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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훈 칼럼리스트 2008/05/0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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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류가 있어 바로 잡습니다. (죄송합니다)
    백제 패망 후 당나라는 5 도독부를 설치합니다. 지명은 맞습니다만, 동명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죄송합니다. 동평을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다 산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덕안은 산동성 아래 강소성에 있습니다.
    백제 패망지 지명 대부분을 김부식은 모르는 지명에 적어 놓았습니다. 김부식을 포함한 고려의 10대 석학이 한반도에 있는 지명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는 백제패망지가 당시 고려가 있던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이기 때문에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 시대 때 갑자기 부여가 백제의 왕도가 되었습니다.
  • 윤복현 2008/05/0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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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못 건넜을 것이라는 성훈님의 논리는..
    해상제국 백제가 동남아시아와 일본열도까지 경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국대륙에서 땅먹기만 한 백제라면 해상제국이라는 닉네임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노저어서 건너겠습니까? 돛달고 큰 바람타고 가는 것입니다. 노는 필요시만 젖겠지요. 근초고왕.근구수왕 등이 일찍이 진출한 중국동남해 지역이 백제땅이였으니 한반도본국의 지명들을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명만을 가지고 주장하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개로왕이 강을 따라 토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유적지의 경우 한강이남의 풍납토성이 고증하고 있습니다. 백제초기 교류했던 동진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고, 침류왕 시절의 사찰터도 최근에 발굴되었습니다.

    온조백제는 [한단고기]나[삼국사기]에 보면 공통적으로 "서해로 바다를 접하고 있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서쪽에 어디에 바다에 있습니까? 지중해까지 가야 한다면 그건 비약이구요. 서해는 중국위치로는 동해요, 한반도위치로는 황해입니다. 중국위치로 기록했다면 동해라고 했겠지요?

    그리고, [비류백제가 땅를 가지고 온조백제로 귀순했다]는 [한단고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서 '땅'은 비류가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만주에서 밀려난 중국대륙(요서)으로 보아야 합니다. 전연에 대패하여 위축된 비류백제세력이 온조백제에 합류한 기록이라고 보아야 하고, 여기서도 서해를 건너 온조백제까지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아마도 마한에 밀붙어 마한왕에게 조공까지 하면서 겨우 살아가던 온조백제가 갑자기 강성해진 근초고왕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근초고왕시기에 마한전역을 복속했으니까요. 여기서 마한은 단군3조선 중 한반도지역에 해당하는 마한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지-동이지전]에 기록을 보면 지금의 읍단위 정도에 해당하는 소국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마한50여개국에 '백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백제는 온조백제입니다.

    이 온조백제가 갑자기 강성해져 마한전역을 복속하는 시기가 근초고왕시기니 이 때 비류백제가 합류한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온조백제와 비류백제가 통합한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진출에 나섰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조세력(십제)이 한강변으로 이동해 오기 전에 소서노가 비류.온조와 함께 남하하여 일시 정착한 지역이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남쪽으로 내려와 땅이 좋고 살기 좋은 패수....진.번 사이에 있고, 북쪽으로는 대수, 서쪽으로 바다로 접해 있는..바다와 가까운 외진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은 아래 지도속의 위치처럼 지금의 발해만 지역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비류는 어머니 소서노가 정착한 발해만 지역에서 왕위에 즉위하지만,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소수만 발해만(만주지역)지역에 남고, 대다수는 나머지는 온조를 따라 남하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류는 만주에서 고구려에 저항하면서 세력을 키워 부여까지 서쪽으로 밀어내기도 하다가 결국 고구려와 전연에 패하여 요서지역으로 밀려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전연에 대패하여 온조백제에 합류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 소서노가 비류.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정착한 곳으로 추정되는 패수지역 -
    [한단고기-고구려본기]"진.번 사이,바다와 가까운 외진 곳,북쪽이 대수('대수'라는 지명은 엄리대수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큰 강"으로 해석하면 무난할 듯),서쪽이 바다"인 위치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남쪽"이라고 했으니 지금의 만주 집안은 고구려의 초기 수도가 아니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즉, 집안지역의 피라미드 무덤군들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는 의미와 동일하죠.중국이 고구려유적지로 왜곡함으로써 홍산문명에 앞선 백두산문명(중국은 '여명문화'라 부르고 있다)의 진실을 감추려는 것이죠..또한 연대가 올라갈수록 세계최대 최초의 유적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는 한반도문명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북한 예성강.대동강 지역에서 백제관련 토성과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어 온조가 남하하여 초기수도를 정한 지역이 대동강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는데,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북에서 계속 남으로 수도를 정한 온조백제였다는 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어 논쟁이 야기되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비류는 만주에 남았고, 온조는 비류.소서노와 발해만 지역(패수)에 함께 있다가 비류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남하하여 한반도지역에 속하는 마한지역에다가 십제를 건국했고, 비류백제는 고구려에 저항하여 만주에서 요서까지 밀려나 결국 전연에 대패하여 근초고왕시기에 온조백제에 합류하게 되었고, 비류계의 북방 군사력을 기반으로 갑자기 강성해진 백제가 근초고왕시기에 마한전역을 통일하고 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일본열도까지 지배하게 되는 강성한 해양제국으로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성훈님의 열정적인 연구는 가상하오나, 너무 문헌에만 치중한 듯한 관념적인 연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고학과 문헌들과의 검증분석이 함께 동반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반도을 제외하고 지나치게 중국대륙에다만 고정시키려는 편향성이 문헌을 바로보는 관점도 흐리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반도와 중국을 하나로 보는 역사인식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땅속에서 출토된 무녕왕 지석에 표기된 사망일시와 [사마]라는 이름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상호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향성은 객관성을 결여한 역사연구라고 보고 싶군요. 동성왕과 무녕왕의 나이차이로 보아서 결코 아들관계가 될 수 없음에도 부자관계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벌써 연구의 문제점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三國史記, 魏書, 宋書, 日本書紀를 비교해 보면, 개로왕은 동생 곤지(여곤)에게 병권을, 여도(문주왕)에게는 국무총리(상좌평)직을 맡겼습니다.그리고 고구려에 한성이 점령당하고 죽음을 당한 개로왕이 개로왕의 친아들인 무녕왕(사마)를 임신한 왕비를 곤지에게 맡기게 되고, 동생 여도(문주왕)는 백제재건을 맡았습니다. 평소 위급해져 가는 백제정국상황에서 개로왕이 평소 동생들에게 부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무녕왕을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한 건 백제 개로왕 당시 북방족의 풍습인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우가 데리고 살아야 하는 풍습"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유교학자 김부식의 입장에서는 유교적인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어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헌가지고는 진실을 알 수 없고, 같은 사건과 상황을 기록한 문헌내용들을 비교분석해서 공통적인 내용을 진실로 보아야 하는 차원에서 무녕왕은 사촌형제사이인 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라, 개로왕의 아들입니다.

    40세에 왕위에 오른 무녕왕(462년 - 523년)과 15세에 왕위에 올라(일본서기 기록) 22년간 재위(재위 479~501년)한 동성왕의 나이 차이는 동성왕의 재위년인 479에서 15을 빼면 출생연도가 464년 되니 2살 차이입니다. 동성왕이 2살때 무녕왕을 낳았다는 소리밖에 안되니 부자관계는 전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로왕의 아들 사마가 일본 '각리섬'에서 출생한 2년후에 동성왕이 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곤지의 형님되는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15세에 암살당하자, 곤지의 양아들이자. 곤지의 형 개로왕의 아들인 사마보다는 곤지자신의 친아들(동성왕)을 왕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때의 상황을 [일본서기]는 日本書紀는 동성황제의 즉위에 대해 “무령왕(사마)의 아버지 곤지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의 차남인 동성왕의 경우 큰 아버지 문주왕의 아들인 三斤王(삼근왕)이 재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왜국의 군사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선박 모형도(돛을 달고 있다)


     



    장보고의 무역선 모형도(돛을 달고 있다)


     


    서양배: http://www.kordi.re.kr/chongseo/vol8/vol8_03.asp


    한국배 :http://www.kordi.re.kr/chongseo/vol8/vol8_04_02.asp


     


    * 서양배나 한국배 모두 돛을 달고 있다..


    기본사항이다! 어찌 노를 저어서 먼 바다로 나서겠나!


    고대부터 개척된 해로와 해풍을 최대한 이용하는 거다!

  • 백제에 대한 좋은 의견이네요
    조재범 (2008-05-08 21:57:36)

    잘 읽었습니다. 아, 그런데 다 좋은데 실수를 하나 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 5도독부의 위치입니다. 일단 그 도독부는 동명, 덕안, 웅진, 금련, 마한입니다. 지금 그 도독부 중에서 금련과 마한의 위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중국엔 동명과 덕안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습니다. 동명은 성훈씨 말대로 산동성에 있지만 덕안은 강서성에 있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발행된 중국 전도에서 확인했습니다. 웅진은 지금의 비성이라는 것도 덧붙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구당서에 웅진의 동쪽엔 대산이 있다는 기록을 가지고 비정하면 됩니다.
    그리고 백제 패망시 지명 중엔 삼국유명미상지방도 들어가 있다고 덧붙여주십시오. 침현,독산,평원,동잠성,덕안 등은 전부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정성일 (2008-05-09 06:59:50)

    저 또한 산동지역에 백제의 속국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중국25사에도 나오는 내용을 부정할 생각은 없구요.
    다만 백제의 멸망시의 도읍인 웅진과 사비를 멸하기 위해 황해를 건넜냐가 문제입니다.
    성훈 선생님 말씀대로 황해의 해류가 매우 위험하다는 의미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백제는 어떻게 그런 위험한 해류를 사이에 두고 동백제와 서백제를 경영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먼저 답하셔야 할 것입니다.
    백제의 항해술을 뛰어나 바다항해가 가능하고 중국은 바다항해가 불가능하다고만 주장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중국이 백제의 조선기술자를 고용하여 배를 만들고 유능한 선원을 앞장 세워서 바다를 건넜다고 하면 어떻게 변명하실 것인지 묻고 싶네요.
    남당 선생의 강역고는 남당 선생의 주장이 적힌 주관적인 글이나 백제의 마지막 도읍에 대하여 비정한 이유에 대하여 10여가지 항목으로 정리하신 글이 있더군요.
    중국의 황제나 군사의 지휘관이 자칫하면 전 군사를 바다에 생매장할 지도 모를 모험을 하였겠느냐에 대해서는 이전에 수와 당나라의 전쟁시에 육로를 통하여 공격하러 왔다가 매번 큰 패배를 당하고 돌아간 경험이 있습니다.
    육로로 전쟁을 하면 백제와 고구려 연합군을 상대해야 하니 수로를 통해 상대적으로 약한 백제와 1:1 승부를 하러왔다고 봅니다.
    전쟁의 신은 불행히도 우리에게 있지 않고 중원에게 도움을 준 듯합니다.
    중국이 백제를 멸망시킬때는 13만의 병력을, 부흥운동을 저지할 때는 40만의 병력을 백제에 보냈다는 기록을 보면 결코 백제의 국력이 낮은 나라가 아니었으며 백제의 멸망은 빈틈을 찔렸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봅니다.
  • 라디오 2008/05/0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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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조 백제니 비류 백제니..남당 유고 백제왕기에 의해 부정이 됩니다.
    온조 백제니 비류 백제니..김성호님의 가설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가 46년간 재위했다고 나오나..
    백제왕기에서는 비류가 17년, 온조가 30년 재위했다고 나옵니다.
    온조가 47년 재위했다고 나오는 기사도 포함되어 있지요.
    3개의 출처가 다른 기사가 섞여서 기재되어 있습니다.
    한 나라에 2개의 왕조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상식입니다.
    분명히 구지왕처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왕들중 몇 왕들은 기록에서 누락되었다고 봅니다. 50여년이란 재위기간은 믿기가 힘듭니다.
  • 서용석 2008/05/0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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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정방을 물리친 서희장군의 자랑스런 후손으로써.........
    그리고 인류시조성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으로 글을 남깁니다.
    우리의 역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왜곡된 역사는 후손들이 그 거짓된 역사를 보고 배우기 전에 기필코 바꿔야 합니다.
  • 조재범 2008/05/0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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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해는 바다란 뜻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윤복현씨, 서해로 바다를 접하고 있다의 그 바다는 바다란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땅도 바다 해를 씁니다. 그것은 옥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로왕이 강을 따라 쌓은 것은 제방이지 성이 아닙니다. 성은 따로 쌓은 것인데, 사서 좀 읽어보시죠. 증토축성이란 말만 듣고 토성이라 생각하시나본데, 토성은 말 그대로 흙을 말려 쌓은 것이고, 증토축성이란 흙을 구워 쌓은 것, 즉 흙 벽돌로 쌓은 것을 말합니다. 말린 것과 구운 것도 구분 못 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삼국사기 기록을 봅시다.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되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였다."
    여기서 하수란 한강이 아닙니다. 하라고 칭하는 강은 한반도엔 못 붙입니다. 하는 흐름이 ㄱ자나 ㄷ자로 굴절이 심한 강을 하라고 하거나 중국 화북지방에서 붙이는 강이름인데 한반도는 이런 강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숭산은 삼국유명미상지방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백제 본국이 한반도요, 백제 속주가 중국이다라고 할 수 있겠소?
    그리고 일본서기를 자꾸 들먹이는데 왜 삼국사기는 내팽개치고 일본서기만을 숭상하는 지 알 수가 없군요. 우리 역사는 우리 민족이 쓴 사서가 가장 믿을만합니다. 일본서기는 대체로 2운 즉, 두 갑자인 120년이 소급되어 적혀있을 뿐만 아니라 670년 이전의 역사는 대체로 전설이 반이상 섞인 허구입니다. 신공황후조가 대표적이죠.
    그리고 내친 김에 무령왕릉에 대해서 반박 좀 해야겠습니다. 무령왕릉에 적힌 사마(斯麻)는 무령왕의 실제 휘인 사마(斯摩)와 다릅니다. 뻑하면 이것은 이두표기다 뭐다 하는데 한 예로 듭시다. 제 이름인 재범은 같은 한자를 쓰는 다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한자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자를 써도 다른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물며 마자 한 자 다른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리고 사망시기인 523년 5월도 따져봅시다. 삼국사기엔 무령왕이 5월에 죽었다고 했지 5월 7일에 죽었다고 안했습니다. 설령 무령왕이 5월 7일에 죽었다 치더라도 같은 날 죽었다고 다 같은 사람입니까? 이름도 다른데. 게다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편부터 의자왕 편까지 다 뒤져보시죠. 백제 역대 왕 중에서 장지가 적힌 왕이 의자왕 말고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왕 중에서 나이 적힌 사람 다 뒤져보시죠. 역시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동성왕이 37세에 죽었다는 것도 일본서기를 보고 짐작하는 것이지 실제론 모릅니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고의로 백제 역대 왕들의 나이를 안 적었겠습니까? 고의로 역대 왕들의 장지를 안 적었겠습니까? 진실은 하나입니다. 김부식이 몰라서 안 적은 겁니다. 기록도 찾을 수 없고 실제 장지도 못 찾으니까 몰라서 안 적은 겁니다.
    그리고 왕릉의 특성이 뭔지 아세요? 왕릉 주위엔 절대 묘가 인접해 있지 않습니다. 즉, 왕릉이 축조되면 다른 무덤은 꽤 먼 거리로 떨어뜨려 만든단 말입니다. 그런데 무령왕릉은 반경 20m내에 무령왕릉을 비롯해서 3개의 무덤이 인접해 있습니다. 왕릉이 분명하다면 어떤 미친 놈이 그 주위에 무덤을 만듭니까? 또 왕릉엔 휘를 절대 쓸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시호를 써야합니다. 이는 정조 대왕 무덤에 이산의 묘다라고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무령왕의 혈연 관계는 일본서기에선 곤지의 아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 삼국사기에선 곤지의 손자라 합니다. 어느 것이 신빙성 있어보입니까? 일본서기가 더 믿음직합니까, 삼국사기가 더 믿음직합니까?
    구당서에 이르기를 '백제의 왕 거소는 동서 2곳에 있었다'하니 충청도 지역의 백제 유물들은 동쪽 거소의 것일테고, 무령왕릉의 주인은 분봉왕인 사마왕입니다. 또한 우리는 웅진의 개명된 것이 공주로 알고 있는데 부탁합니다. 삼국사기 한번 제대로 정독해 주십시오. 웅진의 새 이름은 공주가 아니라 분주(分州)입니다. 또한 역시 구당서에서 웅진의 동쪽엔 대산이 있다 했는데 공주 동쪽에 대산(大山)이란 것이 있습디까? 대산은 태산의 옛 이름입니다.
    위험한 황해 해류를 이기고 어떻게 동백제 서백제를 운영했나? 이건 저도 답은 속시원히 못 하겠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산동반도를 기준으로 해류의 성질이 조금 달라집니다. 산동반도 북쪽인 발해만 일대는 동북아시아 전역을 통틀어 가장 해류가 빠른 지역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연안 해류 때문이지요. 발해만 일대를 보시면 압니다. 아주 큰 만인데 만이 있다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곶입니다. 곶 주위는 해류가 엄청 빠릅니다. 그래서 발해만 일대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이죠. 사서의 기록을 기존의 통념대로 해석한 위 지도에서 나온 그 항로, 그 항로가 바로 자살 행위하는 항로란 말입니다. 그러나, 산동반도 남쪽과 강소성 지역에서 출발하면 괜찮습니다. 한 예로 상하이 지역 가는 배는 그다지 위험한 항로가 아니라고 합니다. 백제가 동백제 서백제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다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로가 어느 쪽은 위험하고 어느 쪽은 안전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안전한 항로만을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천문학 외에도 기상학, 지질학이 입증해주기도 합니다. 백제의 큰물기록을 솔직히 한번이라도 추적해보셨습니까? 백제의 큰물 시기는 음력 5월~6월입니다. 여기서 한반도의 큰물시기도 한번 알아보죠. 음력 6월~7월입니다. 큰물 시기는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겠죠? 동북아시아 각 지역의 기상 관측소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음력 5월에 큰물이 지는 지역은 산동반도 남부~양쯔강 이남 지역, 일본 큐슈, 오키나와 지역이라 합니다. 한반도에선 이례적인 일이 아니면 잘 안 일어나요. 또 백제의 지진 기록은 17회인데 그 중 4회가 강진입니다. 한국은 지진대가 지나가는 곳도 아니라서 강진이 안 일어납니다. 1979년의 홍성 지진도 리히터 규모 5.9라서 강진 기준인 7.0에 못 미칩니다. 그런데 백제의 지진 기록 중엔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져 죽는 사람이 있었다는 둥의 엄청난 강진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땅 갈라지는 지진은 한반도에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록들은 온조왕, 다루왕, 기루왕, 근구수왕 때 있었습니다. 설마 이 것을 보고도 근초고왕 때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다는 케케묵은 주장은 안 하시겠죠?
    고고학적인 유물 사관을 지금 중국 땅에선 할 수 없다는 현실도 감안합시다. 우리는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에 그 지역의 영토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저 극악무도한 서토인들이 상당부분 파괴하고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한 1949년에 대만 초대 총통 장제스가 국민당 정부를 중국에서 대만으로 옮길 때 가져간 유물이 자그마치 62만 여점인데 그 중에 우리 민족 계열이 만든 유물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보매, 사서의 기록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유물이라고 봅니다. 한예로 가야 유물이라고 떠들어대는 경상도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 상당수는 '한국고대금석문'에서도 제작연대가 불분명하여 이것이 정말 가야 것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윤복현 씨, 중국대륙에서 땅따먹기 했다고 왜 해상제국이란 칭호를 못 얻습니까? 꼭 반도나 섬나라에 있어야만 해상제국이란 칭호를 얻습니까? 중국대륙에서 땅따먹기한 것은 그 주위에 고구려와 신라가 있으니까 그 나라들 간의 전쟁이고, 해상제국은 해양으로 진출한 것 뿐입니다.
  • 피닉스 2008/05/0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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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삼국 사기 인용문에서,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의 서쪽" 덕물도에 도착하니... 인데, 나라의 서쪽을 빠뜨리셨네요. 즉, 덕물도는 백제국의 서쪽에 있어야 맞는 거죠. 그리고 제가 무슨 일제 사학의 관점을 가진게 아니라, 그냥 한문만 해석하면, 원래의 글이 자연스럽습니다. 명해는 지명이 아니라, 그냥 바답니다. 불습수자에서 水는 그냥 바다를 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 조선의 水軍은 해군으로 해야하나요? 水는 광범위하게 물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강이든 바다든 모두 "물" 입니다. 그 사람들이 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강 이든 바다든 물에서 싸울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해를 건너 백제를 치는 입장에서는 해군이 아닌 육군이 주력이 됩니다. 적벽대전이 실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물에 익숙하지 않는 병사를 위해 배를 요동치지 않게 다 묶었다는 얘기는 그들이 얼마나 "물"에 잇굿하지 않았는지를 보려줍니다.
  • 조재범 2008/05/0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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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닉스 님, 괜찮습니다. 잘 지적하셨습니다.
    일제 사학의 관점을 가지셨다뇨? 아닙니다. 오히려 님께서 잘 지적하셨습니다. 명해는 지명도 아니고 바다도 아닙니다. 바다라면 건널 섭자를 쓸 수는 없습니다. 섭자는 건너다는 뜻이지만 이상하게 물에 관련된 것에선 쓰진 않습니다. 이는 큰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바다 해(海)는 바다란 뜻 외에도 땅이란 뜻이 있습니다. 수군은 말 그대로 수군이죠. 바다에서 전쟁해도 수군이고 강 위에서 전쟁해도 수군이죠. 위의 배 모양을 통해서 볼 때도 중국인들은 항해술이 그다지 능하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성일 님의 의견에도 한 가지 반박을 하죠. 그 유능한 선원이 몇 명이나 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격군으로 모두 선원을 유능한 자로 쓴 들 어쩌겠습니까? 본래 물에 익숙치 못한 것들인데. 그리고 가해조천록을 아십니까? 이것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안경이란 사람이 지은 것인데요. 이 사람이 1621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체험했던 것을 쓴 것입니다. 이 당시에 중국으로 사신을 갈 때는 반드시 육로를 이용했습니다. 해로가 원체 위험했기 때문이죠. 서울에서 북경까지 해로로 간다면 좋든 싫든 발해만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건 지도만 봐도 아니까 생략하죠. 어쨌든 육로를 이용했는데, 그 당시에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심양에 도읍하고 후금을 세우면서 요동반도 지역이 막혀서 육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해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청천강에서 등주(산동성 봉래시)까지 10척의 배로 가도록 했는데, 이 항로를 이용하는 데만도 1개월이 넘게 소요되었으며, 9척이 파선되어 단 한 척만이 중국에 올 수 있었답니다. 중국인보다 상대적으로 바다와 더 잘 접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이 해로를 이용해도 이 정도인데, 중국인들 중에서 유능한 선원을 고용한들 피해 한 번 고스란히 안 입고 바다를 건널 수 있겠습니까? 설령 수전을 했다면 강 위 쯤이 그나마 적당하겠죠. 그러나 강 위에서 일어났다는 적벽대전을 볼 때도 중국인들은 그 강상 항해도 그닥 잘 하진 못 했나 봅니다. 당연하죠. 그네들의 수도가 있었던 장안 일대는 강의 상류 지역이라 강 폭도 좁고 해서 물이 많지 않겠죠? 그러니까 그들이 수전에 서툴단 말이 나온 것입니다. 정성일 씨, 반도 사관에 못 박혀 있으면 해석이 안 맞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고려 이전까지는요. 한 번쯤은 역발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중립사학 2008/05/1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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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증지대룹니다.
    아니 서해바다를 왜 못건넙니까?
    고대사람들이 무슨 원시인입니까?
    군사동원된 사람수가 위작일 가능성은 왜 배제합니까?

    이거 완전 사학이 아니라 소설이군요.
    성훈씨의 주장대로라면,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님이 그린 백제와 신라의 지도에서 두 나라는 완전히 떨어져 있고, 바다를 건너야 전쟁이 가능한데,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와 신라가 무자게 전쟁하더군요.

    님 말대로라면 해류때문에 신라와 왜와의 교류도 불가능하고 지나와 왜와의 교류도 불가능하군요. 백제와 왜는 어떻게 교류를 했나요? 해류때문에 안될텐데. 이상해도 한참 이상합니다.

    서해바다를 못건넜다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억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솔직히 님이 고대 항해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얇은 지식으로 고대인을 원시인으로 만들지 마십쇼.
  • 성훈 칼럼리스트 2008/05/1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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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제 글을 잘 읽어 보세요.
    백제와 신라는 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붙어 있었고, 신라와 왜도 중국 대륙에서 붙어 있었습니다.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문장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함부로 댓글을 다는 것은 경솔한 짓입니다.
    황해바다를 중국 산적들이 못 건넜다는 것이지 백제가 못 건넜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제대로 읽고 댓글을 달아야 필자도 신경써서 볼텐데 이런 댓글은 시비걸기용으로 사실 답을 할 필요조차 없는 글입니다.
  • dfsdfs 2008/05/1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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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fsfds 2008/05/1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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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토짱 2008/07/0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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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립사학아!
    말하는 요지를 보니 이제 갓 대학이나 졸업했나 보구려~ 흥분하지 말고 성훈님의 글을 전반적으로 잘 읽어보고 그동안 배운것과 좋합적으로 사고를 해 보게나~ 세상은 그리 일방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성훈님,조재범님 같은 분들이 너만 못해서 인고에 인고를 해가면서 이렇게 민족을 위한 기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성의만이라도 인정해보게.. 그런 막말이나 하면서 하세월 하지말고 진정한 공부(예,지,인을 겸비한)를 더하게! 비록 조상중 누군가 친일사학이라 중립을 추구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욕할 수는 없는 입장은 이해하네!
  • 도사 2009/07/14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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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에 다녀와서..
    정림사지 오층탑에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쓴글이있읍니다. 그것이가짜가 아니라면 백제가 부여에서 멸망한 확실한근거가 아니겠어요.
  • heye 2009/12/1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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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 방문자 2010/12/16 [11:12]

    수정 삭제

    대중 글의 내용이 부합하는 듯.
    이 분의 글을 읽고 글을 올립니다.

    저 위에서 윤복현 님이 올린 글 중에서는 '당나라는 바다도 못 건너는데 백제는 어떻

    게그랬냐' 하시는데 이유는 백제가 해양대제국으로 불린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한마디로 하면 백제같은 해양 대제국이나 이렇게 배를타고 대륙에 영역을 건설하는게

    가능하지 원래 당나라 원족인 한족은 내륙에 살아서 동이족에 비해 훨씬 해군이 약합

    니다.

    그리고 대륙백제설 이미 정설된지 오래입니다.

    이분이 말씀하신대로 한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 박혀 우리역사를 가리는 그늘이 되어

    선조들에게 부끄러운 후손,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선조가 되는 우를 범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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