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로동신문, 北 국화(國花) '목란꽃과 더불어 48년' 소개

김일미 기자 | 기사입력 2019/08/05 [11:07]

로동신문, 北 국화(國花) '목란꽃과 더불어 48년' 소개

김일미 기자 | 입력 : 2019/08/05 [11:07]

 [플러스코리아타임즈=김일미 기자] 로동신문은 5일 북한의 국화인 목란꽃을 소개하며 '목란꽃과 더불어 48년' 제하에 중앙식물원 식물관리직장 수목원관리작업반장 김순희씨의 일생을 조명했다.

 

▲ 중앙식물원 식물관리직장 수목원관리작업반장 김순희씨(오른쪽). 사진=로동신문     © 김일미 기자

 

신문은 "보답에 앞서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그 사랑, 그 은정을 심장에 새기고 오늘도 그는 목란꽃나무와 더불어 애국충정의 한길을 변함없이 걷고 있다"고 소개했다.

 

 

목란꽃과 더불어 48년

 

중앙식물원 식물관리직장 수목원관리작업반장 김순희녀성에 대한 이야기

 

 

 

경애하는최고령도자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오늘 우리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초소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48년, 반세기에 가까운 그 기나긴 나날 내 조국의 국화인 목란꽃과 더불어 값높은 자욱을 새겨온 한 녀성이 있다.

 

그가 바로 중앙식물원 식물관리직장 수목원관리작업반장인 공훈도시관리공 김순희녀성이다.

 

지금으로부터 근 50년전 중학교를 갓 졸업한 애젊은 처녀가 단발머리를 흩날리며 평양식물원(당시)구내에 들어섰다.

 

무성한 수림이며 갖가지 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여나는 아름다운 화원…

 

《순희의 기본임무는 나무와 꽃을 잘 가꾸는것이란다.》

 

함께 일하게 될 작업반아주머니들의 말에 처녀는 손벽까지 치며 기뻐했다.

 

《나무를 가꾸는 일은 자신있습니다. 제 고향은 앞에도 산, 뒤에도 산이고 눈에 보이는건 맨 나무들뿐이였어요.》

 

김순희녀성은 이렇게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짚었다.

 

그는 처음부터 잡도리를 단단히 하고 달라붙었다. 모를것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오랜 관리공들의 뒤를 쉴새없이 따라다녔고 련못가시기나 나무가지자르기를 할 때면 남먼저 못가에 뛰여들고 높은 나무에도 주저없이 오르군 했다.

 

어느날 풀베기를 앞두고 김순희녀성의 낫을 갈아주던 작업반장이 그에게 물었다.

 

《순희야, 일이 힘들지?》

 

처녀는 작업반장의 두손을 꼭 그러쥐였다.

 

《반장어머니,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난 힘들 때마다 내 어린시절과 우리 아버지가 늘 해주군 하던 말을 되새겨보군 합니다.》

 

김순희녀성의 고향은 량강도 풍서군 속신리이다. 전쟁이 끝난 해에 집안의 셋째로 태여난 그의 유년시절은 모든것이 어렵고 부족한 속에서 흘러갔다. 막내가 네살 잡히던 해 해방전에 입은 어혈의 후과로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김순희녀성의 가정에는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불행과 아픔이란 없었다.

 

그들을 위해 이웃들은 물론 온 마을이 마음을 쓰고 진정을 다했다.

 

그후 김순희녀성과 온 가족은 맏오빠를 따라 평양으로 이사하게 되였다. 꿈결에도 그려보던 평양에 보금자리를 편 날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고마운 조국의 품, 우리 수령님의 은덕을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순희야, 너에게 그런 남다른 사연이 있었구나.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맡은 일을 더 잘해나가자.》

 

김순희녀성은 작업반장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무렵 중앙식물원에서 200그루의 목란꽃나무재배구역을 꾸리기 위한 사업이 시작되였다. 어느날 포전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목란꽃이 폈어요. 저쪽 떨기나무숲속에 있는 목란꽃나무에서 꽃봉오리가 피여났어요!》

 

모두가 그쪽으로 달려갔다. 김순희녀성도 작업반원들을 따라 힘껏 내달렸다. 잠시후 떨기나무숲에 이른 그의 눈앞에서 흰눈처럼 깨끗하고 소담한 꽃송이가 활짝 피여 웃고있었다.

 

아름답고 정갈한 조선의 꽃!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 작업반장은 김순희녀성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목란꽃에 깃든 어버이수령님의 애국의 깊은 뜻에 대하여, 여러해전 평양식물원에 몸소 찾아오시여 이곳에 200그루의 목란꽃나무재배구역을 꾸리고 잘 관리하도록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데 대하여…

 

김순희동무는 그날 목란꽃향기를 한껏 들이키며 마음속맹세를 굳게 다졌다.

 

(우리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고 목란꽃을 더 활짝 피우기 위한 사업에 한생을 다 바치리라!)

 

목란꽃재배구역이 완성된 후 직장의 종업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목란꽃나무모를 떠오기 위한 수집대를 조직할 때였다. 별안간 여무진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수집대명단에 제 이름도 넣어주십시오!》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직장장아바이가 짐짓 엄한 빛을 띠우며 목소리의 임자에게 말했다.

 

《양덕, 맹산이 뭐 작업반마당인줄 아느냐. 순희는 나이가 어리기때문에 안된다.》

 

하지만 그쯤한 일에 물러설 그가 아니였다.

 

《전 산도 잘 타고 나무오르기도 자신있습니다.》

 

직장장이 이번에는 아예 그루를 박듯 잘라말했다.

 

《순희만은 절대 안돼.》

 

직장의 막내를 아끼고 위해주는 마음을 그라고 어찌 모르랴.

 

하지만 그의 결심을 누구도 꺾지 못하였다.

 

그는 수집대의 한성원이 되였다. 양덕과 맹산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목란꽃나무모를 떠옮기는 나날 김순희녀성은 늘 대오의 앞장에 서서 산길을 톺았고 노래와 웃음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군 했다.

 

20여일간의 간난신고끝에 목란꽃나무모전량을 마련했을 때 그의 가슴은 얼마나 크나큰 환희와 보람으로 높뛰였던가.

 

그후 김순희녀성은 목란꽃나무포전에서 아예 살다싶이 했다. 하루일을 시작하기 전 이른아침이면 남먼저 포전으로 달려가 나무모상태를 살펴보았고 비료주기가 진행될 때면 남보다 두배, 세배의 작업과제를 수행하고야 마음을 놓군 했다. 작업반원들이 다 퇴근한 뒤에도 그는 밤깊도록 포전에 남아 물을 주고 나무모를 가꾸었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였다. 세월은 살같이 흘렀다. 그는 그처럼 소원하던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원이 되였고 작업반장으로 성장했다. 그 나날 김순희녀성은 어린애의 키만 하던 목란꽃나무 200여그루를 하나와 같이 튼튼하게 자래워 첫 종자를 수확했고 연구사들과의 긴밀한 련계밑에 사색과 탐구를 거듭하여 가장 합리적인 목란꽃번식과 재배방법을 찾아냈다.

 

온 나라에 퍼져가는 목란꽃향기, 김순희녀성에게는 그것이 곧 한생의 기쁨이고 긍지였다.

 

이 나날 김순희녀성은 위대한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표창을 수여받았고 제4차 전국어머니대회와 조선로동당창건 70돐 경축행사에 참가하는 영광을 지니였다.

 

보답에 앞서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그 사랑, 그 은정을 심장에 새기고 오늘도 그는 목란꽃나무와 더불어 애국충정의 한길을 변함없이 걷고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완도 약산 해안 치유의 숲, 지난해 대비 방문객 3배 늘어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