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사라리
툭, 툭, 투둑, 툭!
어둑 새벽 전망대에 올라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난간 대 두드리는 소리가 손끝을 타고 전해온다. 바람의 기척이었을까, 마치 곡두처럼 전망대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자잘한 파도는 어스름을 움직여 여명을 재촉하고, 동트기 전의 수평선이 못다 진 별빛만 붙잡고 있는 신 새벽이다.
조그마한 포구마을, 바다로 꼬리를 내린 갯바위에서는 거무스레한 작은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가더니 큰 바다를 향해 건들건들 멀어져 간다. 쪽배다. 어촌의 하루가 시작되는가 보다. 새벽을 가르고 하나 둘 나서는 고깃배들, 어촌의 새벽은 늘 이런 모습으로 깨어나리라. 시나브로 섬 주변을 감싼 연무에 홍조가 배이면서 여명을 끌어온다. 일출을 잡으려 카메라의 방향을 돌리고 줌-인하니 모래톱에 엎어져 있는 장밋빛 사내의 몸뚱이가 뷰파인더에 불쑥 들어온다.
찰칵!
어스름을 가르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눈을 번쩍 뜬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자 남산을 오롯이 담은 도시의 새벽 풍경이 창틀에 가득 찬다. 개운치 않은 선잠 끝인데 잠결에 본 어촌의 잔상이 생시였던 것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 모처럼 잡은 남쪽 먼 바다의 출사(出寫)에 마음이 들떴던 것일까. 한나절 길 여정이니 서둘러야 한다.
“박 선상, 어서 일어나쇼. 지금 출발을 해야 일출을 제대로 찍을 수 있어라.”
이른 새벽, 섬마을 사라리의 이장 정달수가 발목을 잡아 흔든다. 모든 자연 현상이 그렇듯, 일출도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섬의 일출 맞이를 서두른다. 뽀얗게 드러나는 신작로까지 엷은 해무가 내려앉았지만, 여명을 맞으러 새벽을 달리는 기분은 상큼하다. 차가 구부렁길을 돌아 산길을 오를수록 희뿌연 바다가 같이 따라 올라서 섬이 가라앉는 듯 착시가 인다.
오를수록 깊어지는 것이 마치 인생길 같은데, 높이 오른 사람들은 도리어 그걸 모른다. 어둔 하늘에 총총히 박힌 잔별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해무로 그물망을 펼쳐 일출을 저지하고 있다. 전망대 동편 산마루에서 그물망이 찢겨 붉은빛이 쏟아들 때 구릉 사이로 열린 바다 캔버스에는 어떤 빛의 조화가 펼쳐질까. 동편으로 삼각대를 고정해 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사위는 아직 어스름한데 떠나온 마을 쪽으로 시선을 거슬러 내리던 순간, 멈칫한다. 쪽배 한 척이 포구를 막 벗어나고 있고, 그 모습이 눈에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환각의 장막이 벗겨지는 것처럼.
‘아! 이건……. 또 이런 일이 생기네!’
아직 어둑한 주변을 살피며, 나는 기억 속에 담겨 있던 이미지의 실상들이 하나하나 현실로 되살아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다. 이 어스름, 바다 빛깔, 희끄무레한 갯바위! 등줄기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내가 도대체 언제 이곳에 왔었다고!’
다도해 해상공원 끝자락에 있는 섬, 조도. 나는 이 섬에 처음 왔다. 그러나 이곳 도리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포구의 전경이 눈에 익어 낯설지 않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의 물꼬를 터 준 것은 조그만 쪽배였다. 기억 저편에서 부리는 대로 전망대 끄트머리에 서니, 저장된 기억들은 더욱 선명하게 현재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그 꿈이 얼마 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도 이 높이에서 포구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도 새벽 바다는 어선이 깨우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느껴졌던 누군가의 존재감, 카메라 파인더에 잡혔던 장밋빛 사내의 몸뚱이도 기억이 새롭다!
이런 경험은 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시감과는 깊이가 달랐다. 처음 가는 곳, 낯선 땅에서 특정한 사물의 모습과 마주치는 순간부터 나는 주변이 환하게 익숙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것은 마치 정지되었던 필름이 다시 돌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그 기억이 꿈에서 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실에서 있었던 이미지가 아니라 꿈에서 보았던 이미지, 하지만 너무나 현실과 같았다. 그것은 일종의 예지몽이기도 했는데, 그런 현상은 나를 운명론자로 만든 것 같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꿈에서 먼저 보게 되는 일이 거듭되면서, 사람의 삶이란 것도 미리 프로그래밍이 된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그 꿈속 기억이 현실로 치환된 현장에 서 있는 거다. 꿈에서도 이 자리, 전망대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서 있었고, 마을 옆구리 쪽에서 작은 쪽배가 포구 쪽으로 접근하더니……. 오래전에 꾼 꿈인데 그 이미지가 눈앞에서 퍼즐 맞추듯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새북 분위기가 어짜요? 멋져 불지라?”
나의 퍼즐 맞추기는 영사 필름이 끊어지듯 멈춰버린다. 옆의 정달수가 불쑥 끼어든 때문이다.
“안 그라요? 안작 잠이 덜 깨부럿소?”
꿈을 현실로 끌어 앉히려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정달수가 보챈다.
“일출모습이 기대됩니다. 새벽 바다가 참 좋네요.”
“바다가 좋기만 하다면 엄메나 좋것소! 도시 사람들이야 가끔 본께 그라재, 그 바닷속을 아는 사람은 어부들 배께 없어라. 바다 농사꾼들은 부부간에 밤새 다투다가도 아침이 되면 한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수밖에 없지라. 그러다 보면 다시 마음이 풀리기도 하고요. 뭔 말이냐 하믄, 바다 일은 혼자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 이겁니다. 쫴깐 생각해 보믄 뭔 말인지 알것지라?”
그것은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어부들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생활방식일 것이다. 바다는 사람의 피부까지 갈색으로 바꿔 놓는가. 똥똥한 체형에 반백의 머리, 갈색 피부지만 눈동자가 부리부리한 정달수가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을 잇는다.
“근디, 고것을 무시하고 바다에 나가부렀다가 변을 당한 사람이 있었단 말이어라. 그랑께 벌써 삼 년이 다 돼야 가는구먼요. 마누라가 서울 간 다음 날, 뭔 염병한다고 지 혼자 바다에 나갔다가 변을 당해 부렀지라. 그란디, 고것이 째깐 요상한 부분이 있다 요겁니다. 어짜요, 내 야길 한번 들어 보실람짜?”
정달수는 그 일이 못내 아쉬웠던지, 쩝쩝 입맛을 다시며 바다로 보낸 시선을 거두어 내게로 향한다.
“아, 예. 일출 시각 전까지만 말씀해 보시지요.”
나는 아직도 꿈과 현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데 상쾌한 바닷바람이 귓속을 파고든다. 정달수는 헛기침하면서 내 팔목을 잡아끌어 앉힌다. 다시 바다로 향한 그의 눈길에 담긴 이야기가 자못 궁금해진다.
“묘한 사건이었당께요. 그랑께 벌써 한 삼 년 되얐구먼이라. 들어 보시쇼.”
[박종규 소설가]
- 전 문학동인 글마루회 회장 /전 에세이스트문학회 회장 / 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 현 한국문인협회 문협진흥재단설립위원 / 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수필집<바다칸타타),<꽃섬> /소설집 <그날> / 장편소설<주앙마잘>,<파란비 1.2>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박종규 관련기사목록
|
연재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