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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23)-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명치일본의 조선수탈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10/19 [10:42]

대한정통사(23)-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명치일본의 조선수탈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10/19 [10:42]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1945년 8.15 이후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 역사서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정도에 이르건만, 민족정통성의 시각에서 집필된 것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관련 역사서는 물론이고, 논문들의 대부분도 정통성의 맥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화사관(開化史觀)'이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 민족의 존립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사적 정통성을 떠나서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대단히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통성에 대한 민족구성원들간의 의견차이나 충돌로 인하여 민족적 구심력이 깨어지고, 민족분열과 허무주의적인 민족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현대사가 스스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서문 중에서]

 

 명치일본의 조선수탈


1. 명치초기의 사회상과 조선수탈상


  명치유신 후 명치정부는 수백년간 유지되어 왔던 무사제도를 일거에 폐지함으로써 50만 사무라이가 실직상태에 들어갔다. 국민적 지지기반과 경제적 뒷받침이 취약했던 명치정부는 유신이후 다음과 같은 난관에 곧 부딪치고 말았다. 우선 실직 사무라이들에 대한 보상과, 새로이 팽창된 정부기구와 근대화시설 등의 설치를 위하여 엄청난 양의 불환지폐와 공채 등을 남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질적인 식량부족과 물가폭등에 의하여 민생불안이 야기되었으며, 외래상품의 범람으로 인하여 국내산업이 파괴되고 수입초과로 인하여 국가경제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거기에다가 치외법권을 누리는 칠천여명의 외국상인들은 고리대금적인 거래방식으로 일본인들을 착취했으며, 또한 아편이 수입되고 막대한 양의 금·은이 유출되는 등, 명치일본은 내란과 식민지화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명치 10년(서1877)에 벌어진 서남전쟁으로 인하여 정부지출이 크게 늘어 나자 국가재정은 파탄직전에 몰리고 말았다. 이러한 모든 곤경을 해결해 준 것이 바로 강화조약 이래 명치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이었다. 그러한 실정은 다름 아닌 명치일본의 금은화(金銀貨) 보유량의 변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서1872년에 4721.4만원이던 보유액이 점차 줄어 들어서 서1880년에는 2306.3만원이던 것이, 그 후 매년 증가하여 십년 후인 서1891년에는 5923만원으로 갑절이나 증가했으며, 그 후에도 계속 급증을 거듭했다. 일본 국내에서의 자체 금생산량이 서1885년부터 서1890년까지 316만원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서양열강과의 무역에서 적자만을 기록했던 일본의 금은화가 크게 증가한 것은 조선으로부터의 일방적인 막대한 이득을 얻은 것이외에는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다.


  명치일본은 갖가지 불법적이거나 월권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 조선으로부터 부를 긁어가는 데 혈안이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쌀과 금의 염가매입, 어로구역 침범, 도굴및 집단강도행각등이 있다. 특히 조선민중의 생존과 직접 관계있는 쌀을 엄청나게 열도로 반출해 감으로써 거듭되는 민란의 기본적 원인을 제공한 것도, 다름아닌 '통상조약'을 내세운 명치일본의 강도적 수탈행위, 특히 파렴치하기 이를 데 없는 대규모적인 조선곡물 반출행위였던 것이다. 저들이 조선의 주요 곡물들을 왜열도로 반출해 간 수법들은 주곡인 쌀을 예로 들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 째, 무엇보다도 조선의 쌀값이 일본에 비해서 극히 저렴했으므로 왜상들은 그 막대한 시세차이를 노리고 너도나도 쌀무역에 달려들었다. 강화조약이 성립된 서1876년부터 서1879년 사이의 조선 쌀값은 일본 쌀값의 1/6 수준에 불과했으며, 왜열도로의 막대한 곡물반출로 인하여 조선의 쌀값이 폭등세를 기록했던 다음인 서1880년대를 통해서도 대체로 반값 이하였던 것이다.


  둘 째, 왜상들은 현금확보 능력이 미약한 조선농민들에게 살인적인 고리대금을 살포함으로써 한 번 왜인 고리대금업자에게 걸려 들면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저들은 심지어 사설감옥까지 설치해 놓고서, 빚을 갚을 때까지 불법적인 감금도 서슴치 않았다. 월 6& 내지 10%에 이르는 경악할 만한 높은 이자를 정해 놓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확량의 50%를 이자명목으로 수탈해가기 일쑤였다. 폭력배들을 동원한 악랄한 일본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원금보다도 불어난 이자때문에 헐값에 쌀을 빼앗기는가 하면, 결국은 농경지마저 다 빼앗기고 유리걸식하게 되는 경우마저도 드물지 않았다.


  셋 째, 단경기(端境期)와 추수기 사이의 시세차익으로 큰 이익을 남겼다. 즉, 쌀값이 단경기에 비해서 1/2 이하로 떨어지는 추수기에 농민들로부터 싸게 구입해서 3개월 정도 이후부터 쌀값이 두 배로 오를 때 일본에 수출하는 방법을 많이 썼다.


  넷 째, 조선과 일본간의 전통적 됫박 사용방법의 차이를 악용했다. 조선에서는 전통적으로 한 됫박을 고봉(高捧)으로 담았기때문에, 평평하게 깎아 담는 일본식 됫박(평두;平斗)보다 평균 38%정도를 더 담아 주는 식이었다. 왜상들은 이를 악용해서 조선농민들에게 고봉으로 받고서는 평두값만 지불함으로써 막대한 차익을 챙겼다.


  다섯 째, 양국간 무역에 의한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상품 대금도 현금 취급되었던 쌀로 결제함으로써, 공식적 무역에 의한 쌀 반출만도 강화조약이후 년평균 116.4만석에 달했다. 이 양만 해도 무려 120만명 내지는 130만명의 1년분 식량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국제적 화폐사용 관행에 익숙치 못한 조선인들을 농락하는 수법으로서, 명치유신이후 살인적인 인플레로 인해서 일본국내에서마저 액면가의 1/2로 평가절하된 불환화폐인 일본화폐로 쌀을 수매함으로써 또한 막대한 중간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으로부터 알짜배기 식량은 빼내갈 수 있는 만큼 다 빼내가면서, 국제적 통화로서의 신용이 인정되지 못하던 종이조각에 불과한 일본화폐를 뿌려대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악랄하고도 교활한 강도·사기적인 수법들을 총동원하여 질좋기로 유명한 조선의 곡물들을 매년마다 다량으로 반출해감으로써, 왜족은 마침내 유사 이래의 만성적인 기아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 반면, 그 반대로 유사이래 식량을 100% 자급자족하던 조선인들은 해마다 봄철이면 절량(絶糧)농가가 속출하는 집단아사적인 춘궁기를 맞아야만 하는 만성적인 기아상태로 빠져들어가고 만 것이다.

 

2. 명치일본의 귀금속 수탈


  막대한 식량의 지속적인 유출과 함께 조선경제를 도탄으로 몰아 간 또 하나의 커다란 원인은 다름 아닌 금의 대량유출이었다. 이는 특히 조선인들이 근대화폐제도에서 금이 지니고 있는 중대성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국부의 손실이었다. 곡물은 매년 재생산할 수도 있지만 광물자원은 한번 쓰면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식량과 마찬가지로 금 유출의 최대 원흉은 왜족들이었으며, 조선의 금은보화를 송두리째 긁어가려고 왜족들은 모든 간사한 꾀와 악랄한 방법들을 총동원했다.


  명치일본은 서1871년에 서구열강을 모방해서 도입했던 금본위 화폐제도가 서구열강과의 교역에 의해 일본금화의 2/3이상이 해외로 유출되면서 실패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서1878년에 벌어졌던 소위 '서남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전쟁비용이 지출되어 국가재정이 파탄지경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조약이후 조선에서 긁어 모은 막대한 금,은으로 명치일본은 국가적 재정파탄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명치정부는 조선의 금을 확보할 목적으로 서1878년에 부산에 일본제일은행 지점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금수탈 행각을 벌였다.


  거기에다가 개구초기에 조선의 관세제도가 확고히 자리를 잡지 못했던 개구이후 첫 13년간 갖가지 교활한 편법들을 총동원한 일제의 관세포탈 정책까지 겸하여, 파탄지경으로 빠져 들어가던 명치일본의 국가재정은 금본위 화폐제도를 확립하는 등 반석 위에 올라선 반면, 대체로 자급자족에 별 문제점이 없던 조선은 소중한 국부가 썰물처럼 왜열도로 유출되어 나감으로써 전반적인 재정파탄과 유사이래 최악의 민생고에 빠져들어 갔다. 세계 자본주의 무역에 있어서 조선이 처한 열악한 생산성과 하부구조적인 위치는 이러한 상황들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외국화폐의 무제한적인 국내통용으로 국내화폐제도의 문란과 열강에의 경제적예속화 또한 가속화되었다.

 

3. 명치일본의 해양수탈


  왜족의 조선의 어족자원에 대한 침탈 또한 심각한 정도였다. 강화조약이후 왜족은 식량부족 해소의 한 방법으로 조선의 풍부한 어족자원에 눈길을 돌렸는데, 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선의 해안에 숙소까지 짓고 남획을 일삼았다. 그런 현상은 외딴 섬지방에서 더욱 심했으며, 특히 제주도 근해와 연안까지 불법적으로 침탈함으로써 주민들과의 충돌이 잦았으며, 심지어는 주민들에 대한 강도적 약탈과 살인까지도 벌였다. 양국 어민간의 충돌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조선어민들의 항의가 빈번해짐에 따라서, 조일 양국간에 외교적 해결이 시도되었으며, 그 결과 서1889년 10월 20일에 한일통어(通漁)장정이 이루어졌다. 통어장정에 의거하여 조선정부는 일본어민들로부터 동남연해의 어로권을 인허해 주고 일정액의 세금을 받기로 되었으며, 조선대표인 민 종묵은 통어장정에 대한 제주도민의 치열한 반대를 고려해서 제주도에서는 1년 후부터 실시키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일본어민들에 비해서 장비가 열악한 까닭에 제주도 연안의 어로를 왜족들에게 허락할 경우 생존위기에 몰릴 게 불보듯 뻔하다고 판단한 제주도민들은 더욱 치열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에 따라 민 종묵은 일본대리공사 곤도에게 다시 1년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해서 관철시켰으나 제주도민의 항거는 더욱 거세어질 뿐이었다. 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민 종묵은 다시 일본공사 미산(梶山)에게 제주도를 통어장정 대상에서 아예 제외시켜 줄 것을 제의했으나 관철되지 못했다.


  탐욕에 눈이 먼 일본어민들은 명치정부의 힘만 믿고 점차 해적(즉, 왜구)화해 갔다. 서1891년 5월 15일에는 왜구 어선 수십척이 제주도에 몰려 와서 도민과 충돌한 끝에 도민 16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강탈해 가는 파렴치한 해적질을 자행했고, 한 달후인 6월 13일에도 다시 몰려 와 해적질을 하는 등 공공연한 행패를 일삼았다. 고종은 같은 해 년말에 내무협판으로 고빙한 미국인 리젠더를 동경에 파견해서 다시 제주도를 제외한 통어장정을 협상케 했으나, 왜족들의 고의적인 협상기피로 말미암아 결렬되고 말았다.


  양국간 협상이 지지부진하면서 시간을 끄는 동안에 일본어부들은 완전히 집단강도화 하여, 다음 해인 서1892년 2월에는 144명의 왜족이 제주도 성산포에 집단 막사까지 짓고 훈도시 차림이나 나체차림으로 제주도 연안을 횡행하면서 부녀자 겁탈을 자행하거나 저들에게 항의하는 주민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저들 정부의 후원만 믿고 기세가 등등한 왜구들은 이어서 4월 1일에는 화북포(禾北浦)에 다수가 상륙하여 약탈과 살인을 저질렀고, 4월 2일에는 명월진·두모리포 등에도 집단 침입해서 또다시 부녀강간·약탈·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했다. 그리고 일부 매국적 관리들은 그러한 해적행위를 합법화하는 엉터리 세법을 멋대로 조작해서, 일본어선들로부터 세금을 불법적으로 징수하는 행위에 가담함으로써 조선민중의 분노를 사기도 했던 것이다.

 

4. 명치일본의 조선사회 질서파괴


  또한 왜족은 강화조약 이후 조선인 불량배들을 포섭해서 각종 부정한 수법과 악행을 가르쳐 저들과 합작하거나 앞잡이로 내세워 갖은 악행을 자행케 했으니, 그로 인하여 유서깊은 예의지국으로서 도덕심이 높고 질서가 정연했던 조선사회에 왜풍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조선인의 정의감이 약화되고, 국민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경제생활이 크게 파괴당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전체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 들어 갔다. 


  그 외에도 왜족들은 매국적 관리들에게 뇌물을 써 가면서 울릉도의 울창한 삼림과 희귀한 약재 등을 도벌하거나, 남획하기도 하고, 떼지어 다니면서 고가였던 인삼을 대량으로 훔쳐가기도 했고, 위조화폐를 남발함으로써 조선경제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왜구들은 역대 제왕의 능묘 등 많은 무덤을 도굴해서 값비싼 부장품들을 훔치는 파렴치한 본색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매국적이고도 불량한 조선인들을 앞잡이로 내세워서 각종 이권을 잠식하면서, 저들에게 기생하는 경제적 매국노로서의 부왜무리들을 크게 키워감으로써 민족내분의 망조를 급속히 확산시켜 갔다.


  이러한 모든 악랄한 방법을 총동원한 명치일본의 조선침탈로 인하여 조선민중은 도탄에 빠져 들고 왜족은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꾀하기 위한 '원시적 자본축적'에 성공하면서 국력이 피폐해진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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