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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 - 해석 5

중국문자의 발음과 외국문자의 발음의 차이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1/03 [07:54]

[우리글]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 - 해석 5

중국문자의 발음과 외국문자의 발음의 차이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입력 : 2013/01/03 [07:54]
[우리글=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豈能達而無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어찌 능히 통달하여도 (벌어진 틈이) 없으리오! 중요한 것은 모두 각자 처한 바를 따라 편안하게 함이니, 가히 강제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문자를 빌어쓰는 외국의 어느 학자라도 중국어 발음과 그 나라의 발음에 통달하여 중국문자를 아무리 잘 대응시켜 사용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문자의 발음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그 나라 특유의 발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어느 단어나 용어에 대하여 완전히 일치하지 아니하는 발음은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놓아두어야 하는 것이다.

억지로 같게 한다면 중국문자의 발음이 달라지거나 그 나라 특유의 발음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중국문자를 응용하여 문자를 고치어 변형사용하여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실재 역사적으로 거란이나 여진은 중국문자의 발음과 차이가 있어 특유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지구상의 역사에서 그 문자들은 사라졌다.

나라나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는 지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이를 통일하기 위하여는 무한정의 정책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단군조선 시대에 10년마다 신시(神市)를 열어 교역을 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로 인하여 어느정도 말의 통일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던 것으로 된다. 그러나, 1,000년 또는 2,000년 이상 흐르는 사이에 왕래는 뜸해지고 심지어 전란 등으로 교류가 단절되는 것으로 인하여 광대하였던 단군조선의 영역 내에서도 점차 부족 등 각 지역의 말이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 대표적으로 단군조선의 부족으로서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된 역사적 존재로는 흉노, 돌궐, 몽골, 거란 등을 들 수 있다.

사방으로 멀리 떨어진 부족이나 마을의 말이 특유의 말로 변할 가능성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지금과 같이 방송이나 학교가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경우에는 언어의 통일이 거의 완벽할 수 있으나, 아직도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지방 특유의 언어가 일거에 없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없어지지 아니하는 사투리는 표준어와 함께 동의어로서 인정하는 것도 한 방법이며, 다양한 언어구사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투리로 알고 있는 수맣은 말들 중에는 너무나 귀중한 고유어(古有語) 또는 고어(古語)가 산재해 있는 것이 되는데, 언어사전으로 집대성하여 표준어로서 사용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 초기에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말은 당시의 중국문자인 소위 한자의 발음과 달랐던 것이며, 억지로 같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 된다. 이는 우리역사상 배달나라 말기로부터 고대중국이라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던 나라가 파생되어 독립하여 나가면서 벌어지기 시작한 역사적 흐름이며, 이에 따라 조선시대 초기에 당시 중국문자(소위 한자)의 중국어 발음과는 다른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표기할 수 있는 글자가 필요하였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며, 이를 실천적으로 고유문자를 재창조하신 분이 세종대왕이신 것이다.

조선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나 풍토 등이 중국(당시 명나라) 사람들과 달라 언어가 달랐던 것이며, 중국문자를 읽는 발음도 달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종대왕은 중국문자 소위 한자의 발음을 우리식 발음으로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였던 것이다. 물론 동국정운의 발음은 당시 한자를 읽던 중국어 발음에 가까운 소리가 되며, 고려시대 이전부터 이미 우리 고유의 한자발음이 있었기도 하였던 것이 된다.
 

세종대왕 당시 曹(曺)의 발음은 [마 + 유성음 ㅅ . ㄹ 조]인데 지금의 말로는 [마을 조]가 된다. 단, 마을은 관청(官廳)이라는 말도 된다. 그런데, 마을은 신라시대에 [마실]이라고도 하였던 것이 되므로, [마실 조]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두식 표기는 신라시대에 관한 역사기록에서 증명된다. 다만, 이두식 표기는 우리말을 표기할 때 한계가 있어 완전하게 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한문화사업총단 대표/천산역사연구원장/천부역(天符易)과학원장/마고족보연구원 대표/세계무궁화축제문화사업회 이사/독도 대마도 동해 만주 수호회복단 이사/천웅도 문무원 이사/광개토황비문연구원 이사/천부어문연구원 이사/산삼문화사업단 이사/한국삼협회 고문/홍익정치연구원 이사/한문화컨텐츠개발원 이사/한문화유물문화재연구원 이사/한문화사업단 이사/행운천지인 역리풍수 대표/(주)한문화개발 고문/플러스코리아타임즈 이사/춘천고조선유적지보전협의회 총괄기획위원장/천부풍수연구원 이사/풍수지리신문 편집국장/현 법무사/저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 <생활사주> <생활기문> <천부풍수> <천웅도와 홍익인간><우리말글과 세계언문역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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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3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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