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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27)-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조선의 황혼-동학의 대두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11/25 [06:00]

대한정통사(27)-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조선의 황혼-동학의 대두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11/25 [06:00]

 

▲ 동학의 대두. 사진=고창 동학군 발발     © 편집부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1945년 8.15 이후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 역사서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정도에 이르건만, 민족정통성의 시각에서 집필된 것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관련 역사서는 물론이고, 논문들의 대부분도 정통성의 맥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화사관(開化史觀)'이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 민족의 존립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사적 정통성을 떠나서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대단히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통성에 대한 민족구성원들간의 의견차이나 충돌로 인하여 민족적 구심력이 깨어지고, 민족분열과 허무주의적인 민족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현대사가 스스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서문 중에서]

 

조선의 황혼


1. 동학의 대두(擡頭)


  국제교역을 빙자한 명치일본의 농간과 수탈에 의하여 국가 경제가 피폐해져 가던 조선은, 서1889년 10월부터 영국인 죤슨이 해관 총세무사로 취임한 이후 관세업무를 비교적 엄정하게 시행하면서부터 다소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방곡령에 따른 대일(對日)배상금 11만원을 다시 걸머지게 되는 등 국가재정은 여전히 힘겹게 운용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국고확충의 한 방법으로 등장한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즉, 국가에 많은 재산을 기부하는 자산가들에게 일정한 직책을 부여했던 것이다.

 

  관직을 돈으로 산 자들이 그 직책을 가문의 큰 명예로 알고, 또한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청렴하게 처신하기만 한다면, 이는 개인의 명예와 국고의 확충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번에 얻을 수 있는 묘책이 될 수 없는 바도 아니었다. 문제는 거금을 내고 관직을 얻은 자들이 본전을 뽑으려는 천박한 욕심을 내는 데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즉, 탐관오리들과 민중사이에 커다란 갈등과 대립이 표면화되어 갔던 것이다.


  서1860년에 경주에서 최 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하늘과 사람이 같다(天人如一)'는 교리를 근간으로 하여, 사람마다에게 있는 도(道)의 실체를 찾자고 역설하는가 하면, '시천주 영아장생 무궁무궁 만사지'라는 주문을 외우면 장생함은 물론이고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된다고 설교했다. 이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하늘의 뜻(天命)에 맞춰 살아야함을 강조하는 유학적 인식에 대한 커다란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기이한 것을 배척하는 합리주의적 인생관을 지녔던 유학적 기풍에서 볼 때 최 제우의 주장은 이단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동학이론에는 또한 조선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중요한 개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이었다. 서양의 극단적인 말세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후천개벽사상은, 해석여하에 따라서는 반체제적 이념으로 얼마든지 풀이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후천개벽사상은 인류의 역사가 이전과 크게 그 성격을 달리하는 대변혁을 맞이할 것임을 역설하는 까닭에, 그것은 그대로 현체제가 뒤바뀌어야 한다는 논리를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교적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수긍하기 어려운 기복적(祈福的) 종교양상과 반체제적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던 동학이 확고한 유교국가였던 조선의 위정자들과 유림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3년여 짧은 기간동안 포교활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위정척사의 기백이 왕성하던 당시의 위정자들에 의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명목으로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어린 고종의 등극으로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바로 그 해였다.


  최 제우가 처형당한 후 동학이 비밀리에 퍼져가던 중, 신미양요가 벌어지던 서1871년 2월에 영월의 교도인 이필제가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영해(寧海)군수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교조신원을 호소했으나 교도들이 체포당하거나 쫓겨났으므로, 격분한 교도들을 이끌고 무기고를 탈취한 후 군수까지 참살하고 스스로 대장이 되어 상주로 진격하다가 급히 출동한 관군에게 토멸당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교도들을 위험한 집단으로 간주하고 소탕하기 시작했으며, 2세 교주인 최해월은 관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백산중으로 피신해 간 후 그 곳에서 다시 비밀리에 포교활동을 벌였다.


  강화조약에 의한 대외무역 개방 후에 국가경제가 혼란에 빠져들자, 불안감을 느낀 서민들 사이에 동학은 더욱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최시형이 지하포교 활동을 펼친 지 20여 년이 지난 서1890년대 초반에는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수십만 명에 달하는 교도가 확보되었고, 그 나름대로 탄탄한 조직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교도가 늘어남에 따라서 정부측의 억제조치와 잦은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특히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의한 국고의 고갈로 인하여 궁핍해진 지방 행정기관의 경비조달에 큰 애로를 느끼던 각 지방관들에게 있어서 반국가적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던 동학교도들에 대한 재산압류 등은 대단히 매력있는 재정확보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반체제적 집단에 대한 강제조치는 어떠한 사회에서든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부 탐욕스런 지방관들이 재력있는 지방유력자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수법으로 그들에게 동학교도라는 누명을 씌워가면서까지 불법적 수탈을 자행한데서 발생했다. 특히 왜족들에 의한 약탈적인 토지소유가 급속히 증가해 가고 있던 전라도 지방에서 그러한 내부적 모순까지 심화되면서, 인구의 90%이상인 농민들 사이에는 반정부, 반외세 감정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탐관오리들은 불법적 수탈을 정당화하려고 '진짜 동학교도'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탄압을 공개적으로 자행했는데, 그에 따라서 동학교도들은 더욱 비밀결사화해 갔다. 그리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게 되자 동학의 합법화를 위한 교조신원운동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었다.


  동학의 조직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하는 상부조직과 일반 교도들로 이루어진 하부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상부조직은 대체로 보수적이고 온건한 반면에 하부조직은 사회개혁을 열망하는 혁신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중소 규모의 농민이 대부분인 일반교도들은 하루 빨리 교조신원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는 반면에, 최시형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하며 모든 형태의 단체적 항의나 무력봉기 등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여러 번의 절멸적 탄압을 겪었던 그의 입장에서, 교세의 확장과 실력의 배양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까지 동학의 맥을 보존하기 위한 신중한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도들의 요구가 강렬해짐에 따라서 그는 마침내 '인심(人心)은 천심(天心)'이라는 명분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동학의 급속한 교세확장은 국내의 정치가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그 중에서도 임오란 이후 연금상태에 가까운 칩거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재집권의 기회만을 노리던 대원군의 관심은 매우 컸다. 특히 동학의 성격이 반외세적이며, 그들이 대원군을 반외세적 지도자로 숭앙하고 있음을 알게된 그는,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밀사들을 통하여 동학의 지도자급 인사들과 비밀접촉을 긴밀히 유지했다. 그런 가운데 동학교도들은 서1893년 1월 18일에 호남평야의 쌀생산 중심지 중 하나인 삼례에서 수천 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가진 후 교조신원운동을 결의했다. 그들은 포교공인(布敎公認)과 부당착취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소장(訴狀)을 작성하여 전라관찰사 이경식과 충청관찰사 조병식에게 전달했다. 그에 대하여 이경식은 '동학에 대한 것은 지방관의 권리 밖의 일'이라고 하며 집회해산을 명했는데, 그는 불법적 수탈만은 공식적으로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일부 탐관오리들에 의한 수탈이 계속되었다.


  이에 손 병희 등 동학의 지도자급 대표 40여명은 3월 29일에 상경하여 광화문 대궐문 앞에서 3일간 상소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내용을 전해들은 고종이 '소원대로 시행토록 할 것이니 귀향하여 생업에 힘쓰라'는 명을 내리자 일단 해산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 중 하부의 노선을 대변하는 혁신파는 지도자들과는 다른 운동차원에서 따로 상경하여 '서교배척(西敎排斥), 외국상인 축출'을 요구하며 왜영사관 등에 전단을 살포하고, 서양인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에게도 징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놀란 외국인들은 피난준비를 하기도 하고, 자기 나라에 군함파견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원세개도 그러한 사태에 대해 조선정부가 강경책을 강구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반외세적 입장에서는 동학과 다를 것이 없던 위정척사 계열의 유림도, 동학이 단순한 이단이 아니라 반란을 꾀하는 집단으로 파악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을 상소하고, 거기에 덧붙여서 서원의 부활을 상소하기도 했다. 사세가 그처럼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감을 우려한 동학교도들은 일단 해산하는 방안을 택했다.


  상경투쟁을 통하여 동학의 교권확립 요구만으로는  정부나 일반국민의 정서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지도층은, 우선 정부의 탄압을 피하면서 교도들을 결집시키고자 서1883년 5월에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표방한 대대적인 평화적 집회를 열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 윤중을 파견하여 집회를 해산시키도록 조치했는데, 동학 측에서는 집회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해산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어 윤중으로 하여금 정부군을 이끌고 가서 강제 해산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동학지도자들은 정부군의 출동소식을 듣자 미처 정부군이 도착도 하기 전에 집회를 자진해산하고는 도주해 버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일반 교도들의 결속력은 혁신파를 중심으로 더욱 강화되어 갔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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