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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청해진은 대륙 (서)신라의 땅

해신 장보고를 통해 본 서신라의 존재. 신라는 동.서로 두 군데 있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4/09 [12:32]

장보고의 청해진은 대륙 (서)신라의 땅

해신 장보고를 통해 본 서신라의 존재. 신라는 동.서로 두 군데 있었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4/09 [12:32]
▲ 현 교과서에 나와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영토
장보고와 청해진의 이야기는 우리 역사의 실체를 조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장보고(?~846년)가 활동했던 시기는 고구려의 멸망 약 170년 후이고, 후삼국의 후백제 건국 약 50년 전이다. 즉 강단사학계에서 말하는 통일신라시대이고, 엄밀히 말해 대진국(발해)와 대치한 남북국시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신라가 박혁거세의 건국 이래 줄곧 한반도의 동남부(경상도)에 위치했고,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로 알고 있다. 또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에서 영토를 확정지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올바른 역사일까?

신라의 참 역사 소개

신라는 양자강 하류의 안휘성, 절강성, 강소성 일대에 있었다.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를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으로 부르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이 때부터 한반도신라와 대륙신라는 각각 고구려의 속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보이며 한반도신라는 나중에 만주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  동이 5국(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특히 신라는 동.서로 있었다.
 
23대 법흥왕 23년(536년)에 자체연호인 건원(建元)을 처음 사용하고, 24대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고 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鴻濟) 등 자체 연호를 사용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후 신라는 자체연호를 사용하다 28대 진덕여왕 4년(650년)부터 중국(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  절강성에 있는 신라 유적지. 특히 김교각 스님에 대한 유적지가 눈에 띈다. 우측 하단은 대만이다.
김춘추는 사위와 딸의 복수를 위해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산동성 일대에 있었던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망하게 하는데 일조를 한다. 그러나 당나라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을 알게 된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여 석문(石門: 하북성 석가장)에서 당나라를 물리치고 백제와 신라 땅에서 당나라를 몰아낸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별도로 기고하기로 한다.)

이 때의 신라 영역을 정확히 선으로 긋기는 힘들지만, 대륙의 동부연안과 한반도와 만주 일부를 아우르는 즉 황해를 가운데 내해(內海)로 두는 큰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고구려의 영토는 거의 대진국(발해)이 차지했으나, 백제 영토였던 산동성은 신라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영토란 자국이 강할 때는 넓었다가도, 상대방이 강할 때에는 쪼그라들어 원래 시대에 따라 들쭉날쭉한 법이다. 어떤 나라의 영토는 이랬다고 딱 꼬집어 말하기가 사실상 곤란하다.

여하튼 신라는 한반도의 동신라(東新羅)와 대륙 동부연안의 서신라(西新羅) 이렇게 두 군데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 증거가 바로 장보고와 청해진의 역사인 것이다. 또 장보고의 이야기는 불과 50~60년 후에 생기는 후삼국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참고 자료도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역사의 테마라 아니할 수 없다.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역사

장보고의 출생시기와 출생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학계는 삼국사기에 해도인(海島人)이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말기인 790년 경 전남 완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했으며, 신라가 당나라와 일본과의 무역을 한 청해진의 위치를 완도에서 40m 정도 떨어진  작은 부속 섬 장도(將島)로 비정했다. 그래서 현재 장도에 청해진 유적지가 만들어져 있다. 글쎄요, 과연 전남 완도의 장도가 장보고의 청해진일까? 

▲  전남 완도의 장도에 있는 청해진(?)유적지 좌측으로 갯벌이 보여 우측은 얕은 수심임을 알 수 있다.
 
2004년 8월 열린우리당 장영달(張永達)의원은 중국 산동성 영성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 중국 안내원이 장보고에 대해 설명하면서, “장보고의 부친은 중국인이고, 아버지가 신라에 건너가 장보고를 낳았으며, 이후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활동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며 중국이 장보고에 대한 역사왜곡을 하고 있어 역사적 규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런데 필자가 듣기에는 중국 안내원이 한 말은 역사왜곡이 아니라 7~80%는 맞는 말로 들렸다.

안내원의 말대로 중국인인 아버지가 한반도 신라의 완도로 와서 장보고를 낳고, 이후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활동했는지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 추적해 보기로 하자. 추적의 초점은 그 안내원이 말한 신라가 전남 완도가 있던 한반도 동신라인지. 아니면 대륙에 있었던 서신라(강회신라 江淮新羅)인지가 관건이다. 필자 귀에는 안내원이 말한 신라는 분명 서신라를 말한 것으로 들렸다.

아래는 정용석 선생의 “참과 거짓의 역사 2”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1) 인동장씨대동보(仁同張氏大同普)나 장씨연원보감(張氏淵源寶鑑)에 의하면 "장보고의 아버지는 장백익(張伯翼)이고, 절강성 소흥사람으로 신라에 귀화한 사람이다. 장보고의 고손(高孫)에 해당하는 장정필은 고려 초기에 안동의 호족이 된다."라고 되어있다.

소흥은 절강성 동쪽인 절동(浙東)지역에 있는 지명이다. 장보고의 아버지가 원래는 중국인인지 왜인인지 백제유민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여하튼 신라로 귀화했기 때문에 아버지 때부터 신라인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에서도 장보고는 자기네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왜가 절강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100% 틀린 주장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   장보고와 관련된 지명들. 옛부터 산동성은 청(靑) 강소성은 해(海)라 했기 때문에, 청해진은 정해라는 한 지역이라기 보다는 이 두곳을 합쳐 진영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2)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8년(816년) 기록에 (장보고가 당나라로 들어가기 4년 전),
“봄 정월 시중 헌창을 지방으로 내보내 청주(菁州)도독으로 삼고, 장여(璋如)를 시중으로 삼았다. 농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절동(浙東)에까지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 170명이나 되었다. (春正月 侍中憲昌 出爲菁州都督 璋如爲侍中 年荒民飢 抵浙東求食者一百七十人)”

여기서의 청주도독이란 중국의 산동반도의 '청주(菁州)'를 다스리는 도독을 의미하며, 절동지방이란 바로 중국 절강성의 동쪽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 산동성이나 강소성에서 양자강이남 절강성 동쪽지방으로 먹을 것을 찾아 남하한 기록으로 보인다. <수경주>에 이르기를 “절동(浙東)은 절강(浙江)의 동쪽을 말한다.”고 했으며, “절강는 절강성(浙江省)의 최대의 물줄기로 410Km를 흘러 항주(杭州)시를 거쳐 항주만으로 유입되는 강이다.”라고 했다. 한반도엔 역사적으로 절동이란 지명이 없으니 당연히 중국에 있던 지명으로 봐야 한다.  

중국 25사의 하나인 <당서> 당 헌종(憲宗) 11년의 기록에 보면, “두 번에 걸친 대홍수로 서울 및 여러 지역이 물에 잠기고 4,700호가 떠내려가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라고 되어있다. 당 헌종 11년은 A.D 816년으로 신라 헌덕왕 8년이다. 이는 서쪽의 당나라와 이웃한 동쪽의 신라가 똑같이 흉년이 들었단 이야기이다. 그래서 신라인 170명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서쪽(당나라)으로 가지 않고 절강성의 동편으로 간 것이다.

▲  완도와 절강 사이의 해류. 올라가는 주해류와 내려오는 연안해류가 뒤엉키는 곳이다. 이런 해류를 헤치고 돛단 고깃배가 그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으로 보는지?
사학계는 신라에 흉년이 들어 신라 사람들이 배를 타고 절강성 동쪽으로 간 것이고, 이 때 장보고와 정년이 당나라로 들어간 것으로 말하고 있다. 아주 그럴듯한 이론 같으나, 170명의 백성이 군선을 타고 가지는 않았을 테고, 고기잡이배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절강은 북위 30도이고 한반도는 북위 35도이다. 게다가 절강과 한반도 사이에 흐르는 해류는 남에서 북으로 흘러, 옛날 돛단배로는 한반도에서 절강으로 해류를 거슬러 내려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해류 지도에서 보다시피 완도와 절강 사이의 바다는 해류가 뒤엉키는 곳이라 아마 한반도에서 절강에 도착하기 전에 전원 물고기 밥이 되었거나, 선상에서 굶어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해류 사진 중 적색 해류가 주 해류이고, 청색이 연안해류임) 그리고 한반도에서 뭐 하러 그 멀고도 먼 절강까지 가는가? 같은 위도 상에 있는 가까운 산동반도로 가든가, 아니면 북쪽에 있는 대진국(발해)으로 가면 될 것을....

이 두 기록에서 장보고는 아버지의 고향인 절강이나 신라에서 태어났으며, 신라는 절강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산동성이 신라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년)의 기록을 보면,
“가을 7월에 당나라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헌종이 장차 이를 토벌하고자, 조칙으로 양주절도사(楊州節度使)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신라) 군사를 징발하였다. 왕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무장한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운주는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산동성 동평(東平; 제남 부근) 지역을 의미한다. 산동성에서 ‘제’나라를 세운 이씨 일가는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간 산동반도를 다스리며 당나라를 공략했었다. ‘제’나라는 고구려유민인 이정기(李正己)/이납(李納)/이사고(李師古)/이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이정기의 뒤를 이은 아들 이납은 782년 11월 운주지역에서 국호를 ‘제(齊)’로 정하고 황제위에 올랐다. 이납은 슬하에 사고(師古) 사도(師道) 사현(師賢) 사지(師智)라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 기사의 주인공은 이납의 아들 이사도를 말함이다.

비록 짧은 제국이었지만 ‘제(齊)’나라의 황제인 이사도가 당나라의 운주절도사란 <삼국사기>의 기록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고구려 황제를  “XX대장군 고구려왕”으로 봉했다는 기록들도 역시 잘못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하겠다. 다른 나라의 황제에게 당나라가 관직을 주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당나라가 자기네 관직에 봉해놓고 토벌을 했다는 기록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산동성 운주에 있는 ‘제’나라의 황제인 고구려 후예 이사도를 멸하러 동족(同族)인 신라장군 김웅원이 당나라의 요청에 의해 군사 3만을 이끌고 갔다는 서글픈 역사를 보면서, 역시 신라는 동족을 해치는 데는 선수권자(?)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같은 고구려의 후예 대진국(발해)은 ‘제’나라를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준다.
 
양주(사 지방)절도사가 한반도의 서라벌에 가서 신리왕에게 3만을 징발해 전라도 순천에서 배를 타고 운주로 갔을까? 당시 3만의 병력을 싣고 갈 배는 신라에 있었을까?
여기서 이 기록의 순천군의 위치가 대단히 중요하다. 당시 3군데의 순천이 있었다.
1) 순천(順天) : 전라남도 동남쪽에 있는 시. (송광사라는 사찰로 유명한 곳.)
2) 순천(順川) : 평안남도 중부 대동강 중류 연안에 있는 시. (한자가 다름)
3) 순천(順天) : 중국의 <독사방여기요>에서 순천부는 하북 북경(기주 또는 유주)이라 했다. 
 
만일 한반도의 전라도나 평안도 순천에서 3만 병력이 가려면, 육로는 대진국(발해)에 의해 막혀 있기 때문에 배로 갈 수 밖에 없다. 이럴 경우 병력을 실어 나르려면 많은 수(150~250척)의 군선이 필요하고, 그렇게 짧은 시일 내에 산동성에 갈 수가 없다. 그리고 해류 때문에 황해를 횡단하기도 어렵고, 대진국(발해) 앞바다의 연안해류를 거슬러 돌아가야 하는데 대진국이 이걸 보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리고 당나라는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멀고 먼 한반도에 있는 3만 군대를 징발할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까도 의문이다.

참고로 약 770년 후의 임진왜란 때 전쟁준비를 철저히 한 일본군도 한정된 수량의 선박 때문에 한번에 1.5~2만 명씩 6번에 나누어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산동성으로 3만의 병력을 태워 보낼 선박이 신라에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신라가 수군으로 해전을 크게 했다는 역사기록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그렇게 많은 군선이 미리 준비가 되어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장보고가 1만 명의 군사로 청해진을 세우기 전, 당나라 해적들에게 신라 백성이 서쪽으로 끌려갔다고 했다. 전라도 순천에서 3만 병력을 한번에 실어 나를 수 있을 군선이 항시 준비되어 있을  정도로 해군력이 강한 신라가 그까짓 해적을 못 막아 백성들이 서쪽으로 끌려갔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장보고 이전에는 신라의 수군이 해적도 못 막을 정도로 아주 미약했고 배도 별로 없었단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즉 순천은 북경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양주절도사를 보내 군사를 징발했다 하는데, 당나라의 양주는 산동성 운주 남쪽인 안휘성 부근이다. 안휘성 부근에 있던 양주절도사가 바다 건너 신라에 와서 군대를 징발해서, 3만 병력이 전라도 순천에서 배로 산동성에 가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양주절도사는 운주와 가까워 최전방을 지휘하는 지휘관인데, 급한 전선을 내팽개치고 한반도를 왔다 갔다 했다는 기록을 믿기는 어렵지 않은가!!!

분명 이 기록은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주(안휘성)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순천군장군 김웅원은 북경(순천) 부근에 있다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육로로 산동성에 있던 이사도의 제나라를 협공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서신라의 영역은 중국 대륙의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일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 왼쪽은 장보고의 친구 정년, 오른쪽은 해신 장보고로 분한 최수종
4)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을 보면, 장보고와 친구 정년은 당나라에 들어가 서주 무녕군(徐州 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두고 중국 안내원이 장영달 의원에게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활동했다.”고 한 것이다. 후에 장보고가 본국으로 돌아와 흥덕왕을 뵙고 아뢰기를,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여기서 서쪽이란 황해바다 건너 서쪽(대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신라의 서쪽인 당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 해적들이 배를 타고 황해를 횡단해서 한반도까지 와서 신라백성들을 데려가 노예로 삼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로서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해적들이 대륙에 있었던 서신라의 백성들을 데려가 해상에서 매매했고 육로와 황하의 수로를 이용하여 서쪽으로 데려갔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본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보고의 청해진은 군사 1만 명이 주둔했던 큰 곳이었으며, 당에서 관직을 버리고 사수(泗水)의 연빙현(漣氷縣)에서 돌아온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국도(國都)로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고 신무왕(김우징)을 세우도록 한다. 후에 장보고는 재상이 되고, 정년은 장보고 대신 청해진을 지키게 된다고 기록되어있다. (漣氷(연빙)의 氷자도 水자를 고친 것 같아 보인다.)

분명 <당서>에는 장보고와 친구 정년이 같이 신라로 돌아 왔으며,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에 정년은 신라 땅 ‘사(泗), 연수(漣水)’에서 살았다고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왜 <당서>의 내용대로 두 사람이 같이 돌아온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  '청해금지완도'라고 적혀있다.
그건 아마 사. 연수를 신라 땅이 아닌 중국 땅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淸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라는 기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끝에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다 사라지고 소문조차 없었을 것이다.(雖有乙支文德之智略 張保皐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減而無聞)”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고려에서는 소문조차 듣지 못했던 장보고에 대해 중국 서적을 인용해 적어놓고는 중국의 원문과 다르게 기록했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또 소문조차 없었던 장보고의 청해진에 대해 중국 기록을 인용해 적어놓고는 어떻게 지금(고려)의 완도라고 확정할 수 있단 말인가? 청해진이 고려의 완도였다면 고려 땅에 장보고에 대한 소문조차 없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기록은 분명 후대에 누군가가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이는 필시 신라가 대륙에도 있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후대의 누군가가 고쳐 적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해신 장보고의 청해진은 어디인가?

중국 영성시 석도(石島: 옛 정해위 靖海衛)에 장보고 유적지가 있고, 한국에는 전남 완도군 장도(將島)에 청해진 유적지가 있다. 현재 석도 옆 청도(靑島)에는 중국의 해군사령부(해군기지)가 있으며, 장도는 갯벌이 심하고 수심이 얕기 때문에 수군기지가 될 수 없는 곳이고 현재 항구나 접안시설이 없다. 

▲  완도 장도의 청해진은 썰물 때 갯벌이 생기고 수심이 얕아 절대 수군기지가 될 수 없는 곳이다.
▲ 중국 산동성의 석도 장보고 유적지. 가파른 돌산이 있어 갯벌이 있을 수 없고 수심이 깊어 아무 때나 배가 드나들 수 있다. 사진으로만 봐도 청해진은 전남 완도의 장도가 아니라 석도가 진짜 장보고의 청해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석도에는 만도(灣島)라는 섬이 있는데 이 만(灣)자가 중국 발음으로 완(WAN)으로 발음된다. 게다가 석도에는 장보고가 세웠다는 적산(법화)원이란 절도 있고, 고대 지도에 장보고의 사당으로 보이는 해신묘(海神廟)가 근처에 있다. 이 두 곳 중 어디가 진짜 장보고의 청해진일까? 

▲   고지도의 산동성에 해신묘(사당)와 적산 정해라고 적혀 있다. 이건 누구의 사당일까?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 본 해신 장보고의 청해진은 분명 산동성에 있었다. 참고로 장보고는 무주(武州)사람 염장에게 피살당한다. 839년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는다. 이 무주와 진해라는 지명도 중국에 있다. 어떤 학자는 중국의 정해위(靖海衛)은 완도의 청해진(淸海鎭)과 한자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지명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정해위는 예전에 청해로도 쓰였다는 고지도가 있어, 이런 주장은 트집잡기에 불과하다 하겠다.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청해는 어느 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동성을 나타내는 청(靑)과 강소성을 나타내는 해(海)를 합친 지역을 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당히 일리가 있고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우리를 동쪽의 청룡으로 여겼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하는 중국의 경극을 보면 연개소문은 푸른 가면과 망토를 두른 청룡장군으로 나오고, 설인귀가 백호장군으로 나온다. 청(靑)은 예전부터 동이(東夷)를 의미했고, 동이의 본고장은 산동성이다. 그리고 장보고를 해도인(海島人)이라 했는데, 이는 원래 해도인(海到人)인데 고쳐쓴 것으로 (외지에서) 강소성에 온 사람이란 뜻이 아닐까 한다. 

▲  중국이 만들어 놓은 어머어마한 크기의 장보고의 동상. 신라까지 동북공정을 하려는 의도인데, 우리에게는 오히려 서신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그럼 왜 중국은 신라인인 장보고의 유적지를 석도에 만들어 놓았을까? 지금까지 중국은 서신라가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신라방(新羅坊)이 있었다고 조작했고, 소중화(小中華)인 우리 강단사학계도 중국과 똑같이 앵무새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라인들의 숙소인 신라방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 동부에 서신라인 대륙신라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이제는 장보고까지 중국인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장보고와 청해진의 역사를 정확히 밝혀내지 않으면 우리는 치우천자에 이어 또 한 명의 위대한 조상인 장보고까지 중국에게 빼앗길 것이다. 동북공정을 통하여 고구려와 발해를 자기네의 변방역사라고 말하는 중국은 신라인 장보고를 중국인이라고 말함으로서 신라까지 동북공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삼국사기 누가 왜 조작했나?”가 연재됩니다. 
윤복현 08/04/09 [14:41] 수정 삭제  
  [정용석 선생의 “참과 거짓의 역사 2”에서 인동장씨대동보(仁同張氏大同普)나 장씨연원보감(張氏淵源寶鑑)에 의하면 "장보고의 아버지는 장백익(張伯翼)이고, 절강성 소흥사람으로 신라에 귀화한 사람이다. 장보고의 고손(高孫)에 해당하는 장정필은 고려 초기에 안동의 호족이 된다."라고 되어있다. 소흥은 절강성 동쪽인 절동(浙東)지역에 있는 지명이다. 장보고의 아버지가 원래는 중국인인지 왜인인지 백제유민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여하튼 신라로 귀화했기 때문에 아버지 때부터 신라인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중국 기록을 인용해 적어놓고는 어떻게 지금(고려)의 완도라고 확정할 수 있단 말인가? 청해진이 고려의 완도였다면 고려 땅에 장보고에 대한 소문조차 없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장보고 장군은 인동 장씨죠..참고로 저희 외기도 인동 장씨..ㅎ..청해진은 지금의 완도라기 보다는 성훈님의 주장대로 전통적으로 상.은나라 등 동이족의 터전이며 백제지역인 산동지역으로, 해상제국 백제가 장보고의 아버지의 고향인 절강성을 포함 동남아시아까지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백제 유민의 자손으로 보아야 맞을 것이며, 장보고 아버지가 신라로 귀화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중국대륙에서 한반도로 고대사를 국한시키려는 일제 식민사관의 치밀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중국대륙의 지명들과 유사한 한반도 지명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러한 사유가 일제36년간의 조선총독부의 치밀한 작업인지, 아니면 중국대륙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고대인들의 흔적인지의 여부를 명확히 가리는 것이 근본적인 역사뒤집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중국 기록을 인용해 적어놓고는 어떻게 지금(고려)의 완도라고 확정할 수 있단 말인가? 청해진이 고려의 완도였다면 고려 땅에 장보고에 대한 소문조차 없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명나라를 하늘처럼 떠 받들던 소중화 국가인 이씨 조선조에서 조작해 놓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하멜표류기'에 보면 당시 조선의 신하라는 자가 두 하늘에 태양이 2개일수 없다면 조선왕보다는 중국 황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만 보아도 당시 역사를 편찬하는 자들의 소중화의식이 대륙사관의 역사를 편찬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죠..아무튼 소중화.숭미.숭일 등 사대주의가 민족혼을 말아먹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에이 찌질이들~^^

역사왜곡과 조작을 위한 일제의 행위들을 알 수 있다면 아마도 일제하 조선총독부의 지명변경작업일 확률이 높다 보여집니다. 성 선생님의 논리적인 내용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해군기지는 당연히 수심이 깊고 많은 선단이 정착할 수 있는 안전한 지형이어야 겠지요.. 왜곡조작은 언젠까는 그 진실이 환히 드러나는 법이죠..^^

장보고 아버지 장백익의 고향 - 쥥국 절강성
지오 08/04/09 [18:15] 수정 삭제  
  한반도에서 나오는 백제유적, 유물에 대한 설명도 있으셔야죠.. 이런것 없이 백제가 대륙에 있다고만 주장하니 식민사관 역사가 먹히는거 아닙니까?
지오님 08/04/09 [18:25] 수정 삭제  
  백제도 한반도 백제(본국)와 대륙백제로 구분될 수 있겠죠..참조하세요==> http://pluskorea.net/sub_read.html?uid=9861§ion=section78§ion2=^^
성훈 08/04/09 [18:55] 수정 삭제  
  지금 신라 이야기하고 있는데 백제 이야기가 빠졌다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대륙백제와 한반도백제 이야기는 나중에 연재하려고 하니 좀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Korea귀공자 08/08/10 [17:31] 수정 삭제  
  일제식민지사관이라고 딱지를 붙이면 다 좋은 것인가?
위 지도에 오늘의 한국땅을 동신라라고 표시해놨는데, 이 촌뜨기들이 신라를 미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민족적 정체성을 중국으로 확장시키려는 허구 뒤에는 역설적으로 과거 박정희 같은 무리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은 신라이데올로기를 교묘히 다시 삽입하려는 짓과 다를 게 뭐가 있나?

이런 장난보다는 지금 아이들 역사교과서, 많은 역사학자들이나 인문학자, 정치학자들이 앵무새처럼 주절대고 있는 이라는 역사적 허구(historical fiction)부터 뜯어고쳐 바르게 기록하는 일에 먼저 나서야 할 것이다.
민족사학도 08/08/10 [17:37] 수정 삭제  
  과거 중국과 고구려-백제 사이의 동북아 패권전쟁기에 당나라의 개 노릇을 한 신라의 실체를 은폐하고 미화시키려는 집단들의 앞잡이라는 생각마저 드네요.
한국제국 19/01/05 [10:55] 수정 삭제  
  백제가 중국하남성을 중심으로 있다는것에 다 인정 해야 한다 백이 숙제태어난곳이고 망향산도 잇다 그리고 문화로 보아도 백제는 벽돌문화 권이다 일본성도 벽돌성이다 찱흙에 찰살풀을 넣어서 벽돌만들어 1500년이 되어도 쓰러지지 않은게 있다 중국 묘족들이 백제 유민이라고 보는 사람이 중국에는 있다 소림사 근처에 성처럼 벽돌로 집을지어 둥근 모양으로 요새 처럼 지어진 집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자기 조상이 누군지 모르지만 백제 유민일 것이다. 백제땅 중국에 신라가 당나라 하고 전쟁에 승리 해서 아주 긴시간 차지했다. 산서성 까지 통일신라땅이고 장보고도 태어나고 청해진도 설치하고. 그후 나타난 고려는 신라와 발해 땅까지 차지 했다 송나라에서 여진을 갈려면 고려 땅을 통과 해야 만 했다고 나온다.. 고려가 한반도로 대폭 축소 된것은 몽고 침략으로 다시 고향 한반도로 내려 와서다.. 전기 고려 유물은 한반도에 거이 존재 하지 않는다 후기 몽고 항쟁때 유물이 한반도에서 발견된다. 한반도로 우리역사 왜곡시킨것 세종과 이성계다 역적 이성계가 우리후손이 명나라 못공격하게 우리 선조가 차지한 지명 전부 한반도로 교묘히 옮겨 엉터리로 역사 전술하고 진짜역사 책들과 학자는 다 죽였다 세종은 고려사 새로 조작해 만들어 전국지명을 중국 지명으로 갖다 부친거다 중국 전주을 전라도 어느지역에 그냥 전주라 칭하게 하고 전국토을 이런식으로 한거다 몰래명나라 신이나 모시고 중국에 반역 더 못하게 한거다... 진짜 한국 역사책은 일본 황실 창고나 중국어디 깊숙한 곳에 숨겨 져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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