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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8)

단군조선과 춘추전국시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3/05/10 [14:09]

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8)

단군조선과 춘추전국시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3/05/10 [14:09]
[역사 플러스코리아]안재세 전문위원= * 서세동점 이후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 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 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 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自蔑史觀)을 떨쳐버리고, 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더 많은 연구와 보충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골격정비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 강역도     © 안재세

2. 문명과 야만의 교차로

 1. 인류문명의 중반기

  가. 단군조선과 춘추전국시대

  색부루 단군이 삼조선 제도를 만들어 세 한(韓, 또는 汗)들이 나누어 다스리기 시작한 때는 지나지방에서 주나라가 일어나려는 때이기도 했다. 색부루 단군의 뒤를 이은 제 23세 아흘(阿忽) 단군 때인 1148년(서전1185)에 은나라의 제후에 봉해진 후 실력을 키워 가던 서백(西伯) 창(昌)은, 그를 경계한 은나라 주왕에 의하여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그러던 중 위양(渭陽)에서 대전략가인 강 여상(姜呂尙)을 만나 더욱 내실을 기하던 중 서백(문왕)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마침내 은나라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은나라 주왕의 폭정에 시달리던 민중이 많은 지지를 보내었으나, 무왕과 연합하기로 한 많은 제후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참전하였으므로 처음부터 분열과 불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강 여상과 주공 단(周公旦)의 착실한 보필을 받아 세력이 당당하던 무왕은 반란의 우두머리로서 새로운 왕조를 건설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러한 반란군의 속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던 조선족의 나라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인 백이·숙제(伯夷·叔齋) 형제는 무왕의 반란을 말리면서 그 부당함을 간했으나 무왕이 듣지 않자, 말세가 올 것을 한탄하며 수양산으로 들어가서 고사리만 뜯어먹고 살다가 자결하기도 했다.

  은나라 주왕을 제거한 후 반란에 가담했던 제후들에게 약속했던 땅들을 나누어 주고 나니 주나라 왕실에 남은 것은 얼마 안 되는 영지와 왕이라는 칭호뿐이었다. 땅의 분배를 놓고 제후들 간이나 주나라 왕실 사이에도 갈등과 다툼이 심했으므로, 민중생활은 변함없이 도탄에 빠져 있었고 은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무력 반항도 자주 일어났다. 그처럼 혼란한 사회를 통치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현명한 인재들이 필요했으나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나라의 무왕은 올바른 나라를 만들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으나, 정작 현인 기자가 단군조선에서 내려오는 유법(遺法)인 홍범구주를 실현시키려고 하자, 그것이 지나지방에는 맞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홍범구주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기자는 장차 주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예견하여 주나라를 떠나서 단군조선에 귀화하였다. 단군조선에서는 중원지방에서 비교적 현명하다고 소문난 사람이 귀화한 것을 반갑게 여겨서 주나라와 맞닿은 서쪽지방의 변경 일대를 기자에게 다스리도록 하고 지방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기자의 본명은 '자서여(子胥餘)' 혹은 '자수유(子須臾)'라고도 하는데, 기자의 후손들은 대체로 내몽골 지방의 일부를 영지로 할양받아 단군조선의 미풍양속을 끝까지 올바르게 지켜 나가면서, 단군조선에 위급한 변란이라도 생기면 만사를 제쳐 놓고 도와주는 의리를 지켜나갔다. 그리하여 수유의 나라 또는 기자조선이라고도 불리우게 되며, 나중에 불조선의 해인불한(解仁番韓)이 암살당하는 등 춘추전국에 의해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불조선을 인수하여 서쪽변방을 막아내는 역할을 잘 수행하게 된다.

  문명과 반문명, 또는 문명과 야만의 분명한 대립관계를 드러내고 전개된 단군조선과 지나지방·열도지방과의 관계는 군자와 소인과의 관계와 비슷하였다. 홍익인간과 홍범의 이상적인 사회를 면면히 이어온 한민족은 군자의 나라로서, 예(禮)와 의(義)를 실생활에 잘 응용하는 좋은 풍습을 가진 나라로 (주변의) 야만인들에 의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야만인들은 한민족사회를 흉내조차 내기도 힘들어서, 각 왕조의 초기에나 잠깐씩 올바른 정치를 흉내내다가는 2,3 세대도 가지 못해서 다시 야만의 풍습인 탐욕·수탈·사회혼란에 빠지고, 그리하여 얼마 못 가서 새로운 전란시대에 말려들게 되는 악순환만 되풀이하게 될 뿐이었고, 그러한 악순환은 전(全) 역사시대를 거쳐서 계속 반복되어 갔다.

  단군조선이 태평한 세월속에서 홍익·홍범의 아름다운 풍속을 누려가고 있을 때 지나지방은 계속적인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욕심 사나운 각 지방의 제후들은 천하의 이익을 혼자서 모두 차지하려는 망상에 빠져서 끊임없는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선량한 민중들만 도탄에 빠지게 되어서 삶의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 양민들이나 불의한 세상을 보고 참을 수 없는 의분을 느끼게 된 뜻있는 사람들은, 한시바삐 지나지방에도 단군조선과 같은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원하면서, 혹은 산 속에 들어가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비밀리에 가꾸기도 하고, 혹은 탐욕스런 제후들에 대항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을 벌리기도 하였다. 실로 처절한 민중의 투쟁이 대부분의 역사기간을 통하여 전개되어 갔던 것이다.

  주나라가 시작된 지 약 200년이 지나면서 이미 지나지방은 대혼란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때 주나라를 다스리던 목왕은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신선이 되어 보겠다는 잘못된 환상에 빠져서, 서쪽 곤륜산 기슭까지 유람다니며 신선을 찾아다니는 행각을 벌이기 일쑤였다. 서왕모(西王母)라는 전설상의 여자 신선이 살고 있다고 하는 곤륜산은 당시는 물론이지만 지금도 오르기가 힘이 드는 험악한 산지인데, 그러한 허황된 유흥을 즐기면서 엉터리 도사들에게 엄청난 비용을 뿌리려니 그 재정을 담당해야만 하는 민중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당연히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어서 올바른 지도자를 찾게 되었다.

  이때 단군조선의 혈통인 서언왕(徐偃王)이라는 훌륭한 인재가 나타나서 도탄에 빠진 민중을 규합하여, 지나지방(지금의 황하이남에서 양자강 이북지역인 소위 '중원지방'을 가리킴)의 동쪽 절반지역을 석권하고 일시에 주나라의 존립을 위협했다. 곤륜산에서 신선이 되겠다고 돌아다니고 있던 목왕은 신하들로부터 이러한 위급한 일을 전해 듣고서야 허둥지둥 주나라로 돌아왔는데, 이미 서언왕의 세력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재빨리 눈치채고는 서언왕과의 화해를 청하였다. 서언왕은 워낙 어진 사람이었으므로 주목왕을 불쌍히 여겨서 목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강화를 맺었다. 이로 인하여 주나라의 영토는 동서로 나뉘어지고, 서언왕은 풍요한 동쪽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로써 목왕은 제후들에게 비웃음을 받게 되었지만, 모략의 대가이기도 한 그는 그 제후들에게 막대한 봉토와 이익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고 자기편으로 끌어 들였다. 각 제후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서언왕의 지도를 받들려는 민중의 뜻을 배반하고 목왕에게 붙어서 언왕을 몰아내어 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지나지방은 문명사회가 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다시 야만적인 전란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서언왕에게 대항하느라고 제후들에게 너무나 많은 영토와 이권들을 약속했던 주나라 왕실은 더욱 보잘 것 없는 작은 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어 그 명맥과 체면을 유지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어쨌든 명맥만은 간신히 유지해 가던 주나라왕실도 주나라 왕들의 바보스럽고 탐욕스러운 생활에 의하여 망국의 기로에서 계속 헤매게 되었다.

  34세 단군 오루문(奧婁門) 시대에 이르러 주나라의 '유(幽)'왕은 '포사'를 왕비로 삼았는데, 여러가지로 해괴한 포사의 요구를 들어주느라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더욱 많이 저질렀다. 이 포사라는 여자는 매우 아름다왔으나 도무지 웃지를 않는 괴상한 성품을 가진 여자였는데, 하루는 잘못 올려진 봉화때문에 급히 달려 온 여러 제후들이 까닭을 몰라서 어리둥절해하며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더니 요사스럽게 웃어대었다, 포사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었던 유왕은, 국가의 방비에 가장 중요한 봉화를 가지고 가끔 장난을 치는 엉뚱한 실책을 저질렀고, 제후들은 마침내 봉화가 올라가도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무도한 왕과 왕비 때문에 민중의 삶은 또 다시 말세적인 도탄에 빠지게 되었고, 백성들의 원성이 단군조선까지 들려올 지경인 데도, 각 제후들은 자기들끼리의 이권다툼에 빠져서 민중의 한탄을 외면하고 말았다. 이에 주나라와 맞닿은 단군조선의 변방 제후 하나가 무도한 유왕을 징벌하기 위하여 주나라 도읍을 공격하여 유왕과 포사를 처단하고 복귀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서 지나지방의 역사서는 견융이 주나라를 습격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주나라는 당시의 도읍보다 더 안전한 곳을 찾아서 동쪽의 낙양에 천도했는데, 이때부터를 동주시대라고도 하고 춘추시대라고도 한다.

▲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BC770-BC233)는 단군조선 35대 사벌(沙伐) 단군부터 47대 고열가(高列加) 단군 시기로 단군조선은 연(燕), 제(劑), 조(趙)와 끊임없는 전쟁으로 일관한다.     © 편집부

  춘추시대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주나라 왕실이라는 것은 인정해주고 있는 상태에서, 왕실의 신임을 얻은 자가 패자(覇者)가 되어 여러 다른 나라들에게 군림했다. 제일 처음으로 패자의 지위에 오른 것은 제나라의 환공(極公)이었는데, 그는 관중이라는 영리한 재상을 두고 산동반도 서쪽지방을 중심으로 한 제나라의 국력신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황하의 이북, 난하의 서쪽에 있던 연나라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난하 동쪽(요동)의 풍요한 곡창과 어장이 있는 단군조선의 발해만 연안지방을 노리다가, 오히려 단군조선으로부터 반격을 당해서 도읍지인 '계( )'가 격파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나라는 이러한 위급한 상황을 패자(覇者)였던 제나라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였으므로, 명색이 패자인 제환공은 연나라를 도와 주려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나라의 강병마저 조선의 무서운 군사력에 의하여 대패하여 쫓겨 가서 제나라의 도읍지인 '임치(臨淄)'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당황한 제환공은 서둘러서 조선과 화해를 시도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단군조선으로서도 전쟁으로 인하여 쓸 데 없이 민중의 고생을 더 계속 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판단하여 철군하였다.

  이후로 단군조선은 저들 무도한 춘추의 무리들에게 경계심을 더욱 높일 수밖에 없었고, 욕심많고 사나운 춘추제국들과의 쟁패전이 심심치않게 벌어지곤 했다. 이 무렵 단군조선은 동쪽 열도지방에서 소시머리의 자손들에 의하여 가끔씩 발생하는 노략질과 반란들을 평정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할 수가 없어서 군비강화를 추진하여 간 결과, 점차 국가의 재력이 약화되어 가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단기 1611년(서기전 722)인 35세 사벌(沙伐)단군때 열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을 보내어 토벌했고, 단기 1667년(서기전 666)인 36세 매륵(買勒)단군때는 다시 배반명(裵 命)을 보내어 열도를 평정하는 등, 열도의 패역한 무리들이 극성을 부리지 못하도록 힘써야만 했다. 이러한 기회를 틈 탄 춘추의 짐승같은 무리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서, 지상천국으로 알려진 단군조선의 풍요한 강토를 약탈하고자 단군조선의 남쪽 해안지대인 불조선의 변경으로 기회만 있으면 쳐들어 오게 되었다. 이러한 춘추시대에 지나지방에서 탄생한 공자는, 올바른 정치를 위한 유익한 가르침을 전해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여서 춘추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제후들을 문명인으로 이끌려 했다. 그러나 약육강식만을 지고(至高)의 철학으로 아는 짐승과 다를 것이 별로 없던 제후들은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으므로 공자는 차라리 구이에 가서 살고자 하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지나지방에서는 제후들에게 아부하여 출세하려는 '세객(說客)'이라는 자들도 설치기 시작하여, 온갖 잡설을 늘어 놓으면서 제후간에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지나지방의 현실을 깊이 우려한 노자는, 인간들이 탐욕을 버리고 각자의 아름다운 본성대로 살아가는 게 가장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유명한 '도가(道家)사상'의 기초를 세웠다. 이와 같은 도가사상은 그 후로도 지나지방이 난세에 빠질 때마다 민중의 복음으로서 널리 퍼지게 되어,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상천국의 이상향을 꿈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자가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자 했던 것은, 주나라 초기에 기자가 홍범을 주나라 무왕에게 설파하려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올바른 인류사회의 본국인 단군조선으로 망명한 사실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노자의 도가사상에 의한 이상향이라는 것도 사실은 단군조선에서는 이미 생활화되어 있던, 현실적인 문명생활의 방법을 이야기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전국시대

  400여년간 계속된 춘추시대를 이은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보다도 더욱 엉망진창의 아수라장으로서,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수의 생존경쟁 논리와 적자생존 논리의 와중으로 치달아 갔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주나라의 실권은 거의 완전히 없어졌고, 주나라를 믿을 수 없게 된 각 제후가 스스로 왕을 일컫고서 본격적으로 지나지방의 석권을 노리는 광기어린 전쟁의 열풍 속으로 돌입한 것이다.

  야만적인 전국시대가 펼쳐진 지나지방 정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은 바로 당대 최고의 이상적 사회였던 단군조선이었다. 이에 단군조선은 끊임없이 남쪽국경을 넘보며 그 악랄한 침략의 마수를 늦추지 않는 연·조·위·진 등 여러 포악한 나라들에 대하여 경계심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전국시대가 지나지방에서 약 200여년 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니 민중의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파리목숨만도 못하게 되었고, 오로지 힘이 강한 자들만이 득세하여 약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그 시기의 인명 경시의 대표적인 예를 들면, 진나라와 조나라와의 전쟁에서 사로잡힌 조나라 포로 40만 명을 진나라의 장군이었던 백기(白起)가 모조리 생매장해 버리고 마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학살을 자행한 일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지경인 그와 같은 야만스러운 폭거가 크건 작건 간에 그 시대의 보편적인 상황이었으니, 그런 사회가 야만이 아니고 무엇인가? 야만과 문명의 대조는 지나지방에서 그 후로도 얼마든지 전개되어 가지만, 그것도 결국은 홍익인간의 '홍'자도 모르는 욕심장이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아수라장 끝에 더욱 탐욕스러운 진왕 정(秦王政)이 나타나서, 분열되었던 전국시대를 일단락지었다. 진왕 정도 오로지 공포와 포학한 억압으로 민중을 수탈했고, 교만조차 극에 달하여, 전국(戰國)을 통일한 후 지나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스스로 황제라고 이름하였으므로 진시황(秦始皇)으로 불리웠다.

  단군조선은 진시황 출현을 전후한 전국시대 말기에 연나라의 장수인 진개에게 불시의 공격을 당하여 서쪽 땅을 약 천여리나 침탈당했다가, 기자조선의 기후(箕 ))왕의 반격으로 되찾았다. 불조선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기자의 후예인 기후가 관리하면서 지나지방 야만인들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단군조선에서도 역적들의 큰 반란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일시에 도탄에 떨어지는 등 혼란이 벌어졌는데,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영웅 해모수(解慕漱)가 나타나서 자중지란에 빠진 여러 제후국들을 통합하고 북부여를 건설했다. 이로써 2,000여년을 유구하게 이어 내려오던 단군조선은 막을 내리고, 북부여와 불조선은 힘을 합하여 단군조선의 옛 강토를 지켜 나갔으며, 말조선은 여러 부족국가들로 나뉘어 졌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3 13/05/11 [17:57] 수정 삭제  
  세계 지도를 보라! 정확히 중앙이 어디인지? 바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의 중앙인 한반도지역이다. 한반도에서도 세계 최다 적석총(피라미드)의 기원이 되는 세계 최다 고인돌 지역인 호남과 서남해 지역이 바로 마고성이 되는 것이다.마고성 북쪽에 천산이 있다고 했다. 바로 마고여신상과 여신전이 발굴된 홍산문명이 있는 요하지역의 천산이다. 역사를 연구한다는 자들이 그렇게 문헌이해와 고고학적 이해가 부족하나? 중앙 아시아라면 꺼벅 죽는 역사의식부터 바꿔라. 세계중심은 한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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