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단편소설> 하얀 도화지 2회
그러니까 사흘 전이었습니다.
모 청 개혁팀이라는 부서에서 사장님께 직접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 일에는 부가적으로 생기는 일들이 많고, 무조건 우리가 제시하는 시안으로 의견을 몰 테니 프레젠테이션에 꼭 참여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지요.
나이는 오십을 넘겼을 성싶은 여주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수화기 틈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사업이라는 것이 남기자고 하는 것인데, 직원들 한 달간 꼬박 고생시켜놓고도 이익이 없다면 ‘청’ 아니라 청와대 일이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장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애초부터 이 기관의 접촉은 조 실장에게 맡겼는데, 조 실장이 안 하겠다고 꼬릴 내리니 이제는 사장님께 전화를 건 모양입니다.
조 실장이 안 하겠다면 사장으로서도 말릴 수가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눈치였습니다. 건너편에서는 조 실장이 손을 내젓고 있었고요.
“좀 생각을 해 보자. 다섯 회사가 프레젠테이션을 한다고 윗선에 이미 보고가 되었데. 일은 안 해도 좋으니 여직원 한 사람이라도 좀 보내서 출석을 채워 달라고 저리 부탁이니 어쩌지?”
사장님도 난감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안의 중요성에 비하여 여직원이라도 보내라는 것은 말이 안 되었습니다. 더구나 ‘여직원 한 사람이라도’라니! 여성 공직자 입에서 여성비하의 발언이 그리 쉬 나오다니요! 우리 회사만 해도 여성들이 낸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성공한 예가 쏠쏠합니다.
한때는 여직원들이 차 심부름이나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소위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 상위시대가 아닌가요? 안 그래도 이 기관은 내부의 부패가 도마에 올라 사회적인 질타와 언론의 뭇매를 맞은 곳입니다. 이미지 관리의 필요성 때문에 TV 광고를 하려는 곳이랍니다.
스스로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인정했고, 공 기관으로서 들메끈을 고쳐 매고 개혁을 하겠다는 여성 공직자의 입에서 ‘여직원이라도’라는 말이 튀어나오다니. 그들에게서 힘없는 백성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딱 잘라 거부하는 모습을 기대한 스태프들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사장님은 ‘여직원이라도’에 해당하는 직원으로 하필 나를 지목하셨던 것입니다.
“저렇게 부탁하는데 내 얼굴 보아서라도 말이야. 그리고 강유미 씨는 부담감 갖지 않아도 되니 대신 당당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와요. 우리가 그동안 준비한 시안이 사실, 괜찮잖아!”
이 프로젝트는 사장님의 친척 소개로 비롯된 터였습니다. 혈연을 찾아든 것이지요. 큰 거래처 하나 들어오는구나 싶었는데,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조 실장도 정나미가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그는 잔뜩 쌓아놓은 자료들 속에서 얼굴을 쳐들며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건넸습니다.
준비해 놓은 콘티 그냥 설명만 해 주고 오라면서. 나는 어리둥절했지요. 경험도 없는 내게 경쟁프레젠테이션을 하라니! 학교 다닐 때 프레젠테이션에 임하는 기본자세 정도는 배운 적이 있지만, 프레젠테이터가 되려면 광고 바닥에서 베테랑이 되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자신만만한 표정관리와 함께 광고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다방면에 박식하고 유창한 말솜씨는 필수라고 했습니다. 독사 눈을 뜨고 바라보는 광고주에게 기죽지 말고 편안하게 그들을 요리해야 한다고요. 실장이 프레젠테이션하는 모습을 몇 번 참관했으나 이렇게 갑자기 그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것도 혼자 가야 한다니. 더구나 경쟁사들은 단단히 준비들 해 올 것이 뻔했고요.
우리 회사에서는 현실적으로 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즘 S 방송사 일이 밀려들어 지난주까지도 밤샘하는 날이 허다했고, 지금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조 실장 운신의 폭을 좁혀들고 있습니다. 그는 일주일 가까이 가족들 얼굴도 보지 못하는 처지랍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청에서 말하는바 ‘여직원이라도’의 수준이나 될까요? 그들이 말하는 ‘여직원이라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한번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생겼습니다. 내가 비록 이 바닥에서는 아직은 물이 덜 오른 직원이긴 하지만요.
우리가 모 청의 일을 포기하는 데는 사실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 동영상 TV 광고를 제작하는 프로젝트인데, 그들이 확보해 놓은 제작비예산은 한 편 만들기도 빠듯한 금액이었지요. 그것으로 세 편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손으로 그리는 일이니까 원가가 덜 들 것이라니! 손으로 그리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모르는, 현장 감각이 너무 떨어지는 집단이었습니다. 직원들 사이에 ‘도둑놈 심보’라는 말이 돌았고요. 현장에서야 무슨 일이 벌어지든 책상머리만 굴리는 상급 기관들이 업무상 과실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한 예였습니다.
단순 노동도 아니고, 창의력이 필요한 고급 두뇌들의 작업인데 한 편 값으로 세 편이라니! 시대의 트랜드를 이끌어가는 첨단 광고 산업을 무슨 남대문 시장 땡처리로 아는지. 그것은 소위 공정거래에 반하는 ‘갑’의 폭력이었습니다.
처음 조 실장의 커리어를 들먹이며 우리 회사에 접촉해 왔을 때,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여 두 편까지만 만드는 것으로 합의해 놓고 콘티(촬영 밑그림)작업에 들어갔었지요. 회사로서도 ‘관’의 일이니 한번 해 보자는 분위기였고요.
그런데 느닷없이 경합을 시켜 선정된 회사에 일을 주겠다고 다시 통보해온 것입니다. 무조건 우리에게 밀어준다고는 하지만, 그 말은 곧 공정한 심사가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과 같았지요. 이런 경우 미리 줄 회사를 결정해 놓고 들러리만 세우는 일은 허다합니다.
그래도 소위 개혁을 하겠다고 팔 걷어붙인 ‘개혁팀’에서 하는 일이니 좀 다를지는 모르지만. 만약 우리 회사가 탈락하면 시간 손해는 물론 직원들의 사기 저하 등, 보이지 않는 손해까지 입게 됩니다. 어쨌든 나는 우리가 만든 시안을 믿고, 햇내기 티 나지 않게 혼자 당당히 프레젠테이션을 해냈습니다. 시안이 좋으니 자신감이 생겼고, 무엇보다도 회사에서 리허설을 한 번 해선지 마음이 편했었나 봐요.
설혹 떨어지더라도 부담이 적은 건이라 연습 삼아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이었고, 그것이 오히려 기를 더 세웠을까요? 하지만 프레젠테이션을 끝내고 회사에 돌아오자 내 밝은 표정을 다들 반갑잖게 보는 눈치였답니다. 참 묘한 기분이었지요. 그래도 저는 그 일을 우리가 하기는 틀린 것 같다고 보고 드렸습니다. 대부분의 경쟁 PT 참여 회사가 세 편이 아니라 다섯 편이라도 만들겠다는 것을 전제로 프레젠테이션하는 것 같아서였지요.
내게는 사회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체득한 몹쓸 경험이었고, 사장님도 쓴웃음을 웃으면서 바쁘니 잘되었다, 잊어버리라 했습니다. 관공서나 대기업의 일에는 당장 이익보다는 일 자체에 상징성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사의 큰 실적이 되어 이후 다른 프로젝트에 제안서를 낼 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는 것이지요. 홍보 효과입니다. 다섯 편이라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달려드는 회사들은 뒤에 따라올 이 같은 프리미엄에 눈독을 들이는 것입니다.
공기관은 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더욱 잘 해보자고 개혁을 주창하는 개혁팀이라는 데서 이런 상거래상의 약점을 이용하여 더티 플레이를 펼치고 있으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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