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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국 배제시킨 '통일신라론', 중공의 '동북공정' 용인하는 행위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08/06 [15:16]

대진국 배제시킨 '통일신라론', 중공의 '동북공정' 용인하는 행위

윤복현 저널리스트 | 입력 : 2009/08/06 [15:16]

대진국을 배제시킨 '통일신라론'은 역사를 왜곡하는 반민족적인 용어
신라 김춘추의 사대조공외교노선과 고구려.백제의 멸망
역사를 왜곡하는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이제 사용하지 말아야
 
2006년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자기내 역사라고 괴변을 늘어 놓더니, 이제는 동해를 일본해라고 오기하고 나선 것은 동북공정의 완성을 의미하고, 나아가 전형적인 중국측의 외교술이다. 또한 중국동포인 '조선족'가정을 방문해 '중국족'으로 만들고 있으며 백두산에 공항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공영방송들의 대응은 참으로 가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깊은 우려를 표한다. 정부는 강경하면서도 적극적인 자세와 강력한 응징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요즘 방송국 사극중에서 MBC의 <선덕여왕>이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시청자들의 호응이 많아지자, 연말까지 연장방송을 한다고 한다. MBC는 일찌기 '주몽'을 통하여 고고리(고구려) 시조가 되는 고추모를 한참 할아버지뻘 되는 해모수 아들로 둔갑시키고 번조선 영역에 속하는 요서지역에 존재해야 할 소위'한4군'을 요동지역으로 설정하는 등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것이 마치 역사의 진실인양 세뇌시키는 역사를 왜곡시켰다. 고추모의 아버지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의 손자로서 옥저제후였던 불리지라고 [한단고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번 MBC[선덕여왕]을 통하여 우려되는 점 또한 시청자들로 하여금 신라.김춘추.김유신에 대한 호감도를 높임으로써 김춘추.김유신의 숭당사대조공외교노선이 민족사적으로 얼마나 비참한 역사를 만들고 말았는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 줄기세포사태 당시 방송과 관련한 MBC PD수첩 제작진의 사과문


세계 최초로 체세포 줄기세포 원천기술을 개발한 황우석박사에 대해 진실규명이 부재한 차원에서 타격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국익에 부합된 방송행위를 자행했으며, 고대사와 관련한 사극 또한 소설드라마처럼 제작방영하고 있는 꼴이니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 약자들을 대변하는 방송이라기보다는 상업주의에 찌든 방송사임을 자임하는 반증이라 본다.
 
이러한 MBC의 역사왜곡차원의 고대사 관련 사극 [선덕여왕]과 관련하여  신라가 주는 민족사적 교훈에 대한 고찰차원에서 사대조공외교노선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런 민족사를 만든지를 조명해 보기로 한다.
 

▲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영정

신라 김춘추의 사대조공외교노선과 고구려.백제의 멸망
 
신라는 654년 진덕여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귀족회의에서 추대된 상대등 알천(閼川)과 상의하여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신라 최고의 외교관으로 불리우는  태종 무열왕이다.

 

그러나 한반도와  중공일대 지역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갈구하던 신라는 드디어 죽어서 왕의 자리에 까지 추앙받은 김유신과 파트너가 된 김춘추 시대에 이르러 당나라에 대한 사대조공외교노선을 통하여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백제를 완전히 멸망시켜버림으로써 지구대륙에 이르는 광대한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를 당나라에게 빼앗기고 중공 서쪽지역에 만족하는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신라자신으로서는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이 비문에 자신들의 혈통이 흉노족 김일제 후손임을 당당하게 밝히며 김씨 최초의 신라왕 미추왕을 신라의 태조로 선언하면서 이제 숨쉬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기만족을 표명한 것이다.

 

그것이 소위, 신라사관이 자랑스러워하는 '통일신라'라는 역사왜곡의 용어인 것이다. 3국 통일이라고 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의 모든 영역을 통합했을 때를 의미한다. 신라가 선라를 제외한 전 대륙에 이르는 고구려.백제의 광활한 영역은 제외하고서라도 최소한 중공 시베리아지역이라도 회복했던가?
 

▲ 신라는 당나라에 넘겨줘 버린 고구려.백제의 광활한 영역을 통합하지 못하고 대동강 이남에 만족해야  했기에 신라의 '3국 통일'이란 용어는 역사를 왜곡하는 용어로써 이미 폐기된지 오래 되었다. 3국 통일이라는 용어보다는 '3국 공멸'이라는 용어가 적합하다.

신라는 고작 한반도 대동강 이남에 만족하는 영역를 확보했고, 만주지역은 고려성을 지키던 고구려 장군 대중상이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후고구려가 개국되고 아들 대조영에 이르러 대진국으로 국호가 바뀌게 됨으로써 결국 대진국과 신라가 전선을 대치하는 '남북조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를 멸망시켜버린 신라에 대해서 좋게 지낼리 없는 대진국은 적대관계를 유지했고, 백제멸망이후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일본'이란 국호로 다시 태어난 일본과는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 일본에 보낸 대진국의 외교문서에는 '고려'로 표기함으로써 대진국이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명확히 했다.
 
북한에서는 통일신라론을 배격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통일신라로 용인하면 신라   김춘추와 당나라 고종과의 상호 협약(한반도 대동강이남만 신라영토로 인정. 나머지는 당나라에 귀속) 북한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는 셈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는 이명박정부의 친일숭미사대조공외교노선을 비판하는 글에서 "법흥왕 이후 115년간 사용돼 오던 연호를 당의 것으로 바꾸고 옷도 당의 것을 착복하기 시작한다. 복종, 복속, 항복 등 모두가 옷에 관계 되는 말이고 보면 옷을 바꾼다는 것은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춘추는 당나라를 찬양하는 사대주의의 극치인 오행시 ‘태평송’을 지어 바친다. 태평송의 내용은 당나라 황제의 위업을 훼손하는 고구려를 ‘오랑캐’라 지칭하며 단 칼에 쳐 물리쳐 달라는 내용이다. 651년 김춘추는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지명도 순 우리말에서 한자로 바꾸는 동시에 유교를 적극 도입하여 국학이란 교육기관을 세운다. 성균관의 전신과 같은 것이다. 유생들이여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가?

드디어 당 고종은 소정방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660년 백제를 향한 대 공격을 단행한다. 김유신은 신바람 났으며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내가 지금 죽기를 서슴치 않고 험난한 판에 달려 온 것은 큰 나라(당)의 힘을 빌려 두 나라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삼국사기 42권 김유신열전)라고 의기를 토하고 있다.


625년 당태종이 즉위할 무렵 신라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모든 실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을 때이다.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으로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의하면 김춘추는 나이 60이 되었는데도 중국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백제와 고구려를 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모양이 측은하기 그지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임금을 당나라 황실 친척으로 바꾸라는 요구까지 수용하면서 당의 군대 파병을 간청한다.그러자 당은 두 가지 조건을 내 건다. 고구려를 칠 경우는 요동지방을 당에 내 주고 백제를 칠 경우에는 신라의 임금을 당나라 황제의 친척으로 바꾸고 동시에 당나라 군대의 신라 파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647년 김춘추는 직접 당태종을 찾아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까지 치도록 애걸한다. 이에 둘 사이에 비밀 협정이 이루어져 평양 이남 백제 땅은 신라가 그 나머지 모든 땅은 당이 차지한다는 밀약이 이루어졌다..이러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두고 현대 한국의 학자들은 천추에 남을 명 외교관 그리고 충신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에 찬양을 하고 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위 부여정림사지5층 석탑비문에는 4면 모두에 새겨져 있으며, 중국 낙주  하남의 권희소가 쓰고 당나라 헌종 5년8월15일에 완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내용은 백제31대 의자왕,왕자 융,효등은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이하 700여명을 중국이 압송하였고 당나라는 후에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고 당시에 백제 영토에는 24만호에 인구620만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당나라 총사령관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라고 기록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기록내용에 보면 백제 멸망 당시에 백제 영토에는 24만호에 인구620만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를 한반도로만 규정했다면 이 인구가 들어설 수 없다.백제는 본국 한반도 서남해 지역를 중심으로 아시아 바다와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중국.일본.동남아까지 백제통치기구 담로를 설치하여 황제의 친인척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파견했던 대 제국이였던 것이다. 백제의 지배영역에 속했던 중국 절강성지역에는 아직도 백제허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백제라고 부르고 있다.


660년 소정방의 10만 대군은 백마강을 타고 올라와 무방비 상태에 있던 백제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고구려도 668년 9월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당은 백제에 웅진 도독부, 고구려에 안동 도독부 그리고 심지어는 신라에까지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려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사대주의의 결과가 빚어낸 뼈저린 교훈을 그제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막상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선봉장이 된 사람들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었다. 대당 10년 항전 끝에 고작 찾은 땅이란 대동강 이남의 것이었다. 그조차도 신라의 영토 영유권이 인정된 것은 60년 후인 736년이었다. 이제 이 한 조각 남은 한반도 한 부분이나마 중국이나 소련이 차지하면 우리 후손들은 다시 1,000년이 지나도 차지하지 못한다."라고 신라의 숭당사대조공외교노선이 이명박정부에 의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다.

중국문헌[통전]은 중국지역의 백제세력에 대해 "본국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세력은 돌궐이나 말갈(=고려)로 흩어졌다. 부여씨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소멸했다"고 기록함으로써 백제 중심지 본국은 명확히 중공대륙이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구당서-백제전]에 기록하기를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월주(양자강 일대)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지중해)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고려사기에도 고려에 백제를 가려는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야한다고 적혀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신라까지 삼키기 위해 서해를 건너 임진강을 통하여 신라 수도 경주까지 쳐 내려 가려고 했으나, 당시 토번(티벳)이 장안를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결국 한반도에서 불가피하게 철수하여 당나라에게 먹히게 될  신라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게 되고, 만주와 북한지역 또한 고구려 부흥운동을 통하여 대진국으로 고구려가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배달민족의 후예로써 티벳(토번) 등 유목민족이 당시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를 '흉노의 선우'로 인정했을 만큼, 당시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있어  단군의 후예들인 북방 유목민들과 친선교류 및 연합관계를 통하여 본래 단군조선를 지칭했던 '천자'를 도적질하여 스스로가 '천자국'을 사용했던 중국을 괴롭히게 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공격전선을 무력화시킨 전략전술을 사용했던 것이다.
 
엄청난 댓가(막대한 국익적 피해)를 배상해 줘야 하는 차원에서 외세에 손을 빌려서 통합전쟁을 벌이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후세에 부끄러운 역사의 기록인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아직도 신라우월주의적인 신라사관론자들 부끄러운 김춘추.김유신의 사대조공외교노선을 통한 비굴한 통합전쟁행위를 높이 평가하며 영웅시하는데, 정말 한심한 사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자들은 스스로 사대노예근성에서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자들이 되고 만다.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탁본. 조선시대 김정희가 북한산에서 발견한 석비로 신라 진흥왕이 백제영역이였던 한강을 차지했다는 비문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 김춘추의 경우는 고구려의 한반도 남하를 막기 위해 맺었던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고구려와 손 잡고 한강을 차지한 신라 진흥왕 시대를 분기점으로, 고구려로부터 한강을 차지했다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에게 다시 빼앗겨 신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신라군에게 참수당하여 신라궁궐에 목이 묻힌 백제 성왕 때부터 의자왕때까지 지속적으로 백제의 공격을 당하여 국가운명이 위기에 몰린 신라가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가서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때 연개소문은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 영토를 토해 낼 것을 요구하면서 고구려.백제.신라 3국이 연합하여 당나라를 정벌하여 차지한 중국 땅을 공평하게 배분하여 3국 연합으로 통치하자고 제안하는데(한단고기), 결국 김춘추는 거부하고 당나라 고종을 찾아가서 신라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그런데, 황당한 건 고구려 연개소문이 3국 연합군대로 당나라를 정벌하자는 제안을 거부한 김춘추가 오히려 당나라 고종에게 고구려.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전략전술(당나라가 고구려 국경지역에서 시위를 하여 고구려가 백제지원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고구려는 백제멸망 후에 공격한다)를 알려 주면서 스스로 고구려.백제 공격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당나라 고종은 조서를 내려 좌위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산동에서 당나라 수군을 출동시켜 서해바다를 건너 전술상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 처럼 자세를 취하여 백제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로 놓아 두는 차원에서 덕적도에서 머문 후에 신라 김유신 군대와 협공날짜를 맞추어 서해로 내려와 서해바다와 만나는 금강하구을 타고 대백제 수도 부여로 들어오게 되고 결국 신라와 내통한 백제 장군들의 배신과 함께 계백의 5천 결사대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멸망하게 되고, 고구려 또한 연개소문 사후 남생.남건 등 아들들의 권력 헤게모니쟁탈전으로 인한 내분과 함께 고구려.신라 공격으로 멸망당하게 되었다.
 
당시 전쟁상황을 신라중심의 사료들로 치장한 신라사관론자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3월 唐高宗(당고종)은 좌무위대장군 蘇定方(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管(신구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고 金仁問(김인문)을 副大摠管帥(부대총관수)에 左驍衛將軍(좌효위장군) 劉伯英(유백영)등은 水陸軍(수육군) 13만명으로 백제를 토벌하는 勅書(칙서)를 내리시니 王(무열왕)은 우夷道行軍摠管(우이도총관)이 되어 장병으로 하여금 聲援(성원)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은 金庾信(김유신), 眞珠(진주), 天存(천존)등을 서울에서 장병을 출동시켜 6월 18일 南川停(남천정;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였다. 蘇定方(소정방)은 萊州(래주:산동성 액현)에서 출발하여 船舶(선박:배)을 띄워 1000리의 물길을 따라 동쪽(한반도 서해)으로 내려왔다."
 
한민족 국통맥에서 보면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였던 흉노족(신라 김씨왕조)과 선비족(수.당나라)이 단군조선-부여을 계승한 900년 천자국 고구려(=백제)을 멸망시키는 폐륜을 자행한 것이다. 
 
신라 김춘추의 사대조공외교노선은 오늘날까지 신라우월주의 세력에 의해 숭배되며 외세와 짝해서라도 동족인 북한을 몰락시키겠다는 반민족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도 7.4공동성명을 통하여 북한과 합의한 정신이며, 노태우군사정부도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하여 약속한 정신이며, 김대중.노무현정부 때 실질적으로 합의하고 이행한 6.15/10.4남북공동선언정신인 <민족 대단결과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민족 자주주권 시대로 힘차게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남북국 시대. 대진국(발해)와 신라는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오래 전 역사교과서에도 폐기된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대진국을 우리 민족에서 배제하자는 반민족적 의미가 되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왜곡하는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이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조선후기 실학성향의 역사가들에게 비난받았고, 유득공은 [삼국사기]가 신라측 기록이라서  신라통일이라는 용어를  서술해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이 잊혀 졌다고 비난하여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제기하였다.
 
조선후기에 '통일신라설'은 쇠퇴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와서 다시 힘을 얻은 걸 보면 일본의 역사 열등감(일본이 백제에서 탄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중심으로 역사를 왜곡할 수 밖에 없다)에서 기인하는 일제 식민사관과 무관치 않을거라 생각된다. 8.15후 부터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인  1970년대까지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여과없이 인용하였지만, 현재 국사교과서에서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로 정식 채택한지가 오래인데, 학생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 '통일신라'를 사용한다는 주장은 궤변에 가깝다.
 

 
신라-대진국이라는 남.북국사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발해고 渤海考]서문이다. 

高麗 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昔者高氏居于北 曰高句麗。扶餘氏居于西南 왈백고려 부수발해사 지고려지불진야。석자고씨거우북 왈고구려。부여씨거우서남 왈백濟。朴昔金氏居于東南 曰新羅。是爲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是矣。及扶餘氏亡  제。박석금씨거우동남 왈신라。시위삼국 의기유삼국사 이고려수지시의。급부여씨망 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是謂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非 고씨망 금씨유기남 대씨유기북 왈발해。시위남북국 의기유남북국사 이고려부수지비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가 알고도 이를 쓰지 않은 것이다. 옛날 고씨가 북쪽에 머물면서 고구려를 세웠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머물면서 백제를 세웠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면서 신라를 세웠으니,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는 그를 편찬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삼국의)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는 그 북쪽을 차지하여 발해를 세웠다. 이 (두 나라를) 남북국이라 일컬어야 하고,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함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 당나라를 위협했던 토번(티벳). MBC에서는 [선덕여왕]에서 신라의 권력실세 미실(색공녀=왕이나 고위급에게 성을 바쳐서 신분상승을 한 여인)의 죽음을 피하여 도망자 신세가 된 어린 선덕여왕이 서역으로 들어가는 사막지대까지 도망간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아무리 도망자 신세라고 하지만  한반도에서 먼나 먼 사막지역까지 어떻게 도망치고 그리고 귀국을 했을까? 상업성을 위해서라면 불가능도 가능케 만드는 MBC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토번(티벳)에게 수도 장안까지 빼앗기자 다급해진 당나라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로 신라를 집어 삼키려는 야욕을 버리고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대를 철수해야만 했다. 토번과 당나라와의 전쟁기록은 다음과 같다.
 
670년 토번이 귀자, 우전, 언기, 소륵을 빼앗자 설인귀의 10만 대군이 진공하였으나 대비천에서 대패하였다.
 
698년 이경현이 18만 대군으로 토번과 청해에서 싸워 참패하고 아예 돌아오지도 못했다.
 
710년 문성공주를 토번에 진공으로 바쳤으며 711년 전략적 요충지인 하서 구곡을 토번에 할양하였다."토번은 구곡을 얻었고, 그 땅이 비옥하여  병사를 주둔시키고 목축을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국경과 가까워 이 때부터 병사를 이끌고 자주 침입하였다."
 
763년 토번이 장안을 점령하자 대종은 섬주로 피난갔으며 토번이 종실 이승굉을 황제로 앉혔다. 하서,농우등 50개군,6개진을 차지했고 100만명을 노예로 삼았다.
 
783년 당은 당번청수맹약을 체결하여 농남의 여러 군현이 토번 영토가 되었다.
 
787년 토번은 다시 침공하여 1만명을 노예로 삼는다. 토번군이 한 협곡을 통과할때 포로들에게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 부모의 고향에 이별을 고하도록 했다. 역사서에는 이때 수백 명이 통곡하다가 혼절했으며,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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