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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겸 2008/11/1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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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욱>과 <사만>...
    <사욱>과 <사만>은 백제인이 아니고,
    <고구리>의 북방에 있던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 공부하자 2008/11/1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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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훈씨는 더 공부 좀 해야 한다
    성훈씨는 사료들에 대한 종합적 분석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됨. 아니면, 쓸데없는 고집때문에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려는 오만이라고 판단됨. 진실은 영원한 것이고, 오만은 시간이 지나면 인성부재임을 스스로 늬우치게 됨. 진실앞에 순종할 것. 아니면 사건에 대한 각 사료들의 내용들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능력을 키우는 것이 역사기술보다 우선이라고 판단됨. 학문은 우주가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모든 사물과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전제로 종합적으로 분석하려는 인식능력이 전제가 되야 함.


    온조백제세력이 배를 타고 한반도 마한지역에 도착,정착한 후 한강변(풍납토성에서 백제초기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개로왕이 마한토성을 축조하여 증축시켰는데, 이로 인해 민심이 위반됨과 동시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한성백제를 마감하게 되고 웅진-공주시대를 여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며, 황제격에만 사용되는 '붕'자가 표기된 지석문-삼국사기 기록과 동일-이 도굴없이 출토된 공주의 무녕왕릉이 이를 증명하며, 부여의 백제창왕의 사리함이 이를 증명한다)에 수도를 정했다. 이후 남하한 구태백제세력이 온조백제를 통합하고 근초고왕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중국.동남아 지역으로 무역로를 확장시켜 동아시아 무역을 장악한 해상제국이 되었다. 이는 모든 문헌내용이 종합적인 차원에서 객관성을 증명해 준다 하겠다.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있어 한반도 지역에만 국한시킨 일제 식민사관도 문제지만, 중국지역에다만 국한시키는 소위 대륙사관도 문제다.


    [성훈:한반도에서 대륙에 진출하여 무역기지를 세웠다고 하며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위업을 축소시키고 있는 중이다]...이게 식민사학이라고 우기는 자체가 코메디아닌가? 일제 식민사관이 대륙진출설을 인정이라도 하던가? 한반도에 국한시키려는 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라는 정도는 알아야 함.

    [한단고기 고구려본기:비류가 즉위하자 따르는 자들이 없었다. 온조의 신하들이 마한은 쇠퇴기에 접어드니 마한에 정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청하자, 온조가 이를 수용하여 배를 만들어 남하하여 마한에 정착했다.]마한은 단군3조선 중 한반도지역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소위 대륙사관론자들도 공히 인정하는 내용일 것이다. 부정한다면 역사기술을 하지 말 것.

    [후한서-동이열전]3한은 사방둘레가 4천리(한반도 남부)이고, 마한은 서쪽으로 큰 바다와 접하고 동으로는 진한과 경계를 이룬다. 백제국은 마한에 속한다. 여기서 3한은 단군3조선이후 마한에 해당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개국된 3한을 의미한다.

    다음은 서해를 끼고 백제가 위치하고 있다는[삼국사기]기록내용 자료모음입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신라사관에 편중되어 있으나, 많은 자료들을 모아 편찬한 사료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자료다. 참고로 중국 서쪽으로는 바다가 없음.

    먼저 <백제 본기 온조왕 편>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 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 鄒>土濕水鹹, 不得安居.

    백제의 땅을 <천험지리天險地利>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북으로는 한수가 막아주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막아주고, 남으로는 기름진 땅이 있고, 서로는 큰바다가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대륙론자들은 대해大海가 바다라는 뜻이 아니라 큰 평야라는 뜻이라고 우겨댔다.) 여기서 大海를 큰 평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조阻(막을 조)>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동남이 모두 터진 곳이라면 그곳이 어떻게 <천험지리天險地利>한 곳일 수 있겠습니까?백제의 서쪽에는 큰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서쪽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2.
    다음은 온조왕 13년의 기록입니다.

    八月, 遣使<馬韓>告遷都. 遂 定疆 ,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위 기록은 마한과의 경계를 정한 것인데,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으로 한계지으며, 서로는 큰바다에 다하며, 동으로는 주양에 극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대해大海를 큰 평야라고 한다면 끝간데 없는 그것의 어디를 경계로 삼는단 말입니까?

    3.
    다음은 고이왕 3년의 기록입니다.

    三年冬十月, 王獵西海大島, 手射四十鹿.

    여기에는 서해西海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을 <서해西海>라는 지명으로 본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던데, 그렇게 본다면 뒤에 나오는 대도大島(=큰섬)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해의 큰 섬에 가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일 뿐입니다.

    4.
    다음은 근구수왕 5년의 기록입니다.

    五年春三月, 遣使朝<晉>, 其使海上遇惡風, 不達而還.

    이것은 중국의 晉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바다에서 모진 바람(惡風)을 만나 되돌아왔다는 기록입니다.

    5.
    다음은 진사왕 2년의 기록입니다.

    二年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나라사람중 15세 이상을 뽑아서 관방關防을 설치하는데, 청목령으로부터 북으로 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이르른다는 것입니다.

    6.
    다음은 전지왕의 즉위와 관련되는 기사중 일부입니다.

    <전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전지가 머무르며 왜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지하여 때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해도海島를 바다의 섬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번역법이 있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때의 섬은 남해의 섬일수도 있고, 서해의 섬일수도 있지만 앞의 기사 내용을 읽어보면 서해의 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7.
    다음은 개로왕 18년의 기록입니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사신을 중국의 魏나라에 보내서 올린 표에 臣은 나라를 동쪽 끝에 세웠다라는 구절입니다. 즉 백제는 중국의 위魏나라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바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위치는 한반도 뿐입니다.

    8.
    다음은 역시 개로왕이 보낸 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위 글의 내용은 위나라의 사신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이 백제로 오다가 고구려의 방해를 받아 바다에 빠져 죽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즉 위나라에서 백제로 오려면 바다를 지나야 하는 것이고, 위나라는 백제의 서쪽에 있으므로 그 바다는 지금의 서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9.
    다음은 개로왕의 사신에게 위나라의 효문제가 답한 내용 중 위의 내용에 관하여 답한 부분입니다.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위 글은 전에 사신을 보내 바다를 건너 먼 나라들을 위무하라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아 존망을 알 수는 없지만 백제가 보낸 말안장 등은 중국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여기서도 백제를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부해浮海)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
    다음은 위 효문제가 백제에게 준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

    백제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물海物이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지극 정성을 인정해서 몇가지 물건을 내린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해물海物이 쓰여서 백제가 바다와 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
    다음은 역시 개로왕 18년의 일로 중국의 사신들이 백제에 오지 못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後使<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중국의 사신인 소안이 동래東萊(산동성입니다. 중국은 이곳에서 요동반도로 갔다가 서해 연안을 따라 우리나라로 오는 항로를 이용합니다.)에서 바다를 건너(浮海) 개로왕에게 오려고 했는데,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 오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역시 중국도 바다를 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2.
    다음은 문주왕 시해 사건을 삼근왕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탓하며 김부식이 달아놓은 평입니다.

    <唐><憲宗>之弑, 三世而後僅能殺其賊, 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又烏足道哉!

    당 헌종의 시해범도 3세가 지난 뒤에야 잡아 죽였으니, 바다 모퉁이(海隅) 황량하고 궁벽한 곳(荒僻)의 삼근 어린애(童蒙)가 어쩔 도리가 있었겠느냐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비유되는 것은 명확한 것으로, <대학자> 김부식이 백제를 중화에 비유하면 <해우지황벽海隅之荒僻>한 곳이라고 명확하게 기술해 놓은 것입니다.

    13.
    다음은 동성왕 5년의 기록입니다.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사약사가 남제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데 서해西海에서 고구려 병사를 만나 가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14.
    다음은 동성왕조 말미에 붙어있는 기록으로 중국측에서 바닷길이 험한데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고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해로숙징海路肅澄, 요로무체要貢無替라는 부분이 바로 바닷길이 험난하나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역시 백제와 중국은 바다를 항해하여 통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
    다음은 무왕 28년에 복신이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태종이 무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

    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여기에서 해우하광海隅遐曠, 충도간조風濤艱阻라는 것은 바다 멀리 있어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게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
    다음은 무왕이 죽자 당태종이 보낸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故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 棧山航海, 遠稟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민悼.

    위 내용 중 잔산항해棧山航海라는 것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라는 뜻으로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는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7.
    다음의 의자왕의 어린 시절의 기록 중 일부분입니다.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

    의자왕이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바다 동쪽의(海東) 증자曾子라고 불렸다는 것으로 이 말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8.
    다음은 의자왕 11년에 당고종이 의자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列疆界, 地實犬牙.

    해동의 삼국이 건국한지 오래이고 영토가 벌려진 것이 개이빨처럼 인접했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묶어서 호칭할만큼 삼국은 아주 인접해 있으며, 또한 바다가 경계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륙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과 삼국이 붙어있었다면 애당초 저런 표현이 나올 리가 없지요.

    19.
    다음은 의자왕 20년의 기록입니다.

    西海濱小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서해西海 해변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나와서 죽어 백성들이 그것을 먹었는데, 다함이 없었다라는 기록입니다. 땅속에서 물고기가 나와 죽을 리는 없으니, 백제의 서쪽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0.
    다음은 당나라 정벌군 소정방의 행로를 그리고 있습니다.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소정방이 성산에서 떠나 바다를 건너(濟海) 백제의 서쪽(國西)인 덕물도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21.
    다음은 백제의 장군인 의직이 의자왕에게 당군을 맞아 싸울 전략을 품하는 내용입니다.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당나라 병사는 멀리(遠) 큰바다(溟海)를 건너 오므로(涉) 물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베에서 반드시 괴로와할 것이므로 마땅히 육지에 내려서기를 기다려 공격하자는 내용입니다. 바다가 나오고 배가 나오는데도 바다 해를 평지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22.
    그 외에 백제 정복전쟁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날 수 있습니다.

    <文度>濟海卒
    統衆浮海
    海水爲丹

    <문도文度>제해졸濟海卒 은 웅진 도독이 된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 죽었다는 것이고, 통중부해統衆浮海는 유인궤가 원군을 보내달라고 해서 손인사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며,해수위단 海水爲丹이라는 것은 백제 부흥군과 왜의 원군이 주류성 전투에서 패하며 전선이 모두 불태워져 바다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백제가 서해를 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굳이 증명하려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중국측 기록은 모두 거짓이라는 시각을 갖는 사람도 있고, 삼국사기의 기록만 믿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다른 일체의 사서를 배격하고 오로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을 가지고 논의를 폈습니다.
  • 김성겸 2008/11/13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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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훈님, 따근따끈한 자료 공개합니다.... 추모경에서의 마한의 위치 ?...
    芻牟鏡 中 卷五 本紀六
    東明七年庚寅,
    五月, 上如<鄭共>宅, 與<張>氏賞牧丹櫻桃吹笛, 而如<河濱>候宮與<漢素>妻<大房氏>幸溫水. 徵<大房良>夫妻賜衣酒, 命<大房良>爲選部令, <良>辭以老不就. <句茶國>女主<閃尼>殺其夫而請爲夫人. 上,素知其爲毒女,不許. <閃尼>,遂反以<盖馬>王<燕宜>爲夫,而共謀欲侵<黃龍>. 招懷反側群臣請伐<盖馬>. 上, 以<荇人>之創未愈, 欲休兵而不許, 使<都喜>・<吉士>徃探<盖>・<句>之虛實而歸.
    六月, 徵<荇南>軍二千・<黃龍>軍五千. 命<扶芬奴>・<于仁>鍊之于《西川》. 上, 親鍊<沸流>軍三千于<汗濱>, 從<汗水>至<汗東>南, 獵于<桓那>・<句茶>之界. <閃尼>躍馬追<桂>后大罵曰;"亡國之女敢閙天仙之國." 上, 怒欲伐之, 命<沸流>軍結陣于界上而待詔. <萱>皇后告蠶績, 上親臨蠶室賜蠶師蠶人等衣酒.
    七月, 上至《瓠盧湖》, 與<柘公>妃<桂孟子>, 泛舟湖上, 品瓜賞月酒, 然有絶世氣象. <閃尼>, 以<馬韓>人<水德>爲其情夫, 悉集囯中兵, 與我軍相待. 其囯, 在<黃龍>・<桓那>之南, <漢山>之北, 東至<汗東>之南, 西至<盖馬>之東, 南接<馬韓>・<辰韓>, 常附庸於<黃龍>・<盖馬>. 至是, 與<馬韓>通好, 與<燕宜>失和. 上, 以爲戰機, 乃使人謂<閃尼>曰;"戰吾所非不能也.傷人必多,不若和." <閃尼>曰;"勝者傷人,敗者被傷,當然之事也. 欲來降則降, 欲被傷則傷而已. 引兵入界(左忄右劫)之以威, 今忽言和,何也." 上笑曰;"無已則戰矣.其勿怨可也."乃使前騎散告於民曰;"吾欲與和,而<閃尼>請戰,故不得已戰也. 殺傷破毁,吾豈嗜而爲之哉. <北夫余>之故土,不可不復而戰也." <句茶>之民,以此怨<閃尼>. 上又言;"<閃尼>好淫而殺夫者,三不可不懲.訴我皇后辱及朕躬不可不問,罪在<閃尼>一人,宜爾百姓勿妄動而被誅,若有擒梟<閃尼>・<水德>而來者,當封<句茶>候矣." 兩軍因雨相待於二水. 七月二十日, 先鋒突破敵陣直馳<黃山>,大軍繼之,敵集其軍於<黃>東,大戰三日互有勝負, <水德>有勇我軍多傷, 上親射殺之, 敵潰保水上, 追擊破之. <閃尼>,以<虎山>爲將,决死戰於都下,大戰自晨至晡, <桂>后護上被矢. 上,怒,督軍迫之,射殺<虎山>以下九將,血流成渠, 賊臣<霞逢>等縛<閃尼>出降, 命斬之. 命諸將巡撫諸郡,不下者擊破之. 至八月十五日, 乃定. 行<月歌>于<茶>都. 分<句茶>爲<馬山>・<平山>・<黃山>・<泥河>・<豊城>, ....

    참고; 大淸廣輿圖(1785간); 《西川》은 <眞定府> 北方의 北<箕山>隣近에 있었을 <中川> 西쪽의 물줄기이었을 것이며, 《瓠盧湖》는 舊代地 <蔚州>인근 <胡盧河>상류의 湖水일 것임.
  • 소설? 2017/02/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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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의 역사소설
    이러한 소설적인 역사근간들을 가지고 소설을 쓰면 괜찮게 많이 팔릴듯 화이팅하세여ㅛ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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