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 독자의견

기사본문으로 돌아가기

  • 고리족의 북경 2008/12/20 [03:12]

    수정 삭제

    교통의 중심지 북경(뻬이징)지역은 고리(코리.구려)족의 터전
    [북경의 역사에 대하여]

    북경(뻬이징)이 중국의 수도로서 지정된 기간은 역대 왕조 중에서 金, 元, 明, 淸의 왕조에서 수도로서의 위엄을 과시하였다. 이 네 왕조의 기간을 합하면 약 700년의 세월을 북경은 수도로 군림한 셈이다. 당연히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한 1948년 이후에도 북경은 중국의 수도로 남아있으며 2008년에는 중국인들이 그토록 원하던 올림픽도 개최하게 된다.

    북경이 통일 정권에 의하여 수도로 건설된 시기는 비교적 늦었지만 그것이 도시로서 발전한 유래는 매우 오래되었다. 북경은 일찍부터 지방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예부터 북경은 남쪽으로 장강과 회하를 통제하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관할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북경은 동·서·북쪽의 삼면이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고 오직 정남방 한쪽만이 끝없이 펼쳐진 화북대평원으로 열려 있다. 이러한 북경의 지세는 북방의 적에 대한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하였다.

    북경에 대한 명칭 중에서 가장 시기가 오랜 것은 戰國時代 연(燕)나라의 수도였던 '계'(?)이다. 이때 '계'는 농경지대와 유목지대가 교차하는 농경지대의 주변에 위치하여 하나의 중요한 경제 도시로 발전하였다. 당시 '계'는 중원지방, 몽고고원, 송요대평원으로 통하는 대로의 분기점에 위치하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예컨데, 남구를 통과하면 몽고고원으로 직행할 수 있었으며 고북구(古北口)를 지나면 송요대평원에 바로 도달할 수 있었다. 또한 '계'는 영정하(永定河)의 나루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수상 교통 면에서도 유리하였다.

    고대 동북지방의 변방민족들은 중원 지방으로 세를 확장할 때 '계'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다. 唐代에는 '계'를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 '유주(幽州)'로 이름을 고치고 군사를 많이 주둔시켰지만, 이렇게 많은 군사는 결국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거란은 지금의 시라루렌(西拉木倫)강 일대에서 발흥하여 당이 건설한 유주성을 점령한 다음 여기에 배도(陪都)를 설치하고 이름을 '남경'으로 고쳤다. 거란 역시 이 남경성을 거점으로 중원을 공략하려고 하였다. 그 후 금(金)은 요를 대신하여 유주성을 점력한 다음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명칭을 '중도(中都)'라고 고쳤다. 북경이 전국적인 통일 정권에 의하여 수도로 건설된 것은 이때가 최초였던 것이다. 중도성은 완성된 후 백년도 안 되어 몽고의 기병에 의하여 불타버렸다. 이 때 몽고는 이 일대에 연경로(燕京路)를 설치하였으며 얼마 안 지나 수도를 연경로의 치소인 '燕京'으로 옮겼다. 1263년 쿠빌라이는 연경을 수도로 삼는다고 선포하고 금이 연경에 대하여 부여한 중도라는 명칭을 회복시켰다. 그는 1267년까지 궁전·성·해자를 건설하여 하나의 웅장한 수도를 완성하고 1273년에는 중도를 '대도'라고 고쳐 부르기고 하였다.

    주원장은 1368년 남경에서 황제를 칭하고 明朝를 수립한 후 서달(西達)에게 북벌을 명령하였다. 당시 元의 마지막 황제는 대도성을 버리고 도주하였고 원은 마침내 패망하였다. 서달이 대도를 점령한 후 명은 대도를 '북평(北平)'이라고 고쳐 불렀다. 주원장은 북평에 와서 원대의 궁정을 완전히 파기하여 원대의 기운을 모조리 소멸시키라고 명령하였다. 1402년 명의 연왕(燕王)인 주체(朱脊)가 남경을 함락시키고 정권을 탈취하였는데 다름아닌 명의 성조(成祖)였다. 성조는 다음해에 북평으로 천도하고 북평을 '북경(北京)'으로 고쳤는데 오늘날의 '북경'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구려 선조들의 고향인 북경(뻬이징)지역을 지배한 고구려]

    < 북한 덕흥리 고분 (고구려 유주자사 진 묘비) >

    1976년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을 말하며 무덤주인은 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이다.사망 후 자신의 고향에서 묻혔음을 알 수 있다.

    유주자사란 북경 북쪽 인근을 통치하던 고구려 고위관리라 보면 된다.즉 함경도 출신의 고구려인이 고구려 땅이었던 북경인근에 발령을 받아 여러군의 태수들을 통제관리했던 직책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각 시.도 지사에 해당한다.

    그럼 정말 북경유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는가 ?

    그렇다!모본왕 시절에 이미 태원까지 진출한 기록이 있으며, 광개토태왕 비문과 사서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광개토대왕 시절에 고구려가 양자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이것은 선조의 나라 단군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고구려의 다물정신에서 나온다. 즉,단군3조선연방의 붕괴로 해체분열된 단군3조선의 회복이였다. 그래서 광개토태왕때에 이르러 진한지역인 만주.연해주.시베리아 지역을 지배했고, 백제.신라를 공략하여 마한지역에 해당하는 한반도.일본열도(구주.대마도)까지 복속했으며, 번한지역에 해당하는 중국의 요서.하북.산동.내몽골,그리고 동북지역에서 남하한 동이족의 나라들로 이루어진 구이지역인 양자강 지역까지 공략하게 되는 것이다.

    북경인근은 고구려인들(고리족)의 선조들의 중심지였다. 단군조선의 상징인 비파청동검이 제일 많이 분포된 지역이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다물(회복)하기위해서 피나는 전쟁을 벌인 배경이라 하겠다. 이는 단적으로 단군조선을 개국한 주역이 바로 고구려인들의 직계선조인 고리족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모본왕 2년(49년)에 평정한 지역이 북평(뻬이징.북경),어양,상곡,태원이다.

    이렇게 사서와 덕흥리 고분은 고구려 강역이 북경서쪽까지 였음을 명백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의 묘를 통하여 고추모가 고구려를 개국한 수도지역이 만주와 한반도가 맞닿는 압록강변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중국과 몽골과 한반도와 일본지역으로 진출하기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집안지역의 수 많은 고구려 유적유물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유적유물제시도 못하는 자기들만의 문헌해석놀이로 역사를 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한 장수왕이 육로와 동 해양를 연결하는 교역로를 독점하기위하여 고구려의 수도성으로 삼은 북한의 평양성은 구.신당서 기록대로 거리상으로도 정확히 당나라 수도(장안)에서 동으로 5천100리에 떨어져 있었던 지역으로,사방둘레나 건축술에 있어서도 당시 세계 성들 중에서도 최대규모의 성이였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다.

    <舊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京師>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후한) 낙랑군의 옛 땅이다. 경사(즉,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고구려 영역은 북한 평양기준으로)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고구려 영토는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후한서-군국지]에 따르면 장안과 낙양까지의 거리는 950리다. 낙양 + 평양 = 5000리라고 하였으므로 장안 + 낙양 + 평양 = 5950리다. 즉, 양당서는 장안에서 평양까지 5100리라고 하였고 후한서 군국지는 5950리라고 한 것이다.장안과 낙양까지의 거리는 950리면 거의 1천리인데, 장안에서 하북지역까지는 겨우 3천리 정도가 될 것인데, 일부 뻥티기 역사매니아들은 5천리라고 자기들 마음대로 고무줄 늘이듯이 늘었다 줄었다하고 있다. 그냥 과학적으로 거리계산하면 바로 나온다.한반도 남북거리가 3천리라는 상식이나 알고 있나 모르겠다.

    또한,<舊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京師>명백히 동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가 있고, 남으로 바다건너 백제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남으로 바다건너 신라.백제가 있다는 건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중국의 요서.동남부 해안지역을 무역거점으로 삼기위해 백제가 진출했음은 당연하다. 그러한 백제세력은 바로 비류백제세력을 통합한 온조백제세력을 한반도로 남하하여 통합한 졸본부여 고두막의 후손인 구태의 백제세력이다. 중국문헌들도 "고두막의 후손인 구태의 백제가 비로소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는 이를 두고 한 기록이다. 번조선의 왕검성이 위치한 요서지역은 졸본부여을 개국한 고두막이 한나라와 맞서싸워 승리한 지역이다. 고두막의 후손인 구태의 백제세력이 요서지역을 탈환한 배경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왜 그렇게 중국대륙을 두고 치열한 패권을 다투었는가하면 고구려.백제 모두 고리족으로 고리(코리)의 정통성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졸본부여 2대 단군에 오른 고추모가 결국 졸본부여의 토착세력에게 쫓겨났기 때문에 졸본부여세력과 깊은 원한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졸본부여세력이 바로 구태의 백제세력인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는 동일한 혈통이면서 고리족의 정통성을 내세면서 패권을 다툴 수 밖에 없었다. 구태는 한반도(마한)의 온조백제세력을 통합하고 일찌기 중국 요서지역을 비롯하여 중국 동남부 해안지역과 일본열도와 동남아 지역에 진출하여 동아시아해상권을 장악하면서 해상무역을 독점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백제의 주역을 온조세력으로 보면 안되는 것이다.

    당나라 수도 서안에서 5천리에 고구려 평양성이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안에서 북한 평양까지가 5천리다. 북한 평양지역의 후한 낙랑군 유적지에서 당시 가구.인구수를 조사하여 통계를 낸 후한 때의 공식문서에 해당하는 목간이 출토되었고, 후한의 낙랑무덤들에서 광무제라는 후한연호가 기록되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북한 평양의 낙랑군은 고두막이 한나라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위만조선지역에 만든 낙랑군이 아니다. 그 낙랑군은 단군3조선 중 창려에 왕검성을 두고 부단군으로 통치하였던 번조선에 해당하는 요서지역이다.

    북한 평양의 낙랑군은 고구려때 후한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건설한 후한의 낙랑군인 것이다. 즉,대동강 평양의 낙랑군은 AD 44년에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와 세운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조의 "후한의 광무제가 바다건너 군사를 보내 낙랑을 뺏아 군현을 두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고, 유적유물상으로도 맞다고 하겠다.

    [한4군의 허구]'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중국 요서지방인 요녕성 진시시(錦西市) 소왕대에서 발견된 사실이 최근 단국대 박물관 복귀대 박사의 논문에서 밝혀졌다. 공문서를 넣은 상자 등에 함부로 뜯어볼 수 없도록 진흙을 바르고 직인을 찍은 봉니가 바로 그 유물인데 규격과 서체로 볼 때 중앙 정부가 인근 태수에게 보낸 것이다. 더욱이 복리 출토 성토에서는 단군조선 계통의 유물이 다량으로 나와 바로 이곳이 바로 한나라의 성이 아니라, 한나라와 싸워 이긴 졸본부여 고두막이 4개 지역으로 설치하여 태수를 임명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북방지역에서 유목생활과 수렵생활을 하던 고구려.백제.신라의 중심지는 엄연히 한반도에 있었다. 중국과 몽골과 만주(연해주 포함).시베리아와 한반도와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의 중심지 압록강변에서 고추모의 고구려가 일어났고, 서해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한강.부여.공주에서 백제가 일어났고, 중국과 만주에서 망명해 온 진한인들과 부여인들과 흉노족들이 혼합한 신라가 경주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된다.

    고고학적으로 만주.연해주.내몽골.북한지역은 엄연히 고고학적으로 고구려.대진국의 유물유적으로 넘쳐나는 건 상식이고, 한강.공주.부여.그리고 일본열도.동남아시아는 명백히 백제의 유물유적으로 넘쳐나고, 경상도 지역은 신라의 유적유물로 넘쳐난다. 전라도 지역은 마한의 유물유적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지역에서는 공통적으로 단군조선의 청동검과 온돌.고인돌들로 넘쳐난다. 이것이 단군조선의 후예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며, 단군이 민족통합의 구심점이 되야 하는 것이며, 지역패권주의를 위해서 중국과 일본처럼 역사까지 왜곡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단군조선의 제후국들에서 기원하는 고구려.백제.신라3국을 주관적 해석에 기인한 문헌적 이해로 아무런 고고학적 근거없이 중국에 갖다 놓으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바지하는 길임을 명심하자.
  • 허구 2008/12/20 [23:12]

    수정 삭제

    허구의 한4군의 실체는 조선4군이다
    여론마당]`한사군' 일본이 왜곡·날조해놓은 역사
    ( 오피니언 2005-3-21 기사 )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분서갱유를 일으켜 동이족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독립을 추구했던 진시황은 그 목적을 달성했지만 민심을 바로잡지 못해 진시황 사후 15년 만에 진 제국은 무너졌다.(서기전 206년)

     진나라가 망한 후 초나라 출신의 항우와 유방이 각축을 벌이다가 유방의 승리로 한나라가 건국되었다.(서기전 202년)

     계속되는 전쟁과 반란 등으로 중원 대륙의 정세가 불리해지자 그 영향으로 연나라 지방의 위만이라는 자가 무리 1천여명을 이끌고 번조선에 망명해 왔다.

     그러나 그 후, 위만은 자기를 받아주고 신뢰했던 번조선의 왕인 기준의 왕권을 탈취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이로써 번조선은 사라지고 소위 위만조선이 시작되었다.(서기전 194년)

     해모수의 북 부여에 의해 기존의 연합 국가인 단군 조선은 거의 무너졌고 후기에는 그 영토를 북 부여와 위만조선이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고, 지나(China)의 새 통일왕조인 한나라가 세워졌을 때 위만조선은 내부 분열로 최후를 맞게 된다.

     한무제가 침입해온 것은 BC 109년의 일이며 한나라에 의해 설치되어 한무제의 통치를 받았다고 하는 소위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이 세원 진 것은 BC 195년 전의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낙랑국은 한무제가 침입해 오기 86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동이족의 국가였다.

     또 한무제의 침입 당시 위만조선의 우거 정권은 무너졌지만 그것도 위만-우거-성기의 학정에 반발한 내부 쿠데타에 의해서였다.

     오히려 한나라의 군대가 부여군과 낙랑군 등의 연합군에게 패했을 뿐 결코 옛 번조선의 영토는 결코 차지할 수 없었다.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해전에 강한 낙랑국이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한무제의 욕망을 저지하는데 큰공을 세웠기 때문에 고두막한은 위만 조선이 망한 후 그 영지를 대부분 낙랑에 편입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우거왕의 부하였던 새 장군에게 떼어주고 욕살(지방장관)을 삼아 잘 다스리게 했다.

     이것이 한사군의 정체이며 한나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왜곡·날조된 이름일 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낙랑, 진번, 임둔, 현도라는 한사군은 곡필로 유명한 사마천의 사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혹 조선사군이라는 이름으로 있었을까 한사군이라는 이름이 없었음에도 이렇듯 왜곡·날조해 놓은 것은 일제가 `한민족은 예로부터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민사관으로 조작해낸 것이다.

     일본은 한사군 운운하면서 역사를 계속 왜곡·날조하고 있는데 더 이상 나불대지 마라.

     김철수<춘천경찰서신북지구대>
  • 고구려 시인 2008/12/21 [22:12]

    수정 삭제

    고구려 시인은 '고구려'를 이렇게 노래했다
    '아아! 너희들 이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보잘것 없고

    어리석은 한족(漢族)의 어린아이들아!

    요동(遙東)을 향하지 마라.

    죽음의 노래를 눈물 흘리며 부르게 된단다.

    문(文)과 무(武)를 전해 준 우리의 선조 한웅(한雄)이라 불렀으니

    면면히 이어진 그 성(聖)스러운 피는

    많은 영웅 호걸로 대를 이어 전해 졌노라.

    주몽 태조, 광개토대제의 그 위엄은 사해를 진동시켰고

    공업은 더할 나위 없으며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를 있게 하기위해

    스스로를 없게 했노라.

    세계의 문명 중 우리의 문명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쳐들어 오는 모든 오랑캐 다 물리치고

    평화를 보전하였노라.

    유철, 양광, 이세민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그 위풍에 놀라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달아나기를 망아지 새끼처럼 하였으니

    광개토대제의 기념비에 서려 있는 웅혼한 기상은

    천척(千尺) 높이며 만 개의 깃발이

    하나의 색깔로서 태백(太白)은 높고도 장엄하노라.'

    ------------------------------------------------

    유철=한무제(漢武제)

    양광=수양제(隨陽帝)

    이세민=당태종(唐太宗)

    일인(一人): 수양제에게 사자로 찾아가서 활을 쏘아 수양제의 뇌를 맞추어

    실신시켜 수양제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만든 조의.

    고구려국본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시인(詩人)은 명실공히

    천하제일의 문명국이요, 강대국이었던 배달민족의 모습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 보성녹차마라톤대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열정의 레이스 시작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