. 다름 아닌 그가 땅을 디딘 곳이 세계적으로 특이한 분단상태이며, 아울러 거기에서 나오는 민족문제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직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켜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아울러 노벨평화상은 남북정상회담 등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평생의 업은 민족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민족문제를 본격화하기 이전에 그는 남쪽의 비민주적 현실과 부단히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남한 현실에서 민주주의문제와 민족문제가 동일한 차원 아니었을까?

    그는 일관되게 민족문제와 한반도 평화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71년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이미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4대국 보장론’과 ‘3단계 통일방안’을 내세웠다. 정계 은퇴 후 1993년 영국에서 귀국한 그는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해 장차 정계 복귀의 발판을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권력을 쥔 상태에서 그는 6.15공동선언을 내왔다. 대통령직에 물러나면서 그가 택한 길은 한반도 평화와 민족통일을 다루는 김대중평화센터였다. 그는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86세까지 살면서 민족문제에 몰두했다. 이토록 민족문제에 천착해 왔다면 그는 민족주의자임에 틀림없다. 분단된 현실에서는 어느 한쪽에서만 인정된다고 민족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북측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북측 관련 신문은 평양시민들이 그의 부음을 듣고 애도를 표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즉각 유족에게 조전을 보내고 또한 ‘특사 조의방문단’을 남측에 보냈다. 특히, 인생에서는 전성기 못지않게 말년이 더 중요하다고도 한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그는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 등 민족문제에 대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그는 민족주의자로서 말년까지 천직(天職)인 민족문제에 골몰하다가 순직(殉職)했다. ‘민족주의자 김대중’의 유지를 받드는 것은 곧 민족문제와 통일운동에 나서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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