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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총리 주은래의 양심 고백

주은래, "만주족(동이족)은 우리 중국 땅을 크게 넓히는데 공헌했다"

신용하 교수 | 기사입력 2008/04/10 [12:14]

중국 공산당 총리 주은래의 양심 고백

주은래, "만주족(동이족)은 우리 중국 땅을 크게 넓히는데 공헌했다"

신용하 교수 | 입력 : 2008/04/10 [12:14]
중국의 ‘동북공정’에 참여한 중국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설정하려 할 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발해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설정하려 하고 있다. 역사 진실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황당한 역사왜곡이다.

▲ 1940년경 주은래
마침 고(故)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이런 유의 역사왜곡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자료가 있다. 1963년 6월 28일 북한 과학원 대표단이 그를 방문하자 저우 총리는 한중 관계를 세 시기로 구분하면서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 시기 중국 문헌 기록은 대국(大國) 쇼비니즘에 빠져 객관성이 결여된 불공정한 기록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역사 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가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 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의 일부 학자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이 아니었고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저우 총리는 고조선을 기자조선이라고 보고 조선민족을 기자의 후손이라고 보는 일부 봉건적 중국 학자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의 머리 위에 조선족은 ‘기자지후(箕子之後·기자의 후손)’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저우 총리는 발해에 대해서도 “징보(鏡泊) 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는 조선민족의 한 지파였다”고 밝혔다.

중국 측 자료인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는 설명과 ‘신당서’ 발해전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부속한 것으로서 성은 대(大)씨다(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라는 기록의 선택의 문제가 논쟁의 핵심이다. (구당서가 기록한 진실을 나중에 쓰여진 신당서가 조작한 것으로 봄.)

▲ 연해주, 베트남 등과 함께 한국이 되찾아야 할 고토(古土)로 표시한 1950년대 중국 교과서 지도. 사진 출처 ‘대쥬신을 찾아서’(해냄)    
한국 측은 ‘구당서’를 중시하여 대조영을 고려의 별종(지파)이라고 해석했다. 반면에 동북공정 논자들은 ‘신당서’를 중시하여 대조영을 속말말갈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당시의 기록이 중요한데 다행히 신라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 말기 멸망 때 본래 (고구려의) 우취부락에서 나온 것이다(渤海之源流也 句麗末滅之時 本爲우贅部落)’라고 발해와 대조영이 고구려 우취부에서 기원한 것임을 명백히 밝혀 놓았으니 대조영은 고구려 계보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牧丹) 강 상류의 호수인 징보 호 부근에서 발굴된 발해국 유물이 고구려 계보라는 점에서 발해는 조선족의 지파라고 판단한 저우 총리의 견해가 진실과 합치하는 것이다.

○“만주는 오랫동안 조선족의 활동 무대였다”

중국 동북공정 논자들은 만주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임에 기초하여 거슬러 올라가서 만주를 중국의 전통 강역이라고 주장한다. 또 이 중국 전통 강역에서 형성돼 활동한 민족과 국가는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통일적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변경 소수민족이라고 강변한다.

이것은 현재 영토가 과거 역사 및 민족에 의해 결정된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소아병(小兒病)적 사고다. 저우 총리에 의하면 동북지방(만주)은 중국의 전통 강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조선민족과 만주족의 강역이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한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 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 왔다. 랴오허, 쑹화(松花) 강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이것은 랴오허 강과 쑹화 강 유역, 투먼(圖們) 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 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 있다.”

저우 총리는 동북(만주)이 중국에 속하게 된 것은 만주족이 (최후로 청나라) 조선민족을 압록강 두만강 동쪽(한반도)으로 밀어낸 후에 만주족이 중국의 일부가 된 이후(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부터라고 보았다.

그 이전에는 만주는 조선민족의 거주 강역과 활동 무대였다.

▲  주은래 동상
그의 설명을 길게 인용한다.

“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조선민족)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두만강 동쪽까지 밀리게 됐다. 만주족은 중국에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 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漢)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조선민족)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만들고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러한 대국 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朝貢)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 교류를 할 때도 그들은 알현(謁見)하러 왔다고 했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臣服)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들의 붓 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중국 동북공정 역사학자들은 중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헌신한 저우 총리의 가르침을 따라 배워서 깊이 반성하고 황당무계한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을 즉각 폐기 시정해야 할 것이다. (저우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는 현재 판매되는 ‘주은래 선집’에는 빠져 있고 이경일 편저 ‘다시 보는 저우언라이(2004년)에 수록돼 있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자료]저우언라이(주은래, 중국어 간체: 周恩来, 정체: 周恩來, 병음: Zhōu Ēnlái, 1898년 3월 5일 ~ 1976년 1월 8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지도자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지냈다.

자라난 배경

저우언라이는 1898년 3월 5일 중국 장쑤 성 화이안의 가난한 관료출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관리였으나, 봉급은 매우 적었고,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계속 낙방하여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서기같은 하찮은 직업에 종사하였다. 태어난지 한살정도 되었을때 후사가 없이 사망한 친할아버지의 동생의 양자로 입양되어 어릴적부터 양어머니로부터 전통적인 고전교육을 받았다.

10살 이전에 친어머니와 양어머니를 모두 읽고 고아가 된 그는 고향 화이안을 떠나 만주의 선양에 살고있던 삼촌에게 갔다. 12살부터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자유와 평등과 같은 서양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신해혁명이 터져 청조는 붕괴하고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1913년 15세 때 중국 톈진의 난카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1917년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의 칸다구 고등 예비학교(호세이 대학 부속학교)에서 공부하고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침략적 압력이 중국에 가해지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하고 1919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5·4 운동에 참가하다 1920년에 체포되었다.

학생운동

5.4운동을 주도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된 저우는 이후 텐진의 난카이 대학의 문학전공으로 적을 두었으나, 수업에 참가는 하지 않았다. 그는 군벌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텐진학생연합"의 조직자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저우는 이 조직의 기관지인 《텐진학생연합회보》의 편집인이 되어 활동했다. 1919년 9월, 12명의 남학생과 8명의 여학생으로 "각오사"(觉悟社)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서 후에 부인이 되는 덩잉차오를 만났다. 저우는 남학생으로만 조직된 "텐진학생연합"과 여학생으로만 조직된 "애국연합"을 통합하는 조직책이었다.

1920년 경찰이 인쇄소를 덮치고 "각오사"의 회원을 체포하였다. 저우는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이끌었고, 이후 다른 28명과 함께 그도 체포되었다. 이후 경범죄로서 풀려났다. 코민테른은 그를 공산당에 가입시켜 모스크바로 유학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당시에는 공산주의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대신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다. 그가 프랑스로 떠난 이후 덩잉차오가 "각오사"를 맡았다.

프랑스 유학시절

1920년 저우와 196명의 다른 중국인 학생들은 상하이를 떠나 마르세이유로 출발했다. 이것은 "근공검학"(勤工俭学) 이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에 의한것으로 "중불 교육위원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여 파리로 가서 프로그램에 의해 일하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주도한 위원회의 부패로 말미암아 그들은 급료를 받지 못했고, 저우는 중국신문에 교육위원회와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파리시절 덩샤오핑과 알게되어 교유하게 되었다.

저우는 그동안 영국을 여행하고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학기가 안맞아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중국공산당의 산하 학생조직에 가입했고, 1922년 중국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이후 프랑스, 독일, 벨기에등을 여행하면서 중국유학생들을 공산당 산하단체인 "사회주의청년단"에 모집하고 그들을 선발하여 모스크바에 유학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의 활동은 당에서 인정받아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자 국민당과 함께 통일전선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1924년 홍콩을 통해 광저우로 돌아왔다.

제1차 국공합작 시절

1924년 1월 쑨원은 공식적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연대를 선언했고, 중국각지에 할거하던 군벌에 대한 토벌작전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지휘하기 위한 장교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당시 열강에 의해 고립되었던 소련과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내어 고립을 탈피할 기회로 보고 무기와 자금, 군사고문단을 지원했다. 10월에 저우는 이 학교의 정치부 부주임으로 임명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교장은 후에 저우와 대결하는 장제스였다.

저우는 곧 국민당 우파가 국공합작을 극렬히 반대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특히 국민당 자체가 군벌의 연합체라는 것을 깨닫고 이들의 배신에서 공산당의 생존을 위해서는 자체 병력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 그는 황푸군관학교에서 부교장을 맡고 있던 다른 공산당원 네룽전과 함께 생도들을 포섭하여 중국공산당원에 가입시켰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직후, 천츙밍이라는 군벌이 광저우를 점령하였다. 저우는 생도들을 이끌고 천에 대한 토벌에 나서 승리했다. 그래서 황푸군관학교의 군법회의 위원장으로 승진하였다. 저우는 여세를 몰아 다시 승리하고 산토우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산토우와 인근지역에 대한 특별행정관에 임명되었다. 이 직위를 이용하여 그는 비밀리에 공산당의 세포조직을 심었다. 이해 8월 덩잉차오와 5년간의 원거리 연애를 청산하고 결혼하였다.

쑨원의 사후, 국민당은 장제스,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의 삼두정치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곧 좌파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었고, 장제스는 이를 기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당의 우파를 통합하여 자신의 지휘아래 두었다. 1926년 3월 18일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고문 미하일 보로딘이 상하이에 있는 동안 장은 당에 있던 좌익을 추방하고 당권을 장악할 음모를 꾸몄다. 장은 국민당군의 군함 중산함의 함장과 선원이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는 구실을 들어 이들을 모두 체포했고, 더 나아가 네룽전을 포함한 황포군관학교의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었다.

비상사태와 통행금지가 선포되었고, 산토우에서 돌아온 저우도 48시간동안 체포구금되었다. 저우는 풀려나면서 장을 대면하였고, 장에게 저우는 "국공합작의 단결을 방해하는 일이다"라고 비난했으나, 장은 일부 공산당 과격세력의 음모를 분쇄한 것일뿐이라고 강변하였다. 상해로부터 돌아온 보로딘은 장을 신뢰했고, 저우가 성급했다고 힐난했다. 장의 요구에 의해 보로딘은 국민당적을 가지고 있는 공산당원의 명부를 장에게 넘겼다. 이 명부에 빠졌던 당원은 저우가 비밀리에 모집한 당원들이었다. 장은 모든 공산당원 장교들을 해임하였고, 공산당에 동정적이었던 국민당 거두 왕징웨이도 유럽으로 보내버려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저우도 다른 공산당원 장교와 마찬가지로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상하이에서 옌안으로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자 그는 상하이로 와서 선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1926년 상하이에 대한 국민당의 공세가 시작되자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주도하여 국민당군이 상하이에 대한 공세를 시작할수 있도록 원조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시의 주도권이 공산당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시를 점령하자 범죄조직인 청방과 삼합회를 동원하여 백색테러를 주도, 자신을 원조했던 노동자들을 체포처형하였다. (4.12사건 참조) 이를 기화로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각지에서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일어났다. 

저우는 1927년 8월 1일 허룽과 함께 난창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홍군이 있던 장시 소비에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우는 교조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28인의 볼셰비키" 그룹대신 농촌혁명을 우선시하는 마오쩌둥을 지지하게 되었다. 당권을 잡고 국민당군에 정규전으로 맞서 큰 피해를 낸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이 몰락하고 대장정 기간중 마오가 당권을 장악하자 그는 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군벌 장쉐량이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연대를 주장하면서 자신을 방문한 장제스를 체포하는 시안사건이 벌어지자, 저우는 교섭자로 나서 장제스를 석방하는 대신 항일을 위한 국공합작을 다시 재건될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후 저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국민당 정부가 있던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물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저우는 총리겸 외교부장을 맡아 국제 외교무대에서 활약하였다. 1955년 제네바 회의와 반둥회의에 중국 대표로 활약하였다. 이때 국민당의 암살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무사히 벗어났다. 이후 인도, 인도네시아, 유고슬라비아등의 국가와 함께 비동맹회의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58년 천이에게 외교부장을 넘겨주지만, 총리는 그가 죽을때까지 계속 맡았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혼란의 와중에도 그는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은 처신으로 총리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미중 국교정상화를 주도하여 1972년의 미국 닉슨 대통령의 방중에서 마오를 대신하여 주된 상대로 나서 상하이 코뮤니케에 공동서명하였다.

그는 말년에 자신에 방광암이 발병한 것을 알고, 덩샤오핑에게 많은 직무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1974년 문화대혁명의 말기 기간에는 저우 자신이 마오와 사인방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1976년 1월 마오에 8개월 앞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으며, 그의 유해는 자신의 희망대로 화장되어 중국에 뿌려졌다. 마오가 저우가 자신보다 장수할 것을 우려해 병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 텐진에는 이후 저우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세워졌다.

텐안먼 사태

저우의 죽음은 마오 사후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던 사인방에게 희소식이었고, 그를 존경하던 많은 중국의 인민들에겐 슬픈소식이었다.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저우를 기리기 위해 텐안먼 광장에 모인 추모인파가 사인방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자, 4인방은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4인방은 이러한 사태의 책임을 덩샤오핑에게 돌렸고, 덩샤오핑은 자리를 물러나 마오 사후 4인방 체포때까지 권력에서 밀려나 있었다.

평가

노련한 외교관으로서, 유능한 행정가로서, 헌신적인 혁명가로서, 그리고 실용적 정치가로서 중국 현대사에 남긴 그의 족적은 매우 크다. 그의 삶은 현대적인 공산주의 혁명가의 삶과 관리집안 출신으로 "최후의 만다린(궁정관료)"이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삶이 교차하는 역설적인 것이었다. 그는 마오의 관념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을 자신의 권한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도록 노력했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홍위병들의 파괴으로부터 많은 문화유적지들을 보호하고, 숙청인사들을 보호하였고 한다.

마오를 비롯한 많은 중국 지도자들의 비행이나 추문에 대한 사후 폭로나 비화가 잇다르고 있지만, 저우언라이는 이들과는 달리 청빈하고 성실한 근무로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 

그러나 비밀로 분류된 중국공산당의 서류들을 접할수 있었던 전기작가 가오원천이 홍콩에서 펴낸 저서에 의하면, 저우는 문화대혁명 기간중 마오의 행보를 완화시켰다는 통설과는 달리,마오에 굴복하여 수수방관하는 자세로 일관, 자신이 구할수 있던 많은 사람들을 숙청당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그와 아내 덩잉차오는 자식이 없어서, 혁명기간중 부모를 잃은 동지의 자녀들을 양자로 삼아 키웠다. 그중 유명한 이는 후에 총리를 지낸 리펑이 있다.
성훈 08/04/10 [13:44] 수정 삭제  
  이 아사리판 같은 한국 정치판에는 주은래 같은 정치지도자가 나와야 합니다. 오늘의 중국이 있게한 일등공신이 주은래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모택동으로 알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주은래가 중국을 키운 것입니다. 모택동은 국민의 마음을 읽고 국민을 감동시키고 국민을 이끌어 가는 아버지의 역활을 했고, 실제적인 모든 지휘는 어머니 주은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주은래는 중국 정부의 역사왜곡을 못마땅하게 말했습니다. 역사왜곡을 하면 반드시 그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티베트가 먼저 일어 났습니다. 위그르도 일어났고, 가장 문제는 치우천자를 시조로 하고 있는 묘족과 청조의 주인인 만주족이 움직이느냐가 관건입니다. 만일 이 두 소수민족이 일어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풍지박살로 깨지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주은래는 중국 사학계의 심한 역사왜곡을 경계한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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