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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중천태왕의 황후가 된 신라 태후 김옥모 (4부)

김알지의 후손인 김옥모의 동생 미추가 신라왕이 된 이유는?

성훈 컬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5/04/17 [11:49]

고구리 중천태왕의 황후가 된 신라 태후 김옥모 (4부)

김알지의 후손인 김옥모의 동생 미추가 신라왕이 된 이유는?

성훈 컬럼니스트 | 입력 : 2015/04/17 [11:49]
중천태왕 9년(256) 10월, 하늘에 제사지내고 제수용 고기를 옥모에게 보내니, 옥모가 종실의 딸 셋을 태왕께 바쳐 각각 천궁(天宮)・월궁(月宮)・동궁(東宮)에 배치했다. 천궁은 전태후가 기거하는 궁이고, 월궁은 옥모의 딸 월정황후의 궁이며, 동궁은 작년 정월에 정윤이 된 약우(若友)태자의 궁을 말하는 것이다. 연엽황후의 소생인 약우태자는 훗날 서천태왕이 된다.

이듬해 여름 4월, 태왕이 옥모와 만나 대령에서 사냥할 때 사슴 한 마리를 쏘고 나서 옥모에게 그 사슴을 쏘라 명하자, 옥모는 “폐하께서 쏘시어 사슴이 이미 쓰러졌으니 응당 소첩은 그것을 거두어 하늘에 바치겠습니다.”라고 아뢰고는 그 땅을 헌천구(獻天溝)라 명명했다. 나라사람들이 그 곁에 이성사(二聖祠)를 지었고, 훗날 사람들이 “사당의 고개에 춘풍이 불자 사슴이 자신을 살찌워 하늘에 바쳤고, 옥후가 황상을 모시고 돌아갔다네.”라는 시를 남겼다. 
 
당시 백제에서는 큰 가뭄에 나무들이 모두 말라죽었는데 사람들은 두 성인이 교합해 서택(西澤)에 물이 말랐다고 했고, “흑룡(黑龍)이 창룡(蒼龍)와 교합하니 백룡(白龍)이 애태운다.”라는 노래가 번졌다고 한다. 서택은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는 큰 호수인 대야택(발해)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흑룡은 고구리 중천태왕을 가르키며, 창룡은 신라의 옥모태후를, 백룡은 백제 고이왕을 말하는 것이다.
 
11년 무인(258) 봄 2월, 말갈의 장라탕 등이 백제의 고이왕과 상통해 함께 신라를 치려하자, 중천태왕이 명을 내려 장라탕을 토벌해 목을 베고는 고이왕의 사신을 붙잡아 가지고 있던 토산물을 신라의 첨해이사금에게 보냈다. 고이왕은 이전에 받았던 해마 10필을 내고 사신을 바꾸어 갔다.

5월, 태왕이 해(海) 위에서 옥모를 돌려보냈다. 대령에서 함께 사냥한 이래 두 성인이 비류(沸流) 행궁에서 함께 지내다가 이때에 이르러 해로로 귀국하는데, 태왕이 “산에는 꽃이 피고 물에는 물고기들이 있건만, 어찌 내게는 꽃도 물고기도 없단 말인가.”라고 노래하면서 눈물을 흘렸더니 옥모 또한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여기서의 해는 황하를 의미하고, 비류는 관(무)구검과 관련 있는 산서성 남부 비류수를 말하는 것이다.
                
12년 기묘(259) 봄 정월, 중천태왕은 옥모에게 옷・고기・포목・옥노리개・약물 등 100가지를 하사하고, 첨해 이사금을 신라국 황제로 봉한다. 이어 작년에 중천태왕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 돌아온 옥모가 황녀를 낳자 태왕은 사람을 보내 옥모의 궁을 새로 고쳐주고 선물도 많이 보내준다. 아울러 신라가 가물자 곡식 등 구휼물자를 많이 보내준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첨해가 오(吳) 땅 사람으로 칼 만들고 양잠을 가르치는 관리들을 각각 두 사람씩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 땅은 바로 위·오·촉 삼국의 오나라 땅으로 호북성 악주 부근이다. 즉 당시 오나라와 신라는 서로 가깝게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0670 참조)   
              
중천태왕이 옥모에게 푹 빠져 많은 선물을 자주 보내자 걱정도 되고 시샘도 난 전 태후가 이를 말리게 되고, 옥모는 새 궁전이 중건되자 태왕을 초청해 운우의 정을 풀어보려 했다. 보다 못한 전 태후는 만일 태왕이 신라로 가겠다면 자신이 투신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난처해진 태왕은 부득이 옥모에게 “제 처의 나라가 여름에 큰 비로 산이 40여 군데나 무너졌고, 또한 가을엔 혜성이 동쪽으로 뻗쳐서 재앙이 남아있음을 알렸습니다. 미생지신이 없지는 않으나, 위령지철은 삼가 명심하겠습니다. 경께서 진수(溱水)를 건너시겠다면 응당 효교를 놓아드릴 터이니, 원컨대 무산(巫山)으로 들어가서 다시금 운우를 다지십시다.”라고 회답했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미생이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기다렸으나, 여자는 끝내 오지 않았고 소나기로 물이 밀려왔으나 미생은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리다가 숨졌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위령지철(衛靈之轍)은 위령공이 데리고 있던 미소년 미자하(彌子瑕)가 어미의 병 때문에 위령공의 마차를 훔쳐 타고 급히 달려가다 바퀴자국을 남기는 실수를 한 것을 말하며, 효교(孝橋)는 미자하가 위령공의 마차를 훔쳐 타고 건넌 다리를 말하는 것이다.

위 고사성어를 말하면서 언급한 진수(溱水)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황하 바로 남쪽에 있는 낙양 동쪽 정주시 근방에 있는 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수는 고구리와 신라 국경 부근에 있는 강일 것이다.
 
진수(溱水) : ①하남성 정주 남쪽에 있는 평정산시에 있는 동백산에서 발원해 각산현 경계로 흘러 동북류해 여남현에서 동남쪽으로 남녀하로 들어가는 강으로 일명 사하, 오채하, 석곤하라고 한다. <수경주>에 진수는 청의산에서 나오므로 청의수라고 한다. 
(원문) 发源河南桐柏山, 流入确山县境, 一名沙河, 又名吴寨河, 俗名石滚河, 东北流至汝南县, 东南入南汝河,《水经注》溱水出青衣山,亦谓之青衣水。

② 하남성 정주시 동쪽 밀현 동북쪽에 있는 골수욕에서 발원해, 동남쪽에서 쌍자하라고 한 유수와 만나 동류해 가노하로 들어가는 일명 회수 혹은 작회수라고 한다. <설문>에 진수는 정국에 있고, 남쪽에서 유수로 들어간다.
(원문) 发源河南密县东北圣水峪, 东南会洧水为双洎河, 东流入贾鲁河, 一名浍水, 或又作郐水, 《诗郑风》 溱与洧, 方涣涣兮, 《说文》 溱水, 在郑国, 南入于洧。
                   
▲ 중천태왕과 관련된 지명들. 진수는 정주 동쪽을 흐르는 강                                   © 편집부

15년 임오(262) 정월, 신라 첨해 이사금이 갑자기 죽자 옥모는 친정동생인 김미추를 보위에 올린다. 김씨가 처음으로 신라의 통치자가 되는 역사적 순간이다. 명림씨와 연씨 및 종척 여인들을 대각궁에 모아놓고 옥모에게 연회를 베풀다가, 첨해를 장사지낸다는 소식을 듣고는 옥모와 함께 단궁(檀宮)으로 가서 거애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5533 참조)
            
▲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 김씨를 처음으로 왕위에 세운 김옥모 태후                                      © 편집부

2월, 태왕이 옥모 황후를 데리고 온탕으로 갔다. 명을 내려 계림성모사(鷄林聖母祠)라는 사당을 세워 옥모의 초상화 열 폭을 그려 걸어놓게 했으며,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의 신라 김씨의 여섯 조상을 함께 제사지냈다. 태왕이 옥모와 함께 구도에게 술을 따라 올리고서는 “구도대왕께서 영웅이셨음을 들은지 오래인데, 지금은 내 장인이 되셨으니 어찌 공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옥모황후가 “신첩 또한 동명신조(東明神祖=주몽)의 사당에 술을 따르고 싶습니다.”라고 화답하니 태왕이 이를 기꺼이 허락했고, 이에 졸본으로 가서 단(檀)태자를 낳았다. 가을 7월 태왕이 옥모와 함께 기구(箕丘)에서 사냥해 흰 노루를 잡았다.
(기구의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4932 참조)

16년 계미(263) 봄 정월, 신라의 미추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는 “이찬 량부를 서불한으로 삼아 지내외병마사를 겸하도록 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는 옥모가 내린 명이었다. 이처럼 옥모는 친정동생인 김미추를 신라왕위에 앉혀놓고는 중천태왕의 막강한 힘을 배경으로 하여 신라의 정치를 좌지우지 했던 여인이었다. 
 
2월에 미추가 그의 조상사당에 제사했다. 구도 갈문왕을 함께 모셨고, 태왕은 장자인 문부(門夫)태자를 보내 제사지낼 향을 전했다. 이처럼 당시 신라와 고구리는 김옥모라는 여인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가 무척 돈독했다. 문부태자는 통(桶)공주 소생으로 중천태왕의 장자였으나, 255년 약우태자를 동궁으로 삼았으면 하는 부황의 뜻을 미리 알아채고는 스스로 물러나 양위하는 인물이다.

“4월, 중천태왕과 옥모가 산궁(山宮)으로 들어가 전 태후를 찾아뵈었다.”라는 기록을 끝으로 <고구리사초·략>에 더 이상 옥모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륙을 후꾼 달군 고구리 태왕과 신라 태후의 차원 높은 뜨거운 사랑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태후에서 고구리 황후가 된 옥모가 언제 몇 세에 죽었는지 조차 알 길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70년 겨울 10월, 중천태왕은 20년 전 물에 던져 죽이라고 명했던 관나후를 불러 함께 열흘을 연달아 즐기다가 병들어 46세에 붕어하고 만다. 김옥모는 중천태왕의 일생에서 가장 뜨겁게 사랑한 여인이었다. 신라 태후에서 고구리 황후로 변신하는 김옥모라는 여인 때문에 신라에서 김씨가 왕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중천태왕의 기록 중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다. 18년 을유(265) 2월, 자기와 옥기를 만드는 장인에게 명해, 사슴과 기린을 만들어 현무를 떠받치고 닭 벼슬을 채색해 그려서 덮개로 삼았다. 비로소 화(火)・미(米)・치(雉)・룡(龍) 문양의 용포(龍袍)를 입고, 옥화(玉花)로 꾸며진 금관을 면류관으로 삼았다.

금인성의 주(周)씨가 황금 일곱 근으로 쌍기둥을 세운 금관을 만들고 자색 옥화로 장식해 이름 하길 환희천관(歡喜天冠)이라 했다. 현재 신라의 유물로 알려진 금관이 혹 그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참고로 북부여에는 천제운관(天帝雲冠)이 있었다고 한다. 


▲ 대만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리금관의 주인은?     © 편집부

 

원본 기사 보기: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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