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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부여사

부여의 유래와 어원, 부여족이 서진하여 건국한 유럽의 불가리아

문화부 | 기사입력 2008/03/30 [15:27]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부여사

부여의 유래와 어원, 부여족이 서진하여 건국한 유럽의 불가리아

문화부 | 입력 : 2008/03/30 [15:27]
많은 독자분들이 역사관련 기사를 애독하고 계십니다. 저희 플러스코리아는 일제 식민사관를 청산하고 우리의 민족사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환단고기] 등 우리의 문헌들를 중심으로 고대 중국 문헌들과의 비교분석, 고고학를 토대로 유라시아 대륙과 만주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차원에서 가장 객관적인 관점으로 민족사학을 정립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과거인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 조상들의 정신과 역사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고 미래를 설계하는 민족비젼이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관심과 애정바랍니다. 감사합니다.[편집부]

부여의 유래와 어원

 
부여라는 나라이름의 시초는 초대 단군왕검의 막내아들로 국방에 능통했다는 부여(夫餘)에서 왔다. 외교에 능통했다는 첫째인 태자가 부루(夫婁 : 2세 단군, 재위 기원전 2240~2182),  둘째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고리국)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국)에 봉해졌다. 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드님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장군출신 44대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티벳, 단군 44대~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부여'로 국명을 바꾼 구물단군께서는 아마도 국방에 능했다는 단군왕검의 넷째 아드님이신 부여의 후손이라 여겨진다.  

▲ - 타 오르는 "불(부여)"을 상징하는 백제왕관(무녕왕릉 출토) -


인간난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부여출신 황우석박사팀의 핵치환 기술(민족의 저력)

 
'부여'의 어원은 청동기 문명을 가지고 알타이 지역에서 동진해 온 단군족의 이동과 관련된다고 보여진다. 단군왕검의 네 아드님의 이름에 들어 가는 '부'의 어원은 당시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져 있던 말(페르,펴라,벌 등)의 의미로 '불(fire)'을 의미한다. 


청동기 문명의 주역 단군족(부여.고구려)

또한 청동기 문명의 주역인 단군족은 '불'이 중요했고, 몽골과 만주지역의 부여에 대해 고대 중국문헌은 "집마다 철갑옷.철기구 등이 가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만큼 청동문명의 주역인 단군족이 '불'을 이용하여 쇠를 자유자재로 잘 활용했다는  증거이며,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또한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역시 '개마무사'라는 철갑기마부대를 보유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고대 중국문헌은 부여와 고구려를 단군족(예맥족)의 직계후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예맥족은 요서(난하=고리국의 발원지)지역에서 청동기 문명을 일으켜 요동지역으로 이동하여 전파한 종족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청동기문명의 중심지와 관련하여 고고학적으로도 동진해 온 단군족의 초기 중심지는 요서지역의 난하(고구려의 발원지=번조선 수도=고구려 수도 평양성)지역이라 볼 수 있으며,  단군족의 중심세력이 동이족의 터전이며 북방의 외부세력의 침략과 유입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인 요동지방의 하얼삔(진조선의 수도 아사달)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일부는 한반도 지역으로 들어가 대동강 평양(마한의 수도)에 터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청동검의 형태도 만주와 유라시아 지역은 단군족의 이동시기형태인 비파 청동검이고, 비파청동검이 변형된 한반도의 세형동검은 단군족의 정착시기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민족사 역사왜곡하는 MBC
 
사전에 상황과 구조를 전제로 사건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조사확인없이 방송윤리를 위반해 가면서까지 대한민국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황우석죽이기에 불을 당긴 MBC는 특허를 노린 황우석 죽이기 음모세력의 돈다발에 수단화되지 않았다면 상업주의에 치중한 엄청난 반국익적 오류로써 대국민 사죄와 수습에 나서야 한다. 또한 역사왜곡으로 수 많은 민족사학 세력으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았던 사극 ‘주몽’과 일본자금유입설과 관련한 ‘태왕사신기’에 이어 소설가 최인호의 ‘4제국 가야’를 드라마화 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미리부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드러 나야할 문제지, 결코 일개 방송의 이윤창출를 위한 상업주의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MBC는 자신의 엄청난 오류에 대해 대국민 사죄와 수습에 나서던지 방송국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과 조상을 수단화하고 국민을 파는 반민족 반국가적 방송행위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엄청난 오류에 대한 사죄없이 겉으로 민족과 민중을 내세우며 생각하는 척 하며 속으로는 잇속을 챙기려는 파렴치한 행위는 추악한 위선과 거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편집자 주] 

 
고구리 건국이야기를 다루었던  MBC드라마 <주몽>  무엇이 왜곡되었나? 

우리 고대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드라마이였지만, 제작 전 문헌자료에 대한 치밀한 비교분석과 자문없이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상황설정과 지나친 극적 구성으로 실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한 사극이였다. 진실을 외면한체 조상들의 역사를 돈벌기를 위한 상업성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건 엄청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에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대사의 고리를 고스란히 복원시켜주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드라마 <주몽> 시대의 역사를 알아보고  한민족 상고사의 국통맥을 간추려 소개하며,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고 있는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인 일제 식민사관에 대항할 자료로 제시한다.

어린시절 주몽은 겁쟁이?

왜곡의 한 예로,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의 인물됨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주몽은 ‘기골(氣骨)이 뛰어나 범인과 달랐으며, 불과 일곱 살이 되어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하였다’고 나온다.  그래서 ‘(동)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에(善射者謂朱蒙)  그를 또한 주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주몽은 나이 스물이 되도록 활은 고사하고 칼 한번 들어보지 못한 겁쟁이로 나온다. 극적 전개를 위한 각색이라고 해도,  고구려 창업군주의 인물됨을 왜곡하는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드라마 <주몽>이 한민족의 상고사 특히 부여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MBC주몽의 한 장면
천제지자(天帝之子) 고주몽


근래 TV 사극은 옛사람들의 정신의 맥과 한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측면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야비한 다툼만을 부각시켜서 드러내는 경향이 짙다. <주몽> 역시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로,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정치사, 전쟁사로 몰아가는 문제점이 있다.

고대 인물들이 현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주몽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주몽이 영특하고 대범하고 영웅적인 기개가 있으니, (동)부여국 왕자들이 주몽한테 왕위를 뺏길까봐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부여를 떠나라고 한다. 주몽이 도망을 가다가 엄리대수(淹利大水), 즉 지금의 송화강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야 되는데, 뒤에서는 (동)부여 군사가 주몽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온다.  

그 때 주몽이 수신(水神)에게 말하기를, “아시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나는 천제 즉,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자다.’ 이런 뜻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 천제 문화, 천자문화가 생생히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태왕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도 우리 고주몽 태조께서는 ‘천제지자(天帝之子)’요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쓰여 있다. 그 말은, 당시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대행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 부여(夫餘)사

이제 구체적인 역사 내용을 살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여사의 왜곡으로 인해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간의 인척관계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인  불리지(일명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유화부인과 해모수가 부부인연을 맺은 것으로 설정하여,  유화부인이 시증조할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이런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드라마에서는 주몽이 태어난 나라를 부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원시)부여,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 수많은 부여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시청자들의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몽이 태어난 나라는 ‘동부여’이다.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 단군의 고손자로서 황손(皇孫)이다. (『삼국유사』도 분명히 해모수가 북부여의 건국자임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했던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과 국내사가들의 중국사 베끼기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잘 모르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왜곡에 기인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다 언급하기 힘들지만, 중국은 한(漢) 무제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이후로 동방의 천자국(天子國), 스승의 나라,  조선(朝鮮, 고조선)의 역사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조선은 세상에서 아는 것과 달리 하나의 국가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체국 아래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 일종의 연방체제로 이루어진 대제국이었다. 조선이란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단지 제후국의 이름만 거론하면 조선은 역사 속에서 오리무중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후세의 김부식과 같은 우리의 역사가들은 중국인들이 써준 역사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탓에 우리의 역사, (고)조선사는 실체가 없는 신화로만 남게 된 것이다. (고)조선사를 역사 속에서 지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여사 또한 지우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사 계승은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거쳐서 열국시대와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남북국시대(대진국·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게 되는데, 북부여를 역사 속에서 지우면 뒤에 생겨난 국가들은 (고)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의 미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노렸던 것이다. 

읽어버린 부여사


그럼 구체적으로 부여의 정체를 풀어보자. 이것이야말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빈치코드>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동양 한민족사의 실체에 얽힌 중대한 비밀코드를 풀어내는 열쇠이기도 하다.  

(고)조선의 역사 |

 
단군조선은 군사지휘권을 가진 진조선(만주.연해주.몽골.시베리아)을 중심으로 번조선(산동.요서)과 마조선(한반도)으로 분할통치하는 3한 관경제 나라였다. 진조선의 단군은 대단군으로 불리였으며, 번조선과 마조선은 대단군의 혈족이나 덕이 있고 현명한 유명인사가 부단군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부여의 원뿌리는 (고)조선(朝鮮)이다.  (고)조선은 마흔일곱 분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 한 나라를 크게 진한(辰韓, 후기엔 진조선) 번한(番韓, 후기엔 번조선) 마한(馬韓, 후기엔 막조선)  셋으로 나눠,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번한 마한에는 부단군을 두어 일종의 연방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삼한 안에도 더 작은 제후국들이 존재했다.

대부여의 등장 


44대 단군은 구물(丘勿)단군이다. 그는 본래 43대 물리단군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다.  43대 단군 때 사냥꾼의 두목 우화충이 사냥꾼들을 모아 반역을 저질렀다. 그들이 수도를 점령하고 물리단군이 피난 중에 죽자, 이에 맞서 반란자들을 제압한 이가 바로 상장군 구물이었다.

이에 5가(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 5인으로 구성된 조정의 주요 대신(大臣)들) 제신들은 그를 44대 단군으로 추대하게 된다.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개원(開原), 단군 44대~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고)조선의 종통은 보전하고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 (‘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요컨대 (고)조선의 국호가 부여(대부여)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고)조선의 국통은 다름 아닌 부여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제식민사학을 답습한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과 부여가 어떤 관계이며,  또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어떻게 국통맥이 이어졌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북부여의 등장 

 (고)조선 말기인 대부여로 오면서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군권이 독립되고,  진조선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군웅들이 할거하며 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는 50여년에 걸친 치세에도 결국 이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고,  5가 대신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은거하게 된다.(BCE 238) 이로써 2,096년간의 (고)조선은 막을 내리고, 5가(五加)에 의한 과도기의 공화정이 실시된다.
 
이 무렵 (고)조선의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세력을 키우면서 6년간 계속된 공화정을 철폐하고 5가 제신들의 추대로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다시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게 된다(BCE 232). 이렇게 대부여의 국통은 북부여로 이어진 것이다.  

해모수는 국가 체제를 그대로 보전하고 나라 이름만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해모수도 ‘단군’으로 호칭했으므로, 해모수 단군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해모수가 ‘북부여’라고 나라이름을 정한 데에는, 북부여가 ‘대부여’ 곧 단군 (고)조선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해모수(단군조선의 제후국 고리국 왕손)/고두막한(47대 고열가 단군후손)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그러면 북부여의 국통은 어디로 이어졌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의 3대손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옛날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 하여 강한 북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의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은 삼신문화가 전수된 정신사적인 정통맥일 뿐만 아니라, 직계조상과 후손으로서 혈통줄을 타고 계승된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보이는 부여는 엄밀히 말해서 동부여이다. 그런데 해부루가 다스렸던 동부여는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 중국의 전한(前漢)과 국경을 맞대고있지도 않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도 없었다. 동부여는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여에 의해 막혀 한나라와 교류를 할 수 없었다.


드라마가 상정하는 그 자리에는 사실 북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 동명성왕 고두막한

또 드라마에서 볼 때 전한(前漢)이 매우 강성하여 부여 국내에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은 북부여의 국통을 잇게 되는데, BCE 58년 고무서 단군이 죽자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북부여의 6대 단군인 고무서(高無胥)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일 소서노는 그의 아들 온조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다.  

그러니까 소서노는 드라마에서처럼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본문에서조차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 후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단지 일설로만 연타발의 딸일 가능성을 주를 달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나라의 국통맥을 치졸하게 끊어놓는 것이다. 연타발은 고구려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BCE 200년경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킨 후, 연나라 사람 위만이 한의 세력에 쫓겨 (고)조선의 분국인  번조선의 변방으로 피난을 와 있다가 BCE 194년 번조선 왕조를 강탈하게 된다.

▲ 고추모의 어머니 유화와 고추모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 무제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인해 번조선 위만정권도 막을 내리게 된다.(BCE 108년) 한 무제는 계속해서 번조선 일대와 북부여의 서쪽변방으로 침략을 하는데,  이 때 서압록(요하)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가는 곳마다 격퇴하여 민심을 크게 얻게 된다. 고두막한은 또한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민심과 혈통을 바탕으로 북부여 4대 고우루 단군을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개칭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에서 말하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은 고주몽이 아니다. 또한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도 아니다.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인 것이다. 그가 바로 북부여 5대 단군이며 고주몽의 장인이 된 6대 고무서 단군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소서노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물론 주몽이 ‘동명부여’(졸본으로 도읍을 옮겼기에 졸본부여라고도 함)를 계승하였으므로, 주몽을 ‘동명왕’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참고로,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를 이어 그의 동생 해부루가 5대 단군으로 먼저 즉위하였으나, 고두막한에 쫓겨 동쪽의 가섭원이란 곳으로 나라를 옮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부여의 시작이다.) 

고두막한의 태양 같은 의기와 충의에 힘입어 사실상 한나라는 조선의 고토에서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가 번한의 영토 부근에 한사군(낙랑, 임둔, 현도, 진번)을 설치한 것은 사실이나 고두막한을 필두로 한 민중의 뜨거운 저항으로 조기에 무너지고 만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제 이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혹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민족사의 맥은 정신사에서…

이상의 내용은 주로 한민족의 정통도가사서를 묶어 편집한 『환단고기』 내의 「단군세기」, 「북부여기」, 「고구려국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런 사서들은 한양조선 시대조차 중국에 사대하는 풍토로 인해 금서로 묶여 있었다. 흔히 강단 사학자들이 기존의 역사 서술구도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역사 서술의 사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참역사는 정신사를 알아야 한다. 왜 고주몽 성제는 최초의 연호(年號)를 ‘다물(多勿)’이라고 했던가? 다물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회복하다’, ‘되물리다’는 뜻을 가진 한민족의 고어(古語)이다. 고주몽 성제는 (고)조선의 역사적 문화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혈통적 정신적인 연계성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고구려와 고조선이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서술하는 현재의 역사 기술 풍토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참 역사는 고조선이 나라를 다스렸던 근본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한민족 역사는 단순히 청동동검과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유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오늘날과 같이 스테인리스 그릇이 아닌 토기에 음식을 해먹었더라도 오히려 오늘날 인간보다 훨씬 더 수승(殊勝)한 인간적 덕성으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사(先史)시대라 하여 반 짐승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현대의 역사 인식도 또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부여(브라이트)족이 건국한 유럽의 불가리아


▲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사비) 시내에서 바라본 남쪽 비토샤 산의 풍경. 소피아가 자리 잡은 비토샤 산이 발칸 산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비잔틴시대의 기록화.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펼친다
.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유럽인종 중 몽골반점이 발견되는 지역은 불가리아 지역 뿐만 아니라, 훈족.마자르족이 세운 헝(훈)가리 지역과 프랑스, 스페인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된다. 유럽을 지배하던 몽골리안 유목민족의 흔적으로 유럽은 몽고리안과 백인과의 혼혈 민족국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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