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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61)통한의 을사늑약

통한의 을사늑약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6/15 [22:16]

대한정통사(61)통한의 을사늑약

통한의 을사늑약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6/15 [22:16]

대한정통사(61)통한의 을사늑약

▲ 중명전(출처 - 문화재청) :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을 강압적으로 맺었던 곳   

 

[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이등이 11월 15일에 광무황제를 알현하면서 대한국의 외교권을 이양할 것을 상주하는가 하면 그러한 내용의 공문을 대한국정부에 제시하는 등 기세가 등등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등에게,

 

“작년에 이등공이 특파대사로 대한국을 다녀간 후에 대한국내부의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소. 그리고 일본이 이제는 외교관계까지 다 접수한다고 하니 대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의심하고 악감정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라고 대놓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뻔뻔스러운 이등은 ‘대한국이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나, 대한국이 독립하고 있는 것이 누구의 덕입니까?’라고 지극히 오만하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한 이등의 안하무인격 태도를 목격한 이완용 등 기회주의적인 대신들은 재빨리 이등을 가까이 하며 친일파로 변신하였으나, 오직 한 규설만은 충성심을 잃지 않고 국권을 수호하고자 노력하였다.

 

  이틀 후인 11월 17일에 이등은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임권조·장곡천 등과 함께 다시 대궐에 나타나서 ‘보호조약’을 강제하려 하였다. 온갖 궤변을 다 동원해서 일제가 마치 대한국을 위하여 헌신이라도 하는 듯이 둘러 대던 이등의 요설에 황제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등은 ‘이 조약은 일본정부가 확정한 것이므로 더 이상 절대로 변동할 수 없으며, 만약 거절하는 경우에는 대한국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협박과 공갈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황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짐이 귀국 황제의 일로선전(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 조칙가운데 ‘대한국의 독립을 보증 운운’하였으므로 이를 믿었더니 지금에 와서는 ‘보호조약 운운’함은 이것이 웬 말인지 짐은 양해하려 하나 알 길이 없노라.”

 

고 일갈했다. 그에 대하여 이등은 ‘본국정부의 명령이니 허락해 달라’고 거만스럽게 대답하였다. 이에 황제는 내심 매우 괘씸하게 여기면서도,

 

“짐이 조종(祖宗)이래로 대사가 있으면 대소 관리와 재외유현(在外儒賢)에까지 자현하여 결처할 뿐 아니라, 일반 국내의 신사와 인민에게까지라도 횡의입론(橫議立論)하여 탐방시행(探訪施行)함이 유래(遺來)의 전례(前例)이니 짐의 단독 의사로 천단(擅斷)할 수 없노라.”

 

하고 대인답게 거듭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그러나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등은 황제의 심중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황제께서 정부각료에게 자문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반국민에게 듣는다는 것은 괴상한 말’이라고 되레 따지면서,

 

“대한국은 입헌군주국도 아닌 군주전제국가인데 이것은 국민을 선동해서 일본에 반항해 보자는 뜻이 아닙니까? 모든 사태에 대해서는 황제폐하 자신이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유생들이 비밀리에 상소운동을 일으키려는 것도 그러한 황제폐하의 태도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까?”

 

하며 을러대었고, 황제는 그에 대하여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고, 꼭 민론(民論)을 듣겠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중추원이 있고 거기에다가 황제의 의견을 물어보는 제도가 있기 때문에 정부와 함께 자문을 해보겠다는 뜻이다. 절대 민중을 선동하려는 뜻은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 기고만장한 이등은,

 

“인민의 이의가 있으면 병력으로 진압할 것이오니, 오직 폐하께서는 양국의 교의를 진념(軫念)하사 처분을 곧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고 더욱 거만을 떨었다. 이에 더욱 기가 막힌 황제는,

 

“이 조약은 무국(無國)의 조약이다. 짐은 응할 수가 없노라.”

 

하고 단호히 거절했다. 예상외로 강경한 황제의 태도에 당황한 이등은,

 

“그럼 어전에서 각의를 열어 결정하심이 어떠하올까 하옵니다.”

 

하고 사뭇 겸손한 어조로 나왔다. 그러나 황제는,

 

“짐은 그러한 (망국을 자초할) 어전회의는 열 수 없노라!”

 

하고 강경하게 답했다. 또한 황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등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차조(此條;이 조약)를 인허하면 즉 망국과 일반(一般)이니, 짐은 寧(령;차라리) 종사(宗社)에 순(殉)할지언정 결코 인허치 못하리라!”

 

하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광무황제의 단호하고 강경한 반대에 부딪친 이등은 황제에게 더이상 상주해봐야 소용없을 것임을 직감하고 어전을 물러 나와서는, 친일매국노 간신들을 동원해서 어전회의를 억지로라도 개최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애국심이 강한 참정대신 한 규설이 끝까지 반대하여 어전회의 개최가 어려워지자 이등은 다시 황제께 알현을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병이 심해서 더이상 못 만나주겠다고 알현요청을 거절했다.

 

  초조해진 이등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는 ‘말 안 들으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라는 등의 모욕적인 언사로 노골적인 협박을 자행하였으며, 종국에는 대신들에게 종이쪽지 한 장씩을 돌려주면서 ‘보호조약에 찬성하는 사람은 [가(可)]자를 쓰고, 반대하는 사람은 [부(否)]자를 쓰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대하여 참정대신 한 규설과 탁지부대신 민 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 단호하게 거절하였으나, 이등에게 기가 질린 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박제순은 가[可]를 쓰고 조약에 날인함으로써 매국노의 대명사인 오적(五賊)이 되고 말았다.

 

박제순은 철석같은 결의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이 [가]표를 던짐으로써 동지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엉터리 ‘보호조약’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서울시내는 완전히 일본군의 위협적인 통제하에 놓여 있었으며, 특히 경복궁은 중무장한 일본군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늑약이 알려지자 황성신문의 주필이던 장 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일제와 오적을 규탄하였으며, 서울을 위시한 전국은 바야흐로 분노에 찬 대한국인들의 함성으로 덮여갔다.

 

이완용의 집은 성난 군중에 의하여 불타버렸으며, 군중은 오적을 잡아 죽이려고 몰려 다녔다. 이에 놀란 오적은 일제헌병대에 ‘보호’를 요청하는 등 구차한 목숨을 지탱해 보려고 안간 힘을 썼다.

 

  일제에 의한 사기극이 진행된 대신회의의 실무담당자였던 이 상설은 회의참석차 가던 중에 일제군졸들에 의하여 저지당하여 정작 회의에는 참석도 못하였고, 민 영환은 매국적 담판이 될 것이 뻔한 회의이기에 아예 참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에 그 사기적 회의가 끝나고 일제에 의한 불법적인 감금상태에서 힘없이 풀려 나오는 한 규설을 만난 이 상설은 황제의 인준도 없는 엉터리조약이 강제된 사실을 듣고 함께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러나 통곡을 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이 상설은 곧 황제에게 상소하여 최후의 결단을 내려주실 것을 촉구했다.

 

“‥이 조약을 인준하시면 나라가 망하고, 인준을 아니하셔도 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황제폐하께서는 순사(殉死)하실 결심을 하시고, 오적을 죽이시고 조약파기를 선언하셔야 합니다‥”

 

  이 상설은 이와 유사한 내용의 상소를 다섯번에 걸쳐서 올리고 관직을 사임한 후, 동료들과 함께 문무백관과 유림들의 조약파기를 위한 연명상소도 올렸다.

 

상소대표자로서는 원로인 조 병세가 뽑혔으나 그는 곧 울분에 북받쳐서 자결하였고, 다음 대표자로 뽑힌 민 영환은 이 상설과 함께 매일같이 상소를 올리다시피 하였으나 일제와 친일매국노들의 농간에 의하여 상소가 효과가 없게 되자 그는 일전에 맹약한 바에 따라서 자결하고 말았다. 민 영환의 자결소식이 전해지자 이 상설은 종로네거리로 나가서 수많은 민중 앞에서,

 

“나도 국가에 충성치 못하여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 이제 민 영환이 자결한 오늘이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하는 날이다. 내가 민 영환 한 사람의 죽음을 위해 조상(弔喪)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함을 한탄하며 우노라!”

 

라는 취지의 연설을 한 후, 그도 또한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쳐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성공 못하고, 유혈이 낭자한 채로 인사불성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인근 민가에 옮겨져서 응급치료를 받고나서 수시간 후에야 깨어났으나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대할 것인가?’하며 음식을 전혀 들지 않으려 하므로 동지들이 자택으로 데려갔으나, 그 후로도 수개월동안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거의 물만 마시면서 통곡을 하며 두문불출하였다.

 

  민 영환의 장렬한 자결후에 황제는 곧 충정공(忠正公) 시호를 내려 그 의로운 죽음을 애도하여 뜻있는 대신들과 국민들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충정공이 순국한 지 6개월 후에는 충정공댁 사당의 마루 틈새에서 혈죽(血竹)이 솟아 나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그의 만고충정을 더욱 빛냈다. 많은 사람들이 혈죽을 확인하고 감회에 젖었으니, 그 중의 어떤 방문객은 다음과 같은 싯귀절로 감회를 토로했다.

    

“血生死 死生義 義生忠 忠生節 節生竹 血食一貫千秋 竹色四時長春

  피흘려 돌아가시니 그 죽음 의롭구나

  의로운 마음이 충성스러운 혼이 되고

  충성스러운 혼령으로 맺힌 절개에서 대나무가 나니

  피를 머금음은 천년을 한결같이 꿰뚫을 것이오

  대나무빛은 일년 사철을 봄처럼 푸르리로다 ”

    

  이 상설은 민 영환과 함께 즉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자신도 언제든 기꺼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것을 다짐하며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중 이 상설은 네델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기회에 헤이그에 직접 가서 일제의 죄악상을 세계만방에 폭로하고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열강및 각 나라들의 협력을 얻어서 국권을 회복해야겠다는 웅지를 품게 되었다.

 

같은 뜻을 지니고 있던 이 준과 함께 일단 계획을 세운 이 상설은 극비밀리에 광무황제께 연락하여 그 뜻을 전하고 비밀리에 함께 실행할 수 있기를 황제께 간청드리니, 이 상설의 충심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황제는 다시 비밀리에 황제수결(手結)과 어보(御寶)가 찍힌 백지위임장을 내렸다. 황제는 이 상설의 뜻을 크게 칭찬하는 뜻으로,

 

“경의 붉은 충성심을 짐은 잘 알고 있노라. 어떻게 해서라도 이 기회를 잃지 말고 전력을 경주하여 (목적을)성취하도록 하라.”

 

는 친서까지 함께 내렸던 것이다. 이에 감읍하고 용기백배한 이 상설은 곧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이 상설은 우선 일제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행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치밀한 탈출작전부터 세웠다.

 

  4239년(서1906) (음)4월 17일에 선친의 기제사를 최후로 마친 이 상설은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고향의 선영에 성묘하러 간다고 소문을 내놓고는, 그 길로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해삼위(블라디보스톡)로 향하였다.

 

해삼위에 도착한 이 상설은 우선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 범진과 연락을 취하면서 평화회의 개최소식을 기다렸으나, 회의가 이듬해로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오자 그 때까지 우선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간도에서 민족교육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용정촌으로 떠나 가서, 동지들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고 평화회의가 개최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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