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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선생 가는 날,국립묘지 안장해야

이 나라가 반역자 양성소인가? “친일파의 후손들은 몇 백만평씩.."

리복재 기자 | 기사입력 2007/11/21 [00:09]

권중희선생 가는 날,국립묘지 안장해야

이 나라가 반역자 양성소인가? “친일파의 후손들은 몇 백만평씩.."

리복재 기자 | 입력 : 2007/11/21 [00:09]
 
“어떻게 이럴수 있습니까? 친일파의 후손들은 몇 백만평씩 땅을 되찾겠다고 아우성 치는데...
독립을 위해 애쓰신 분들은 돌아가셔서 편히 누울 한뙈기도 없는 나라라니...
작으나마 보탬이 되서 가시는 길 편히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준아네(pensees) 라는 한 네티즌이 울분을 토해냈다.

▲ 백범 김구 선생 묘역 앞에서 故 권중희 선생 노제가 거행됐다.  노제 사진은 남북평화통일실천연대에서 기증   © 플러스코리아
▲ 선생의 책을 읽고 감명 받아 제자를 청하고 민족반역자요 역적도당 하수인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척살했던 박기서씨가 당시 상황과 선생에 대한 추억담을 말하고 있다.     © 플러스코리아
▲ 왼쪽에서 세번째, 주태상, 이선옥 부부, 다음이 故 권중희 선생님 부인 김영자 여사님. 주태상, 이선옥씨는 2004년 선생께서 백범 선생 관련 극비문서기록을 찾아 방미 중 유학생으로 선생을 도왔다. 그 인연으로 결혼하여 2살짜리 딸을 두고 있으며, 이번 돌 잔치에 한국 방문시 타계 소식을 듣고 제일 비통해 하며 안타까워 했다. 부부의 연을 맺게 해주신 선생을 평생 아버지로 모시기로 했다고 한다.     © 플러스코리아
 

▲ 노제에 참석한 애국지사들이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가를 부르며 선생의 유덕을 기렸다.     ©플러스코리아

 또한 조성준씨는 다음과 같이 격문을 써서 알리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치욕스런 역사 속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다
 
권중희 그를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자
우리의 역사가 치욕스러운 것은
우리가 30여 년간 일제의 압박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해방 후 지금까지도
그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직도
치욕의 역사 속에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범법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조국
나는 그런 조국을 원하지 않는다.
 
권중희 선생을 위해
그가 우리의 치욕스런 역사를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故 권중희 선생은 돌아가실때도 1,000원짜리 한 장 없었다고 한다. 이미 한 달 전에 심장에 이상을 느꼈으면서도 돈이 없어 진료조차 받지 못했던 선생이시다. 가슴의 통증을 부여잡고 ‘곧 나아지겠지...’하는 심정으로 아픔을 참으며, 책상에 엎드려 글 쓰시다 끝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민족정기를 위해 일평생 조국에 바쳤건만 정부는 국립묘지 한 자락도 밟지 못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마지못해 뜻있는 인사들이 민족민주열사들이 묻혀 있는 ‘마석 모란공원’으로 장지를 마련했으나 문제는 비용이다. 1,000만원이 넘는 장지비는 그렇다 쳐도 묘비까지는 꿈도 꾸지 못한다. 일단 장례준비위에서 500만원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1개월 후 갚겠다는 약속을 한 후 선생의 시신은 간신히 땅에 묻히게 되었다.

19일 저녁 빈소인 강남성모병원 예식장에서 추모식을 거행하며 뜻밖의 호소를 했다. “평생을 가난하고 고독하게 싸우다 가신 고인의 영면을 위해 부끄럽지만 추모식에 모인 가난한 여러분께 십시일반 정성을 보탤 것을 호소합니다.”

이날 권오헌 양심수후원회장은 “지금까지 많은 분들을 모셔왔지만 이렇게 안타까운 상황은 처음이다”며 “백범 선생의 정신과 민족정기 구현에 온 몸으로 헌신해 왔던 분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어렵지만 공원 측과 협의해 이 정도까지라도 합의를 했다”며 정부와 국민들에게 성원을 부탁했다.

이어 박해전 공동장례위원장은 “고인은 평생 가난하고 고독하게 싸워왔듯이 마지막에도 1000원 한 푼 남기지 못하고 떠나셨다”며 “하지만 통일이 되는 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오는 날 고인의 삶은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4년 백범 김구 선생 암살배후 진상규명을 위해 미국 방문을 추진하고자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를 통해 모금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선생의 죽음까지도 모금을 해야 하는 척박한 대한민국 현실이 고인을 그렇게 보내야 하는 세태가 마냥 가슴을 저미어 온다.

20일 오전 09시 효창공원 김구 선생 묘역. 생전 백범 선생을 가슴에 묻고 민족정기를 위해 민족반역자 안두희를 처단한 故 권중희 선생. 묘역에서 다시 만나는 날이다. 상여도 떠나가기 싫은지 슬픈 음악 한 줄도 흐르지 않는 데 땅바닥은 질펀하게 습기로 가득 찼다.

노제는 유족과 사회인사들과 남북평화통일실천연대 단체에서 마련해 거행됐다. 추도사는 이랬다.

“권중희 선생님께서 안타깝게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고인은 심장이 멎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한나라당을 비롯한 친미매국노들을 단죄하는 글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의혈인 권중희 선생님의 생은 한마디로 외세와 매국노들과의 치열한 대결전이었습니다. 고인은 친미, 친일매국노들과의 투쟁을 단 한 순간에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고인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셨습니다. (생략)”

다음은 20일 오전 김구 선생 묘역 앞 노제에서 울려 퍼진 추도시이다.

追悼詩

민족과 행복
- 애국지사 고 권중희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곁에는 평생 가난이 함께 했다.
감옥의 철문도 늘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가족들의 시련도 항시 그의 가슴을 후비였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 응징 위해
그렇게 그는 청춘도 가정도 모두 바쳤으며
오늘은 그 마지막 남은 생명까지
민족의 재단에 서슴없이 올려놓았다.

아!
권중희 열혈애국지사여!

그렇게나 그리던 통일조국도 기어이 보지 못하고
그렇게 염원하던 민족자주정권 수림 그 찬란한 축포소리 듣지 못하고
과로와 의분으로 원통하게도 눈을 감고야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운명의 그 시각 권중희 애국지사의 눈에는
선명한 통일조국의 깃발이 나부끼고
귓전에서는 민족자주정권 수립 그 웅장한 축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음을
<중략>

산자들이
후대들이
사생결단의 각오로 기어이 싸워 이겨
이 땅에 사대매국세력 영영 쓸어버리고 찬란한 우리민족시대를 열고야 말 것이니

하여 이번 대선부터 님의 뜻대로 반드시 승리로 결속지으리니
지켜보시라 권중히 애국지사여!
밝은 미소 그대로
우리를 보시라!

 
뜻있는 인사들의 정성으로 그나마 민족정기구현이란 우리 시대의 사명을 어느정도나마 할 수 있었던 노제. 장지로 출발해 12시경에 故 한길 권중희 선생님은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특 840호 묘역에 모셔졌습니다. 국내외 뜻있는 인사들의 눈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허무한 죽음 앞에 울분과 비루(悲淚)를 삼켜야만 했던 날이었습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현재 故 권중히 선생의 장지비가 마련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부에게 손을 내밀수는 없습니다. 십시일반 국민성원으로 장지를 마련하고 후에 국립묘지 안장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도록 성원 바랍니다. 성금을 보내시는 통장 계좌번호는 故 권중희 선생님 부인 명의임을 밝힙니다.


장지 마련 모금 문의 : 박해전 공동장례위원장 010-2894-0615

모금 계좌 : 국민은행 292501-01-067721( 예금주 김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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