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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의 운주(산동성)는 서신라의 땅

고구려의 후예인 제나라는 대륙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조재범 | 기사입력 2008/10/02 [15:13]

이사도의 운주(산동성)는 서신라의 땅

고구려의 후예인 제나라는 대륙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조재범 | 입력 : 2008/10/02 [15:13]
제나라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려주신 J교수님은 아주 뜻깊은 일을 하셨지만 이 분 역시 반도사관을 벗어나지 못 하셨고 산동성 운주 지역을 당나라 땅으로 인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김웅원이 헌덕왕의 명을 받들어 무장병 3만을 이끌고 간 것을 치안 유지차 간 것이라고 현명하게 분석하셨지만, 역시 신라방 같은 신라인의 자치 기구를 위해서 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해서 역시 식민사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주는 당나라 땅이 아닙니다.
만일 운주가 당나라 땅이라면 이런 기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애장왕 원년 조입니다.
애장왕이 즉위하고 좀 지나서인데 당나라에서 소성왕이 죽은 줄 모르고 소성왕의 책봉 교서를 써서 위단이라는 사람에게 신라에 전해주라고 했는데 이 위단이가 운주에 와서야 소성왕이 죽은 줄 알고 다시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만일 운주가 당나라 땅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웃 나라의 왕이 죽은 일은 아주 중대한 일이라서 이런 소식을 들었을 경우엔 즉각 수도에 보고되었던 것이 통상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소성왕이 죽고 애장왕이 즉위하고 좀 지나서까지 소성왕의 죽음을 몰랐고 운주에 와서야 알았다는 것은 운주가 당나라 땅으로 볼 수 없는 증거라고 봅니다.

즉, 위단이 신라에 와서야 소성왕이 죽은 것을 알았다고 봐야 한다는 거죠. 수도에서조차 모르고 있던 소성왕의 죽음을 변방에 와서야 알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라고 봅니다.

이로 봐서 이사도가 있던 제나라는 본래 신라 땅이고 그 지역에 와 있던 당나라 관리(ex. 양주절도사 조공+ 그 외 이정기 일가를 도왔던 당나라 번진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문무왕 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서기 663년에 신라엔 당나라의 계림도독부란 것이 설치됩니다. 즉, 이는 신라가 당나라의 연방의 1국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좀 기분이 나쁩니다만 사서상의 기록은 그렇습니다.

옛 소련을 봅시다.
소련 역시 한 나라라기 보다는 15개의 자치 공화국이 구성하고 있는 연방국입니다. 저 때의 상황이 소련식의 연방제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신라 땅에 온 당나라 관리들은 소련에서 치면 모스크바에서 각 자치 공화국에 파견한 장군들과 같다는 셈이죠.

그 이전 성덕왕 때를 보면 대진국(발해)이 산동성 등주를 공격하니 당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고 또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어 신라군의 징집을 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과연 당나라가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 이런 걸까요?  그렇다면 신라는 왜 굳이 파병을 했을까요?
 
산동성 등주가 당나라 땅이라면 "아, 난 동족을 칠 수 없소"하고 거절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는 역시 등주가 신라 땅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나라가 자신의 군사도 보내고 그 주변에 신라가 있으니까 원조를 요청한 것입니다.

다시 저 애장왕 때의 기록을 검토해봅시다.
만약 산동성 운주가 당나라 땅이라면 굳이 [삼국사기]에서 위단이 어느 지역에서 돌아갔다고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오던 길이라고만 써도 될 것을 뭐하러 글자 수를 늘려서 수고롭게 한단 말입니까?

성덕왕, 애장왕, 헌덕왕 때의 기록을 볼 때 산동성 지역은 엄연한 신라 땅이라고 봅니다.
허나, 이 당시 동아시아 정세가 워낙에 특이하다 보니까 해석하는 데서 여러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죠.
 
 
위 이론에 대한 사서의 기록 분석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 가을 7월에 당나라 운주절도사(鄆(운)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헌종이 장차 이를 토벌하고자 조칙으로 양주절도사(楊州節度使)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 군사를 징발하였다. 왕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무장한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원문) 秋七月 唐鄆(운)州節度使李師道叛 憲宗將欲討平 詔遣楊州節度使趙恭 徵發我兵馬 王奉旨 命順天軍將軍金雄元 率甲兵三萬以助勑(래)之

(지도로 풀어보면)
▲  순천은 북경일대, 운주는 산동성, 양주는 강소성


(1) 당나라 헌종이 수도 장안에서 양주절도사에게 명령을 한다
(2) 명을 받은 양주절도사 조공이 한반도로 와서 군사를 징발한다
(3) 이에 신라헌덕왕은 순천군 장군 김웅원에게 군사 3만을 준다
(4) 김원웅은 배를타고 반란을 일으킨 운주절도사 이사도를 평정하러 간다

→ 순천이 하북성 밀운으로 나온다(고지도상 '순'으로 표시)

(의문점)
(1) 운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한반도 순천에서 병사를 구하러 온다는게 말이되는가 ?
(2) 그 넓은 대륙의 당나라군사는 다 어디로 가고 한반도로 구하러 오는가 ?
(3) 군사 3만이 내 집 드나들듯이 황해를 건널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4) 신라가 그땅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를 원조 받은 것일 가능성은 ?
(5) 대륙내 지명중 순천이 있는지 찾아보자.  → 북경 일대가 '순천부'였다는 기록이 있군요.

한반도내 순천은 두군데 입니다. 함경남도 순천과 전라남도 순천입니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통일신라의 강역을 대동강 ~ 원산을 잇는 선이라 합니다. 함경남도 순천은 통일신라의 강역을 벗어나 발해땅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함경남도 순천이 합당하나 발해땅이므로 근세지명 전남 순천쪽으로 해석하는 분이 있나 봅니다.

어쨌거나 이 사건은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이지 한반도 사건이 아닌것으로 보입니다.

 
▲  장안에서 명을 받은 양주절도사가 한반도 순천에 와서 군대를 징발할 수는 없다


고구려의 후예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란?

(이사도는 이정기의 후손 이납의 아들) 산동성에 “제”나라를 세운 이씨 일가는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간 산동반도를 다스리며 당의 행정수도 낙양을 공략했었다.

'제'나라는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正己)/이납(李納)/이사고(李師古)/이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이정기에 뒤를 이은 아들 이납은 782년 11월 산동성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로 정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 운주가 치우천자의 릉이 있는 산동성 동평지역을 의미한다

이납(李納)은 슬하에 사고(師古), 사도(師道), 사현(師賢), 사지(師智)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 에 나오는 다음기사의 주인공은 이정기의 아들 이사도(李師道)를 말함이다

당나라 영향력 밖에 있는 고구려 후예 이사도를 신라장군 김원웅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동족을 멸하러 갔다는 서글픈 역사의 한 단면인 것이다.
답이업네 08/10/02 [18:20] 수정 삭제  
  그 이전 성덕왕 때를 보면 대진국(발해)이 산동성 등주를 공격하니 당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고 또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어 신라군의 징집을 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과연 당나라가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 이런 걸까요? 그렇다면 신라는 왜 굳이 파병을 했을까요?

산동성 등주가 당나라 땅이라면 "아, 난 동족을 칠 수 없소"하고 거절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는 역시 등주가 신라 땅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나라가 자신의 군사도 보내고 그 주변에 신라가 있으니까 원조를 요청한 것입니다.

이거 뭐 문젝가 좀 심한거 아닙니까?
대진국(발해)이 신라 땅을 공격하는데 당나라거 먼저 대지군이랑 싸우고 신라에 원조를 요청하고 이거 뭐 정신나간 소리 아니세요.대진국이 신라를 치면 신라가 먼저 싸우고 당나라에 요청을 해야 정상이 아닙니까.
정신나간소리 하지 마시고 공부나 좀 똑바로 하시던지.이거 뭐 병원좀 가따와야 되지 않나?
aaa 08/10/02 [18:56] 수정 삭제  
  삼국사기의 운주가 지금 산동성 운주라는 증가 있으면 좀 봅시다.
우리역사 08/10/03 [07:57] 수정 삭제  
  삼국사기 운주나 당서의 운주나 그 내용이 같고 그 위치가 같다.
그 운주는 산동성으로 서신라의 땅에서 이정기가 제나라를 세웠습니다.
aaaa 08/10/03 [11:50] 수정 삭제  
  말로만 같다 하면 그거 밑는 사람 별로 없으니까 근거 내놓고 설명을 하세요.
공부하자 08/10/03 [13:21] 수정 삭제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경사(즉,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명백히 동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가 있고, 남쪽으로 바다건너 백제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남으로 바다건너 신라.백제가 있다는 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나라 수도 서안에서 5천리에 고구려 평양성이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안에서 북한 평양까지가 5천리다. 평양의 낙랑유적지에서 당시 가구.인구수를 조사하여 통계를 낸 한나라의 공식문서에 해당하는 목간이 출토되었고, 낙랑무덤들에서 광무제라는 후한연호가 기록되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평양의 낙랑군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만든 낙랑군이 아니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그 낙랑군은 산동지역이다.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라는 구당서 내용에서 북한 평양이 한나라 낙랑군의 옛땅이라는 내용은 한나라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다.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비정하면 한사군은 한반도지역으로 규정되고,[후한서][삼국지-동이지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위만에게 망한 산동반도에 위치한 번조선 기준이 수천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도망쳐 한반도남부지역인 마한을 쳤다는 내용자체가 모순이 생긴다. 그리고 소위, 재야사학자들은 단군3조선의 마한이 한반도지역임을 인정하면서 자기들의 논리를 만들기위해 마한지역을 중국에다가 갖다붙이는 생쇼를 하는데, 이건 명백히 오류다. 단군3조선의 마한은 한반도지역이고, [후한서][삼국지-동이지전]에서 말하는 '한'은 한반도 마한지역의 3한을 의미한다. 사방4천리라고 둘레거리까지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마한전체국가가 74개국하니 무슨 거대한 국가정도로 생각하는데, 내용에서 국가라고 했을때는 지금의 읍단위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북한 평양의 낙랑군은 한(漢)족 낙랑식민지로 후한의 광무제가 기원후 44년에 “바다를 건너” 개척한 것이다. 위만 조선을 무너뜨린 전한의 무제 유철이 기원전 108년에 설치한 것이 아닌 것이다. 150여년의 차이가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멸망시켰는데, 한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소속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 위만조선이 평양부근에 있었다는 설과 낙랑국과 낙랑식민지를 연속적으로 보게 되면 일제강점기의 관학사학자들의 인식을 답습하는 것이 된다. 위만 조선이 바로 평양부근에 있었고, 전한 유철에게 패망하여 처음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나중에 낙랑군만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당나라 수군의 백제정벌



"3월 唐高宗(당고종)은 좌무위대장군 蘇定方(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管(신구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고 金仁問(김인문)을 副大摠管帥(부대총관수)에 左驍衛將軍(좌효위장군) 劉伯英(유백영)등은 水陸軍(수육군) 13만명으로 백제를 토벌하는 勅書(칙서)를 내리시니 王(무열왕)은 우夷道行軍摠管(우이도총관)이 되어 장병으로 하여금 聲援(성원)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은 金庾信(김유신), 眞珠(진주), 天存(천존)등을 서울에서 장병을 출동시켜 6월 18일 南川停(남천정: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였다. 蘇定方(소정방)은 萊州(래주:산동성 액현)에서 출발하여 船舶(선박:배)을 띄워 천리의 물길을 따라 동쪽(한반도 서해)으로 내려왔다."

또한 명백히 "蘇定方(소정방)은 萊州(래주:산동성 액현)에서 출발하여 船舶(선박:배)을 띄워 천리의 물길을 따라 동쪽(한반도 서해)으로 내려왔다."라고 기록함으로써 백제본국이 한반도 서남해(부여)에 위치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내용에 래주에서 배를 타고 1000리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고 기록또한 산동반도 래주에서 서남해까지 거리가 1000임이 입증된다. 그리고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소정방이 부여를 정벌하고 대당백제정벌비문을 기록했다. 그 흔적이 부여 정림사지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중국의 북동부 해안지역의 백제영토는 근초고왕이후 정벌한 서백제 영토다. 동성왕이 시해당한 후에 친동성왕 태수들이 고구려에 귀순하거나 중국세력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당나라의 백제정벌비문(부여 정림사지5층 석탑)

일제 식민사관이나 중국 동북공정논리와 같은 신라사관의 열등감에서 기인한 논리라고 본다. 제발 민족사학이라 하지말고 신라사학이라고 고백해라!!그래봐야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밥먹고 하는 일이 역사연구만 하는 기존의 사학자들이 그렇게 어리버리한 사람들이 아니다. 가능한 종합적이고 객관적 시각으로 역사연구를 해야 한다. 자신들의 논리에 맞지 않으면 출토된 모든 유적유물들과 문헌들도 조작되었다고 억지를 부릴 것인가?

신라는 [후한서][삼국지-동이지전]의 기록이 증명하듯이 진시황의 노역에서 탈출하여 마한지역으로 유입된 단군조선의 유민들이 마한으로부터 경상도지역을 할양받아 6씨족이 만든 진한에 기원을 두며, 흉노세력인 김알지왕조를 통해서 당나라를 상국으로 사대함으로써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나라다. 그러한 반민족적인 신라의 역사에 대해 축소.은폐시키기보다는 인정하고 자성하고 지역패거리주의에서 탈피하여 거시적인 관점으로 민족공동체차원에서 보다 나은 역사를 만들기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민족전체를 살리는 길이다.

일제 식민사관과 중국 동북공정하고 싸우기 바쁜데, 신라사관하고 싸우며 에너지낭비할 시간이 어디있나!! 일본군 장교 박정희와 국민들을 총칼로 살해하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 사진을 아무런 죄의식없이 올려놓고 역사를 기술하는 자들아!!

일본이 조선에 사죄하고 배상해야할 문제인 일본의 조선침략과 일제식민지,나가 민족분단 등 한국과 일본과의 악연의 역사적 책임도 동이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당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세력을 일본열도로 몰아낸 신라 김알지 흉노세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고.김알지 흉노유전자들이 민족비극의 원흉들이라고 인정을 해야 한다.역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넘들치고 역사를 왜곡축소하지 않는 넘들이 없기 때문이다.
성훈 칼럼리스트 08/10/03 [20:38] 수정 삭제  
  공부하자님은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타파하자 해놓고 본인은 식민사학의 이론인 반도사관을 펴고 계십니다.
1) 낙랑군이면 낙랑군이지 그게 어떻게 한반도와 하북성을 왔다갔다 합니까?
2) 단군조선의 마한은 나중에 낙랑국으로 변하고, 기준의 한이 3한으로 되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후삼한이라 합니다. 그 마한은 산동성 대방 근처에 있습니다.
3) 읍정도를 국가로 했다고요? 그게 읍장이지 어찌 국왕이라 합니까? 한반도로 마한을 붙이려다보니 74국이 너무 크다보니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4) 당나라 수군의 백제 정벌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조하세요. 소정방은 래(萊)주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협(莢)주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海는 대야택이거나 강소성 해지방입니다. 대당백제정벌비는 일제가 만들어 세웠거나 옮겨놓은 겁니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423
제목 : 소정방은 백제를 멸하러 황해를 건넜나?
5) 진시황의 노역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신라의 백성이 되는데 그 마한은 한반도 경상도가 아니라 후삼한의 마한 즉 대방 근처가 됩니다. 진나라 장성은 황하를 건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장성 노역자들이 한반도로 옵니까?

말로만 식민사학/동북공정과 싸우자고만 하지 말고 사관부터 먼저 정립을 하십시오. 공부하자님의 이론이 일제 식민사학과 똑같은데, 그런 본인이 식민사학하고 싸워야 한다니 웃기다 못해 기가 막힙니다.
제발 그런 왔다리 갔다리 엉터리 이론가지고 국민을 현혹하지 말기 바랍니다.
공부하자 08/10/03 [23:09] 수정 삭제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라는 구당서 내용에서 북한 평양이 한나라 낙랑군의 옛땅이라는 내용은 한나라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다.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비정하면 한사군은 한반도지역으로 규정되고,[후한서][삼국지-동이지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위만에게 망한 산동반도에 위치한 번조선 기준이 수천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도망쳐 한반도남부지역인 마한을 쳤다는 내용자체가 모순이 생긴다. 그리고 소위, 재야사학자들은 단군3조선의 마한이 한반도지역임을 인정하면서 자기들의 논리를 만들기위해 마한지역을 중국에다가 갖다붙이는 생쇼를 하는데, 이건 명백히 오류다. 단군3조선의 마한은 한반도지역이고, [후한서][삼국지-동이지전]에서 말하는 '한'은 한반도 마한지역의 3한을 의미한다. 사방4천리라고 둘레거리까지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마한전체국가가 74개국하니 무슨 거대한 국가정도로 생각하는데, 내용에서 국가라고 했을때는 지금의 읍단위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북한 평양의 낙랑군은 한(漢)족 낙랑식민지로 후한의 광무제가 기원후 44년에 “바다를 건너” 개척한 것이다. 위만 조선을 무너뜨린 전한의 무제 유철이 기원전 108년에 설치한 것이 아닌 것이다. 150여년의 차이가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멸망시켰는데, 한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소속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 위만조선이 평양부근에 있었다는 설과 낙랑국과 낙랑식민지를 연속적으로 보게 되면 일제강점기의 관학사학자들의 인식을 답습하는 것이 된다. 위만 조선이 바로 평양부근에 있었고, 전한 유철에게 패망하여 처음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나중에 낙랑군만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자신들의 논리에 안 맞으면 식민사관이라고 비하매도하는 자세가 역사연구하는 사람들의 자세요? 모르면 더 깊이 종합적으로 공부하시요!!나중에 님의 논리가 아니면 님은 헛수고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허상을 심어준 것 밖에 안됩니다.
공부하자니에비다 08/10/04 [07:34] 수정 삭제  
  니머리에 들어있는 똥을 파버리고십다.이 인간말종아123
ASDFA 08/10/04 [11:44] 수정 삭제  
  123씨 언제부터 중국 내륙 호수가 해로 불렸는지 아세요.
모르면 공부 좀 하시요.미친소리 하지 마시고.완전 또라이네.
ASDFA 08/10/04 [16:03] 수정 삭제  
  왜서 언제부터 어느 민족부터 호수를 해로 불렸는지 좀 공부하시라 그거 여요.
청해호가 왜서 청해호라 불리는지 아세요. 모르면 제가 설명을 해드릴 가요.
중국가서 청해란곳 있나면 중국사람등 없다고 답할겁니다.
청해성 청해호는 있지만 청해라는 곳은 없는거로 알고 있습니다.
ASDFA 08/10/04 [17:14] 수정 삭제  
  조선족이든 아니든 지간에 민족 역사 연구에 뭐 문제가 있습니까? 솔직히 저 중국사람입니다.조선족도 아니고 화교도 아닙니다.중국 싸이트에 이 동네 이상하단 소리가 나기에 보러 온겁니다.뭐 안데는거라도 있습니까?

언제 부터 중국 내륙 호수가 해(해로 불리는 호수가 많그던요)로 불려 왔는지 아시나 물었지 해가 청해라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청해호가 있지 청해란 곳은 없다나까요.

그리고 조선족도 좋고 한국 분도 좋고 범죄는 다 일으키는 겁니다.한 민족끼리 까대기 하는 민족은 별로 업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이 민족만 이러는지 몰라.참!!!!
ASDFA 08/10/04 [18:24] 수정 삭제  
  그때 당시 지명 혹은 지역명을 연구하고 가다붙이던지 말든지 하자 그거죠. 근데 이 싸이트보면 완전이 수백년후 중국지도나 짐시어 청나라때 지도 가지고 2000년전 소설을 쓴다 그겁니다.참 답답 합니다.여기글을 중국싸이트까지 퍼지니 제가 알고 찾아온거고.중국사람들 한국욕하고.그러니 뭐 역사연구를 똑바로 하고 글을 쓰자 그겁니다.몇사람 잘 못으로 천체 한국사람 욕볼일 없엇으면 합니다.
한국 막로동하러간 조선족 한족도 좋고 한국에서 아무생각없이 중국 진출한 사람들이나 다 똑 같다고 봅니다.솔직이 말하면 기분 나쁘시겄지만 제가 북경 왕징지역에 사는데 이 동네 한국사람들도 문제니다.중국 유학온지 몇년되는 학생이 아직 언어소통도 안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중국에서 배우지 못하고 벌어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들어가서 범죄 일으키고 하니 전체 조선족이 욕먹고 한국에서 잘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중국 출발해서 모여서 살면서 말성을 피우고 하니 혐한이 생기는 겁니다.한국간 조선족 만 보고 조선족 전체를 욕하지 말고 중국와서 난리치는 한국 사람 보고 한국 전체를 욕하지 말았으면 하는데 그게 그리 쉽지 않다고 봅니다.
ASDFA 08/10/04 [18:45] 수정 삭제  
  똑같은 막로동으로 한국에서 중국보다 훨씬 만이 벌수 있나는 자체입니다.
저도 중국 욕하면서 중국에 사업하라 오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왜 일가요.
심지어 한국에 있는 집 전에 놓고 그 이자로 중국와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중에 놀고 먹는 사람도 많지만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려 하는데 중국 사회 자체를 이해 할수 없으니 일단 살면서 중국을 이해 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일부있습니다.아주 똑똑한 사람이다 생각을 합니다.막무가내로 사업전개하고 실패한 사람보다 얼마나 나은지 모릅니다.
제가 대학전공이 조선어고 한국 대기업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으며 한국 본사서도 일년 넘게 근무한 경험이 있습니다.글때 한국말이 많이 늘었습니다.
ASDFA 08/10/04 [18:51] 수정 삭제  
  현재까지 가지고 있는 증거 가지고 그해를 황해로 생각하는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고서기록이나 다른 증거가 나오기 전에 그것이 정답이라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그 시기 역사기록이 별로 많지 않다는게 사실입니다.
ASDFA 08/10/04 [19:43] 수정 삭제  
  중국 고서에 보며는 당나라와 신라사이에 많은 무역에 진행되었다고 있습니다.
북에서 등주(登州) 운주(莱州) 남으로 촉주(楚州,江苏淮安),양주(扬州)까지 상인들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촉주에 신라관(新罗馆) 운주에 신라坊이 있었는데 신라 상인들이 모셔사는 곳이라고 합니다.그때 당시 통신능력으로 위단이 운주에서 신라 소성왛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는게 정상이다 생각을 합니다.
ASDFA 08/10/04 [19:52] 수정 삭제  
  중국 자료에 보면 배가 400척이고 수군이 4만 3000 육군이 6만으로 나와 있습니다.
40만은 어디서 나온 건지?
ASDFA 08/10/04 [20:21] 수정 삭제  
  관련 내용이 너무 많으니 직접 가서 좀 보시요.어느정도 이해할지 모르겠네요.
http://www.famana.com/mysg/zhdbj.htm
중국글로 쓰여 있는데 알아 볼수 있을 라는지.
왜서 원병을 보낸 사람은 10만이라 하는데 신라에서 40이라 할가요.군사적으로 보면 답이 좀 나오는것 같은데.
ASDFA 08/10/04 [21:33] 수정 삭제  
  第二,孙仁师所部的战斗力问题。两《唐书》等中国侧史料说得很清楚,孙仁师所部为淄、青、莱、海4州之兵7000人,或称“齐兵”7000人。但《三国史记》《新罗文武王纪》龙朔三年五月条却说“诏遣右威卫将军孙仁师率兵四十万至德物岛,就熊津府城”,大唐援军数量竟达“40万”,是中国侧数字的57倍,这明显是夸大其词。不论这种谣言系何人所造,其目的只有一个,即壮大援军声势,隐藏其真实实力。那么这支7000人的援军战斗力究竟如何呢?这个问题需要具体分析。



张沛编《唐折冲府汇考》中记录了唐代各时期近700个折冲府,淄、青、莱、海并没有折冲府见于记载,所以孙仁师所部不是府兵。《旧唐书》卷38《地理志一》载:“东莱守捉,莱州刺史领之,管兵千人。东牟守捉,登州刺史领之,管兵千人。”莱州、登州已分,这两个守捉也不是龙朔二年的编制。而后来设立监管这些地区的兖海、平卢军两节度使此时也不存在。



据《旧唐书》同卷,4州贞观十三(639)年在籍户数分别为海州户8999、口43693,青州户10658、口56317,淄州户6323、口34425,莱州户11568、口63396,总计户37548、口197831;全国在籍户3041871、口12351681,4州总计户口占全国分别为1.23%和1.60%。天宝十二(753)载东海郡(原海州)户28549、口184009,北海郡(原青州)户73148、口402704,淄川郡(原淄州)户42737、口203821,东莱郡(原莱州一部)户26998、口171516,东牟郡(原莱州一部)户20298、口108900,总计户191730、口1070950;全国在籍户9187548、口52881280(此为天宝十三载数字),5郡总计户口占全国2.09%和2.03%。永徽三(652)年全国在籍户约385万,以每户6口计2310万口。从贞观十三年至永徽三年,户数年增长率1.8%,口数年增长率5.1%,这是因为唐朝疆域不断扩大,逃户、隐户大量检出的缘故。从永徽三年至神龙元(705)年户数年增长率仍有0.94%,口数年增长率为0.95%,这还是很高的。若永徽三年至龙朔二年这10年内口数增长率仍有1%,龙朔二年全国在籍约2552万口。以龙朔二年4州在籍人口占全国1.8%计,约有45.94万口。再按照3.5口出1丁计,4州当时共13.13万丁。天宝十三(754)载,全国课丁约占在籍丁数的51%,按规定这些课丁每年需承担20天的劳役。如龙朔二年4州课丁比例与天宝十三载全国比率相当,其时当役的壮丁不过约3670人,才及孙仁师所部人数的一半多。由此判断,孙仁师所率4州兵只能来自强行征募。



唐代募兵中不乏精勇善战的豪杰,薛仁贵就是一个典型案例,但我们仍须承认,绝大多数募兵的战斗力并不如日夜操练的府兵。前面提到,龙朔元年征讨高句丽时也进行过一次大范围的募兵,当时在河南、河北、淮南3道67州招募了44646人从军;而这次在4州之内便招募7000人从军,其比例之高实在惊人,战斗力自然大打折扣。而《旧唐书》《刘仁轨传》引其后仁轨所上表文则更明确反映了这些募兵的状况:“州县发遣兵募,人身少壮,家有钱财参逐官府者,东西藏避,并即得脱;无钱参逐者,虽是老弱,推背即来。……发海西之日,已有自害逃走。……百姓不愿征行。”这些募兵“从显庆五年以后,征役身死,更不借问”,“洎到西岸,唯闻枷锁推禁,夺赐破勋,州县追呼,求住不得,公私困弊,不可言尽”,“又为征役,蒙授勋级,将为荣宠,频年征役,唯取勋官,牵挽辛苦,与白丁无别”。他们到了百济之后,“手脚沉重者多,勇健奋发者少,兼有老弱,衣服单寒,唯望西归,无心展效”。这正是孙仁师、扶余隆、刘德敏等所率援军的真实面貌,正是为了掩饰外强中干的实情,“四十万”之说才应运而生。包括行军长史刘仁轨在内,当时并不了解这些情况,百济、新罗更无从探察。鬼室福信等必定如临大敌,遣水陆大军从中阻击,企图将援军与泗沘守军隔绝开来,各个击破。

백제의 서해는? 08/10/04 [22:21] 수정 삭제  
  백제의 서해는 어디인고 하니 바다가 아니라 바로 대야택이란 큰 호수입니다. 아래 중국 학자의 논문을 보세요.

西海:这个西海不可能是蒲昌海,距离太远了。何幼琦先生认为《海经》中的西海就是古代的巨野泽,古亦称大野泽、勃(渤)海[2],其说良是。古时河、济、濮、汶等水皆注之,形成了一个巨大的淡水内陆海,水面甚为广阔,《元和郡县志》云:“大野泽在巨野县东五十里,南北三百里,东西百余里。”《宋史·宦官传》:“梁山泊,古巨野泽,绵亘数百里,济、郓数州赖其蒲鱼之利”,可见其面积之广大,故古人以海视之。此泽今已基本堙没为平地,东平湖乃其遗存的部分水面,所谓“沧海桑田”由此可见矣。

서해 : 이 서해가 蒲昌海(포창해)가 될 수는 없다.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何幼琦(하유기)선생이 (역자 주 : 산해경인 듯)에 나오는 서해를 고대의 거야택(巨野泽)(옛날에는 대야택, 발해(勃,渤海)라고도 불렸다.)으로 본 것은 옳은 말이다. 고대의 河、济、濮、汶강은 모두 이 곳으로 흘러들어서 거대한 담수 내륙해를 형성하였다. 수면이 매우 광활한 바, 에 이르기를 “대야택은 거야현(巨野县) 동쪽 오십리에 있다. 남북이 삼백리 동서는 백여리 이다”라고 하였다. 에는 “양산박, 고대의 거야택은 수백리나 이어져 있다. 제,운(济、郓) 등 여러 주가 그 곳에서 고기잡는 것에 의존하였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 면적이 광대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이 것을 바다로 인식하여 보았던 것이다. 이 호수는 이제 그 기본(본래 모습)이 매몰되어 평지가 되었다. 동평호(东平湖)가 겨우 그 일부 남은 수면인 바, 소위 “푸른바다가 뽕나무 밭이 된다(沧海桑田)”는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다고 하겠다.
ASDFA 08/10/04 [23:17] 수정 삭제  
  그것도 젊은사람들이 별로 없고 늙은 병사들이 많다고 합니다.적을 속이기 위하여 40만이라 뻥을 친거라고 나옵니다.
구당서에 639년 당나라 인구가 1200만으로 나오기 때문에 40만은 너무 많지 않는가 생각이 듭니다.
ASDFA 08/10/05 [00:27] 수정 삭제  
  당나라 전성기 인구가 구당서에 5000만이라고도 나오긴 나옵니다.
그때가 754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120년을 통하여 영토도 많이 커지고 인구도 많이 늘었습니다.신인사가 거느린군은 7000이고 그때 이미 刘仁愿이 거느린 군대가 백제와 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 제가 긍금한것도 백제하고 신라 인구 입니다.
고구려 전성기에 69만7000호로 나오고 있습니다.백제인구가 400만? 신라인구도 백제와 비슷한거로 알고 있는데 지금 한국 땅보다도 작은 땅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뭐 먹고 살았을가요.
중국 고서 당서에 76만호, 大唐平百济国碑铭에 24만호로 적혀 있는데 어느것이 맞을가요.중국 학자들은 24만호에 120만 인구가 맞지 않게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인구가 얼마나 되냐는 더 연구해야 된다고 봅니다.
ASDFA 08/10/05 [00:34] 수정 삭제  
  (1)显庆五年七月九日至十日,黄山之役,百济将军阶伯以兵5千敌新罗5万之众,百济军大败,阶伯死之;

(2)七月十日,伎伐浦之役,大唐苏定方率军大破百济,死者数千人;

(3)七月十三日,泗沘原之役,唐罗联军大破百济军,杀虏万余人;

(4)七月十五日义慈王降,其后唐罗联军屠杀百济丁壮,劫掠百姓,至八月十六日百济复国运动兴起,旬日于任存聚众3万余人;

(5)八月二十六日,唐罗联军发动第一次任存之役,未能将该复国军据点拔除,伤亡不明;

(6)九月三日,苏定方以百济王及王族臣寮93人、百姓12807人自泗沘乘船回唐,《三国史记》《金庾信传》称俘虏中有2万百济士卒;

(7)九月二十三日,复国军围攻泗沘城,城中唐罗守军达1万7千人,围城之军当胜此数;

(8)十月九日至十八日,尔礼之役,新罗军主力夺取百济尔礼城及周围20余城,伤亡不明;

(9)十月三十日,新罗军攻击围困泗沘之敌,杀伤1500人;

(10)十一月五日至七日,王兴寺岑城之役,新罗斩百济军700人;

(11)龙朔元年正月,熊津口之役,刘仁轨所部及新罗大破百济道琛之兵,堕水及战死万余人;

(12)四月十九日,角山之役,新罗品日西征百济古沙城不成,其麾下上州、郞幢两军遇敌于角山,进击克之,遂入百济屯堡,斩获2000级;

(13)九月二十五日至二十七日,瓮山之役,新罗文武王亲征百济瓮山城,斩杀数千人,遂降之;

(14)其后,雨述之役,新罗军破城,斩首1000级;

(15)百济助服、波伽率众降,人数不明;

(16)龙朔二年五、六月间,泗沘城守军与鬼室福信所部大战熊津之东获胜,拿下尹城、支罗、大山、沙井等城,杀获甚众,其数不明;

(17)约七月初,真岘之役,刘仁轨引新罗兵乘夜袭破真岘,斩首800级,新罗饷道通;

(18)八月,内斯只之役,新罗金钦纯等19将军统兵下内斯只城,罗军人数众多,该城百济之兵恐亦不在少数;

(19)下半年,古沙之役,孙仁师所部7千唐军大破倭济联军于古沙城,伤亡不明;

(20)龙朔三年二月,新罗金钦纯、金天存等取百济居列城,斩首700余级,又攻降居勿、沙平2城,攻破德安并斩首1070级;

(21)八月二十七日至二十八日,白江口之役,唐罗水军2万人170艘大破倭济水军若干人1000艘,焚毁400艘,之前倭济水军似在数量上占据一定优势;

(22)九月七日,周留之役结束,在唐罗联军围困下,百济“伪王子扶余忠胜、忠志等率士女及倭众并耽罗国使”开城投降,城中兵力不明;

(23)九月间,倭济联军余部泛舟前往列岛;

(24)十月二十一日至十一月,第二次任存之役,百济迟受信坚守任存,唐军用百济降将沙宅相如、黑齿常之子弟兵为先锋破城,伤亡不明。

이 24차레 싸움이 고서에 기록된 전부 입니다.이 기록중의 수치도 좀 과장된 부분이 있을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ASDFA 08/10/06 [23:38] 수정 삭제  
  성 규모가 얼마나 됐을가요.
당나라 수도인 장안이 전성기 인구가 가장 만을때 성 둘레가 36KM정도 되고 인구가 100만 미만이라고 합니다.18만호 90만 자체가 문제가 좀 있다고 보이는데요.

18호가 어디서 나왔나 찾아보니 삼국유사에 나온거 군요.삼국유사에 백제 전성기에 인구가 15만 2300호라 하였는데 그거는 안믿으면서 금성이 18만호라는것은 믿네요.백제인구는 세가지 기록중 가장많은거로 믿고?일단 가장 진실을 연구하자는 것보다 인구가 가장 많은것만 믿으시는것이 아닌지?


ASDFA 08/10/07 [11:45] 수정 삭제  
  15만2300호가 400만 정도면 1호에 26명이 넘는다는거죠.
그럼 같은 식으로 금성이 18만호 이니까 468만 인구여야 되는데 왜 90만이라 하는지.
참 궁금합니다.수학시간에 잦나?
ASDFA 08/10/07 [14:22] 수정 삭제  
  해석좀하시죠.
ASDFA 08/10/07 [18:31] 수정 삭제  
  백제인구는 3가지 기록주에서 제일많은 호수를 믿는다는 거네요.그걸 믿는 근거는 뭐지요.나머지 두가지를 믿지 않는 이유는 또 뭐지요.
역사 기록에 보면 전쟁에서 사상된 백제병수가 400만 인구에 비하여 좀 적그든요.
왜 일가요.황제한테 많이 죽였다고 과장하여 보고하면 했지 줄이지는 않았을거 같은데?
정림사지5층석탑중 大唐平百济国碑铭에 보면 凡置五都督,卅七州,二百五十县。户廿四万,口六百廿万,各齐编户,咸变夷风라고 나오는데 그중에 六자가 共자의 오타지 않는가 하는 분석이 있습니다.
백제가 전쟁에 투입된 군사 수량은 7만좌우로 분석이 나오거든요.4호정도에서 한명이나온다고 보면 28만호 정도라는 결과가 나오지요.
제가 지난번 소개한 사이트에

一、百济末期的地方制度

二、唐罗联军灭亡百济的具体时间

三、苏定方与王文度

四、大唐在百济故地上的初设建制

五、熊津都督府与带方州

六、白江口补遗考证(上)

七、白江口补遗考证(下)

八、百济的军力与人口

九、中间期(上)

十、中间期(中)

十一、熊津改制

十二、中间期(下)

十三、逆转的螺旋
로 나누어서 상세한 분석을 해놨는데 어느정도 참고가 되였으면 합니다.단 정답이사 아니겄죠.
머털도사 08/10/08 [10:55] 수정 삭제  
  쨍깨들은 고구려랑 震旦이 지들것이라고 도둑질하려고 하는데...(요즘은 물고기도 도둑질 하고, 더 막되먹은 짓도 하던데)
요즘은 東夷도 짱깨 고대 종족 중 하나였다고 거짓말 하더만...

이사도 땅이 서신라 땅이라는 이 정도는 글은 애교로 봐줘야~~
ASDFA 08/10/08 [17:45] 수정 삭제  
  머털도사/동이가 먼지도 모르고 떠드는 놈은 도대채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겄다.
동이가 언제부터 나오고 언제까지 사용하였으며 시기 별로 어디사람을 말하였는지 공부나 좀하고 지껄이세요.무식하기론.
머털도사 08/10/09 [02:15] 수정 삭제  
  역사왜곡하고 거짓말하는데 도가 튼놈들...
동이가 어째서 현재 중공인의 일부냐?

상고시대 동이를 산동근처로 이야기하는 것은 신시와 단군조선의 영토가 산동반도까지 지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걸 숨기려고 쫑국공산당은 동이가 시대마다 달라졌으며 상고시대에는 하화족은 동쪽을 지칭하다가 고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는 궤변을 피고 있는 것이지... 공산당의 하수인이 쓴 중국민족사에는 더 궤변을 떨어 동이는 넓은 의미의 동이가 있고 좁은 의미의 동이가 있다고 했으니, 동이가 우리민족이려는 것을 숨기려는 너희 중공 공산당의 행태가 가련하기 그지없구나.

동이가 시대마다 지칭하는 곳이 달라졌다는 원전 사료의 구절을 대거라. 그런 구절은 없느니라.

이제 고구려 도둑질 못하니까 동이까지 도둑질하려드느냐... 그냥 물고기나 도둑질 하고 배불리 먹기나 하거라.
ASDFA 08/10/09 [10:11] 수정 삭제  
  머털도사/   东夷的起源与分布
  海岱地区的新石器文化,是大昊、少昊两大部落集团的文化遗存;而大昊、少昊两大部落集团,一方面有一部分与来自黄河上游、中游的黄帝部落集团融合,构成华夏民族来源的重要组成部分;另一方面,泰山周围及其以东至海、以南至淮的诸部落,仍按其固有文化传统发展,即夏商周三代的东夷。先秦文献中的东夷,专指今山东省及淮河以北那些非华夏方国和部落,即分布在今山东、苏北、淮北地区。它们的文化直接继承海岱地区的新石器文化,继承山东龙山文化发展的岳石文化一般即认为是夏代东夷的文化;它们的族源直接继承两昊部落集团,直到春秋时期,在今山东、苏北、淮北还留存着两昊苗裔仍称为东夷的许多方国。但不能反过来简单地称海岱地区的新石器文化为“东夷史前文化”,也不能简单地说两昊集团就是“东昊部落集团”,因为当时尚未出现夷、夏的区别,而且海岱地区的新石器文化与两昊部落集团也是华夏民族的重要来源之一。夏与商均与三代的东夷有一部分共同的渊源关系。到秦始皇统一时,三代东夷的苗裔,都已融合于华夏民族之中。
  夷的族称,今所见为当时确证的,以甲骨卜辞关于尸(夷)方的记录为最早;古籍记载则夏代的东方已有众多夷人的方国部落。《后汉书·东夷传》说:“夷有九种,曰畎夷、于夷、方夷、黄夷、白夷、赤夷、玄夷、凤夷、阳夷。”这九种夷都见于古本《竹书纪年》关于夏朝与东方诸夷关系的记载。实际上,“九”仅言其多,不必拘泥于九种。《竹书纪年》所载,夏代还有淮夷、蓝夷;《尚书·禹贡》记载两河之间的冀州有鸟夷(一作岛夷,字形近似致误);青州在泰山以东至海有嵎夷、莱夷;青州南部至淮河有淮夷;淮南与淮海之间扬州也有鸟夷(一作岛夷)。《禹贡》成书于战国,或亦保存了夏代民族的名称。
  甲骨卜辞对于商朝东方与东南方的夷人,写作“”方和“”“”方。前者像人侧立之形,释为“人方”,后二者均像人蹲踞之形,与夏人危坐不同,释为“尸方”。甲骨文学界认为作为族称,两者都是夷的假借字。然而有的学者认为“人方”指商东南方淮水流域靠海一带和山东半岛靠海一带;有的学者认为人方与尸方是同一称谓的不同写法,都是指商东方与东南方的诸夷。郭沫若先生说:“尸方当即东夷也。征尸方所至之地有淮河流域者,则殷代之尸方乃合山东之岛夷与淮夷而言。”
  西周金文才正式出现了“东夷”的称谓。在整个西周时期,东方诸夷都是周王朝的劲敌。文献记载周对东方的战争,不同时期出现了东夷、淮夷、南淮夷、南夷等不同称谓,这些称谓,实际上反映了周王朝不同时期对东方劲敌用不同地理方位概括。西周前后两三个世纪观念上的变化,造成了现在研究工作辨析的困难。学术界对西周时期东夷、淮夷、南淮夷到底指哪些地区的部落与方国,有着不同的看法。
  据张懋镕《西周金文所见东夷、淮夷、南夷、南淮夷比较表》统计,西周早期仅见有“东夷”,周公、成王东征的对象金文中记载都概称为东夷,而《史记·周本纪》说:“召公为保,周公为师,东伐淮夷,残奄,迁其君薄姑。”《鲁周公世家》说:“管、蔡、武庚等率淮夷而反。周公乃奉成王命,兴师东伐……宁淮夷东土。”周公,成王东征虽涉及淮夷,而主要是在山东省境,此为东夷起源的地区,也是夏、商时东方诸夷的核心地区。金文为当时实录,西周早叶以东夷概称东方诸夷部落与方国,而淮夷包括即在其中。
  周公,成王东征以后,今山东省境内的东夷势力一蹶不振,且周王朝封大公于齐,封周公子鲁以镇东方。到西周中叶淮夷在淮河地区兴起,成为东夷中势力最强的一支。据上引张懋镕的《比较表》第二栏,西周中期金文只见有淮夷,反而不见东夷的记录。说明成康以后,周王朝与东方诸夷的关系,主要对手是淮夷,因而又以淮夷概称东方诸夷部落与方国了。文献记载多为后世追叙,关于周公、成王东征的记载,盖成于成康以后,所以依周中期的观念,反以淮夷概称东夷了。
  到了西周晚叶,夷王时期《禹鼎》复见淮夷与东夷并举,而淮夷居前;厉王时器《钟》又有南夷与东夷并见,而南夷居前。周晚叶的南淮夷、东夷各指哪些地区的部落与方国,可在东夷与西周的关系中去辨析。总之,一直到春秋战国时期,文献中关于东夷的军事活动已涉周雒邑畿甸地区,然而其分布范围,都没有超出海岱与淮河流域。
  秦汉以后的东夷,主要是指先秦的东北夷,又将倭人列于其中,是泛指东方的民族和国家,与先秦东夷在地区与民族等方面,都有明显的区别。
  先秦的东北夷,包括肃慎,息慎同音异译。《史记·五帝本纪》叙述舜时“方五千里,至于荒服”。在来贡的诸民族中有息慎。《集解》引郑玄的注解说:“息慎,或谓之肃慎,东北夷。”《国语·鲁语下》,记述孔子在陈,有隼死于陈侯之庭而身上留着射来的楛矢石砮,于是问孔子。孔子说:“隼之来远矣,此肃慎民之矢也。”并且讲述其中出典,是周武王克商,命四方各族进贡方物,于是肃慎氏贡楛矢石砮,其长度有一尺多。周王为了以其能招来远方的美好政绩垂法后世,在箭杆上刻了“肃慎氏之贡矢”,分给舜的后裔而封于陈。孔子说:“分异姓以远方之贡,使无忘服也。故分陈以肃慎之贡。”韦昭注:“肃慎,东北夷之国,故隼之来远矣。”
  肃慎的分布,学术界长期有过多种推论。然而古人早已指明肃慎在不咸山(今长白山)之北。《山海经·大荒北经》:“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肃慎氏之国。”郭璞注:“今肃慎去辽东三千余里。”郭璞晋人,晋辽东城即今辽宁省辽阳市老城区,晋尺约相当今6寸,当时3000里合今华里1800里左右,明显已在长白山以北。《三国志·东夷传》:“挹娄在夫余东北千余里,滨大海。”又说:“其弓长四尺,力如弩,矢用楛,长尺八寸,青石为镞,古肃慎之国也。”三国时夫余王城大概还在今吉林市境,其东北晋时千余里,合今华里600里左右。两书所记肃慎地理,都相当于今黑龙江省宁安县附近。《新唐书·渤海传》说:渤海“以肃慎故地为上京,曰龙泉府”。贾耽《入四夷道城纪》说:渤海上京“临忽汗海,其西南三十里,有肃慎城”,渤海上京遗址即今宁安县东京城。按文献记载,肃慎分布在以今牡丹江中游为中心的地区。再证在考古学发现的楛矢石砮及对肃慎人文化遗址得出的判断,可以肯定肃慎是起源于今牡丹江流域的东北古民族,又是东北与中原王朝发生政治交往最早、源远流长的古代民族。
  夫余,又有扶余、凫臾等异译。《史记》记述秦汉时的经济区域说:“夫燕亦勃、碣之间一都会也……北邻乌桓、夫余”,而《论衡·吉验篇》记述夫余立国的传说:“北夷橐离国王侍婢有娠,王欲杀之。婢对曰:‘有气大如鸡子,从天而下,故我有娠。’”后产子,即夫余的始祖东明。说明夫余的始祖传说,也带有东夷以鸟为上天使者的特点。夫余立国以北流松花江中游平坦地区为中心,其先橐离大概分布在嫩江支流乌裕尔河流域。

한족이란 개념이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거 같은데 좀 공부하시요.
계속 나와서 헛소리 치지말고.

당신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한국이 문제라는 겁니다.
무식하면 공부나 좀 하시요.
도대체 한국은 병원이 없나?좀 병을 봐야 할겄 같은데.
머털도사 08/10/09 [11:01] 수정 삭제  
  원전 사서기록 대라고 했더니 이상하게 생긴 간자체만 주루루 써놔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남의 나라 와서 너희들 문자를 쓰면 누가 알아먹냐?
중공인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여주는구나.

한국에 와서 한국사람과 대화하려거든 한국말로 번역해놔야 하는거다.
알겠냐?
저기 써놓은게 소련말인지 아프리카말인지... 너 대체 뭐라고 하는거냐....



내가 미국유학시절 있었던 이야기 해주랴?
"어떤 강의를 들어갔더니 중공인 거의 전부이고, 나 말고 미국인 딱 1명있더라.
그런데 team project할 일이 있어서 모였는데...

어떤 팀에는 흑인 한명을 제외하고는 다 중공인이더란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발생했다.
그 team project하면서 토의해야할 일이 있었는데
대부분을 차지한 중공인들이 중공말로 토의를 하더란다...
하하 이럴수가...그래서 그 미국인 수강포기했단다. 나야 원래 너희들 습성을 아니깐 일찌감치 포기했지

딱 네가 여기서 그짝이로구나

예의가 뭔지좀 알거라
한국에 와서는 한국말 해라.
저런 이상한 간자체 써놓지말고..."
머털도사 08/10/09 [11:01] 수정 삭제  
  어디 원전 사서에 동이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고 나오냐?
동이면 동이지 옛날에는 동이가 중공인이었다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한국사람이 되냐?
하하
이런 궤변은 궤변도 아니라 엉터리 어용론이라는거다.

네가 정자체 모르는거 다 안다.
정자체를 모르고 원사료 읽을 실력은 안되니
맨날 공산당 하수인들이 만들어낸 어용학자들의 저서만 읽다보니
원래 기록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지는 하나도 모르지 쯧쯧.


논어정의에 夷는 아홉종이 있다고 했는데
그 중에 현도 구려 낙랑 부여가 들어가는거 모르냐?
夷 아홉종 중에 너희들 중공인들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거짓말좀 그만해라.

공산당 노예와 하수인 짓은 그만하고 정신 좀 차리거라.
머털도사 08/10/09 [11:28] 수정 삭제  
  맨날 저런 어용학자가 쓴 책을 읽지 말고 원전을 읽어라.

成王旣伐東夷肅愼來賀傳海東諸夷駒麗扶餘馯貃之屬
뭐라고 말하냐? 夷는 구려 부여 한 맥이라고 하잖냐... 그런데 지금 뭔소리를 하고 있는거냐?

후한서 東夷열전 맨 마지막 부분을 보여주랴?
論曰昔箕子違衰殷之運避地朝鮮始其國俗未有聞也及施八條之約使人知禁遂乃邑無淫盗門不夜扄回頑薄之俗就寛略之法行數百千年故東夷通以柔謹為風異乎三方者也茍政之所暢則道義存焉仲尼懷憤以為九夷可居或疑其陋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亦徒有以焉耳其後遂通接商賈漸交上國而燕人衞滿擾雜其風於是從而澆異焉老子曰法令滋章盜賊多有若箕子之省簡文條而用信義其得聖賢作法之原矣

너희나라 말이니 해석안해줘도 되겠지. 핵심만 보면...
"箕子가 朝鮮으로 피난해 왔는데...(어쩌구저쩌구)... 그러므로 東夷 전체가 부드러운 것과 근신함으로 변화하여 나머지 셋(三方, 서융 남만 북적)과는 다르게 되었고 진실로 다스림과 가르침이 창달되니 도리와 의리가 있게 마련이다..."

箕子가 간 朝鮮도 중공이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라...

夷가 방위가 아님을 보여주마...
설문해자에 東方貉從豸
네 말대로라면 동쪽은 夷일텐데 왜 貊(貉)이라고 했을까?
왜냐하면 상고시대에 너희 중공땅 동쪽에 夷貊 즉 한국사람이 살고 있었기때문이다. 이걸 지금 너희가 숨기려고 발버둥치고 있는거지...

너희국가가 만약 일당독재 공산국가가 아니었다면,
너희 어용학자들이 저런 이상한 소리를 해대지는 못했을게다.
정신차려 이 친구야~~
ASDFA 08/10/09 [12:21] 수정 삭제  
  너무 무식한거는 아닌거 같은데 진한후 사서만 보지 마시요.진한후 사서에 일본도 동이중의 하나입니다.일본가서 같은 민족이라 하세요.
사기/좌전/吕氏春秋등 많은 사서 중에도 동이가 나오그던요.그중에 뭐라 적어낳나 좀 찾아보세요.보시면 자기가 얼마나 무식한지 알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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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자체 알고 모르고는 당신이 걱정할일이 아니고 한국말이나 잘하세요.외래어 안쓰고 살수 있을라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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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FA 08/10/09 [12:36] 수정 삭제  
  일단 자기 나라에 맞는 정책이 필요 한것이 아닌지 십습니다.
어느정도 독재가 되는 싱가폴은 경제성장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고
자유민주고 우기는 한국이나 대만은 정치인들이 매일 개싸움하고 있고
국민이 사는지 마는지 걱정도 안하고.
도대체 동방인 성격상 어느것이 맞는지 두고 봐야 하는거 아닙니까.
미국까지 유학했다는 사람이 왜서 하나만 보고 자꾸 얘기 하는지.

지금 상황에 와서 언론 통제라는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한국은 가능할지?언론 통제를 위하여 실명제 도입 까지 하니.

자 그리고 조선민족이 어느때 형성되였다고 생각을 합니까.
다 그만두고 인류 기원이나 원구하여 세계모든 사람이 다 조선민족 이라 우기시요.세계땅도 다 였날 조선 선조들의 땅이라 우기고.그러면 정답이 나오는겄 같습니다.
머털도사 08/10/09 [12:43] 수정 삭제  
  나는 계속 秦漢시대 혹은 그 이전의 동이를 말하고 있소이다.

秦漢 이전의 문헌에서는 東夷는 계속 중공의 동쪽 즉 산동 부근과 淮水가를 말하고 있소. 그곳에 夷貊이 살았던 것이오...

그러나 문제는...
燕國 진개가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만번한까지 자기땅으로 만들고....
그 이후에 漢이 위만낙랑조선을 멸망시켜 낙랑군을 세우니...
산동과 회수는 더이상 조선땅이 아니므로,
東夷라는 위치가 산동에서 만주와 한반도로 넘어오게 된 것이오....

또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위만조선 멸망 즘에 한국 고대국가는 갈기갈기 찢겨 여러나라가 되고, 주변 민족과 섞이고 합하여지고 변화를 겪게 되니...
중공의 동쪽에 있는 모든 다른 나라를 동이에 분류하게 된 것이오...
그래서 결국 倭도 동이에 포함되게 된 것이오.

알겠소이까?


추가사항: 간자체 못하는거 자랑이오. 간자체... 정말 한국사람에겐 필요없는 글자요. 저런 간자체야 옛날에 붓으로 한자 쓸때 빨리쓰기 위하여 발전되었다지만, 지금 컴퓨터를 쓰는 시대에 뭐하러 간자체 쓰겠소이까?
ASDFA 08/10/09 [13:09] 수정 삭제  
  조선일보보니까 한글날 마지하면서 외래어 안쓰기 운동한다든데.
중국사서에 요 순(尧、舜)제도 동이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건 어찌 생각하는지?
아에 중국사람도 다 같은 사람이라 하세요.
머털도사 08/10/09 [13:17] 수정 삭제  
  순임금... 동이출신이이죠... (요임금이 동이라고 나온 곳은 없는 것 같던데...)
동이출신인 사람이 중공땅에서 임금 좀 했기로서니 뭐가 이상합니까?

기자가 중공에서 넘어와 조선땅에서 왕노릇했다고 하는 설과 비슷한것이외다.

지금 한국대통령도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이것이 한 5000년 지나면 AD2000년대 초기에 일본사람이 한국서 대통령했다고 일본이 왜곡할라나....

미국 대통령 후보 오바마.
할아버지는 아랍계통이고, 아버지는 아프리카 가나 출신인데..
미국대통령 후보가 됐소이다.
오바마가 대통령되면 아랍사람이 미국사람됩니까? 허허.

순임금이 동이족이건 기자가 殷에서 넘어왔건 이상할것은 하나도 없소이다.


그리고 내가 무슨 외래어를 썼다고 그러시나... ?
ASDFA 08/10/09 [13:56] 수정 삭제  
  황제를 조상으로 중공이 작업한게 아니고 중국사람 자체가 염황자손이라고 자칭을 합니다.중공의 날조 라면 근거를 내세요.
기자조선에 대하여 사기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도 중공이 날조라고 생각하시면 아에 중국 사서를 다 날조라 생각하시고 마음대로
글을 쓰시요.
요제가 동이하고 무슨관계지 기록이 많거든요.좀 찾아서 공부 좀 하시요.

한글로 쓰면 다 한국어라고 생각 하는건지 아니면 외래어가 몸에 박혀 한국어로 알고 있는건지.이거 뭐......
조재범 08/10/09 [20:07] 수정 삭제  
  논쟁하지말고 답이 없다고만 말하지 말고 문맥적으로 제대로 해석을 하십시오. 그리고 성덕왕 때 일로 문제가 많은데 그 때 일어난 사건이 어땠는지 그리고 그 당시 신라와 당나라 관계가 어땠는지 자세히 알고 말하십시오. 733년(성덕왕 32)에 일어난 일이 있기 전인 663년에 신라는 당나라의 계림도독부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어졌다는 기록도 없어요. 즉, 이것은 신라가 당나라 연방에 편입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덕왕 때 발해의 장문휴가 공격한 것은 등주자사 위준이라는 당나라 사람입니다. 저 글에 어렴풋이 나와 있을 텐데요. 산동성 지역에 있는 당나라 번진들은 중앙에서 각 자치국에 보낸 장군들과 같은 존재라고요. 즉, 발해가 공격한 것은 당나라 번진입니다. 직접적으로 신라가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 뿐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현종이 자신의 번진이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앞장서서 전쟁에 나섰던 것이고 그 지역이 형식상 신라 땅이므로 신라에 원조를 청한 것입니다. 733년에 있었던 사건과 그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를 알지 못하면 누구나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죠.
참, 나도 내가 인터넷에 올린 글이 언제 이 신문사에 기고되었는지를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어쩌다 봤더니만 수차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니 참 놀랍습니다.
ASDFA 08/10/09 [23:20] 수정 삭제  
  조재범//
잘 왔습니다.저기 지도 보면 현 중국지역 하북성남부부터 시작하여 남으로 절강성일부까지 서신라라고 한 근거부터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기리고 저 지도에 河北道/河南道/江南道 등으로 나오는데 저지도 출처는 어딥니까?
머털도사 08/10/10 [02:04] 수정 삭제  
  1. 내가 황제를 날조라고 한 적도 없고,

기자가 조선에 온것이 날조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대체 뭔소리를 하는것인지....
내말을 이해못한것 같구만.

오바마가 후보가 아랍계요 아프리카인데.
오바마가 미국대통령에 당선되면 아랍인이 미국인되고 아프리카인이 미국인이 되는가?
오바마가 미국대통령에 당선되면 아랍인이 미국을 지배하고 아프리카인이 미국을 지배한 것이 되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요.

똑같이....
순임금이 조선사람이요 기자가 殷나라 사람이면 문제될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지.
이해되시오?



2. 자꾸 외래어라고 하는데 내가 뭔 외래어를 쓴다는 것이요?

한자말을 당신이 지금 외래어라고 트집잡으려면 그렇다고 말하시오. 그렇다면 중공이야 말고 외래어 투성이니깐. 뭐든지 짬뽕하여 자기네것으로 만드는 중공인의 특성이 한자에 다 나와 있소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浿...이거 당신중공인들 입장에서는 외래어요. 江도 중공인들 입장에서는 외래어구만.

더군다나 옛 중공의 동쪽 황하 하류는 동이이 살던 곳인데... 한자가 화하족의 글자라고만 볼 수 있겠소? 뭔가 잘못됐구려...


3. 중공인 자체가 염황(염제신농을 말하는것 같소)의 자손이라 자칭한다??

중공은 여러민족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중국이라서 지역마다 사관이 다른가보구만.
당신이 어느지역 출신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중공인에게 물어봤소이다.

사천성 출신 칭하대학 나온 친구에게 "너네 나라 첫번째 국가는 어디냐"라고 했더니
"周이다"라고 하더이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 이전은 이민족이 짱뽕된 국가라서 순전히 漢족으로만 이루어진 국가는 周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이다...

당신 말하고 내 친구 말하고는 좀 다르구만...
따라서 중공인 전부가 염제신농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 하오.
머털도사 08/10/10 [02:07] 수정 삭제  
  맨 위에 지도 三蘇전서와 속수사고전서에 있는 지리지장도(한자로 어찌 쓰나) 일부 아닌가 함.
ASDFA 08/10/10 [11:06] 수정 삭제  
  상나라때 한족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상나라 동쪽사람을 동이라고 말했다고 사서에 나오고 있습니다.당신 친구가 말한 주나라때도 한족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럼 한족이란 개념이 언제부터 생기기 시작하였을가요.
한족이란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것은 한나라 한무제시기입니다.한무제때 영토가 어디서 어디까진지 좀 연구하시기 바람니다.
그친구한터 염황자손인 맞나아니가 물어보세요.답이 나올거니까.
그친구 말대로 주나라가 한족으로만 형성되였다고 하는것이 맞다고 생각하시는가 본데
주나라때 산동지역은 주나라땅입니다.즉 한족 땅이죠.그런데 솔직히 그때까지는 한족이란 개념이 없었을 때 입니다.
그러니 동이하고 조선사람하고 무슨관계지 답이 나오는거 같은데.동이중에 조선사람이 속한다 말이지 동이가 조선사람 아니다 그겁니다.

아마 외래어가 몸에 박히고 한글로 쓰니 한국어고 알고 있는가 보다.
컴푸터가 외래어지 한국말인지 아세요.참 답답해라.

머털도사 08/10/10 [23:41] 수정 삭제  
  지금까지 말해줘도 이해를 못하고 있구만...

저 위에 상서, 설문, 후한서를 인용하여 말해줘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구만...

기원전 중공 동쪽에 살았던 사람들은 한국사람이고, 중공에서 夷 혹은 東夷라고 했다.
그런데 전국시대 들어서면서 燕에게 밀리고...
秦에게 또 밀리고....
漢에게 또다시 밀리니...

그래서 그 뒤로 東夷를 가리키는 말이 점차 만주와 한반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주나라때 산동이 어찌 주나라 땅이냐...
참내.

夷가 살았던 땅이므로 조선땅이다.
東夷란 동쪽 오랑캐란 말이다.
너희 중공인들은 자신들 스스로 오랑캐라고 불렀었냐? 하하
그럼 夷貊이란 말은 무슨 뜻이고, 蠻夷란 뜻은 무슨뜻이냐?

夷란 하은주 시대 중공 동쪽에 살던 오랑캐로 주로 조선민족을 말하며
조선이 산동부근을 빼앗기자 夷를 가리키는 지역이 만주한반도로 변화한 것이다.

알겠느냐?

夷를 가리키는 지역이 왜 시대가 지남에 따라 바뀌었느냐? 대답해봐라. 합리적인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면 네 말은 공산당의 당리와 정책에 근거한 어용사학의 결론에 불과한 것이다.
머털도사 08/10/11 [00:16] 수정 삭제  
  通志卷三上
帝武乙武乙復去亳都河北中國微弱東夷盛彊分遷淮岱漸居
중국이 미약하니 동이가 강성하여 회대 지방을 점거하였다..... 동이가 중국이면 이런말이 나오겠냐

論衡卷九
孔子疾道不行於中國志恨失意故欲之九夷也...不行於中國故欲之九夷
논형은 漢때의 문헌이다..
공자가 중국에 다니기를 싫어하여 九夷에 가고싶다고 말하였다.

이래도 東夷와 九夷가 중국이냐... 말도안되는 소리하지말거라.
공자가 저런 입바른 소리를 해대니 너희들은 "공자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는가보다.
ASDFA 08/10/11 [08:40] 수정 삭제  
  정말 이해가 안된다.
주나라가 상을 멸망하기전 주나라가 당시 상나라가 동이가로 하는곳에서 동이인이 세운나라가 그겁니다.그때까지는 조선사람이란 개념도 없었고 한족이란 개념도 형성이 안된상황 이라 그겁니다.당신론리대로 아에 인류 기원이나 연구하고 세계사람들이 다 조선사람의 후예라 하면 됩니다.동이중에 지금 만주족 일본민족 등등이 다 속해 있는데 아에 다 조선민족이라 하세요.세계사람들이 다 무식하고 멍청하고 당신만 똑똑하다고 사시요.
그게 당신한테 편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당신 같은 말도 안통하는 사람하고 계속 토론 할 생각을 접었습니다.
세계사람이 다 조선사람이라고 하면서 사시요.
머털도사 08/10/11 [22:24] 수정 삭제  
  또 이해 못하고 딴소리 한다. 하기야 남의 말을 안듣는 것이 짱개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조선이란 개념이 왜없냐? 미치는구만.
단군조선도 조선이니라 알겠냐?
조선이란 개념이 이때부터 있었는데 대체 너는 뭔소리하냐...
중공이야 하도 이민족이 섞여서 漢族이란 개념이 후대에 생겼지만..
우리민족은 너희랑 완전히 다르니라....

그리고 언제 내가 조선이 모든 인류의 기원이라고 했냐?
멍청한게 남의 말을 이해못한다니깐.

동이가 기원전 이전에는 조선이지만 漢國이 위만조선을 멸하면서 동이를 倭까지 확장시켰다고 이미 말했는데
머리나쁜게 이해못하고 딴소리한다.

남의 말좀 제대로 읽어보고 말하거라.
짱깨는 항상 이게 문제라니깐.
남의말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듣는단 말야.... 쯧쯧.
ㅠㅠ 08/10/25 [13:53] 수정 삭제  
  아직도 사람을 즉결처분하고 자유도 민주도 평등도 없는 공산국에서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박통때 우리가 그랬듯이 나라에서 이거야라고 하면 그대로 이거라고 생각하는 나름 저 나라 엘리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되먹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쓰면 투사가 되겠지요...
mimesis 08/10/25 [22:34] 수정 삭제  
  지나것이라 할 아무런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겠군요. 그저 공동의 역사로 해야겠네요.
정보가 많이 부족하신 분 같고... 대체로 저런 왜곡되고 발췌된 정보만 널리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례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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