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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선생' 죽어 묘지에도 못 묻히나?

가난한 애국지사가 편안히 쉴 수 있도록 국민적 성원이 있어야 한다!

리복재 기자 | 기사입력 2007/11/19 [19:48]

'권중희 선생' 죽어 묘지에도 못 묻히나?

가난한 애국지사가 편안히 쉴 수 있도록 국민적 성원이 있어야 한다!

리복재 기자 | 입력 : 2007/11/19 [19:48]
▲  강남 성모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故  권중희 선생의 영정사진 © 플러스코리아
  배달겨레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이 일개 초급 장교의 손에 암살당했는데도 오히려 2계급 특진 시키며 보호를 해주고 경제적 부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었던 나라. 당시 강원도 제2위의 세금 납부자로서 경제적 부까지 만들어 주었던 나라. 평생을 호위호식 하며 천수를 누리게 만들려고 했던 나라.

  그러나 정의와 양심을 가진 권중희씨가 있었다. 선생은 193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셨다. 15세에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백범을 민족의 혼으로 가슴에 새겼다. 평범한 시민으로 생활하던 선생의 인생행로가 전기를 맞게 된 것은 1982년이었다. 매국노요 더러운 민족반역자 하수인이었던 테러범 안두희가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진실을 외면하고 변명만 늘어놓는 것을보고 비분강개해 했다.

  선생은 즉각 직장을 그만두고 민족반역자 안두희를 응징하기 위해 추적의 길에 나선다. 선생은 이때에도 수차례 정부 당국에 탄원서도 보냈지만 묵묵부답. 그러나 선생의 추적은 계속 되었다. 안두희를 직접 응징하리라 결심한 선생은 1987년 대로상에서 안두희를 만나 몽둥이로 정의했다. 폭행죄로 처벌을 받은 선생은 이후에도 추적은 계속되어 1991년 한차례, 1992년 세차례에 걸쳐 안두희를 응징하고 멱살을 잡아 백범 선생 묘소 앞에 꿇어앉히게 하여 참회시킨 다음 진실을 밝힐것을 종용하여 마침내 당시 지휘계통에 있는 자들을 고백하게 만들었으나 이미 그들은 죽고 없는 자들이었고, 안두희는 숭미매국노 이승만에 대해선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이후 자신의 고백은 타인에 의한 거짓 자백을 했다고 위증하기에 이른다. 
 
  이후 질곡의 한국 현대사의 본질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선생의 제자였던 박기서씨에 의해 안두희는 ‘정의봉’이란 몽둥이로 척살당하기에 이른다. 이후 선생은 자신의 인생행로와 민족정기를 되살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1993년)란 책을 집필했다. 

  이로써 친일,숭미 사대주의 매국노요 민족반역자 하수인인 암살범 안두희를 보호한 조국을 상대로 민족적 단죄를 했던, 선생이 유일하다 할 것이다. 즉 구한말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을 보호한 일제 군국주의자들에 대해 일대 경종을 울려준 사건이기도 했다. 일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일제 군복과 사무라이 칼을 자랑스럽게 내보인 친일행위 민족반역자들.
 
▲ 故 권중희 선생 빈소를 찾아 고개숙여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드리고 있는 '민족반역자처단협회' 회원들. 빈소를 지키며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플러스코리아

  선생은 그들 행위에 대헤서 단 한차례의 제대로 된 민족단죄였다. 일제가 우리민족의 정신을 없애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당쟁을 포코스로 맞추어 부끄러운 조상을 둔 저질스런 민족으로 만들어 버리고, 오직 일신의 영욕을 위해서라면 서로 간 헐뜯고 비방과 음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민족반역자들을 양성하여, 광복을 맞은 후에도 일제를 주인으로 받들던 이들의 주구는 미국으로 인해 해방을 맞아 민족을 배신한 죄에 대해 민족을 깔아뭉개는 주인으로써 변모하여, '그 죄가 죄가 아닌 어떤 식으로든 승리자의 역사가 이렇다' 하고  독재자, 군사정권에 일본과 미국을 등에 업고 친일숭미사대주의자로써 권력과 부를 축적하고 아첨과 아부로 일관하며 살아 왔다.
 
 그들은 선생과 같은 투사들을 철저하게 좌익으로 몰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민족주의자요 보수주의자'로 둔갑하여 오늘 날 까지도 광분하고 있다. 역적 안두희는 백년 천년 호의호식하며 살 것처럼 활보하고 다니다 민주화의 바람에는 어쩔수 없었던지 음지로 숨어다니다 '정의와 민족'의 이름으로 척살당해 그와 그들이 원하는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평생 ‘민족정기구현’를 위해 헌신해온 故 권중희 선생. 그런 선생이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유언장도 없이 허무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심장마비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선생께서는 가슴을 부여안고 고통과 통증을 호소하며, 또 최후의 순간까지도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쓰시다 운명하고 말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병을 한 달 전에 알았다는 사실인데,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나 그 애통함을 더했다. 일평생 투쟁만 하시는 선생을 조용히 내조했던 부인 김영자 씨는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만 하시다 지켜보는 이 없이 허무하고 쓸쓸하게 돌아가셔서 불쌍하기 짝이 없다’는 말씀만 하셨다.

  문제는 이러한 애국지사들이 죽어서도 편안히 쉴 수 없다는데 있다. 장례준비위에 따르면 모란공원에 묻히려면 당장 1500여만원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과 장례비용까지 합하면 3000만정도가 든다고 밝혔다.

  그런데 조문객들이 낸 조의금으로 비용 절반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나머지 비용 마련이 문제이다. 준비위원도 오랜 투쟁으로 단 돈 기십만원 마련도 어렵다. 실제 필자가 이러한 과정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살펴보아도, 국민모금운동을 전개할 것인지, 아니면 비용 절감을 위해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모셔둘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애국지사들은 죽어서도 묘지에 묻힐 운명이 못되는 구나’ 할 정도의 감정들이 솟구쳤다. 이후 진통을 거듭한 끝에 일단은 민주열사들이 묻혀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그 비용은 이후 뜻있는 인사들의 쾌척을 바라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또 한 번 선생의 죽음이 살아 있는 우리들의 남은 짐이다.

  즉 정부의 나몰라라하는 것은 아직도 민주화가 안 되었다는 증거이며, 민주투사들에 대한 예우가 없어지고 있다는 현실이며, 방기와 방조가 난무하는 참여정부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는 지금이라도 선생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국립묘지 안장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살아 있는 애국지사들의 사후에 대해 불안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현재까지 故 권중희 선생에 대한 논평이나 성명을 발표한 곳은 민주노동당뿐인 것으로 파악됐다. 사회단체도 묵비권을 가진곳이 많다. 이들은 오로지 양지만을 쫒는 사회활동을 했다는 말인가. 한숨만 나올뿐이다. 일신의 안달을 위해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유족들에 큰 절을 드리며 애도를 표하고 있는 민처협 회원들     © 플러스코리아
 
  이제 국민들도 각성해야 할 때이다. 그들 주구들의 논리에 현혹되지 말고 무조건 진보요 보수라는 어깨에 맞추려하지 말고 냉철하게 그 자리에서 '민족정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하고 모색해야 할 것이며, 가난한 애국지사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국민적 성원이 뒤따라야만 한다.

  민족정기 구현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진정한 애국지사인 ‘한길 권중희’ 선생이 16일 향년 72세로 타계하셨다. 선생은 정치사회경제 모리배들이 난무하는 나라에서 진정으로 민족의 아픔을 생각하는 의지와 몸짓을 하나로 살아오신 후대의 귀감이며 민족 운동의 큰 스승이었다.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보수로 위장한 모리배들을 축출하기 위해 헌신하시는 가운데, 갑자기 너무나 초라하고 허무하게 영면하신 故 권중희 선생은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 숭고한 애국정신은 민족주의자요 깨워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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