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단편소설> 911, 그날 4회
처제는 부드러운 눈빛과 달리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당돌한 말투다. 처음에는 결혼하겠다는 말로 당황하게 하더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뜻밖에 처제가 쏟아 낸 말, 이건 프러포즈였다. 처제가 생각하는, 그런 둘 사이를 가정해 본 적은 없다.
그런 일은 입 밖에 올리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금기 같은 거였다. 처제의 태도는 사뭇 도발적이다. 고개를 들어 윤아와 눈을 맞춘다. 그녀도 막상 입 밖으로 내놓아 버린 말에 부담을 느끼는지 시선을 테이블 끄트머리에 내려 둔 체 숨을 죽이고 있다. 어린 나이도 아니고,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까. 사실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그렇긴 해도 어른들 생각도 중요하고,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죄송해요, 형부. 제 생각일 뿐이에요.”
갑자기 꼬리를 내리고 있다. 장난으로 한 말이라면 차라리 좋을 것 같다.
“…….”
“다미를 생각해서는 아니에요. 물론 다미가 동기일 수는 있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겨우 한마디 건넨다. 내 머릿속은 하얀 포말로 가득 차올라 생각이 정지된 듯하고, 처제가 쏟아 낸 말들이 한데 섞여 귀속에서 웅웅댄다.
“제가 형부를 무척 좋아하나 봐요.”
“갑작스런 말이라…….”
“알아요, 형부.”
“그래, 그 문제는 좀 생각을 해 보자. 오늘은 밥이나 맛있게 먹고.”
“언니한테는 미안한 일이나 사실은, 예전에 언니 대신 형부를 만나러 갔을 때…….”
처제는 말을 못하고 멈칫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면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예전에도 그런 느낌을 좀 받기는 했었다. 내가 어떻게 말을 받아줘야 할까. 간절함이 배어 있는 윤아의 눈망울에 이슬이 보인다. 나는 따뜻한 미소로 응대한다. 그 미소는 정리되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선웃음이다. 이건 감정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처제도 어렵게 말을 꺼냈겠지만, 내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이제부턴 윤아 라는 이름을 절대 부르지 않고 처제라 부르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처제의 눈빛이 예사롭잖다. 순간적인 감정은 절대 아니에요. 오랫동안 고민해 왔어요. 전 이미 맘을 굳혔어요. 형부만 괜찮다면……. 윤아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말없이 처제의 손을 꼭 쥔다.
혹시 그동안 처제에게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닌지, 수아를 잃은 상실감을 윤아에게서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달이 밝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윤아와 수아의 두 얼굴이 노란 달무리에 싸여 달 물결로 일렁거린다. 나는 그 물결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적절한 시기에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재혼할 생각은 했다. 다미를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젠 새롭게 처제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그녀가 한편으로는 놀랍고 고맙다. 다미가 처제만큼 좋은 새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스스로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아의 모습을 지닌 윤아를 매일 접하면서 가슴에 묻은 수아를 떨쳐버릴 수 있느냐고. 앞으로 그녀를 진정 아내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2. 그날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 했다. 넓은 곳에 가면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들과의 비즈니스는 언제나 만만치 않았다. 김준구 사장도 미국에서 이기면 세계에서 이기는 것이라며 미국에서의 성공을 들먹이곤 했다.
회사에서 미국 시장에 거는 기대는 그만큼 컸고, 김 사장도 내게 미국 지사의 현지법인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그것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다. 김 사장은 나를 서둘러 미국으로 보내야 하는데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는 가정이 문제라는 진단을 내리는 듯했다.
다미를 위해서도 재혼 문제는 빨리 매듭지어져야 한다. 윤아에 대한 나의 감정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나의 사랑은 수아와 함께 한 줌 재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다시는 사랑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아의 동생이 가슴으로 들어서려 한다.
윤아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데 필요한 시간과 정신적인 부담을 훨씬 더는 일이다. 윤아 만큼 나를 이해해 주는 여자를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윤아는 부모님을 설득하던 과정을 전하면서 물 끼 서린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드디어 임원의 반열에 오른다. 나이 서른넷에 기획실장으로 부임하니 파격적인 인사였다. 사장은 외국출장을 갈 때마다 나를 데려갔고, 비서보다도 나를 더 곁에 두려 했다. 어느 날 나는 비행기에서 김 사장과 생명공학분야의 비전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수아를 잃을 때부터 키웠던 싹이었다. 김 사장은 내게 미국에 있으면서 그 분야에 대한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짜 보라며 손을 꼭 쥐었다.
다미가 착하게 자라준 다섯 해 동안 우린 새 아이를 갖지 않았다. 처가에서는 손자 보고 싶다고 했어도 윤아는 똑똑한 다미 하나면 된다며 아이 가질 생각을 접었다. 자기의 아이를 낳으면 차별을 안 할 수 없게 되니, 다미에게 상처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 문제로 실랑이가 좀 있었으나 윤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런 윤아의 태도는 수아를 잃음으로써 황폐해졌던 내 마음에 새싹이 돋게 하였다.
회사에서는 새 제품의 미국 내 판매를 구체화했다. 나는 신제품을 미국 구매자들에게 선보일 프레젠테이터로 지목된다. 비로소 꿈꾸던 대륙에 상륙하게 된 것이다. 내 꿈을 이룰 땅은 미국이라 생각해왔다. 글로벌한 비즈니스 인맥은 훗날을 위한 포석이 될 것이다. 그동안 은밀히 준비해 온 생명공학분야의 투자 계획이 현실화되면 지금의 회사는 하나의 징검다리가 될 것이고, 나는 가장 높은 계단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다는 말을 윤아는 달갑잖아 했다.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당연히 반길 것이라 짐작했다. 이국땅에 건너가서 살면 그런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윤아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이국땅에서 비명에 간 언니를 떠올리게 된다며 함께 미국 땅을 밟기 싫어했다. 미국에서의 일정이 촉박해지면서 나는 결국 홀로 출국한다. 행사를 치른 뒤 가족의 합류 문제를 다시 이야기하자 했으나 윤아는 미국에서의 생활 자체를 끝까지 수용하지 않았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은 뉴욕에 있지요?”
“그래. 쌍둥이 빌딩이지. 세계 비즈니스의 상징이고. 내가 꼭 있어야 할 곳이야.”
“84층이나 올라가야 해요?”
“높을수록 멀리 보는 거야. 내 눈높이는 그보다 높은 곳에 있어. 이해하지?“
윤아는 머뭇거리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초조한 기색으로 대답한다.
“당신은 늘 목표 지향적이며 높이 올라야 하는 당위성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어요. 높은 곳으로 향한 눈에는 좌우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요. 결국, 주변을 잃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요.”
“높이 자란 대나무는 곁가지가 적은 법이지. 84층은 지금 내 눈높이에 맞을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아요. 다른 걱정하지 말고, 우선 행사부터 끝냅시다.”
“아무래도 내 생각엔 너무 높은 곳이군요. 조심하세요.”
공항에서 윤아가 내게 던진 마지막 말, 그 말은 수아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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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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