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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견해 2009/01/2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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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장.축소.왜곡 모두 역사연구에서는 혼란부추기는 요인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

    국내성이 현 압록강지역이여도 마자수는 국내성 서쪽으로 있는 강은 맞는 것이고, 바다는 황하가 아니라 그냥 황해로 흘러 간다가 맞다 봄. 황하였으면 황하라고 표현했을 것임. 바다와 강하나 구분못하는 고대인들이 아님.

    ▲1906년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관구검기공비. 이 유물로 인해 집안 근처가 고구려의 도읍지로 변조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다르다. 관구검은 집안까지 오지 않았고 산서성 남부에 있는 환도산성을 함락시킨다. 관구검기공비는 고의로 중국이 옮긴 것이 확실하다.

    ==> 자신들의 논리에 안 맞다고 부정하고 의심하는 것도 문제가 있음. 현재 출토되는 백제유물들도 그럼 믿을 수 없는 조작? 역사는 근거없이 주관적인 해석으로 지나치게 과장시켜도 문제고,지나치게 왜곡축소시켜도 문제임. 그래서 객관성이 중요하며, 모든 역사학자들의 치열한 논쟁과 합의가 중요함. 고구려사를 중국화하려는 중국정부도 고구려유적유물이 발견되면 마땅히 공개할 것인데, 만주.한반도.내몽골.요서지역외에 크게 발견되어 공개된 것들은 없음.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광개토태왕이 개척하고 다물한 영역이 다 나옴. 대략 한반도.일본열도(대마도.구주지역).만주.내몽골.요서.산동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음. 농경.수렵생활을 하는 고구려와는 달리 북방 유목민들인 흉노의 피를 받은 징기즈칸은 초원사람이기 때문에 동서무역을 연결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흉노제국의 부활을 위해서 말을 달릴 수 밖에 없었음.
  • 성훈 2009/01/2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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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해선생은 강단이거나 강단을 추종하는 분이시군요
    강단사학계가 비정한 국내성(집안)은 압록수 북서에 있으므로 압록수 동에 있어야 한다는 신당서의 기록과 안 맞습니다. 그리고 평양성이 압록의 동남에 있어야 하는데, 대동강변에 있습니다. 안시성도 압록수 북에 있어야 하는데 요하 강변에 있으니 이 지리비정은 완전 엉터리라고 봐야 합니다.

    압록수를 현 분하로 보면, 서안평은 산서성 운성시 하진시이고, 안시성은 여량산맥 남단, 평양성과 국내성은 압록수(현 분하) 동쪽에 거의 붙어있는 후마, 임분, 평요, 태원 중 하나일 겁니다.

    고구려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백제 유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말을 흐리려는 의도이며, 현재 발굴된 백제 유물이 거기서 나왔다고 그곳이 백제의 핵심 강역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물은 모조리 고구려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한, 위, 진, 당의 유물로 둔갑이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나 흉노나 몽고나 다 단군의 후손인 동이족입니다. 이들의 피가 서로 다른 민족으로 만든 것이 바로 중국의 수법입니다. 동북공정은 동이족을 서로 다른 민족으로 만들어 분열시키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 고구려 수도문제 2009/01/2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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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추모.유리왕시대의 고구려 수도문제

    강단사학이든 재야사학이든 누가 진실에 근접하느냐의 문제이다. 강단사학을 매도할 것도 아니고, 재야사학도 매도할 것도 아니다. 문제는 과장이나 왜곡이 혼란을 부추기는 근원인 것이다.


     


    중국의 [사서]나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초기수도 명칭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고,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골본(忽本)으로 적혀 있다. 졸본(卒本)은 수도라는 뜻으로 원래 명칭은 골본(忽本)이다. [고리는 골,코리,구리.구려.고을이다...산골짜기에 온기종기 동네를 이루어 수렵생활을 했고, 당시 최첨단 산업기술인 제철기술을 가지고 있어 여기저기에서 나라을 세우는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종족이라는 의미다] 중국의 사서에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는 것은 중국의 사가들이 고구려가 다시 일어나 강국이 되지 못하도록 기원하는 마음에서 원래 명칭대로 골본(忽本)으로 적지 않고 병사'졸'로 표기하여 졸본(卒本)으로 적었기 때문이고, 신라사관론자였던 김부식의[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는 것은 [삼국사기]를 기술할때 중국의 사서를 그대로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내용을 100%부정해서는 안되며, 한중일 사서들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비교분석하여 내용의 사실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사서들을 보면 고구려는 대략 총 14번 수도를 이전한다.


     


    고추모가 남하하여 개국한 고구려 첫 수도는 비류수위의 골본성이다.


     


    1986년경에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면서 고구려 유적으로 인정되었다


     


    "주몽은 오이,마리,협보와 졸본천(비류수)에 이르렀으며 비류수가에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했다"  (삼국사기권13 )


     "비류곡의 서쪽에 있는 산성위에 수도를 정했다."   (광개토태왕비문)


     "주몽이 오이,마리,협보와 흘승골성(오녀산성)에 이르러 살며 고구려라 국호를 정했다."  (위서 권100,열전88)


     



    고구려 첫 수도-비류수 위의 골본성(오녀산성)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요 휘는 주몽(추 혹은 중해라고도 함)이다..중략..졸본천에 이르러 토지가 비옥하고 강산이 험고함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 위(골본성)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 始祖 東明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一云衆解)..中略..至卒本川(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皇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東明聖王) 3-4년조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35년에 골령(골본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다음해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동명성왕3년(B.C 35년) 봄 3월 골령에 황룡이 나타났다. 三年 春三月 黃龍見於골嶺」


    「동명성왕4년(B.C 34년) 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四年 秋 七月 營作城郭宮室」 


    위 “골”은 고을 또는 수도를 뜻하는 "골(忽)"을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으로 골령은 산 위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황(黃)은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고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위 문구는 나라 기틀이 잡히자 졸본천(卒本川)에서 방위하기 쉬운 인근 산 위로 수도를 옮겼다는 뜻이다.


     


     고구려에 마자수가 있는데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물의 색이 기러기 머리색이라서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을 지나 염난수와 합쳐 서남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有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淥水 歷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西南 至安市 入于海」新唐書 高句麗傳



    「서개마현 마자수가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쳐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른다. 2개 군을 지나가는데 길이가 2천 1백 리이다. 西蓋馬 馬訾水 西北 入鹽難水 西南 至西安平 過郡二 行二千一百里」前漢書 地理志 玄菟郡 西蓋馬縣

    위 문구에 의하면 마자수(馬訾水)를 일명 압록수(鴨淥水)라고 불렀고, 이 마자수는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와 합쳐 서남으로 흐르며 길이가 2,100리이다. 압록수라 불리운 강 중에서 위 요건에 맞는 강은 동요하이다.

    위 문구에 의하면 마자수(馬訾水 : 동요하) 방면에 있는 국내성은 마자수가 염난수(鹽難水 : 서요하)를 만나기 전 서북으로 흐르는 곳의 동쪽에 있다. 마자수가 서북으로 흐르는 곳은 동요하(東遼河) 상류이므로, 위 문구에 나오는 국내성은 동요하 상류 동쪽에 있다. 이곳은 위치상으로 요원시(遼原市) 방면이다.

    고구려가 유리왕(琉璃王) 22년에 수도를 장춘 방면에서 요원시 방면으로 남천한 것은, 유리왕 13년경부터 기근과 질병으로 마음 고생이 심하였고, 유리왕 14년에 인근 길림 방면의 동부여(東夫餘) 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왕자를 인질(人質)로 잡히라고 요구하는 등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註 유리왕 13년조의 "봄 정월 형혹성이 심성을 지켰다. 春正月熒惑守心星"는 문구는 기근과 질병으로 마음 고생이 심하였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으로, 고대인들은 형혹성(熒惑星)이 질병과 기근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琉璃王) 27년조에 의하면 고구려가 장춘 방면에서 요원시(遼原市) 방면으로 남천하였을 때 장춘 북쪽에는 황룡국(黃龍國)이 있었다.

    「유리왕(琉璃王) 27년(A.D 8년) 봄 정월 왕태자 해명이 고도에 있어 힘이 세고 용맹을 좋아하는지라 황룡국왕이 그 소문을 듣고 사자를 보내 강궁을 선사하였더니..二十七年 春正月 王太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註 위 황룡국은 삼국사기를 지을 때 뒤에 붙여진 명칭으로 적은 것이다. 요사지리지 용주 황룡부조에는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는 본래 발해의 부여부(夫餘府)였다. (요)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돌아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죽었다. 황룡이 나타나 명칭을 바꾸었다..중략..개태(開泰) 9년에 성을 동북쪽으로 옮겨..중략..다시 설치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그 뒤 금 나라는 그 곳에 융안부(隆安府)를 설치하였는데, 대청일통지에 의하면 융안은 뒤에 농안(農安)으로 음이 바뀌었다.]

    위에서 북옥저(北沃沮 : 長春 방면) 일명 눌현(訥見)이 고도(古都)로 적혀 있다. 이는 고구려가 요원시(遼原市) 방면으로 남하(南下)하기 전 고구려의 수도가 장춘(長春) 방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왕(琉璃王) 27년조 문구는 고구려가 장춘 방면에서 요원시 방면으로 남하하였을 때, 태자(太子)가 유리왕(琉璃王)을 따라 오지 않고 고도(古都) 장춘 방면에 남아 있으면서 힘 자랑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네번째 수도 국내성 


     


    고구려는 유리왕(琉璃王) 28년경 수도를 요원시(遼原市) 방면에서 혼하상류(渾河上流) 방면으로 다시 남천(南遷)하였다. 


    「유리왕(琉璃王) 28년(A.D 9년) 가을 8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망하여 가로 대, "우리 선왕이 선군 동명왕과 서로 좋은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하를 꾀어 이곳으로 도망하여 인민과 성곽을 완취하여 국가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무릇 나라는 대소가 있고 사람은 장유가 있으니, 소로써 대를 섬기는 것은 예요 유로서 장을 섬기는 것은 순이다. 이제 왕이 만약 능희 예와 순으로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 국운이 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전키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라를 세운 시일이 얼마 되지 아니하고 백성과 병력이 아직 잔약하니 형편상 부끄러움을 참고 후일을 기다려야 된다 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와 상의한 끝에 答하기를 "나는 해우에 떨어져 있어 예의를 듣지 못하였더니 이제 대왕의 가르침을 받으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 讓王曰 “我先王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禮也 以幼事長者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難矣”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  ” 乃與群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註 "나는 해우에 떨어져 있어" 문구는 동명성왕 본기에도 나오는데, 그 위치는 비류수 상류 방면이다.]



    ▲ 골본성(오녀산성)에서 바라본 혼강(비류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琉璃王) 37년조에는 물(비류수)에 빠진 왕자를 비류(沸流) 사람이 찾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면 고구려의 수도는 그때까지도 비류수(沸流水:혼하) 상류 방면에 있었다.


     


    「유리왕(琉璃王) 37년(A.D 18년) 여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으니 왕은 애통하여 사람을 시켜 그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뒤에 비류 사람 제수가 발견하여 알리니 예로써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을 주었다.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田十頃.」


     


    고구려는 유리왕(琉璃王) 37년에서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A.D 21년) 사이에 수도를 비류수(沸流水:혼하) 상류 방면에서 집안(集安)으로 남천(南遷)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수도를 다시 남천한 것은 동부여왕(東夫餘王) 대소(帶素)가 유리왕 28년(A.D 9년) 8월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복속을 강요하였고, 유리왕 32년(A.D 13년)부터 고구려를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 백제바로알기 2009/01/2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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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중심지는 한반도(서울-공주-부여)다
    고두막의 북부여(골본부여)후손 구태가 후한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배후에서 공격하는 과정에서 대방고지(황해도)에 나라를 개국한다. 그것이 구태백제다. 구태백제세력은 남하하여 온조세력을 통합하고 마한지역과 일본열도까지 영향권안에 둔다. 호남-오사카-한강변의 전방후원분 무덤들이 바로 구태백제세력의 지배권을 나타내는 흔적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처럼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구태백제는 왜(=백제세력의 남하로 인하여 단군조선시대에 마한영역이였던 일본열도로 이주한 마한세력)와 함께 고구려를 자주 공격하나, 결국 장수왕때 한성백제(서울)를 빼앗이고 고마(곰나루=공주)로 수도를 이전한다. 중국문헌에 구태세력의 중심지가 고마로 기록된 배경이다. 백제황족들은 시조 구태에게 제사지냈다는 것이 중국문헌의 기록내용이다. 구태백제는 근초고왕때부터 구태백제세력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에 진출한다. 마한의 선박.항해술을 이용하여 이후 일본-중국-동남아-인도를 연결하는 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한다. 한반도 서남해지역(백제멸망이후 해상을 장악했던 백제의 후예 장보고와 후백제 견훤세력의 중심지)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드디어 고두막의 후손 구태가 동이강국이 되었다고 중국사서들이 기록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백제가 지배하는 중국동남해안 지역을 서백제라고 하기도 한다. 신라 김춘추가 당고종을 꾀여 결국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대가 산동을 출발하여 백제본국 수도(부여)를 정벌하고 부여 정림사지5층 석탑에 소정방이 백제정벌문을 남긴 것이다. 이후 중국지역의 백제세력은 대부분 고구려로 흡수되었고, 일본열도의 왜(마한)세력이 백제부흥군과 연합작전으로 금강유역에서 나당연합군과 전쟁을 벌였으나 바람이 왜(마한)수군쪽으로 불어 결국 패배하고 백제는 문을 닫고 의자왕과 백제황족들은 당나라로 끌려가 의자왕은 북망산에 묻혔던 것이다. 자꾸 백제중심지를 중국에 설정하려는 자들은 문헌공부를 다시 함으로써 중국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논리를 펴지 말기를 바란다.
  • 라디오 2009/01/22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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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경에서는 비류곡 서성산에서 건국했다고 나와요.
    광개토비문에 나오는 비류곡 西成山은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추모가 즉위하기전에는 東成, 南成등에서 살다가..즉위한 후로는 西成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개토비문에 나오는 문구는 '비류곡 서성산'이라고 말해야 옳아요.

  • 라디오 2009/01/2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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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고구려 수도문제'라는 사람은 한순근씨인가요?
    요즘 한순근씨가 자기 글 허락도 안 받고 퍼 간다고 길길이 날뛰면서..고소,고발을 즐기던데..
    위의 '고구려 수도문제'라는 사람은 한순근씨 본인이 아니라면 글을 퍼 왔으니..
    저 사람도 고소하라고 알려 줘야겠군요.
  • 이병도손자이건무 2009/01/2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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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고하셨읍니다..........
    언제나 많은 역사정보를 주시는 성훈선생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어우름 2009/02/01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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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녀산성은 고구려 홀본성이 아니라 조선의 올라산성입니다. 그것도 후대에 남쪽으로 위조해 만들어놓은..
    이만주가 차지한 올라산성은 원래 현재의 요동 개원일대에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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