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덕이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는 사이, 태진은 영원면의 농지를 사들이기 위하여 거간꾼들을 여럿 풀어 동태를 살피게 했다. 시세보다 값을 더 쳐주겠다는 달콤한 말에 벌써 수십 가구가 농지를 팔겠다는 구두약속을 하고 있었다. 공한지의 주인을 찾아내어 연락도 취했다.
성민은 앵성과 흔랑마을 사람들을 찾아와 대기업에서 집단농장을 만들어 이 마을 사람들에게 살기 편하게 만들어준다고 꾀었다. 빚이 있는 것까지 갚아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구두약속을 한 사람도 몇 생기었다. 어떤 사람들은 해덕이 이 마을을 공동체 마을로 만들겠다는 꿈을 깰 것이냐고 성민의 꾐에 넘어간 사람들과 대판 싸웠다.
성민이 다녀가고 난 후에는 마을 사람들끼리 두 패로 나뉘어 싸웠다. 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한다고, 빚이 있어도 내 땅으로 내가 벌어먹고 사는 것이 뱃속 편하지 않느냐며 해덕을 믿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과 월급이 매달 따박따박 나오면 영화도 볼 수 있고, 볼링, 당구도 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는 사람으로 인해 마을은 시끄러웠다.
이 소식은 해덕의 귀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듣고 눈을 감아버렸다. 깊은 한숨만 몰아쉬고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 눈을 뜨려 하지 않았다. 해덕이 그토록 좋아하던 외할머니의 흥에 겨운 민요도, 한에 서린 민요소리도 거부했다.
시골에서는 해덕이 사경을 헤매고 마을 사람들은 농지를 파느냐 마느냐 하는 사이 천만은 잠실역에서 앵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앵초는 시골 어머니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지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해덕의 소식은 그녀로 하여 깊은 고민을 하게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태진은 그녀를 찾아왔다. 몰라보게 변한 중년의 중후한 멋을 지닌 태진의 모습은 한눈에 반할 정도였다.
그가 타고 온 최고급 승용차, 와이셔츠 깃에 달린 값비싼 금단추, 흰머리가 한올 두올 보이지만 뒤로 빚어 넘긴 머리는 그의 외모를 빛이 나게 했다. 그보다 그가 내민 청사진은 그녀로 하여금 욕심을 내게 했다.
손에 물을 안 묻히게 한다는 말, 해덕이라면 감히 그런 말을 할까? 그는 357년 제작된 안악3호분의 묘주부인 초상화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 아니? 그것도 모른단 말이야? 북한에 우리 민족의 유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하고 통박을 주었을 것이다. 데이트를 하면서도 엉덩이가 잘생겼다는 그녀의 말에 항상 앞서 걸어가는 통에 해덕의 엉덩이를 보고 걸어야만 했던 날들이 허다했다.
태진의 말소리는 부드럽고 친절했다. 자르르 기름이 흘렀다. 여유로 묻어나는 미소는 황금처럼 빛났다. 그보다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이혼을 했다는 말에 감동을 받았다. 이 세상에서 해덕오빠만큼 잘생긴 남자가 없으며, 가슴이 가장 따뜻한 남자라고 여기며 그를 기다렸다. 그런 그가 교수자리를 내놓고 궁벽한 시골로 내려가 가당찮은, 수천억을 가지고 내려가도 공동체 사회를 만들 수 없는 것을 하겠다는 무모한 행동에는 절대 따를 수 없었다.
그를 위해 기다려온 세월과 뒷바라지가 아깝긴 했지만 그녀가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온갖 말로 싸워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지만, 그녀는 미련 떨지 않으려고 월급을 타자마자 명품을 사들이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주식으로 모은 수억의 돈 중에 일부가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그녀는 허한 마음을 물건 사는 것으로 달랬다. 그의 가슴속에는 자신의 자리는 없고, 오로지 북한의 유물, 유적이 가득 차 보였던 서운함을 생각하며 해덕을 잊으려 했다.
어느 날은 자신이 북한의 어느 한 곳에 와있다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녀의 입에서도 북한에 대해 슬슬 거미줄 나오듯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태진의 성공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태진이 그녀에게 부려놓고 간 청사진을 들여다보며 며칠은 행복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잠실역에서 기다린다는 천만의 전화를 받자, 태진이 준 청사진이 날개를 달고 날아갈 것만 같은 생각에 마음이 불안했다.
잠실역에 앵초가 도착하자 천만이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깔끔하고 희멀겋던 천만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시꺼멓게 그을리고 논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옷차림에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천만을 눈길로 쫓으며 얼굴을 찡그리며 앉았다.
“해덕이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내려가자. 앵초야.”
그녀가 앉기가 무섭게 천만이 결론부터 말했다.
“제가 가면 나무가 살아나요? 해덕오빤 강한 사람이니까 곧 일어설 거여요.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안했어요. 오래도록 사귀면서도. 제 귀도 그런 말 듣고 싶고, 오빠는 날 안아주는 것도 인색했어요, 오로지 북한, 북한에 대한 말만 했다고요. 오죽하면 제가 종북이냐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그런 오빠에게 다시 가라고요? 내가 얼마나 모진 말을 했는대요. 난 시골에서 살 수 없어요. 아버지가 실명을 하면서 실의에 빠져 술에 취해, 아무데서나 자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고 웃으면서 살겠다고 다짐을 했었어요. 그래서 해덕이 오빠가 교수가 되게 뒷바라지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냐구요? 그런데 그 꿈을 깨고 시골에서 산다고 내려갈 때,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큰지 아세요. 항상 해덕 오빠는 자신 생각만 해요. 날 이해하고 내편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아요. 그런 오빠에게 다시 가라고요. 이제 난 오빠와 같은 길을 갈 수가 없어요.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면서요?”
“해덕을 사랑한 것 맞니? 그 녀석이 너를 간절히 원한다는데 넌 어떻게 그런 말이 슬슬 나올 수 있어? 앵초 맞니? 그 착하던 앵초가 맞느냔 말야? 너는 앵초가 아냐? 해덕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외면할 네가 아니다. 절대.”
천만이 냉커피를 벌컥 들이마시며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지만 눈동자는 말갛고 깨끗했다.
“전 변했어요. 이 도시가 날 변하게 했어요. 얼마나 매력 있고, 화려하고, 신이 나는 도시인지 몰라요.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어요. 사랑도, 우정도 살 수 있어요. 새로운 문화는 계속 생겨나고, 신비스러워요. 달콤한 말을 하는 사내도 많고, 은밀한 손길을 뻗히는 사내도 많아요. 싫증나면 화끈하게 돌아서며 끈적거리지 않아서 좋은 사내가 많다는 것을 오빠가 떠난 뒤에 알았어요.”
천만은 오로지 해덕만 바라볼 것만 같았던 앵초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에 그만 실망스러워 입을 다물었다. 앵초를 데리고 갈 수가 없다는 절망감이 밀려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는 카페안의 사람들을 들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훑었다. 2년 사이에 몰라보게 촌스러워진 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혹시 태진이 너한테 왔었니?”
그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두 차례 왔다갔어요. 그가 그렇게 변할 줄 몰랐어요, 몰라볼 뻔했어요. 성공을 한 모습은 아주 멋졌어요. 우리 친구 중에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앵초의 말에 천만은 더욱 실망이 컸다. 태진에 대한 앵초의 마음이 상당히 기울었다는 생각이 드니 앵초를 애타게 기다린 해덕의 절망스러운 얼굴이 그의 눈앞을 가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아직도 그 녀석은 너뿐이다. 아마 네가 잊었다고 하면 목숨을 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는 네가 필요해. 아주 절실하게. 네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날마다 마을 입구에 나가 앉아 있다 오는 것을 보았다. 입구에는 네가 오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 온갖 꽃을 심었단다. 그 꽃을 누군가 베어버렸어. 나무까지도. 네 엄마에게 들었을 줄 안다.”
앵초는 애써 태연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지만, 마을 입구에 앉아있는 해덕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왔다. 간신히 그를 잊었노라 했는데…….
“누군가 의도적으로 해덕을 망치게 하려는 사람의 소행같아. 우린 태진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있다. 네가 태진을 택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해덕을 두 번 죽이게 되는 것이다.”
“태진의 짓일 것이라는 증거라도 있어요?”
“들리는 말이 수상해. 영원면에 집단농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해덕이가 있으면 방해가 된다고 여기고 있어. 영원면 사람들 중에는 해덕의 공동체 사회를 만드는 것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런데 태진이 벌써 영원면 사람들을 설득하여 농지를 사들이려고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하니, 내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내려가야 한다. 해덕이 사경을 헤맨다고 하니 병원으로 옮겨야겠어. 정말로 안 가겠니?”
앵초는 천만의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을 뒤로 하고 천만은 일어섰다. 앵초에게서 해덕을 보러 시골에 오겠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가는 발걸음이 천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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