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단편소설> 하얀 도화지 (4회)
다음 날 아침 일찍 조 실장은 다시 전화를 받습니다. 이번에도 여주임이었지요. 자기네 팀장이 청장님을 직접 만났고, 예산 배정을 더 해주든지 한 편 만 제작하는 수밖에 없다고 통사정을 했답니다. 팀장이 청장한테 통사정하는 일은 자기들도 처음 보았다면서. 팀장님이 정말 애 많이 쓰셨고 결과는 잘 됐으니 좋은 작품으로 한 편만 만들라고 했다고요.
한 편도 제값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며 설득을 했다는 것이지요. 자기도 물론 같이 갔었답니다. 야호! 조 실장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개혁팀에서 확실하게 바람을 막아준 것이었지요. 두 편중에서 조금 예산이 더 들어가는 안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사장님은 그 자리에서 저쪽 팀장에게 감사하다는 전화라도 드려야 하겠다며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청에서는 예상외로 협조적이었습니다. 특히 여 주임과 팀장은 아주 우호적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작팀원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발주자 측에서 저녁을 사는 일이란 없었기 때문에 조 실장은 꺼림칙했으나 좋은 뜻으로 생각을 고쳐먹는 눈치였습니다.
조 실장은 스텝 3명을 데리고 그들이 잡아 놓은 일식집으로 저녁 시간에 맞춰 출발했습니다. 웬걸, 이튿날 조 실장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근사한 일식집에서 비싼 음식 잘 대접받았다며. 한편으로는 그런 식비 아껴 제작비에 보태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도 털어놓았습니다. 광고주 측에서 접대를 바라기는커녕 제작 스텝을 불러내서 대접하는 일이란 아주 드뭅니다.
일이 끝난 뒤에 성공 여부에 따라 멋진 뒤풀이를 하는 일은 더러 있었지만요.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청의 일이 여럿 있는데, 같이 해보자는 언질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장님은 인력이 부족하다는 조 실장의 고충을 생각하여 앞으로 청에서의 일을 염두에 둔 인력 충원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음식 대접까지 받자, 직원들은 예산이 쪼잔하다는 불평을 감추고 열심히 밤샘작업까지 강행했습니다. 내년부터는 회사의 빌링이 훨씬 더 많아지리라는, 그러면 연봉도 더 오르리라는 기대로 손바람이 났던 겁니다.
방영일 스케줄에 빠듯하게 맞추어 광고가 완성되었습니다. 어린아이를 소재로 등장시킨 감성 멜로 스타일인데, 이 작품에서는 하얀 도화지가 청렴이나 미래가치, 순수 등의 상징성을 띠고 등장합니다. 하얀 도화지는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빌어 나락에 떨어진 청의 이미지를 끌어 올리는 상징적인 메시지입니다. 광고에서의 ‘어린아이’라는 소재는 문학에서 ‘사랑’만큼이나 고전적인 소재가 되어왔습니다.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커머셜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통설이 있습니다.
총선거나 대선 때마다 자기 손자도 아닌 아이를 안고 뽀뽀를 해 대는 정치인들의 연출된 이미지가 자주 나옵니다. 이미지를 친근하게 끌고 가는 데는 아이만큼 효과적인 상대도 없지요. 그러니 정치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정치 상품’이나 ‘꾼’으로 자임하는 선택을 하는 셈이랄까요. 언제 우리 정치판이 진정 (장사)꾼이 아니라 사람 냄새나는 인물들로만 채워질지 모르겠지만요. 하얀 도화지는 순백의 공간에 어떤 색깔이나 이미지도 받아들이는 포용성이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고 비워둔 하얀 도화지는 공직사회의 표상이 되어 어린아이의 손길로 화면을 하얗게 지워나갑니다. 광고가 방송을 타자 광고를 보는 사람마다 잔잔한 감동이 전해진다고들 했습니다. 개혁팀장은 고무되어 전화로 회사에 고마움을 표시해 왔습니다. TV에서 광고가 방송되고 있던 어느 날, 사장님은 청의 여 주임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주임은 광고 효과가 좋다는 둥 우리 회사를 추켜세우느라 입에 침 고일 틈이 없을 정도로 칭찬해 댔다고 합니다. 언제 식사나 한번 하자면서. 그 다음 날.
“청에서 저녁 식사하자고 전화가 왔어, 조 실장.”
“전에 자기들이 샀으니, 이번에 우리더러 사라는 얘길 거예요.”
“광고 효과가 좋으니 제작비도 적게 책정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분위기로 보아선 고맙다는 취지일 거야. 그게 아니면 이번에는 우리가 내지 뭐! 앞으로 생길 일도 있다는데.”
“그 사람들 속과 겉이 다르다는 인상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렇지만 협조를 잘해 주긴 했어요.” 사장님과 조 실장의 대화가 날아듭니다. 조 실장은 늘 예리한 판단을 하는 사람인데 그마저 호의적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관의 일이라는 것이 사소한 일이라도 그 규모가 큽니다. 그만큼 수익성이 클 수 있고요.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말마따나 회사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면 오죽 좋을까요. 개혁하겠다는 나선 공직자들이니. 일이 마무리되면 광고주와 저녁 식사라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요. 그것은 고객관리차원에서도 필요한 일 아니겠어요?
“뭐 좀 챙겨갈 거 없을까?”
“방송사 DVD 세트나 하나씩 줄까요?”
방송사에서는 방영된 모든 프로그램을 비디오상품으로 만듭니다. 특히 연속극 류의 DVD 세트는 마니아들은 물론 한류 바람을 타고 외국에서 더 인깁니다. 국내 판매가는 10만 원 선이지요. 이 정도면 적절한 선물이고, 상대는 개혁팀이고 청렴계약이행각서까지 체결한 마당입니다. 선물이 지나치면 상대가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상거래상 ‘을’의 입장에서 이런 일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고, ‘나는 언제나 갑의 입장이 되어보나!’하고 조 실장은 늘 투덜거렸습니다.
“그거나 챙겨 봐. 개혁팀 사람들이니 그 정도면 될 거야. 더구나 청장이 우릴 추천했으니 말이야. 나랑 둘이 가야겠지?”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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