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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권중희 선생 '네 발의 총성으로 민족정기는 허물어져'

유족 인터뷰, “한마디로 너무나 허무하고 불쌍하게 돌아 가셨습니다”

리복재 기자 | 기사입력 2007/11/17 [12:44]

故 권중희 선생 '네 발의 총성으로 민족정기는 허물어져'

유족 인터뷰, “한마디로 너무나 허무하고 불쌍하게 돌아 가셨습니다”

리복재 기자 | 입력 : 2007/11/17 [12:44]

 

▲     © 플러스코리아



▲ 2004년 1월 31일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를 찾기 위해 노력해 온 권중희 (가운데) 선생이 미국에 46일간 머물며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 칼린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백범 암살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출국전 모습 . 사진=한겨레 신문     ©플러스코리아

'탕! 탕! 탕! 탕! 네 발의 총성으로 민족정기는 허물어 졌지' 故 권중희 선생이 평소 즐겨쓰던 단어다. 1949년 6월 26일 오후 12시 30분 무렵, 서대문 네거리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본관)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총탄에 독립운동지도자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절명하고 말았다.

그리고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터졌다. 백범 선생의 예언은 적중했다. 남북이 따로 정권을 세우면 동족간 비극이 찾아 올거라며 당시 38선을 넘어 북으로 찾아가 통일정부를 세우도록 노력했으나 결국 남한내 친일반민족자가 숭미주의자로 둔갑 자신들의 주인이었던 일제로부터 해방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점과, 이데올리기에서 이념만으로 정권의 허구에 찬 김일성의 정권야욕으로 결국 무산되고, 네발의 그 총소리와 함께 민족정기도 허물어져 버렸다.

암살범 안두희는 줄곧 단독 우발 범행을 주장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했다. 민족반역자이자 친일반민족자가 숭미주의자로 변신하던 시기. 그들의 하수인이 되고만 매국노이자 역적인 안두희는 자신이 백범 선생을 죽였다고 큰소리치고, 우발적 범행이라고 항변했다.

1949년 8월 6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6월 28일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고 군에 복귀하게 되며, 이후 떵떵거리며 살다가 민주화를 타고 쫒겨 다니다 결국 ‘정의봉’이란 몽둥이에 죽고 말았다.

백범 선생이 돌아가신 지 57년이 지났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테러의 진실, 즉 암살 배후의 진상규명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진행형이다. 반역자 안두희 입에서 암살 지령 지휘 계통에 있었던 사람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즉 간교하게 죽어버린 반역자 매국노들만 슬쩍 밝히고 죽어 버린 간악적인 민족반역자였다.

이에 선생은 평소 암살 배후의 진상규명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어디엔가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비밀문서에서 김구, 안두희라는 이름이 나올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리고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암살 배후에 대한 진실규명이었다.

그러나 아직 건강해 보였던, 아니 진실규명을 밝히고 떠나실 줄 알았던 선생은 16일 갑작스럽고도 허무하게 살아서 나라를 위해 투쟁만 하시다 지켜보는 이 없이 혼자서 유성처럼 쓸쓸히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선생의 죽음을 놓고 민족반역자 매국노들은 춤이라도 출 것이다. 속이 시원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께 배운 '신광복군'들이 전국에 점점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작고한 故 권중희 선생은 1936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평범한 시민으로 생활하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모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진실을 외면하고 변명만 늘어놓자 이에 격분, 직장을 그만두고 추적의 길에 나선다. 권중희 선생은 마침내 1987년 3월 27일 서울 마포구청 앞 대로에서 몽둥이로 안두희를 응징하다가 폭행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35일만에 출소)을 받았고, 1991년 그리고 1992년 9월 23일 안두희를 경기도 가평의 한 농장으로 데려가 범행 일부를 자백받았다. 선생은 이 일로 다시 폭력행위 위반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6개월 처벌을 받고 70일만에 풀려났다. 1987년 대로상에서 안두희를 몽둥이로 응징하기도 했던 선생은 추적 과정에서 세 차례에 걸쳐 안두희를 응징하고 일부 중요한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저자 권중희, 출판 돌베게. 이 책에는 그의 남다른 삶과 백범살인사건의 전모가 담겨 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를 예정

故 권중희 선생. 너무나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를 가진 부인 김영자(69세)씨는 “한마디로 너무나 허무하고 불쌍하게 돌아 가셨습니다”며 통곡하고 말았다.

□기자: 16일인 어제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부인: 제가 서울에 볼일을 보기 위해 외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오후 2시 반경쯤이나 3시경에 전화를 해주시더라구요. 그리고는 “문산 시장에 농산물이 아주 싸게 나왔다는데 뭘 좀 싸 놓을까?”하고 물으셔서 ‘배추’가 싸면 사 놓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 오후 4시경에 운명하신 걸로 아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 제가 기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6시쯤 이었어요. 집에 들어와 보니 배추 3단이 보여서 ‘사 놓으셨구나’하며 방안에 있냐고 부르니 아무 인기척이 없어요. 그래서 방으로 들어가 보니 책이 떨어져 있고 책상에 엎드려 있어 어깨를 잡고 주무시냐고 물으니 아무런 답이 없어 어깨등을 흔들고 이마를 만지자 싸늘한 느낌에 놀랐습니다. 얼굴은 창백했구요.

그래서 아이들(자녀)에게 연락하니 구급차가 왔습니다. 심폐호홉 등을 했지만 너무 오래 지체되었다며 그래서 피가 얼굴에 몰렸다며 가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지병이 없으셨는데 갑자기 그랬다는 것인지요?

◆ 한 달 전에 조금 높은데 올라가면 숨이차고 가슴이 쓰리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병원에 가자고 말하니 이 양반이 “동네 병원에 가면 뭘해요, 돈 좀 생기면 서울 큰 병원이나 암 센타에 가서 진료를 받아 보자”고 말해서 병원 진료나 치료를 하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홍삼을 다려 차로 드시게 했습니다.

□ 그렇다면 심장과 관계가 있겠습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 병원에선 심장마비라고 합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말았습니다. 제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곧으셔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으신 분이라 알리지도 못했습니다.

제일 가슴이 아픈 것은 평생 나라와 민족 걱정을 하며 사신분인데, 돌아가실때 곁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쓸쓸하게 제 곁을 떠나 보냈다는 것이 너무나 허무하고 한 스럽습니다.

외로운 투쟁만 하시다 가실때도 불쌍하게 혼자 가신게 저를 더욱 아프게 합니다. 정치하시는 분들, 특히 민족을 업신여기는 xx당의 친일파청산은 뒷전이고 정권만 잡으려는 짓에 분노하셨고, 어쩔땐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화를 내셨습니다. 이 양반은 화병으로 돌아 가신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겉으론 말짱하셨다는 권중희 선생. 부인은 끝내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너무나 불쌍하다는 말만 되뇌이셨다. 유족측은 "권오창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대표를 위원장으로 해서 사회장으로 치를 예정"이라고 밝혔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만 하시다가 아무도 없이 허무하게 타계하고 말았다. 선생은 이 나라가 아직도 친일파 청산을 놓고 정략에 따라 미온적으로 움직이는데 극도의 분노를 표시하였고, 특히 친일행위반민족자 특별법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극심한 배신의 분노로 인해 화병을 얻고 아무도 지켜보는이 없이 허무한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고인은 강남성모병원 영안실(11호)에 모셔져 있다. 발인은 11월 20일(화) 오전.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연락처: 010-3968-2244, 010-8501-5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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