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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년 고구려제국의 핵심강역은 어디?

우리 역사의 진실은 국사책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2/26 [14:04]

900년 고구려제국의 핵심강역은 어디?

우리 역사의 진실은 국사책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2/26 [14:04]
과연 900년 대제국 고구려의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 또 그 영토를 지도에 그려보면 과연 어떻게 될까? 우리 국민들에게는 무척이나 궁금한 사항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영토의 변화가 수시로 있었던 고구려의 영토를 한 장의 지도로 확정지어 그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900년의 긴 사직에는 광개토태왕 같은 전성기도 있었지만, 동천왕 때와 같이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을 받아 많이 위축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당나라 고종이 언급했듯이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가 마치 개이빨(犬牙) 처럼 서로 얽혀져있어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며,  또 고구려는 직접 통치의 영역도 있었으나, 연방제국으로 상대국을 인정하며 속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는 식으로 운영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  백제,신라,왜를 연방으로 편입한 고구려 대제국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백제 아신왕을 공격해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을 받는다. 아신왕을 죽이고 백제의 영토를 고구려의 직할령으로 전부 편입할 수도 있었으나, 조공을 받고 속민으로 삼아 백제라는 국가를 따로 인정하면서 고구려 연방의 하나로 편입한 것이었다. 신라와 가야도 마찬가지로 연방국으로 편입한다.

그러면 우선 사학계의 바이블인 <삼국사기>로 고구려의 영토를 추정해 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영토의 단서가 될만한 몇 개 기록은 있으나, 근본적인 지리 비정이 잘못되어 있어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추정할 수가 없게 되어있다. 그럼 왜 어떤 내용이 <삼국사기>에 있기에 고구려의 영토를 추정하기 힘든 걸까?

반도사관의 빌미를 제공한 삼국사기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인의 민족정신과 얼을 빼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고, 조선과 중국 전역에 있던 고대사서 20만권을 수거하여 불사르고 수많은 우리의 사서들을 일본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남겨놓은 고대사서로는 달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둘 뿐이었다. 왜 2권은 남겨 두었을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위대한 단군조선에 대해 알게 되면 민족정기를 빼기 힘들다고 판단되어, 단군조선을 언급한 고대사서는 전부 없애 버리고는 단군을 신화화해 버린다.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삼국시대 사서이기 때문에 단군조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신화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남는다. 사서를 전부 없애는 것보다는 “너희들의 사서에도 단군은 신화로 기술되어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 위대한  조선의 영역도. 이런 민족을 일개 섬나라가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역사왜곡과 단군의 신화화가 필요했다.

<삼국유사>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아무래도 <삼국사기>보다 많이 떨어진다. 승려가 저술한 역사서이다보니 아무래도 종교관에 입각한 서술이 많이 있다. 고려 때 신라계 김부식선생이 저술한 <삼국사기>는 상당히 정교하기는 하나 선생의 조상이자 승자인 신라 위주로 기술하다보니 고구려/백제를 많이 폄하시켰고, 사대주의 사관에 의해 저술된 사서라 주체성이 없고, 일제에게 반도사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제의 분서갱유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일제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는 것이다.

반도사관의 빌미란 <37권 잡지 지리>에서 우리 고대 강역에서 중요한 위치인 패수(浿水)의 위치를 대동강으로 분명하게 비정하면서, 고구려의 평양성은 서경(西京)인 것 같다고 적었다. 그 근거로 <당서>의 기록을 인용했다. 이 문구는 나중에 일제에게 악용되어 망국의 반도사관을 고착화시켜 아직까지 정설로 이어지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 의해 패수가 현 대동강으로 비정되는 바람에 낙랑군 등 한사군의 위치가 전부 현 북한 지역이 되고, 현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고대사의 강역이 실제보다 엄청 축소되어 버린다. 일제는 <삼국사기>의 이 점을 이용하기 위해 분서갱유에도 없애버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삼국사기>를 직접 조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  현 국사교과서의 삼국의 영토
필자는 김부식이 인용한 <당서>를 열심히 읽어 보았으나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확정적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패강의 어귀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이 된다.”또는 “패강을 지나 평양에 도착한다.”는 문구가 있다. 아무리 사대주의에 물들어있는 유학자라 하더라도 <삼국사기>의 집필진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데 이런 글귀만 보고 패수를 대동강으로 단정지울 수는 없다. 패수란 중국 사서에서도 숱하게 언급되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뭔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결국 <삼국사기>로 추정할 수 있는 고구려의 영역은 현 국사책에 나와 있는 고구려 영역과 별 차이가 없다. 즉 현재의 북한 지역과 만주 땅만을 그 영역으로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영역은 고려와 근세조선의 영역일 뿐, 고구려와 대진국의 영역은 아니라고 잘라 말하고 싶다. 그럼 실질적인 고구려의 강역은 어떠했을까?

고구려의 강역을 전성기와 평상기와 쇠퇴기로 나누어 지도에 그린다는 것은 힘들고, 전성기에 동서남북으로 어디까지 최대로 진출했느냐를 알아보는 것으로 고구려의 영역을 말하기로 하겠다.

동쪽으로는 어디까지?

고구려가 중원의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동쪽으로는 당연히 한반도 전체와 만주 일대가 고구려의 영역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 신라가 있어 고구려의 영역이 아니라고 국사책에서 배운 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진실은 국사책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백제와 신라는 원래 대륙에 있었던 나라들이며, 대륙에도 있으면서 한반도에도 들어온 것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5-6세기 경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나중에 따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나중에 신라는 고구려 말기에 만주 지역까지 진출한다. 그래서 고구려 평양성(요양) 동쪽에 신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지, 평양성이 대동강 평양이 아닌 것이다. 
 
그럼 동쪽인 현 일본 열도는 어떠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광개토태왕 비가 훼손되고 조작되기 전에 <한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선생이 직접 비문을 보고 글로 적어 놓은 <비문징실>이 전하는데 거기에는 왜 정벌 기사가 나온다. 그리고 <한단고기>에도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왜는 현 일본 열도라기보다는 열도로 옮겨오기 전 중국 남쪽대륙과 대륙에서 가까운 큰 섬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한단고기>에 의하면 고주몽과 같이 동부여를 떠나 길을 떠났던 사람은 오이 마리 협보였는데, 이들 중에 협보는 나중에 다파라국(왜)의 시조가 된다. 이 다파라국은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했는데,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고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늘 통제를 받았다 한다. 다파라국(왜)도 역시 고구려 대제국의 일개 연방이었던 것이다.

왜에서 처음 국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백제계 응신이 세운 야마토왜(大和倭)이다. 그 이전의 왜는 실질적인 국가로 보기가 어렵다. (응신은 백제 12대 계왕의 손자로 왜로 건너가 백제 아신왕과 손잡고 광개토태왕과 일전을 벌이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북쪽으로는 어디까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중국의 사서 <통전>을 인용하여 “주몽이 북부여에서 동남쪽으로 길을 떠나 홀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성을 고씨라 하였다.”그러므로 홀승골성이나 졸본은 같은 것 같다고 기록하였다.

몽고 과학원 수미야바타르 박사의 설에 의하면, 주몽의 설화 배경은 몽고의 부이르호나 할힌골강인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북부여 건국 장소로 언급되는 홀승골과 <위서>에 나오는 홀승골은 몽고의 할힌골 강이며, 졸본의 비류수(沸流水)는 부이르호수로 비정하고, 북부여가 몽고에서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광개토태왕 비문에서도 확인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재 바이칼호 연변에 사는 부리아트인들이 스스로 코리아(Korea)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설이기도 하다.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는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천문기록을 컴퓨터로 계산하여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식기록으로서, 일식은 월식과는 달리 지구 전 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과학상식으로 알고 있는 사항이다. 천문을 관측하던 곳은 원래 그 나라의 수도와 가까운 법이다.

고구려의 일식기록을 분석해보니 최적관측지가 바이칼호 우측 몽고지역이며, 백제는 북경지역, A.D 201년 전의 상대신라는 양자강 중류, 787년 이후의 하대 신라는 한반도 남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최적관측지란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위치이므로 부분일식까지 보는 지역은 그 주위로 많이 넓어진다.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으로는 개기일식인지 부분일식인지 구별이 안된다. 


▲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나오는 삼국의 일식기록도
 
참고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일식기록을 분석해보니 628년-709년 사이에는 동지나 해상 즉 대만 필리핀 해남도와 대륙의 남부가 최적관측지였다. 1189년 이후에야 비로소 현 일본열도가 최적관측지로 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핵심강역과 수도는 원래 우리 민족의 고향인 바이칼호 우측을 중심으로 위로는 시베리아까지 그리고 아래로는 현 내몽고지방이나 하북성 북쪽(북경 주변)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수도가 현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례라 하겠다.

우리 민족의 문명이라 하는 홍산문명의 발견지는 내몽고 적봉시 근처이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내몽고의 염수라는 곳을 정벌한 것으로 되어있어 이 사실의 신빙성을 더해주며, 게다가 1976년 북한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는 이러한 사실을 확정시키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  1976년 북한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의 무덤 안의 벽화. 주변 13태수가 진에게 하례를 올리고 있다.

무덤의 주인공 진은 고구려 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태왕 때의 인물로 유주자사(유주는 현 북경지방으로 유주자사는 우리로 치면 경기도지사)를 지냈는데, 진에게 주변 13 지역의 태수가 하례를 올리는 장면이 벽화로 남아있는데, 13지역은 현 하북성 전 지역과 산서성과 산동성의 일부 지역까지로 이는 광개토태왕 시절 유주(북경)가 고구려의 핵심강역 임을 강력히 입증하는 자료라 하겠다. 

▲  덕흥리 고분의 벽화의 13태수의 지역을 지도로 표시했다. 하북성은 물론 산서성과 산동성 일부 지역도 포함된다.
 
고구려의 핵심강역에서 북쪽 영토는 어디까지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바이칼호 북쪽인 북시베리아나 북극 쪽으로 올라가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기후 관계로 동토인 북시베리아를 힘들여 굳이 정벌할 이유는 없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바이칼호 북쪽대신 따뜻하고 물자 많은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았나 싶다.

고구려의 남쪽과 서쪽까지의 전체 강역을 굳이 논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핵심강역만 보더라도 현 국사교과서는 엄청난 왜곡이 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맥을 잇는 정통성 있는 적장자 국가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현 국사교과서는 이러한 고구려를 만주 지방에 가두어 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박노자 같은 국적불명의 강아지가 여기저기서 고구려의 진실을 왜곡하며 함부로 멍멍 짓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지면상 고구려의 남쪽과 서쪽 영역은 어디까지? 는 다음 편에 연재됩니다.
어이상실 08/02/26 [21:12] 수정 삭제  
 


朝貢이라는 말은 朝鮮에게 바친다는 말이다. 朝廷은 朝鮮의 정부를 뜻하며 중국대륙에 있던 모든 족속들은 朝鮮의 屬民임을 나타낸다. 漢나라에 물건을 바치면 漢貢이어야 하는데 이 역시 朝貢이라 한다. 朝鮮의 위대했던 모습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말은 존환양호(尊桓攘胡), 尊(檀)朝攘胡를 고친 것이다.



그러나 中土의 나라들이 君公 및 王에 봉해졌던 내내 우리나라 속국이었다. 百濟 皇帝를 君公에 봉할 수가 없어서, 皇帝보다 더 높다는 뜻으로 廣開土境好‘太皇’[高句麗가 계승한 北夫餘는 檀帝의 나라다. 中國 문헌으로 둔갑한 책에도 高句麗의 통치자는 皇帝로 기록되어 있다. 隋書에는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소열제(昭烈帝), 대무신왕(大武神王)은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로 되어 있다. 날조하면서 빠트린 대목이다.


李氏朝鮮 중기에 쓴 太白逸史 조차 廣開土境好太皇이라 했다. 채옹(蔡邕 : 132~192 後漢의 학자)도 "독단(獨斷)"에서 天子라는 호칭은 우리나라가 먼저 사용했다고 했다(天子之號稱始於東夷父天母地故曰天子). 太王으로 표기되어 있는 廣開土境大勳跡碑는 李成桂가 朱元璋과 濊貊族에게 黃河 이남을 주었을 때, 날조사에 맞춰 새로 만든 가짜 비다],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라 했던 것이다.


新羅 皇帝는 신하를 君公도 아니고 君王에 봉했다. 원성제(元聖帝)는 황위쟁탈전에서 패한 金周元을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했다. 王이 王을 封할 수 있나? 통치자는 君公이고, 신하는 君王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新羅의 최고통치자가 皇帝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하를 君王에 봉할 수 있었다. 新羅가 동아시아를 통일했을 당시 新羅는 天子國이었다. 그래서 日本이 植民母國 百濟를 멸망시킨 新羅에 서둘러 조공했다. 제1의 강대국이 天子國의 지위를 획득했던 것이다.


고쿄 기요히코(吾鄕淸彦)는 일본 신대(神代)문자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司馬遷의 史記 25 권은 檀君朝鮮이 中國 대륙을 지배 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中國이 檀君朝鮮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삼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

최근 百濟는 동방의 로마(얼마 전에 열린, 학술대회 주제)라는 위치까지 끌어 올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百濟의 실체를 모른다. 로마가 서방의 百濟였던 것이다.

高句麗가 廣開土境好太皇 이전까지 中國 대륙에서 南進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허구의 漢四郡 때문이 아니라, 百濟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高句麗는 5 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4 세기 까지는 百濟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百濟의 전성기는 高句麗의 전성기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百濟는 4 세기 까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淸이 後漢의 일식기록을 다시 베꼈다는 사실이나 日本이 1824 년 이후에 천문기록을 갖기로 날조 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저들이 우리나라 역사책 및 고문헌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日本은 20 세기에 들어 와서도 우리나라 한단사(桓檀史)를 토대로 남연서(南燕書) 등의 날조 일본 역사책을 만들어 왔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이를 근거로 日本과 中國에 우리나라 역사책과 기타 문헌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부상수(扶桑樹)는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고 하는 신령스러운 나무다. 그 扶桑樹가 있는 나라가 동쪽에 있어 日出處라 했다. 우리나라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민족을 東夷族이라 했다. 그 원뜻은 오랑캐가 아니고 동쪽에 사는 어진 종족, 근본인 종족이다. 오늘날 옥편을 찾아보면 夷는 ‘오랑캐, 동방동족,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평평하다, 평탄하다, 깎다, 온화하다, 안온하다, 기뻐하다, 크다’라는 뜻이 있다. 정반대 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랑캐,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등은 中土의 미개 오랑캐 華夏族이 揚子江 이남으로 기어 나온 후에 玉篇에 추가한 것이다.

倭奴王이 소유하고 있다는 족보책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은 중국의 문물을 전수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졌다. 중국계 가문 109 개는 모두 중국에 있던 百濟, 新羅系의 가문이다. 高句麗系 역시 百濟系, 新羅系 가문이다[날조 日本史에서 新羅의 문물 전수는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中國倭에게도 新羅는 원수같은 나라였다. 추잡의 절정 기모노(きもの)섹스, 혼욕(混浴), 요바이(よばい) 풍습 때문에 新羅 땅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천문기록 27쪽)
하기야 家門이라는 말이 日本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中國倭가 저 땅에, 기모노섹스, 混浴, 요바이의 性文化를 전파한 이래로 천 년 동안 가문 해체를 경험한 나라다. 그저 다른 나라 보기에 창피해서 家門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히로히토(裕仁)는 다이쇼(大正)의 섭정으로 있으면서 南淵書라는 희대의 僞書도 창작해내고, 倭奴王이 된 후에는 花郞世紀 (화랑세기)날조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新撰姓氏錄 역시 히로히토가 날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南淵書는 벌거벗고 흙구덩이에서 뒹굴던, 百濟의 군사식민지로 출발한 日本이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했으며 당연히 예속시켜야 한다.”가 핵심 내용이다. 5 세기에도 日本은 원시 그대로의 아담과 이브였다.
南淵書는 日本의 순수창작이 아니다.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한 것은 배달, 朝鮮, 高句麗였다. 배달과 朝鮮, 高句麗를 日本으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결단코 배달도, 朝鮮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데, 日本은 배달과 朝鮮이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王朝의 모든 正史書와 온갖 역사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의 역대왕들이 숨겨놓았던 한단 역사서 51 종 마저 日本으로 빼돌렸다.

倭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서를 분서하고 개서해서 韓國史 말살에 광분 했다는 것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韓國史 抹殺은 倭奴의 最大 國策事業이었다.

중국이 4대 발명품으로 자랑하는 것 중에 이미 한국이 元祖이자 종주국으로 밝혀진 인쇄술[앨 고어 前 美國 부통령은 2005 년 5 월 19 일 "서울 디지털 포럼"에 참석하여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Gutenberg : 1397~1468)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李氏朝鮮)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된 것"이라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敎皇의 사절단과 이야기 했는데 그 사절단은 Corea를 방문하고 여러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고 전했다. 2005.5.19.연합뉴스]
열심히 08/02/27 [01:15] 수정 삭제  
  쥐나(시조=황제헌원=동이족)와 일본(왜=가야)은 혈통적으로 조상들이 조선인들이기에 동생뻘 되는 민족들임으로 그들의 역사왜곡이라는 것도 다 열등감에서 기인함으로 나중에 잘 가르쳐 주고 역사논쟁에서 논리적으로 승리하기위해 조선인들이 부지런히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플코독자 08/02/27 [01:44] 수정 삭제  
  위 어이상실님의 인용글(상선약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 보다는 패거리와 개인이익을 앞세우는 개독들과 얼빠진 국민들이 판을 치는 즐비한 세상에다(관심을 가지고 상선약수님이 쓰시는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애독하는 자들도 거의 전무해보였음) 기막히는 모함과 해코지를 겪으시는 가운데 아무도 위로도 하지 않아 결국 상선약수님의 역사칼럼이 2006년 8월에 중단이 되고 말았으며 또한 비공개로 설정되고야 말았습니다.
전준성 08/02/28 [23:35] 수정 삭제  
  http://blog.hani.co.kr/jaychun/에 한번 방문하시어 조언 부탁합니다. 조만간에 박노자씨가 쓴글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올릴 에정입니다만, 제 공부가 미약하여 잘 될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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