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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왜)를 식민지로 삼은 광개토태왕 (7/8부)

죽은 자가 십중팔구, 거국적으로 고구리에 항복한 왜

성훈 컬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09/04 [14:13]

고대 일본(왜)를 식민지로 삼은 광개토태왕 (7/8부)

죽은 자가 십중팔구, 거국적으로 고구리에 항복한 왜

성훈 컬럼니스트 | 입력 : 2012/09/04 [14:13]

신라의 복속과 비문징실로 본 왜의 항복  

(광개토태왕 비문)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特遣使還, 告以密計.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住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번역) 9년 기해에 백잔은 자기의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더불어 화통했다. 왕은 하평양을 순유했다. 그리고 신라가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아뢰었다. 왜인이 국경에 가득 차 성과 못이 파괴되니 노객(신라왕)은 백성으로써 왕의 명을 듣기를 원한다고 했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들의 충성을 칭찬했다. 신라 사신을 특별히 돌려보내며 비밀계획을 말했다.
1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걸쳐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은 퇴각했다.  

(해설) 위 내용에 신라왕은 백제 아신왕과 마찬가지로 노객(奴客)이라는 표현을 썼다. 따라서 비문의 신묘년 기사의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왜가 아니라 고구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가 신민(臣民)이 아니라면 이렇게 군사를 보내 신라를 구원할 리가 있었겠는가!

▲ 광개토태왕 비문에서 석회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글자를 변조 조작했기 때문이다.     ©편집부

이후 문구는 왜와 관련이 아주 많은 내용이라 그런지 일제가 조작하여 깨어진 글자와 결자가 많고 문구가 많이 조작되었다. 아래는 민족의 성서인 <환단고기>를 엮은 운초 계연수선생이 광개토태왕 비를 직접 보고 글로 적어 전한 내용으로 이름 하여 <비문징실(碑文徵實)>이라한다. 아래의 굵은 글자가 일제가 조작하거나 없애버린 글자로 추정된다. 중요한 내용은 왜가 거국적으로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환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第2面9行)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 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六
(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第2面10行)被我攻口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 取卓淳而佐 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

(第3面2行)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위 비문의 내용은 <삼국사기>에는 삭제되었으나, 남당 박창화선생이 필사한 <고구리사초.략>에는 “10년(400년) 2월 왜가 신라를 침입했다는 소식에 서구와 해성 등을 보내 5만 명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왜를 물러나게 하였다. 임라, 안라, 가락 등 모두가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였다. 남방이 모두 평정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비문징실>의 내용이 허구가 아님을 입증해주고 있다. 

위 <비문징실>의 내용을 보면 왜 일제가 광개토태왕 비문을 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정복자 일제의 조상인 왜가 식민지 조선의 조상인 광개토태왕에게 결국 항복하고 십중팔구는 죽었다는 기록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한 광개토태왕의 비문 조작은 이러한 이유로 행하여졌던 것이다.  

▲ 대청광여도로 본 황하 북부 하남성 지역의 지명들이 모두 <금사지리지>에 들어 있다. 패수(浿水)는 황하와 심수와 같이 있다 했으니 제원시를 흐르는 강이다.                                                                  ©편집부

 
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靷率□□□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 斬殺無數
[번역] 영락 14년 갑진(404년))에 왜가 불궤하게도 대방(帶方)의 경계에 침입하였다. 왜는 XXXXX 석성에 배를 연결하여 XXX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XXX 평양에서 봉(鋒)이 서로 마주쳤다. 왕의 군사가 들이쳐서 무찌르니 왜구가 무너져 패하였는데, 목 베고 죽인 적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14년 기록은 왜가 고구려를 대방의 경계에까지 침입해 이를 무참하게 격퇴시켰다는 말인데, 여기서의 대방은 과연 어디일까? 아래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대방은 유주에 속한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낙랑군에는 패수현도 속해 있어서 그 위치는 북부 하남성 일대로 볼 수 있다. 아래는 낙랑군 속한 패수의 위치를 찾는 기록들이다.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수성),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둔유),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또 패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서로는 <금사(金史)지리지 권5>을 들 수 있다.
“縣四、鎮六: 河內倚。有太行陘、太行山、黃河、沁水、浿水(패수)。鎮四武德、柏鄉、萬善、清化。修武有濁鹿城。鎮一承恩。山陽興定四年以修武縣重泉村為山陽縣,隸輝州。武陟有太行山、天門山、黃河、沁水。鎮一宋郭。” 
(번역) “하내기(행정단위). 태행단층이 있고, 태행산, 황하, 심수, 패수가 있다. 무덕, 백향, 만선, 청화 등 4진을 두다. 수무현(황화북 하남)에 탁록성이 있다. 승은진이 있다. 흥정 4년 수무현 중천촌을 산양현으로 하여 휘주에 예속시키다. 무척현에 태행산이 있고 천문산, 황하, 심수, 송곽진이 있다.”

위 <금사지리지>에서 말하는 지역은 바로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지역들이다. 태행산, 심수, 수무, 무척, 천문산 등은 모두 황하 북쪽 하남성에 있는 지명들이다. 따라서 패수(浿水)도 대방도 당연히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수경주>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패수는 제원시를 지나는 강이다.                               © 편집부

한서군전쟁의 주무대인 패수는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할 때 건넌 강으로 고구리의 남쪽 경계로 알려져 있다. 수경(水經)에서 패수(浿水)에 대한 설명으로는 패수는 동류하는 강이다.
“(수경)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난다. (중략) <13주지>에서 말하길,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 대개 그 현에서 나와 남쪽 루방을 지난다. 위수도 패수에서 나와 루방을 지난다. 옛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로부터 조선까지 갔다.
(水經: 浿水出乐浪镂方县,东南过临浿县,(중략) 《十三州志》曰:浿水县在乐浪东北,镂方县在郡东盖出其县南迳镂方也。谓出浿水迳镂方也。昔燕人卫满,自浿水西至朝鲜)”。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아래 <위략>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삼국지 위지-위략>의 기록에 따르면, 패수는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할 때 건넌 강이다.
漢以盧燕王 朝鮮與燕界於溴水 及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胡服東渡水
(번역) 한(漢)에서 노관을 연왕으로 삼았다. 조선과 연(燕)은 추수(溴水)를 경계로 삼았다.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갔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호복(胡服)을 입고 동쪽으로 추수(溴水)를 건너 망명을 했다. 

이 <삼국지 위략>의 내용은 <북부여기>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위략>에 언급된 추수(溴水)는 <북부여기>와 <수경주>에 언급된 패수(浿水)와 같은 강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같은 강을 놓고 연나라에서는 추수(溴水)라 불렀고, 조선에서는 패수(浿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추수=패수의 위치는 어디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명일통지(明一統志)>의 기록에 따르면,
溴水在濟源縣 其源有三 一出琮山俗呼白澗水春秋公諸侯于梁此 一出縣西二十里曲陽城西南山 一出陽城南溪俱東南流與瀧水合又東南至溫縣入于黃河
(추수(溴水)는 제원현(하남)에 있다. 물의 근원이 세군데 있는데, 동남류해 롱수(瀧水)와 합해져 동남으로 흘러 온현에서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기록에 의하면,
原山:在河南济源县西北三十里,今名琮山,溴水所出,相连者为莽山,泷水出焉。
(원산은 하남 제원현 서북 삼십리에 있다. 지금은 종산이라 부르는데 추수(溴水)가 나오는 곳이다. 상련자가 망산이라 한다. 롱수가 여기서 나온다) 

▲ 패수는 한사군전쟁의 주무대, 위만이 건넌 강, 고구리의 남쪽 경계이다.     © 편집부

즉 패수 = 추수는 현재 망하(蟒河)로 불리우는 강이며, 추수란 이름도 아직 남아있다.
즉 위만이 건넌 추수(溴水)는 바로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는 제원현을 지나 온현에서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 단군조선에서는 이 강을 패수(浿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강은 연나라와 단군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것이다. 제수(濟水)라고도 불려 백제와도 관련이 있다. 대방고지(帶方故地)를 백제의 시국처라 하지 않는가! 

또한 왜가 대방의 땅까지 침입한 것으로 보아 왜의 위치도 현 일본열도로 볼 수 없으며, 중국대륙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전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일본서기> 일식기록 분석이 과학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식기록의 최적관측지는 남지나해상이다.     ©편집부


원본 기사 보기: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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