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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58) 한미공수동맹 집념

광무황제의 한미공수동맹 집념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5/16 [14:32]

대한정통사(58) 한미공수동맹 집념

광무황제의 한미공수동맹 집념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5/16 [14:32]

 

한미공수동맹 집념

 

  노일전쟁이 종반전에 접어들던 4238년(서1905) 3월 25일에, 광무황제는 러시아가 일제를 견제하여 대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내용으로 하는 친서를 상해에 주둔한 러시아군지휘관 ‘데시노’를 통하여 러시아황제에게 전달토록 했다. 그 때만 해도 러시아가 북만주에서 설욕전을 벌이기만 하면 국력이 취약한 일제가 패망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친서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노일전쟁이 시작된 지 일개년을 지나 러시아군이 점차 대한국의 경계를 떠나감에 따라 일본의 대한국에 대한 압제의 도는 날이 갈수록 더하여, 병권으로부터 재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악·좌우하고, 관리까지도 그 의사대로 다 임면·출척하기를 자행함에 전연 대한국의 주권을 횡탈하였으며, 공법을 무시하고 포학이 극렬함에도 열국 중 한 사람의 사신도 우리를 도우는 자 없으니, 군신이 한가지로 침식을 잃고 우려하고 고뇌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이에 러시아의 은배(恩背)에 의하여 일본군을 구축하거나 혹은 정책으로서 일본의 폭압에 항거할 수단에 대하여 러시아국 대황제폐하에게 호소할 것을 바라노니‥”

 

  데시노가 보내온 광무황제의 친서를 접수한 러시아황제는 파블로프공사에 훈령을 보내어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내도록 하는 등 대단히 호의를 보였다

 

"러시아가 대한국황제를 도와서 일본의 폭거를 억압하여 배제함도 멀지 않으리니‥”

(이와 같은 니콜라이 2세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그 답신이 광무황제에게까지 무사히 도착되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음).

 

  그러나 일제와 밀통한 음흉한 제국주의 국가 영국의 노골적인 노일전쟁 개입과 미국의 강화회담 추진으로 간악한 일제로서는 숨통이 트이게 되었으며, 점점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이 되어 가는 대한국의 입지는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어 갔다. 일제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대한국에 대한 수탈을 한층 악랄하게 자행해 갔으며, 그에 따라서 자주독립을 지키려는 대한국인들의 반발도 거세어졌고, 마침내 대한국땅 곳곳에서 일제의 폭압에 대한 항거와 의병항쟁의 불길이 높이 타올랐다.

 

  대한국민의 분노는 일제의 수탈장치가 되어 버린 철도나 전선 등을 파괴하여 일제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방향으로 거세게 타올랐고, 또한 일제에 아부해서 앞잡이노릇을 하거나 민중을 수탈하는 부패한 매국노들에게도 퍼부어졌다.

 

4237년(서1904) 9월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폭도’들이 군수와 일본인 역부를 화형에 처하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철도파괴혐의자로 지목된 김 성삼·이 춘근·안 순서 세 명이 처형당하기도 하는 등 민중차원에서 치열한 항일투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4238년(서1905) 5월에는 강원도 원주에서 원 용팔이 의병을 일으켰고, 경기도의 지평(이 문호 의병장)과 광주(구 만서 의병장)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며, 뒤이어서 기라성같은 의병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일제타도를 위하여 초야에서 일어섰다.

 

  이처럼 국내외적 정황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민 영환 등은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하고자 국제정세를 유리하게 만들려고 지혜를 짜내고 있었다. 여러 애국지사들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포츠머스조약에서 대한국에 대한 일제의 우선적 권리가 인정되자 실의에 빠졌던 그들에게 한가지 희소식이 전해졌으니, 그것은 즉 루즈벨트의 딸인 앨리스가 약혼자인 미육군부장 꼬빈과 함께 대한국을 친선방문한다는 소식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소개되었다.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씨의 영양, 해군대장 특레인(트레인)씨와 육군부장 고빈(꼬빈)씨와 급(及) 기일행(其一行)이 내유한성(來遊漢城)하니, 한국사녀(士女)가 병규환성(幷叫歡聲)이로다‥”

  앨리스의 방한은 자신의 결혼을 앞 둔 초호화판 세계일주 중에 들렀던 순수한 친선방문이었던 것이나, 그녀의 부친인 루즈벨트가 주도하여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이루어진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순진한 대한국인들은, 그 당시에는 막연하게 ‘정의로운 나라’라고 대한국에 알려져 있던 미국에라도 기대해 보고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앨리스를 열렬히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앨리스 일행을 맞이하는 역할을 하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민 영환이었다.

 

  애국지사들은 의논 끝에 민 영환의 저택에서 앨리스를 위한 특별만찬을 열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비밀리에 미국과의 공수동맹을 맺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9월 26일 저녁 6시에 민 영환저택에서는 민 영환·이 용익·이 상재·이 준·윤 치호·헐버트가 주최측 대표로 참석하고, 앨리스와 미해군대장 트레인과 육군부장 꼬빈이 귀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만찬이 열렸다.

 

앨리스는 그 자리에서 제의된 공수동맹에 찬성의 뜻을 표시했으며, 트레인은 ‘대한국황제폐하의 국서를 특파대사를 통하여 워싱턴으로 보내어 교섭하도록 절차를 밟도록’ 친절하게도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특파대사 적임자로 헐버트가 뽑혔고, 만찬은 지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다음날 광무황제를 알현한 시종무관장 민 영환은 한미공수동맹이 이 준의 제의로 비밀리에 진행되었음을 보고하니 황제는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이에 민 영환이 특파대사 파견문제에 대하여 보고하자 황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준이 가는 것이 좋겠소.”

 

했으나 민 영환은

 

“이 준은 곧 상해로 가서 프랑스주재공사 민 영찬과 만나 세계 각국에 통신으로 일제의 비행을 호소해서 세계 만방의 여론을 일으켜서 일제를 견제하기로 하였으니, 헐버트를 보내기로 합의보았읍니다.”

 

하고 보고하니, 황제는 애국충신들의 열성적인 노력에 크게 감동하고 모든 것을 비밀리에 붙여 추진하도록 특별히 당부했다.

 

  이 준은 비밀리에 하지 말고 아예 공식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낫겠다는 의견이었으나, 노일전쟁이후 더욱 기고만장해진 일제와 친일파의 안하무인격의 횡포가 극성스러웠던 현실에서 공식적으로 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 준과 헐버트는 밀명을 받고 함께 상해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국가이익을 위하여 이미 일제와 ‘밀약’을 맺은 루즈벨트측에서는 공수동맹에 어떠한 성의도 보이지 않고 흐지부지해 버림으로써 풍전등화와도 같은 대한국인들의 위기상황을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때 ‘밀약’을 알 길 없던 황제가 미국을 끝까지 믿어보기로 한 데는 막연한 바램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었다.

 

즉, 미국은 대한국과 4215년(서1882)에 가장 먼저 상호수호조약을 맺었던 나라였고, 4220년(서1887)에 박 정양의 미국부임을 청국에서 반대했을 때 미국측의 중재로 부임할 수 있었고, 4237년(서1904) 봄까지도 주한 미국공사 알렌은 ‘미국이 대한제국의 독립보전에 호의적임’을 누차 밝혔었고(그러나 4238년(서1905) 3월에 알렌은 미국의 새로운 대한(對韓)정책에 의하여 신임 모르간공사와 교체됨. 즉, 알렌의 주장은 더 이상 미국정부의 정책과는 무관한 것으로 됨), 4237년(서1904) 9월에 전 주미공사 조 민희가 미국으로부터 돌아올 때 헤이 미국무장관과 회담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대한국의 독립을 보전할 것임’을 거듭 다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상의 도덕성같은 것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광무황제의 바램은 날강도들에게 양심을 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니, 그것은 신의를 생명같이 알던 당대의 선비들이나 광무황제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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