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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진실 2009/11/1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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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한(전한)4군/최씨 낙랑국/후한 낙랑군
    1.소위,한(전한)4군:한4군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조작된 기록이라 해야 할 것이다.위만조선이 내부분열로 망하자 한나라에 투항한 위만조선 지배층들(조선인들)에게 산동지역을 영역으로 하는 위만조선의 땅을 배분해 준 내용이 한4군으로 조작된 것이다.한4군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한나라 제후로 봉직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5군이라 해야 맞다.북부여영역인 요서지역은 고두막군대와 위만조선지역의 조선유민들의 연합으로 인하여 한나라가 공략하지 못했다.소위,한4군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마천의 사기기록이며 한4군으로 착각하는 조선5군은 산동지역에 존재했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2.최씨 낙랑국:번조선에 해당하는 요서지역의 낙랑국 최숭이 47대 고열가대단군이후 단군3조선이 붕괴되자, 무리를 이끌고 마조선의 왕검성인 평양지역에 개국한 나라다.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로 유명한 나라다.공주는 국왕의 딸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4군의 하나인 낙랑군 태수 딸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자들이 많다. 골빈 자들이다.

    3.후한 낙랑군:북한 평양지역에서 후한시대 인구조사목간이 출토되었고, 무덤들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후한 광무제때 고구려(초기수도는 국내성) 후미를 공격하기 위해 북한 평양인근에 설치한 낙랑군이다.[삼국사기]에도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후한(後漢) 광무제는 A.D 44년에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하여 바다건너 A.D 32년에 고구려에 항복한 낙랑(樂浪)의 우거수(右渠帥) 소마시(蘇馬諟)를 꾀어 살수(薩水:청천강) 이남 지방을 점령하여 그 곳에 낙랑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을 설치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살수이남을 상실하였다"라고 기록된 내용이다.

    3번 내용이 이해되려면 고구려 수도문제가 언급되야 한다.

    [한단고기][삼국사기],지나국[사서]기록에 따르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고두막의 골본부여에 망명한 해(고)주몽은 고두막의 아들 고무서에게 아들이 없어 고무서 둘째 딸 소서노와 혼인하고 왕위에 올랐다.그러나,부여인들의 반대하자(반 고구려세력이 바로 고두막의 후예라 자처하는 구태세력으로 요서지역에서 한반도 평안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한강지역의 온조-십제를 통합하고 백제를 개국한 주역이다), 골본에서 이주하여 골본천(심양방면)에 이르니 토지가 비옥하고 강산이 험고(險固)함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혼강) 위(골본성=오녀산성)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해씨를 성으로 삼았다.후에 해씨는 태조대제때 고씨로 바뀌었다.

    [구당서]에도 "고구려국의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성(장안성)은 漢나라의 옛 땅인 낙랑군(樂浪郡)이다..거리는 경사(京師:서안)로부터 5천리이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이때 한나라는 전한이 아니라 신나라를 무너뜨린 광무제의 후한을 의미한다. 서안으로부터 5천라고 했으니 북한 평양까지 거의 5천리가 나온다.장수대제 14년에 천도한 평양성은 현재의 북한평양이 아니라 요양(평양)이다. 장수대제는 광개토대제 때 백제로부터 빼앗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지키기 위하여 요양으로 천도하기 2년 전인 A.D 425년에 북위(北魏)와 동맹을 맺었고, 북위와 전쟁 가능성이 없어지자 수도를 요양으로 옮겼다. 이 평양성은 문자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때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기 15년조]에 의하면 고구려는 장수왕 15년(A.D 427년)에 수도를 평양 동황성에서 평양성(요양 방면)으로 옮겼다.

    기록내용은「장수왕(長壽王) 15년(A.D 427년)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十五年移都平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북위 태무제(A.D 423-452년)의 사자가 (고구려왕이) 기거하는 평양성에 왔는데, 이곳은 요의 동경(요양)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遼史地理志 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고구려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한다...진나라 의희(A.D 405~418년) 후 장수왕은 (요양의)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고구려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 동남 1000여리에 있는 평양성(북한 평양성)은 전에 (장수왕이 기거하던 요양의) 평양성이 아니다.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晉 義熙 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元史地里志 東寧路]

    현재 북한 평양성의 정확한 명칭은 장안성이다.장안성으로의 천도는 25대 평원왕때 이루어졌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평원왕기 28년조]에는 "「평원왕(平原王) 28년(A.D 586년)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二十八年 移都長安城」"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는 평원왕 28년(A.D 586년)에 수도를 평양성(요양 방면)에서 장안성(長安城:평양성)으로 옮겼다. 이는 수나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평양성은 고구려·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개·수축되었으며 성내 여러 곳에서 고구려시대 기와와 주춧돌이 출토되었고 만수대(萬壽臺) 부근에서 고구려시대로 추정되는 건축유지(遺址)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이 때 평양을 창려라고 착각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구려 후기 수도는 북한 평양이다.물론 요서지역까지 고구려 영향권에 두었다.

    북한 평양지역은 낙랑문제로 인해 논쟁이 많은 지역이다. 문헌.고고학적으로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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