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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59)강요당하는 병탄 사기극

강요당하는 병탄 사기극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5/25 [17:41]

대한정통사(59)강요당하는 병탄 사기극

강요당하는 병탄 사기극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5/25 [17:41]

 대한정통사(59)강요당하는 병탄 사기극

 

 

  [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대한국을 병탄하는 첫 순서로 한일의정서를 강요한 일제는 이어서 4237년(서1904) 8월에는 소위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하면서 대한국의 재정적 기반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대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재정고문’으로 왔다는 목하(目賀:메가다)는 엉터리 화폐개혁으로 민중경제를 오히려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난 후에, 대한국정부와 궁중의 반대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궁중재산까지 정리하려고 설쳤다. 일제는 궁중재정을 국가재정에 편입시킴으로써 황실의 자금줄을 묶어 두고, 최종적으로는 대한국의 모든 재정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폭거는 황실을 일제의 침략에 대한 최후의 보루로 삼고 있던 광무황제로부터의 큰 저항에 부딪쳤고, 황제는 황실재정 관리만은 충직한 내장원경 이 용익에게 필히 맡기려 하였다.

 

그러한 황제의 조치를 아니꼽게 여긴 일제에 의하여 이 용익은 일본땅으로 강제연행당했다가 10개월만인 4238년(서1905)도 1월초에야 다시 귀국할 수 있었다. 이 용익의 귀국을 한사코 반대하던 임권조는 수많은 첩자들을 이 용익의 주위에 깔아놓고 감시시켰다.

 

  황제가 이 용익에게 다시 내장원경의 임무를 맡길 것이라는 정보를 첩자들을 통하여 알게 된 이등박문은 깜짝 놀라서 주일한국공사 조 민희를 만난 자리에서 그 결정을 철회하고 목하에게 대한국황실의 재무관리를 일임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최후의 보루로써 황실만은 지켜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던 광무황제로서는 그것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예기치 못했던 광무황제의 굳은 결의에 놀란 임권조는 친일매국노들의 집합소인 일진회를 동원해서 이 용익 배척운동을 일으켰는데, 황제는 여론을 빙자한 매국노들의 치졸한 음모를 눈치챘으나, 5월 14일에는 압력에 못이기는 체 이 용익에게 강원도관찰사 직책을 주어 부임토록 조치했다.

 

그러나 이 용익은 강원도에 가지 않고 궁중이나 친밀한 일본인의 집 등으로 숨어 다니면서 계속 광무황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다가 결국 밀정에 탐지되어 광무황제만 곤경에 몰리게 되었다. 이 용익은 마침내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함을 절감하고 대책을 강구하던 중, 대한국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려서 협조를 구하려 한 광무황제로부터 육군부장의 직책과 밀명을 받은 후 비밀리에 프랑스를 향하여 출국하였다.

 

그런데 불운이 겹치느라고 그가 승선한 배가 풍파를 만나서 산동성 연대항에 임시 정박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일제관헌에게 적발되어 체포당하고 말았다.

 

  일제는 당연히 이 용익의 탈출사건을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고자 대한국정부에 따졌는데, 밀명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 한 대한국 측에서는 그가 멋대로 출국했다고 변명을 하면서 그를 공직에서 해임시켜 버렸다.

 

만일 밀명이 성사도 되기 전에 밝혀지는 날이면 이 용익의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될 것이 뻔하였으므로, 우선 황제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이 용익의 생명만이라도 건지기 위한 고육지계였다.

 

그리하여 이 용익은 공직을 박탈당한 채 풀려나서 프랑스로 갈 수는 있었으나, 국가를 대표할 만한 아무런 외교권도 행사할 수 없었으므로 열강 중 어떤 나라도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이 용익은 할 수 없이 망명생활을 시작했고, 프랑스와 러시아 등 비교적 대한국에 우호적인 국가들을 방문하면서 조국의 현실을 알리고 일제를 규탄하는 데 마지막 정열을 기울였다.

 

  일제는 광무황제에게 궁중재정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일제로부터 3년간 150만엔의 차관을 도입토록 반강제적으로 주선하였는데, 광무황제는 그러한 거액의 자금이 들어온다면 그것도 독립운동자금으로 유용하겠다고 나름대로 판단한 끝에 차관을 승인했다.

 

그 후로도 일제는 온갖 구실을 붙여서 관세수입을 장악하는가 하면 통신사업도 장악하는 등 대한국에 남아 있던 몇 안되는 이권들마저 송두리째 도둑질해버렸다. 심지어는 재정정리라는 미명하에, 대한국 자체의 은행을 만드는 대신에 일제의 제일은행이 대한국의 국고금을 흡수해버리는 흡혈귀같은 기구로 작용함으로써 민중생활이 도탄에 빠지는 등 그 폐단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한일의정서 조인과 동시에 대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로 작정한 일제는 먼저 그 사기적인 의정서를 근거로 하여 러시아 주재 공사관을 폐쇄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4237년(서1904) 5월 18일에는 마침내 러시아와의 모든 조약을 폐기당하게 되었고, 대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러시아의 이권은 모두 일제에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일제의 음모를 잘 알고 있던 러시아주재 공사 이 범진은 철수하지 않고 버티었으며, 국제적으로 일제의 횡포를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광무황제께서도 4237년(서1904) 9월에 ‘대한국의 독립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친서를 비밀리에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의 고문인 니드햄(Charles W.Needham)을 통해서 미국무장관 헤이(John Hay)에게 보냈으나, 이미 국제전략상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대한국과의 관계보다 더욱 중요시하기로 한 미국정부측으로부터는 애석하게도 별다른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목하는 4237년(서1904) 10월 17일에 재정고문으로 들어오자 곧바로 엉터리 화폐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재정적 위기를 핑계로 군비를 삭감하여 대한국의 국방력을 마비시키는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이어서 12월에는 다시 재정절감을 핑계삼아서 해외공사관들을 대폭 축소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에 따라서 이듬해인 4238년(서1905) 5월에는 영국주재공사관이, 7월에는 미국주재공사관이, 12월에는 주일공사관마저 폐쇄되기에 이르렀는데, 영국주재공사 이 한응은 간교한 일제에 의한 공사관폐쇄와 외교권 박탈음모에 항의하며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써 대한국으로서는 정상적인 외교교섭 경로가 모두 단절되어 버렸고, 남은 외교교섭방법이라고는 오로지 비밀외교, 즉 밀사를 통한 마지막 외교수단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었다.

 

  일제는 대한국의 모든 대외적 활동을 봉쇄하여 고립시킨 후에 힘들이지 않고 병탄해 버리려고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두 차례에 걸친 영일동맹을 성립시키고도, 4238년(서1905) 9월 9일에는 일제외상 소촌(小村:고무라)이 주미 일제대사 고평(高平:다까히라)과 함께 루즈벨트와 미국무장관을 차례로 방문하여 대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는 데 대한 승인을 얻어내었고, 주영일제대사 임동(林董:하야시 다타스)도 9월 26일에 일제의 훈령에 따라서 영국외상 랜스다운을 찾아가 대한국외교권을 탈취하려는 데 대한 양해를 구하였는데, 랜스다운은 ‘그것이 성취되기를 바란다’며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국제 열강의 지지를 얻게 된 일제는 드디어 10월 27일에 이르러 내각회의를 열어서 대한국의 외교권장악을 확정하고자 실행결정을 채택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즉, 미국과 영국이 지지하고 있고 다른 나라들도 이를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절호의 기회이며,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양보한 것도 오직 한국을 먹기 위해서 일단 자제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보호권’ 확립 방법과 순서에 대하여 제멋대로 정한 다음 이등박문이 그 집행자로서의 임무를 띄고 11월 6일에 ‘일왕의 특사’라는 명분으로 대한국에 건너 왔다.

 

그와 때를 맞추어 주미 일제공사인 고평도 루즈벨트와 미 국무장관을 찾아가서 다시 한 번 일제의 대한 정책을 설명하고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재차 요구했으며, 그에 대하여 미국 측에서는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일본정부에  ‘미국의 일본지지를 일본 국민이 환영하고 있는 사실을 미국 대통령도 기뻐하고 있으며, 대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책이 성공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는 친절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미 거리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된 이등은 시종일관 거만하기 짝이 없는 방자한 태도로 대한국의 대신들에게는 물론 광무황제까지도 얕잡아 보면서 ‘보호조약’이라는 세기적 대사기극을 날강도적으로 강행해 갔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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