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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인물] 민족의 계몽발전에 기여한 애국녀인 백선행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6/22 [16:57]

[조선력사 인물] 민족의 계몽발전에 기여한 애국녀인 백선행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6/22 [16:57]

 

▲ 백선행 기념비. 자료사진     © 이형주 기자

▲ 평양에 위치한 백선행기념관. 자료사진     © 이형주 기자

 

력사에 이름을 남긴 조선녀성들 (6)

 

민족의 계몽발전에 기여한 애국녀인 백선행

(1848-1933)

 

위대한수령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사람들이 백선행을 존경한것은 그가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많이 하였기때문이다.》

19세기말~20세기초 우리 나라 근대말엽의 력사기록에는 자선사업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한 백선행이라는 녀인이 있다.

그는 평양의 어려운 집안에서 태여나 어린시절을 빈궁속에서 흘러보내였다.

백씨는 얼굴은 박색이고 아는것은 적었으나 일단 결심한것은 반드시 해내고야마는 완강성과 함께 남의 불행한 처지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의협심이 강했다.

그는 다른 뭇녀인들과 마찬가지로 끌끌한 장부에게 시집가서 아들딸 많이 낳고 초가삼간일망정 재미있게 살아보려는 소박한 꿈을 안고 살았다.

그러나 가혹한 생활은 녀인의 이 조그마한 꿈마저 무참히 짓밟았다.

그가 시집간 안재황이라는 사람은 불쌍한 처지의 사나이로서 녀인의 사랑을 지켜줄 아무러한 능력도 없는 빈주먹뿐인 사람이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락망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생활을 굳세게 개척해나갔다.

생활은 행복을 목마르게 갈망하는 녀인에게 불행의 찬서리만을 연신 들씌웠다.

하루아침에 기둥같은 남편을 잃고 16살의 꽃나이에 과부가 되여버린 녀인의 얼굴에는 때이르게 주름이 잡혀지기 시작했다.

이웃사람들은 그러한 녀인이 측은하여 의기를 잃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군 하였다. 여기에서 힘을 얻은 그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하나 살길을 개척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였다.

그는 처음으로 꽃장사도 해보고 콩나물과 두부장사도 하면서 간신히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갔다. 녀인은 하루도 번지지 않고 꾸준히 일했다. 그 과정에 점차 그에게는 저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백선행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돼지도 사다기르고 남다 자는 깊은 밤에는 베를 짜고 무명낳이도 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생활이 풍족해지면 어렵게 살던 지난날을 다 잊고 사치와 타락에 물젖기가 일쑤였지만 백과부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는 수십년간 죽으로 하루 끼니를 이을망정 축적된 돈을 절대로 마구 탕진하지 않았다.

백선행은 자기의 피와 땀으로 마련한 수만원의 자금을 자기 일신의 부귀나 영달에 쓴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불쌍한 우리 민족, 일제에게 짓밟힌 우리 인민을 위한 정의로운 일에 고스란히 바치였다.

그의 아름다운 소행과 관련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백과부는 해마다 남편의 묘를 찾아갈 때면 《솔뫼다리》를 건느군 했다.

그런데 그 다리는 장마때마다 물에 잠겨 주변사람들에게 늘 불편을 주군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녀인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에 많은 돈을 희사하여 1908년에 든든한 석조다리를 만들어세우게 하였다.

그때부터 그 다리의 덕을 보는 사람마다 그 다리를 《백선교》라고 즐겨부르기 시작한것이 그만에야 다리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였다.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밑에서 제 식솔의 입에 풀칠하기조차 조련치 않고 부자들은 저마다 자기의 리속과 영달을 위하여 세월을 보내던 그때 백과부가 사람들에게 바친 지성은 참으로 고결한것이였다.

사람들은 녀인의 비단결같은 마음을 찬양하여 그를 백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백선행은 이웃끼리는 화목하고 순박한 녀인이였으나 배일정신이 매우 강한 녀인이였다.

그가 일본인자본가에게 골탕을 먹여 사람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한 다음의 이야기도 있다.

백선행은 모은 돈으로 땅을 사서 경작하거나 산을 사서 채벌하였는데 이때 누구도 돌보지 않는 황무지 돌박산(당시 평남도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도 후일 필요가 있을듯 하여 평당 30전의 헐값으로 사두었다.

그곳이 오늘의 승호리세멘트공장에 속해있던 석회석광산부지였다.

당시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본국에서 건너온 오노다라는 대재벌이 있었다. 오노다는 공장을 경영하자면 석회석부지를 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두루 탐문하던중 석회석부지의 땅을 백과부가 깔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오노다는 어리숙한 조선녀성을 구슬려 땅을 눅거리로 사려고 흥정판에 나섰다.

조선땅에서 주인행세를 하며 돌아치는 쪽발이놈들을 몹시 증오해오던 백과부는 오노다와의 흥정을 계기로 놈들의 면상을 후려치리라 결심하였다.

《부인, 그 땅을 나에게 팔아준다면 내 그 값을 록록치 않게 드리리다.》

오노다는 쥐상판에 게면쩍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붙었다.

《글쎄 그 땅으로 말하면 우리 조부때부터 내려오는 땅인지라 그렇게 홀가분하게 팔아버릴수가 없어요. 정 그쪽에서 꼭 사야겠다면 자그만치 평당 30원씩으로 계약을 맺어주지요.》

백과부의 말에 오노다는 놀랐다. 조상때부터 물려받은 땅이라는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것이 명백했다. 그리고 거기에 턱을 걸고 평당 30원씩이나 내라고 으르는 이 녀자의 요구는 기가 막히는것이였다.

오노다는 제편에서 팔을 걷어붙이며 독을 썼다.

하지만 백과부 역시 록록치 않았다.

《그래 남의 나라 땅에 쳐들어오면서 당신들은 그래 동전 한잎 내기라도 했소? 누구더러 도적이라는거요? 그야말로 도적이 도적이야 하는 격이군. 난 당신에게 내 땅을 억지로 사달라고 빌지 않았소. 그러니 정 싫으면 딴데나 가보시구려.》

백과부는 이렇게 내뱉고는 자리에서 힝 일어났다.

오노다는 바빠났다. 공연히 잠자는 범의 수염을 다쳐놓았구나 하고 후회도 들었다. 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평당 30원씩 매매하기로 약조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말았다.

결국 백과부는 왜놈에게서 황무지값을 본래의 100배로 불구어 받아냈던것이다.

백선행으로 말하면 주산 튀길줄도 몰라 수수대껍질을 벗겨 손톱자국을 내면서 계산해가는 평범한 조선아낙네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사기와 협잡에 이골이 난 일본재벌과의 거래에서 이겼던것이다.

백과부의 행동은 참으로 애국적인 미거라고 해야 할것이다.

백선행은 그후에도 거액의 돈을 투자하여 학교와 공회당건물도 지었고 평양의 광성소학교와 창덕학교 그리고 숭의녀학교와 같은 학교들에 많은 토지들을 기증하여 민족계몽사업과 후대교육사업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늘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조선의 장래를 책임지게 될 아들딸들이다. 졸린다고 자지 말고 놀고싶다고 놀지 말고 공부하기 싫다고 책을 밀어두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너희들이 공부를 잘해야 우리 나라가 독립된단다.》라고 부탁하군 하였다.

백선행은 80고령까지 홀로 살면서 여생을 보내였다.

백선행이 세상을 떠난지도 어느덧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절세의 위인들의 각별한 관심속에 오늘도 빛을 뿌리며 사람들속에 전해지고있다.

위대한수령김일성동지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백선행이 민족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막대한 투자를 한데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자신께서도 결국 백과부의 덕이 미친 창덕학교에서 그 덕행의 일부를 받아안은셈이라고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정일장군님께서는 백선행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친 생을 소중히 여기시여 대동강기슭의 련광정가까이에 있는 백선행기념관을 개건보수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이런 사랑속에 백선행의 생은 민족사와 더불어 길이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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