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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역사코미디 그만하라!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7/11/06 [00:05]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코미디 그만하라!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7/11/06 [00:05]
한나라당 전 총재였던 이회창씨가 대선에 출마한다는 말이 나오자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주자인 정동영후보가“국민의 지탄과 분노를 자아낼 역사의 코미디”라고 말했다.

그러나‘역사의 코미디’란 말은 이회창씨의 대선출마를 두고 할 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역사의 현주소라 할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국사편찬위원회/동북아역사재단을 겨냥해 말해야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국립중앙박물관 뿐만 아니라, 국사편찬위원회가 만들어 우리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는  우리 국사책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부가 출연한 동북아역사재단의 홈페이지에도 아직까지 역사 코미디를 많이 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면 한서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이 평양(대동강)에 있었다고 버젓이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하루에도 수천 명의 학생들이 견학하며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전시장이다. 그러한 곳에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은 낙랑군의 위치가 잘못 게시되어 있다는 것은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과 같다. 낙랑군의 엉뚱한 위치 선정은 韓國史 최고의 코미디인 동시에 가장 슬픈 일이기도 하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漢四郡에 대한 상식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지금의 북한 지역에 설치한 4개의 식민지(낙랑, 현도, 진번, 임둔)로 B.C108년에 설치되었다가 A.D313년에 없어져 421년간 존속했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에 의해 왜곡되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우리 고대사의 영토를 중국/일본이 한반도 안으로 축소. 왜곡한 것을 아직도 우리는 우리 역사의 진실로 알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     © 플러스코리아


한사군의 진실은 무엇인가?

1) 한사군이 421년간 한나라의 식민지로 존재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사군이 존속한 동안 식민지의 종주국인 중국 왕조의 등락을 보면 아래와 같다.
전한(B.C206~A.D5)-->신나라-->후한(A.D25~220)-->삼국시대(위,오,촉)-->서진(265~316)

前漢의 武帝 劉徹에 의해 식민지로 설치된 한사군이 종주국인 전한이 망하고도 계속 존속되어 4대 왕조를 더 거치면서 이상없이 인수인계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를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뭔가 조작이 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2) 한나라 때 저술된 사마천의 <史記>에는 한사군의 기록이 없었다.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한무제의 史官이었으며, 한나라와 위만국과의 전쟁에 직접 참전해“한나라의 육해양군이 모두 졌다(兩軍俱辱 將率莫侯矣)”는 기록을 남겼다. 그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 중 1명은 전사했고, 한무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1명을 전쟁도중에 참수했고, 나머지 4명의 장수는 귀국 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기시(棄市)라는 극형에 처했다.

한무제가 참전했던 지휘관들을 극형으로 다스렸다는 것은 장수들에게 참패한 패전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참패한 한나라가 어떻게 승전국인 위만국이 있던 자리에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를 설치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뭔가 역사 기록이 조작된 것이라 봐야 한다.

그런데 사마천은 <사기>에“마침내 조선이 평정되어 사군이 되었다. 평주,날양,추저,획청(遂定朝鮮爲四群 平州,捏陽,萩苴,澅淸)”고 적었다. (주: 평주, 날양, 추저, 획청은 조선사람이 통치하던 곳으로 지금의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에 있었다.)

즉 <사기의 조선열전> 원문에는 애당초 한사군인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기록이 없었다.

이 기록은 전쟁에 진 후 나중에 위만국이 평정되어 한사군을 설치한건지, 아니면 전쟁에 이긴 위만국을 나중에 4명의 조선인이 평정한건지 확실치 않다. <사기>에 적혀있는 사군은 아마도 漢四郡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위만국이 朝鮮四郡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역사왜곡의 선수였다. 그는 <사기>를 쓰면서 東夷族(고조선)의 나라였던 殷나라를 漢族의 역사로 편입했고, 단군조선의 일개 제후국이었던 기자국을 승계한 위만국이 마치 전체 고조선을 계승한 위만조선인양 위조한 전력으로 미루어보아 사마천이 사군을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이미 단군조선(마한,진한)은 B.C238년에 북부여의 해모수에게 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최초의 동북공정으로 이미 동북공정은 이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3) 그럼 한사군인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은 누구의 작품인가?

사마천의 <史記> 다음에 저술된 역사서는 <前漢書>로 약 180-200년 후에 후한시대 사람인 반고가 저술한 사서로, <전한서의 조선전>은 <사기의 조선열전>을 그대로 베끼면서 아래와 같이 여덟 글자가 가필 되어있다.

< 遂定朝鮮爲四群 --> 遂定朝鮮爲낙랑현도진번임둔四群 >

이 가필은 반고가 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에 한 것으로 보여 지는데, 아마도 고구려의 연개소문에게 항복까지 가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당태종이 고구려(동이족)에 대한 분풀이로 중국사서에 있는 동이족(고조선)에 대한 내용을 모두 고치면서 한 짓으로 추측된다. (당태종 이세민에 의한 동이족 역사의 분서갱유라 말할 수 있다.)

4) 한사군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일제 36년간 나라를 빼앗기면서 일제에 의해 20만권이 넘는 우리의 사서가 불살라지거나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국내에 남겨진 고대 사료라고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뿐 이다. 그러다보니 한사군의 위치를 우리 사서로는 알 수가 없게 되었고, 부득이 중국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 사서로도 한사군의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한사군은 거의 붙어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낙랑군의 위치 하나만 파악하면 된다.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나 2가지만 사서를 인용하고 2가지는 유물로 밝히고자 한다.

* < 通典 >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진나라 때 축성한 장성이 동으로 요수를 질러 이 산에서 일어난다.”(碣石山在漢遂成縣 秦築長城 東截遼水 起於此山) (주: 당시 요수는 하북성 난하를 말하며, 갈석산은 현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다)

* < 史記(색은) > “태강지지에 낙랑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太康地誌, 樂浪遂成縣有碣石, 長城所起) (주: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는 장성의 동쪽 기점)
▲   낙랑군의 위치


* <평양 덕흥리 고분> 1976년 평양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 무덤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에게 주변의 13명의 태수가 하례를 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그 중 1명이 樂浪太守이다. (주: 유주자사 진은 고구려 고국원왕 ~ 광개토태왕 시절 사람이다. 유주는 지금의 북경 지방이다. 낙랑태수는 한사군의 낙랑군과 직접 관련은 없으나, 낙랑이라는 地名은 예전부터 북경 근방에 있었다는 증거임)

▲  덕흥리 고분

* < 점제현신사비 > 1913년 평남 온천군에서 발견된 이 비문은 한사군인 낙랑군의 25현 중 하나인 점제현을 나타내는 신사비로, 지금까지 일제에 의해 낙랑군이 평양(대동강) 부근에 있었다는 유물(증거)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과학적인 조사(핵보열흔적법) 결과 이 비는 일제에 의해 갈석산(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서 떼어져 인위적으로 평남 온천군으로 옮겨졌음이 밝혀졌다. 즉 비석의 돌 성분은 온천군 돌이 아니라 갈석산 돌과 일치했다.
▲   점제현 신사비

 
5) 한사군의 낙랑과 다른 낙랑(국)이 있었다.

낙랑이란 명칭은 단군조선 시대에도 여러 번 나온다. <한단고기>에 보면 B.C1767년, BC1237년, BC1161년에 낙랑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낙랑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보이며,

한사군이 설치되기 전인 B.C195년, B.C169년 에는 또 하나의 낙랑인 낙랑국왕(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자명고 이야기로 유명한) 최승의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일제 때 한국사 위조의 주범인 이병도가 <한국상고사입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북경 가까운 곳에 있는 樂浪郡과, 한반도 내의 평양지역에 최리의 樂浪國이 별도로 있었는데, 여러 사서에서 이를 혼돈하여 낙랑군이 평양부근에 있었던 걸로 오해하고 있다.”

현재 강단사학계의 대다수 이병도의 後學들은 元祖의 이러한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아직도 말하고 있다. 우리 역사를 스스로 비하하고 축소 왜곡하는  것은 元祖보다 後學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다.

6) 한사군 이후의 동북공정

이천년 전의 <사기>뿐 만이 아니라 그 후에도 많은 동북공정을 한 흔적이 많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요서와 요동을 구분하는 기준의 왜곡이다.


* 최초 요서와 요동의 구분은 산서성 태향산맥 안에 요(遼)라는 지명이 있어 이곳을 기준으로 하여 서쪽은 요서, 동쪽은 요동이라 했다. 즉 서쪽의 산악지대는 한족의 땅이었고, 동쪽 평야지대는 동이족의 땅이었다.

*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그 기준을 요하로 하였는데 최초에는 黃河가 요하였다. 그러다가 하북성 난하를 요하로 불렀으며, 나중에는 요녕성 지금의 요하로 바뀌면서 갈수록 북동진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사서에 있는 요동, 요서가 혼돈이 되어  기준이 애매해졌고 동이족의 고토는 갈수록 축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행정구역과 도시명을 바꿔 버리니 옛 지명이 지금의 어디인지 잘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렇듯 주변국들은 동북공정과 황국사관을 앞세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거늘, 우리 강단사학계는 아직도 반도사관이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일제가 반도사관에 의해 만들어준 축소 지향의 왜곡된 국사를 아직도 그대로 우리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의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언제쯤 어떻게 해야 강단사학계의 사고가 반도사관에서 민족사관으로 바뀔 수 있을지.... 그들의 史觀이 바뀌는 그 날이 우리 역사의 진정한 광복절일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밝은 내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족혼 07/11/09 [09:33] 수정 삭제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강단사학계는 깊은 잠에세 깨어나라.
기록과 유물이 뒷받침되면 국사 이론을 바꾸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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