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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재미한인들 독립운동 자료 속속 발굴

3·1운동 6개월후 상해임시정부에 30만달러 보내

보도부 | 기사입력 2016/04/15 [12:00]

일제 때 재미한인들 독립운동 자료 속속 발굴

3·1운동 6개월후 상해임시정부에 30만달러 보내

보도부 | 입력 : 2016/04/15 [12:00]

4월13일은 1919년 3·1운동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97주년 기념일이다. 이 뜻 깊은 날에 미주한인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자료가 나타나 재미한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있다. 

 

상해임시정부 설립초기에 북미대한인국민회(총회장 대리 백일규)에서 30만달러의 애국금을 거둬 납입하기로 했다는 비밀문서가 발견되었다. 

 

1932년에 만들어진 이 문서는 뉴욕시립대 퀸즈칼리지 재외한인사회연구소에 교환교수로 재직중인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김재기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상해일본영사관 경찰부 발간 비밀문서 <조선민족운동연감>에서 확인되었다. 

 

이 비밀문서 26쪽의 1919년 9월3일자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북미대한인국민회총회장대리 백일규가 미국교민들의 애국금 30만달러를 납입하기로 보고하였다”고 적혀있다.

 

이는 대한인국민회가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공문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공문을 일본상해영사부 경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비밀문서로 정리한 것이다. 상해임시정부는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 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던 한인 디아스포라들에게는 정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 비밀문서는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직후인 4월30일 상해일본영사관 경찰부 제2과에서 상해임시정부와 상해한인교민단을 급습하여 압수수색한 자료들을 비밀자료로 정리한 것이다.

 

이 비밀문서는 400여쪽에 달하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1932년까지 13년간 활동이 날짜 별로 정리되어 있다.

 

◆ 임시정부 김구 주석, 대한인국민회에 인구세 납부 감사편지 = 재미한인들이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 속에 독립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는 근거는 1930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서도 나타난다.

 

1919년 3·1만세운동이후 10년 후에 발생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제2의 3·1운동’으로 평가한 대한인국민회는 광주학생들을 돕기 위한 후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는데 이에 대한 김구주석의 감사의 편지 원문이 신한민보에 실려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한 ‘신한민보’ 1930년 5월1일자에는 상해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대한인국민회 백일규 총회장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는 “다시금 감복한 것은 수년간 우리 독립운동이 침체상태에 빠졌던 현상이 광주학생운동으로 기인되어 강경히 진작됨에 따라 정부의 비용도 가일층 호변한 차시에 그것까지 유념하시어 영수증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의를 다하시와 인구세(人口稅)를 또다시 보내주심을 더욱 감격합니다. (대한민국 4월2일 김구)”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있다.        

 

신한민보가 보도한 이 편지는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직접 언급하며 높게 평가한 최초의 문건이라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미주한인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자금을 송금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지원금 300만달러 규모 파악하여 한인이민박물관에 전시 해야” =  미국을 비롯한 중국과 소련에 거주하던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애국금, 인구세, 의연금, 후원금 등 다양한 이름으로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송금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은 중국의 장개석 정부와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받은 지원금을 제외하면 미국동포들의 성금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자료에 의하면 1919년 5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13만1,909달러의 예산이 사용되었는데 수입으로 동포들의 애국금 8만6,567달러, 충의금 1만4,487달러, 구미위원회 1만2,354달러로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임시정부 예산의 80% 정도인 10만달러 규모가 미국동포들의 성금으로 마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주한인 50년사’를 편찬한 김원용에 의하면 일제시기 최대 300만 달러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번에 확인된 30만달러 자료는 1919년 이후 1945년까지 미주동포들이 지원했던 독립운동 금액을 밝히는 단초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자료를 찾아낸 김재기 교수는 “미국동포들이 보낸 애국금이 갖는 의미는 나라 없는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물구입과 운영비 등 초기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기반조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김재기 교수는 이어 “1919년 30만달러를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6,000만 달러(한화 640억원) 규모이다. 이 자료를 시작으로 향후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신한민보, 대한인동지회와 구미위원회 등의 자료를 분석하여 미주동포들의 독립운동자금 지원 규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했으면 한다. 이러한 자료들은 검증을 통해 향후 들어설 미주한인 디아스포라 박물관에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원본 기사 보기:뉴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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