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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大백제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

▶ 전북 익산군(益山郡)은 중국 운남성에 있었다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9/08 [09:43]

[단독]"大백제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

▶ 전북 익산군(益山郡)은 중국 운남성에 있었다

박병역 위원 | 입력 : 2007/09/08 [09:43]



[1]. 중 조선시대(후삼한, 신라,고구려,백제)의 올바른 이해

[단독보도 제23편] 세계적 대국의 우리나라 조선(朝鮮)은 [고조선⇒후조선⇒중조선]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고조선(古朝鮮)의 단군왕검은 삼한(진한, 마한, 변한)시대이며, 후조선(後朝鮮:후삼한)과 5천축국시대이며, 중조선은 이씨 왕조(王朝)라 할 수 있습니다. 후 삼한의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제후를 거느리고 마한은 54개의 제후를 거느려 무려 78개의 제후를 거느린 대제국(大帝國)과 5천축국을 합하여 조선(朝鮮:중조선)이라 칭했기 때문입니다.

▲   인류를 구제한 대제국 조선전도  © 박병역 위원

그리고 삼국사기의 진한(辰韓)은 신라이고, 마한(馬韓)은 고구려이고, 변한(弁韓)은 백제가 계승했다는 기록은 후조선(후삼한)시대의 영토일 뿐입니다. 한편 북부여의 5가(五加)들이 건국한 후삼한은 5천축국(중조선)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2]. 북부여 5가(五加)들은 5천축국으로 발전했다

북부여 해모수 천제가 BC 194년 돌아가시자 이윽고 북부여의 5가들은 대장군 탁(卓)이 태어난 월지국(月支國:서천축)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여 중마한(中馬韓)이라 칭했다. 이때 5가들은 땅 백리를 받아 수도로 정하고 변한, 진한의 두 한도 재 건국 되었다. 그 당시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 제후국을 거느리고 마한은 54개 제후국을 거느려 무려 78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마한 54개 제후 중에 월지국을 월씨국이라 한다.  

◆ 월지국(月支國)의 역사적 진실
月支國(월지국)은 西域(서역) 말로 또는 月氏國(월씨국:)이라고도 하며, 서역의 큰 왕국이다. 이 종족은 원래 중국의 감숙성 돈황과 祁連(기련) 사이에 살다가 BC 174년에 흉노에게 쫓겨 伊犁川(이리천)과 悉陀犁耶川(실타리야천)의 상류인 熱河(열하)의 남방으로 옮겼으나 BC 158년경 다시 烏孫(오손)의 침략을 받아 지금의 samarkand(사마르칸트) 지방에 근거를 정하고 塞種(새종:현 인도)을 征伐(정벌)하고 위水(위수) 연안의 大夏國(대하국)을 정복하여 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오손(烏孫)은 신강성(新疆省) 천산 산맥 일대에 있다. 제3세 迦泥色迦王(가니색가왕) 때에 세력이 크게 떨쳐 서쪽으로는 페르샤(이란)의 동부에서부터 중앙아세아 인도에 걸친 乾陀羅(건타라) 왕국이 되자 불교의 外護者(외호자)가 되고 500명의 阿羅漢(아라한)을 모으고 大毘婆沙(대비파사)를 편찬함. 그 후 불교가 大成(대성)하여 支婁迦懺(지루가참)등 많은 스님들이 중국에 불경을 전하고 支亮(지양), 支謙(지겸), 法護(법호), 支法度(지법도), 支道根(지도근),支施崙(지시륜) 또는 支姓(지성)의 著者(저자) 모두 月支國(월지국) 사람들이다. 이 나라가 멸망한 것은 미상이나 5C경으로 보고 있다.<불교 사전 참조>  

후한(後漢서기 25~220년)때 5천축국은 신강성 남부와 감숙성, 청해성, 서장성 남북부와 운남성 지역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점하고 있었다. 남천축은 인도, 베트남,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국토는 약 3만리가 되었다, 따라서 중조선(中朝鮮)은 신라, 고구려, 백제와 5천축을 거느린 세계적 대국입니다.

소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 한(韓)·위(魏)·조(趙)·제(齊)의 4개 신흥국과 진(秦)·초(楚)·연(燕)의 3개국으로 축소되었는데, 이 7국을 '전국7웅(戰國七雄)'이라고 한다. 이 7국들 간의 오랜 전쟁 끝에 BC 223년 마침내 진(秦(BC 221~206)이 위수[渭水] 유역에서 초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2년 후에 7국을 하나로 통일한 중국 최초의 제국을 수립하고 자칭 시황제(始皇帝)라 칭했다. 시황제는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가혹한 통치로 BC 210년 시황제가 죽은 후에 한나라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일어났다.  

유방의 한(漢)나라가 항우를 물리치고 황제가 된 후에 한나라의 제후 연나라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이때 한(漢) 나라의 제후국 연(燕), 제(齊), 조(趙)나라의 수많은 주민들이 조선의 변한 땅으로 넘어와 망명하였던 것이다.  

즉,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한 시기는 한(漢)나라 고조(高祖; BC 206~BC 195)의 아들인 효혜제(孝惠帝;이름은 유영(劉盈);B.C.195∼188)와 한고조의 부인이며 효혜제의 어머니인 [고후(高后 :여태후(呂太后)]로서 이름은 여치(呂雉;기원전241~180]가 정치를 하던 시기이다. 위만에게 빼앗겼던 땅은 손자 우거왕(右渠王)에 이르러 BC 108년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高于婁)재위 계유 13년, 한나라의 유철(劉徹:한 무제를 말함)이 평나(平那:왕험성)에 들어와 우거를 멸하고 소위 한4군(漢四郡)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고조선 3한 말기의 조선 3한 중의 변한왕 수한(水韓)이 BC 340년 [제 39세 변한 왕위에 즉위하여 17년 간 재위하고 무술(BC 323)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군사를 이끌고 변한의 왕궁에 들어가서 스스로 조선의 변한왕이라 칭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允許)를 청하자 진한의 보을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연(燕)나라 침략에 대비하여 굳게 수비하라 하였다. 

[제 40세 기후(箕詡)]왕은 무술(BC 323)년에 즉위하고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제 41세 기욱(箕煜)]이 죽고 그의 아들 기석(箕釋)이 신미(BC 290)년 제42대 변한왕위에 즉위하고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였더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명이었다. 재위 10년(BC 281)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介)가 공격해 들어오니, 막아 싸웠으나 패하여 서비(西鄙:돌궐)까지 천리의 땅을 잃었다. 

 그때 연나라에 빼앗긴 군은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의 5군이었다. 이때부터 연과 변한의 경계는 만번한(滿番汗:하북성)이 국계가 되었다. 15년(BC 276)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40년 기석이 승하하자, 아들 기윤이 즉위하였다. 

고조선의 변한 43대 기윤(箕潤)이 BC 251년 즉위하고 20년 기윤이 승하하였다. 한편 고조선 진한의 47대 고열가 재위 57년 임술(BC 239년) "종실 대해모수(大解慕漱)가 옛 도읍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천왕랑(天王郞)이라 하니 4방 조선국경 안이 모두 그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BC 232년 해모수는 수유(須臾)의 제후 기비(箕丕)를 승진시켜 고조선 변한의 제43대 왕으로 삼고 운장(雲障)의 상·하(上下)를 지키며 조선에 들어온 중국의 망명자를 수호하였다.  

이때 위만이 기비(箕丕)왕에게 망명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기비(箕丕)가 12년 재위하고 승하하자 아들 기준이 즉위했다. 44대 기준(箕準)이 BC 221년 즉위했다. 13년(BC 208년) 진승(陳勝)의 반란으로 사람들은 생활이 곤란해 지자 연(燕)·제(齊)·조(趙)의 백성들이 조선의 변한 땅으로 도망 온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 운장(雲障)에 나누어 두고 장수를 보내어 감시하게 하였다.

BC 195년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호복(胡服)을 입고 패수(浿水)를 건너와 조선의 기준(箕準)왕에게 망명을 요청했다. 이에 기준왕은 위만에게 박사(博士) 벼슬을 내리고 규[圭:천자가 제후에게 주는 상원하방(上圓下方;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의 옥(玉)]도 주시어 서쪽 운장의 일백리(一百里) 땅을 하사하시어 서쪽 국경을 지키도록 배려해 주었다.  

위만(衛滿)은 운장(雲障) 상하에 나누어 살면서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계속 망명해오자 그 주민을 꾀어서 세력을 키운 후, 기준왕이 베풀어 준 은혜를 배반하고 BC 194년 한(漢)나라 군사들이 열 갈레로 나누어 조선을 침략해 오니 왕험성(왕검성)을 지키겠다고 기준왕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고 군사를 몰아 패수(浿水)를 건너 왕험성(산해관)을 공격해 왔다.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산해관(山海關) 왕험성(王險城), 패수(浿水)

▲     © 박병역 위원


위만의 기습 공격에 패한 기준왕은 좌우 궁인(宮人)들과 함께 마한 땅 해성(海城:요녕성)에 도착하여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마한왕(馬韓王)이 되었다. 조선의 변한왕 기준(箕準)이 마한지역으로 이동한 후 마한을 재건국하고 성을 한씨(韓氏)라 하여 한왕(韓王)이라 불렀다. 기자족(箕子族)은 원래 수유족(須臾族)이라 하며 箕子(기자)의 성은 기씨(奇氏)이며 箕(기)와 奇(기)는 같이 쓰인다. 수유족(須臾族)은 원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마한왕의 후손 중 일부는 수유족(須臾族:변한왕 기자족)의 우두머리를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하여 성을 선우씨(鮮于氏)로 하였다.  

후마한 1세 武康王(무강왕, 哀王(애왕)의 諱(휘)는 準(준)이다. 정미(B.C 194년) 마한의 땅이었던 해성(海城:요녕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해 돌아가시자 세상 사람들은 기준왕(箕準王) 무강왕(武康王)을 애(哀)왕이라 칭했다. 후마한의 제 8세 元王(원왕)의 諱(휘)는 勳(훈)이고 계해(B.C 5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는 26년이다. 9세 稽王(계왕)의 휘는 貞(정)이다. B.C 32년에 왕위에 오르고 202년을 계승하고 백제 온조왕에게 멸망했다.

▲    후삼한 중  변한의 준왕 역대기  © 박병역 위원

 
 백제의 온조가 갑진(B.C 17년)에 왕위에 올랐다. 온조왕 26년, AD 8년, 10월, 온조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겉으로는 사냥한다는 핑계로 몰래 후마한을 습격하여 金馬郡(금마군)은 백제에 합병되었으나 只保圓山(지보원산:요동), 錦峴城(금현성:요동성) 新莽(신분) 두 성이 백제의 온조왕에게 항복함으로써 후마한은 결국 멸망하였다. [제12편 참조 바랍니다] 

[3].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4군의 정체[사마천사기 조선전]은「위만의 손자 우거(右渠)까지를 전해하기를 한인(漢人)들이 유혹을 받고 이처럼 많은 사람이 [조선으로] 망명해서 들어온 것은 역사상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조선의 진한과 변한왕은 한(漢)나라에 입조(入朝)하지 않고 또 진번(辰番)의 이웃 여러 나라에서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해도 [우거]가 한(漢)나라와의 교통을 저지하였다. 원봉(元封) 2년에 한나라는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보내 우거(右渠)에게 유시(諭示)했으나 우거는 끝내 조칙(詔勅)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한나라의 섭하(涉河)는 돌아가다가 국경 패수(浿水)에 이르렀을 때 부하를 시켜 그 곳까지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패수(浿水)를 건너 한나라 요새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와 천자(天子)에게 "조선의 장군을 죽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자(天子)는 잘한 일이라 여겨 섭하(涉河)를 책하지 않고 요동의 동부도위에 임명하였다.  

조선은 섭하(涉河)를 원망하며 병사를 일으켜 섭하(涉河)를 죽였다. 이에 천자(天子)는 죄수(罪囚)들 중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조선을 치도록 하였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제(齊)에서 발해(渤海)로 향하게 하였는데 좌장군(佐將軍) 순체(荀)는 요동(遼東)에서 나와 우거를 치니 우거(右渠) 또한 군사를 내어 왕험성에 의지하여 대항하였다. 좌장군(佐將軍) 졸정(卒正) 다솔(多率)은 요동(遼東)의 군사를 먼저 공격하다가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솔은 도망쳐 돌아 왔으므로, 군법대로 참수하였다. 

누선장군은 제(齊)의 군사 7천 명을 선발대로 이끌고 먼저 왕험성(王險城)에 이르렀다. 우거(右渠)는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아내고, 즉시 성을 나와 누선장군을 공격하니, 누선장군의 군사는 패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군사를 잃고 10여 일을 산중에서 숨어 지내다가 점차 흩어진 군사를 다시 모아서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군(西軍)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천자(天子)는 장차 두 장군의 전황(戰況)이 유리하지 않자 위산(衛山)을 사자로 보내어 병력의 위세를 업고 우거(右渠)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자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기를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두 장군이 신(臣)을 속여 죽이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태자(太子)를 파견하여 한(漢)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고, 말 5천 필과 군량과 조선에 들어왔던 1만여 명을 보내기로 하였다. 

패수(浿水)를 건너려 하자 사자와 좌장군이 변란을 일으킬까 의심하며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무기를 지니지 않도록 명하여 주시오"하고 청했다. 태자(太子) 또한 한나라 사자와 좌장군이 자신을 속여 죽이지 않을까 의심하며 마침내 패수(浿水)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인솔하여 되돌아왔다. 위산(衛山)이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주살했다. 

삼국유사의 위만조선은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는 누선장군을 묶어두고 그의 군사와 합쳐서 좌장군과 함께 조선을 공격하여 조선의 재상(宰相) 노인(路人), 한도(韓陶), 니계(尼谿)의 3재상과 장군들은 항복하기를 청했으나 우거왕은 따르지 않았다. 이때 노인(路人), 한도(韓陶), 니계(尼谿)는 도망쳐 한나라에 항복하고 노인(路人)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 여름에 니계(尼谿)가 세 사람을 시켜서 우거왕을 죽이자 항복해 왔다. 우거왕의 대신 성기(成己) 또한 자기나라를 배반했다. 좌장군은 우거왕의 아들 장(長)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崔)가 백성을 타이르자 그 나라 백성들은 성기를 죽였다.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가 조선의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을 평정하였다. 고 기록돼 있다.
 

[4]. 한의 유철은 소위 한4군을 설치하지 못했다

[현행 고등국사] 고조선은 요서지방을 경계로 하여 기원전 3세기경 부왕, 준왕이 등장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한무제는 수륙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이병도 청천강:遼河(요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평양)이 함략되었다.(BC 108).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막강한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고조선은 멸망하였다(기원전108). 한은 고조선 지역에 군현을 한4군을 설치하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후략) 

[환단고기] [ 제 2세 모수리(기준) 재위 35년]
2년 무신(B.C.193년),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延陀勃 : 고주몽의 장인)을 파견하여 평양(요녕성)에 성책을 설치하고 위만(衛滿)의 도적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끼고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3년 기유년 해성(海城:요동성)을 평양도(平壤道)에 속하게 하고 황제의 동생 고진(高辰)을 시켜 수비하도록 하시니 부여지역이 하나같이 모두 복종하여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구제하였다. 25년 신미(B.C.170년)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했다. 삼국유사 위만 조선조의 李寄(이기)는 왕검은 왕험지명이라 하고 臣瓚(신한)은 왕검성은 낙랑군에 있고 浿水(패수:난하) 동쪽이라 했다)  

[ 제 3세 高奚斯(고해사) 49년 재위 ]
원년 임신(BC 169년) 정월에 낙랑왕 崔崇(최숭)은 곡식 300석을 해성(海城)에 헌납하였다. 최숭은 낙랑왕으로 있으면서 선대에도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싣고 바다를 건너 馬韓(마한)의 도읍 王儉城(왕검성:왕험성)에 가져 왔는데 이 때는 단군 解慕漱(해모수)가 계신 병오년(BC 195년) 겨울이었다. 42년 계축(BC 128년)에 황제는 몸소 기마 보병 일만 명을 통솔하고 衛滿(위만)의 도적 떼를 南閭城(남려성:하북성 창현)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49년 경신(BC 121년) 一群國(일군국)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지방의 특산물을 헌납하였다. 이해 9월에 황제님이 붕어하시니 태자 高于婁(고우루)가 왕위에 옹립되었다.

[ 제 4세 고우루 재위 34년 ]
원년 신유(B.C.120년),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위만의 손자)를 토벌했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高辰(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려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우거를 능히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 제후로 삼았다. 3년 계해(BC 120년)에 戎賊(융적) 右渠(우거)가 대거 칩입하여 우리의 군대가 대패하고 해성(海城)의 북쪽 50리 지역에 우리 군이 모두 포로가 되어 잡혀 있었다.  

4년 갑자년 황제는 장군을 파견하여 해성을 공격했으나 석 달이 걸려도 이기지 못했다. 6년 병인년에 황제는 친히 5,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습격하여 드디어 해성(海城)을 격파하고 끝까지 추격하여 薩水(살수)에 이르니 九黎河(구려하)의 동쪽은 다 항복해 왔다. 7년 정묘(BC 114년)에 坐原(좌원)에 木柵(목책)을 설치하고 南閭(남려)에 군사를 주둔시켜 대비하였다.  

13년 계유(BC 108년)에 漢(한)의 劉撤(유철)은 平那(평나;왕험성)를 노략질하여 右渠(우거)를 멸망시키고 四郡(4군)을 설치하고 4방의 병사를 거느리고 침공해 왔다. 이에 高豆莫汗(고두막한)은 국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전투를 하니 가는 곳마다 漢(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때 그 지방의 백성들은 사방에서 모두 일어나 호응하여 도움으로서 전투하는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상기의 기록과 같이 결국 한의 유철은 한4군을 설치하지 못했던 것이다. 

34년 갑오(BC 87년) 10월에 동명성왕(추모왕)은 고두막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나는 [북부여] 천제(해모수)의 아들이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세우고자 하니 왕은 이곳을 피하여 주시오 라고 알려주자 고우루 단제는 매우 난처해하며 걱정하다 이 달에 질병이 겹쳐 붕어 하고 [고우루 단재]의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하였다. 동명왕은 군대를 앞세워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들은 매우 난처하였다. 이때 [해부루]의 국상 阿蘭弗(아란불)이, 通河(통하:길림성)에 가섭원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잘되며 도읍을 세울 만한 곳입니다" 라고 [해부루]왕에게 권고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 부여 또한 동부여라 하였다.

  이병도의 위만조선과 고조선         가섭원 부여(동부여)
 
▲     © 박병역 위원

▲     © 박병역 위원
 

=> 삼국유사는 “요수(요하)”를 일명 압록이라 칭했다.
 

[ 제 5세 高豆莫(고두막:혹 두막루)]
5세 단군 고두막은 혹은 두막루이라 하고 22년을 재위하고 재 재위를 27년 간 하셨다. 원년 계유(BC 108년)은 단군 高于婁(고우루) 13년이 된다. 고두막 황제는 인품이 준수하고 영웅호걸로서 덕과 선을 겸하고 用兵術(용병술)이 매우 뛰어났다. 북부여가 쇠약함을 보고 漢(한)나라의 도적들이 치열히 날뛰는 것을 개탄한 연후에 인간 세상을 救濟(구제)할 뜻을 갖고 卒本(졸본)에서 즉위하시고 스스로 호를 東明(동명)이라 하였다. 혹은 高列加(고열가) 후손이라 하였다. 

3년 을해(BC 106년) 고두막(동명) 황제는 스스로 장군이 되어 직접 격려문을 만들어 곳곳에 전달하니 열흘도 안 되어 무려 5,000명이 모여 도적 漢(한)의 군사와 전투에서 바라만 보아도 바람처럼 궤멸되었다.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九黎河(구려하)를 건너 遼東(요동)의 西安平(서안평)에 이르렀다. 옛 藁離國(고리국)의 땅이었다. 

22년 갑오(BC 87년). 단군 고우루 34년에 고두막 황제는 장수를 파견하여 裵川(배천)의 漢寇(한구:한의 오랑케)를 파멸시키고 유민들과 협력하여 연전연승을 거두고 항거하는 守將(수장)을 사로잡아 전투에 철저히 대비하셨다. 23년 을미(BC 86년)에 북 부여의 城邑(성읍)을 항복시키자 여러 차례 국가만 보전해 달라며 애원하였다. 고두막 황제가 듣고 解夫婁(해부루)를 왕에서 강등시켜 제후에 봉하기로 하고 

[해부루]를 차능(길림성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의장대를 앞세워 수만의 군중을 인솔하여 都城(도성)에 들어가 東夫餘(동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西鴨綠河(서압록하;요서)의 상류에서 漢寇(한구)와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져도 큰 승리를 거두었다. 30년 임인((BC 79년)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岔陵(차능)에 탄강 하였다. 49년 신유(BC 60년)에 황제가 붕어하고 遺命(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하였다. 태자 고무서가 왕위에 올랐다. 

[제 6세 高無胥(고무서) 2년 재위.]
원년 임술(BC 59년)에 황제는 卒本州(졸본주)에서 즉위하고 白岳山(백악산)에서 장노들과 함께 회의를 하시면서 매년 행사하던 事例(사례)에 따라 삼신 하느님(황천상제)에게 제사 할 것을 약속하고 국내외에 널리 반포하시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황제님은 탄생하실 때부터 神德(신덕)을 가지고 태어나시어 呪術(주술)로서 능히 바람을 일으켜 비를 내리게도 하셨다. 善德(선덕)으로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民心(민심)을 크게 얻어 小解慕漱(소해모수)라 칭하였다. 이 시대에 漢寇(한구)들이 遼河(요하)의 좌변에서 자주 소란을 피워 전투가 일어났으나 모두 다 무찔러 큰 승리를 거두었다.  

2년 계해(BC 58년)에 황제님은 전국을 순행하시고 寧古塔(영고탑)에 도착하여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황제께서 돌아가실 때 유언의 말씀에 따라 고주몽이 大統(대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보통 사람과 다른 고주몽을 보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해 나이 23세에 고주몽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북부여 사람이 고주몽을 죽이려고 하자 烏伊(오이), 摩離(마리), 陜父(섬부)등 세 사람은 덕으로써 사귄 친구 사이며 어머니(유화 부인)의 말씀에 따라 함께 길을 떠나 岔陵(차능)에 이르렀으나 강을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었으므로 뒤 쫓아 오는 군사들에게 잡힐까 두려워하며 <요하의 압록강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자입니다. 오늘 도주함에 있어 병사들이 추격하고 있으니 어찌하여 지켜주소서 라고 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후략]

한편 신라의 박혁거세왕은 조선 삼한 유민(遊民)들의 추대로 甲子(BC 57년:후마한 원왕 22년)에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은 갑신(B.C 37년)년에 졸본천에서 건국하여 옛 진한과 마한지역에 두 나라가 나란히 다시 일어셨다. 그리고 고구려 고주몽의 아들 백제의 온조가 갑진(B.C 17년)에 왕위에 올랐다. 

온조왕 26년, AD 8년, 10월, 온조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겉으로는 사냥한다는 핑계로 몰래 후마한을 습격하여 金馬郡(금마군)은 백제에 합병되었으나 只保圓山(지보원산:요동(遼東), 錦峴城(금현성:요동성) 新莽(신분) 두 성이 백제의 온조왕에게 항복하므로서 후마한은 결국 멸망하였다. 지금의 해성(海城:요동성)은 백제 초기의 영토이었다.
 

[5]. 전북 익산군(益山郡)은 중국 운남성에 있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 26년(AD 8년) 10월 [기준왕이 재 건국했던 후 마한]의 金馬郡(금마군)을 습격하여 백제의 영토로 병합되었다. [삼국사기 잡지 제5 지리3]로 살펴본다.

금마군(金馬郡)은 본시 백제의 금마저군(金馬渚郡)으로 경덕왕이 금마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이다.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이다. 영현(領縣)이 셋이 있었다. (1),옥야현(沃野縣)은 본시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인데 신라 삼국통일 이후 경덕왕 16년 옥야현(沃野縣)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이다(익산군 城內) (2), 야산현(野山縣)은 본시 백제의 알아산(閼也山縣)으로 경덕왕이 야산(野山)으로 개명하여 지금은 랑산현(朗山縣:지금의 익산군 랑산면)이다. (3), 우주현(紆洲縣)은 본시 백제의 우소저(于召渚)현으로 경덕왕이 우주((紆洲)로 개명하여 지금의 우주(紆州:완주군 북쪽)이다.


(1).  [益山(익산)]은 한반도 속에 없었다

[현행 국사]는 金馬郡(금마군)은 지금의 益山(익산)이라 했다. 위만(衛滿)에게 패한 기준왕은 해성(海城:요동)으로 도피하여 국호를 고쳐 馬韓(마한)이라 했다. 삼한 중의 마지막 변한 왕이었던 기준왕이 한반도 속의 전라북도 金馬郡(금마군) 益山(익산)에 왔단 말인가? 또한 한무제(漢武帝)가 전라도 땅을 통치했단 말인가?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에 의하면 한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에 상강(賞羌)을 진왕으로 봉하고 인장을 하사하였으며 진왕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진지현을 다스렸다. 한(漢) 무제는 익주군(益州郡)에 곡창현(穀昌縣)을 소속시켰다. 3국의 촉(蜀)나라 때 제갈량(諸葛亮)은 남정(南征)으로 건녕군(建寧郡)이 되고 6세기에는 곤주(昆州)에서 다시 곤천(昆川)이 되어 익녕현(益寧縣)으로 바뀌었다. 

서한(西汉)3년(BC108) 한무제(漢武帝)가 장수 곽창(郭昌)으로 하여금 촉나라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운남성의 일부를 정복하게 되면서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게 된다. 이때 익주군(益州郡)은 총 24개현이며 그 중 하나가 운남현(云南县)이다. 운남통기(云南通志)에서 "한무제(漢武帝)가 사냥하던 중에 남쪽에서 채색구름이 솟아오르는 형상을 보고 이때부터 운남(云南:雲南)이라는 이름이 시작됐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후한서 권53 열전(列傳)제13 두융전(竇融傳)》: 서기 25년,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는 동한(東漢)을 수립했을 당시 천수군(天水郡)을 점거하고 있던 외효(隗囂)와 익주군(益州郡)을 차지하고 있던 공손술(公孫述)도 자신들을 모두 자칭 황제라고 칭하고 있었다. 두융은 하서의 다섯 군(郡)을 지키며, 외효에 의해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두융은 유수의 군사적 우세를 보고, 유수에게 귀순하여 자신의 길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서남연대(西南联大)의 심종문(沈从文) 교수는 1940년 <운남간운(云南看云)>이라는 산문집에서 "운남은 구름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운남의 특징은 하늘위의 구름이 변화무쌍하고 신기하다, 특히 해가 저물 무렵이면 구름의 색깔이며 형태,기운이 정말 사람을 감동시킨다"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여행/월드타운 아시아편 참조] 

그리고 사천성(四川省)은 삼국시대에 천부지도(天府之都)라 불리었다.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 및 식량을 소유한 성도평원의 중부에 위치한 사천성의 성도이다. 분지지형으로 4계절이 온화한 기후여서 연평균온도 16.3℃로 혹한과 혹서가 없고 겨울에도 따뜻하고 강우량이 풍부해 땅이 기름져 농사 짓기에도 최적의 조건이다.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는 춘추전국시대에 백제의 영토로서 양자강(한강) 북안, 삼협(三峽) 서쪽에 백제성이 있다. 중국은 백제성(百濟城)을 백제성(白帝城)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영토이었다. 당(唐)의 현종(玄宗)이 안사의 난 때에 이곳 신라 땅으로 피신해 왔다. 현재 사천성에 고려태조 왕건묘(王建墓)가 있다. 

왕건묘를 영릉(永陵)이라고 부르며 능묘는 높이 15m, 길이 80m의 둥근 형태이다. 내부에는 삼실(三室)이 있고, 삼실 중 중실에 관이 안치되어 있다. 이 능묘는 특히 당시의 무용, 음악 등의 예술 분야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중국은 고려태조 왕건의 일대기의 역사와 비슷하고 또한 연대도 비슷한 왕건(847~918년)에 대해 원래 상인 출신이었는데, 군생활을 하다가 당나라 조정의 쇠퇴기에 힘입어 전촉을 세운 인물이다. 라고 조작했다.
 

(2). 전라도/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는 어떤 기관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9권] 전라도 남원도호부 동쪽 30리 운봉현(雲峯縣)까지 이고 남쪽은 67리 순천부까지이고 곡성현은 33리에 있었다, 서쪽은 남원도호부에서 37리의 순창군 이고 옥과현은 경계까지 62리이다, 북쪽은 임실현 경계까지 43리이고,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70리며 서울까지는 6백 55리이었다. 

(3).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에 역(驛)이 11개 있었다

【역원】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에서 북쪽 40리에 오수역(獒樹驛) 있다. ○ 남원도호부에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속역(屬驛)은 11개소가 있었다. 창활(昌活)ㆍ동도(東道)ㆍ응령(應嶺)ㆍ인월(引月)ㆍ잔수(潺水)ㆍ지신(知申)ㆍ양률(良栗)ㆍ낙수(洛水)ㆍ덕양(德陽)ㆍ익신(益申)ㆍ섬거(蟾居) 등이 있다. ○ 찰방 한 사람이 임명된다. 

동도역(東道驛)은 남원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응령역(應嶺驛)은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창활역(昌活驛)은 창활수(昌活藪)의 남쪽에 있다. 잔수역(潺水驛) 잔수진(潺水津) 언덕에 있다. 안신원(安信院)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호산원(虎山院)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금천원(金川院)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비홍원(飛鴻院) 비홍현(飛鴻峴) 아래에 있다. 서림원(西林院)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순자원(?子院) 순자진(?子津) 언덕 위에 있다.  

다시천원(多時川院)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운제원(雲梯院)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천원(遷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축천원(丑川院)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홍화원(弘化院)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율두천원(栗頭川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원천원(源川院) 원천의 언덕에 있다. 잔수원(潺水院) 잔수진의 언덕에 있다. 


(4). 전라도/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의 곡식창고

【창고】 익산의 옥야(沃野)는 이름과 같이 옥토(沃土)로서 곡식을 저장해 두는 창고가 10개가 있었다. 1,읍창(邑倉), 2,지혜창(紙惠倉) 3,진휼창(賑恤倉) 성부(城府)는 성내(城內)에 있다. 4, 동창(東倉)은 40리에 있다. 5, 서창(西倉)은 40리에 있다. 6, 구남창(舊南倉) 40리에 있다. 7,신남창(新南倉) 40리에 있다. 8, 구북창(舊北倉) 30리에 있다. 9, 신북창(新北倉) 40리에 있다. 10, 산창(山倉)은 교룡산성(蛟龍山城)에 있다. 
 

(5).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의 변천사

1,백제의 시조 온조왕 AD 8년 때 金馬郡(금마군=익산군(益山郡)이었다. 2, 신라의 경덕왕 (742~765년)때 금마군(金馬郡)은 (1),옥야현(沃野縣),(2), 야산현(野山縣=랑산현(朗山縣, (3), 우주현(紆洲縣=우주(紆州:완주군 북쪽)의 셋 영현(領縣)이 있었다. 

660년(백제 의자왕20년)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망하게 됨에 따라 당나라의(웅진도독부 설치) 통치를 받다가 676년(신라 문무왕 16년)당나라가 쫓아내고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685년 전국에 9주 5소경을 둘 때 본도에는 완산주(현 전주)와 남원경(현 남원)을 두었다. 892년(진성여왕 6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을 때 후백제의 중심지역으로서 50여년간 존속하다가 통치를 당하다가 936년 후백제 신검(神劍)대에 고려(태조 왕건)에 귀속되었다. 후백제가 900년부터 고려에 귀속되기까지 완산주(현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전라도 일대를 통치하였다.

                                        조작된 고려시대의 전라도
▲     © 박병역 위원
고려시대인 996년(성종 14년)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전라북도는 강남도(江南道)라 칭하고 4주(전주-전주지방, 영주-고부지방, 순주-순창지방, 마주-옥구지방)를 설치하였다. 1018년(현종 9년)에 전국을 5도 양계(兩界)로 크게 나누면서 강남도(전북)와 해남도(전남)를 합하여 전라도라 칭하고 전주에 안찰사를 두었다.

고려시대 명종 6년(1176년) 익산군에 감무(監務)를 두고 그 뒤 다시 전주(全州)에 속하게 되었다. 충혜왕(忠惠王) 5년(1344) 익산군(益山郡)을 주로 승격시켜 익주(益州)라 하였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년) 전국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하면서 전라도는 전주에 관찰사를 두고 현재의 전라남도, 전라북도와 제주도에 걸친 1부(府) 4목(牧), 4도호부(都護府), 12군(郡), 31현(縣)의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였다. 1896년(고종 33년)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북도로 분리되고 전라북도는 26군으로 구성되었다.

(6). 일제는 1910년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일제식민지시대의 1910년 전국을 13도 12부 317군으로 개편할 때 옥구군 일원이 군산부로 되면서 전라도는 1부 27군이 되고 1914년 부·군을 통폐합하여 1부(군산)14군(완주·익산·옥구·김제·정읍·고창·남원·순창·임실·장수·진안·무주·부안·금산군)이 되었다가 1935년에 전주읍(全州邑)이 전주부로 승격되면서 완주군과 분리되었다. 

1945년 8.15 조국 광복과 더불어 행정구역 확장과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이리시로 승격되었다가 전주에서 익산으로 편입될 때 구오면(동일면, 남일면, 남이면, 서일면, 북일면)이 옛적 옥야현 영역(領域)인데 편입된 뒤 남일면 동일면이 익산면, 남이면, 서일면이 오산면,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으로 되었다. 1947년 11월 8일 행정구역을 확장시켜 익산군 복면 묘인리와 오산면 목천리와 송학리일부를 편입시켜 17개 동이 되었다. 

정부수립이후 1949년 전주,군산,이리부가 각각 시로 승격되고 1951년 2월 이리민사지부가 설치되었고, 7월 1일을 기하여 종래의 17개 동에서 25개 동으로 분활하여 일선 행정기구를 강화시켰는데 이 때 북일면과 춘포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는 금산군이 충남으로, 전남 위도면이 전북으로 편입되는 등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81년 정주읍,남원읍이 각각 시로 승격되고, 1989년에는 김제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전주시에는 완산구,덕진구가 설치되었다. 1995년 도농(都農)복합형태의 시 설치로 옥구·정읍·남원·김제·익산군과 군산·정주·남원·김제·이리시가 각각 통합되어 군산시,정읍시,남원시,김제시,익산시(益山市)로 변경되는 등 행정구역 개편을 거듭하여 현재는 6시 8군의 행정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도 연혁 참조]


(7). 1945년 전라북도 익산은 10여호에 불과했다

익산의 옥야현은 예전엔 갈대만이 무성한 습지로서 구릉에 따라 몇몇 집들만 산재한 곳이며, 갈산동에 인가라고는 십여 호에 불과했었다고 전한다. 그 뒤 해가 거듭할수록 농민들이 모여들었으며 이어 시장이 섰으며, 군산이 개항된 뒤에는 전주와 군산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숙박소가 되어 상주하는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  

익산의 옥야(沃野)는 넓은 평야로 이름과 같이 기름진 옥토(沃土)로서 곡식을 저장해 두는 창고가 10개가 있었다. 그런데 1945년 익산의 호수는 십여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익산에서 1862년 전라도 익산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고 하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

                   중국 운남성 익산(益山) 농민들의 반란 발발
▲     © 박병역 위원
임술농민항쟁을 기록한 <임술록>
철종 13년 1862년 3월 27일 전라도 익산에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임술년 삼남지방에서 잇달아 일어난 농민봉기를 임술농민항쟁이라 한다. 이 항쟁은 도결 환곡 등의 부세와 군역세를 불법으로 징수했으며, 내수사에 대한 진상과 공물이 많아 폐단이 심했다.

농민들의 저항의식이 높아가는 가운데 진사 홍정이 군수에게 수세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옥에 갇히자, 농민들이 몰려가 군수를 고을 밖으로 내쫓았다. 조정은 익산에 안핵사를 파견해 봉기에 적극 가담한 농민들을 효시(梟示)하거나 처벌했으며 군수 또한 유배시켰다. 이후 조정이 실시한 삼정이정책은 농민들이 봉기를 통해 얻어낸 구체적인 성과물 중의 하나였다. 이처럼 중국 속의 호남(湖南)이 한반도 속의 전라도로 둔갑해서 고려태조의 훈교 10훈과 농민반란 등 엉터리 국사로 인해 전라도 인들은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고 있는 것이다.



▶ [전북 익산군(益山郡)의 정체]에 의의를 제기하라

백제 온조왕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익산군, 익주(益州)이었습니다.
우라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일본 부모국의 역사를 말살하지 않고는 침략의 정당성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중국 대륙 속의 대제국 조선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편찬된 거짓 국사를 입증하고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하여 삼국사기의 지명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산, 함열, 용안 세 고을이 더 첨가되어 남일면과 병합하여 익산군이 되었다. 

1931년 4월 1일 [지방제도 개정에 관한 읍면제 실시]에 따라 이리가 딸린 지정면인 익산군은 ⇛ 익산읍(益山邑)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1일 익산읍이 ⇛ 이리읍으로 개칭되었다. 독자님들은 본래 중국 대륙에 건국되었던 신라, 백제 가야국을 삼국사기를 증서로 삼아서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역사적 진실을 상기의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의 지명 유래에서 확인했을 것입니다. 즉 중국 대륙의 남북부에 위치했던 백제의 광활한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한 일제와 이병도의 만행을 확인 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침탈한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한국의 국내와 중국의 각처에 산재했던 수 많은 고대사료를 수거하여 오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권 만 남기고 전부 다 불태워 없애고, 각 비문의 글자마져 훼손시키고, 유구한 우리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하여 영원히 감추려 했어도 그 비밀은 영원히 감출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듯이 인류 부모국의 우리역사의 진실이 드디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은 천리입니다.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코리아의 본 연재는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와 조국을 배신하고 오직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본왕에게 충성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삼국사기를 우리국사 왜곡의 증서로 삼았던 것입니다. 즉 대한민국의 모든 지명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을 증서로 삼아서 지명 유래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신라, 백제, 가야국을 한반도 속으로 억지로 얽어 맞추었기 때문에 허실이 드러나 우리 고대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즉시 거짓 지명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말살, 왜곡, 변조한 현행 국사의 실상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신라, 백제, 가야의 3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어 편찬된 현행국사는 엉터리 거짓 가짜 국사로 명확히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무려 62년 동안 거짓 가짜 국사교육에 세뇌된 거짓 지식에 고질화되어 분별력을 상실하여 본 연재의 고증도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추종하며, 망국적 현행 국사를 적극 사수(死守)하고 있는 세력들은 일제가 우리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한 사실을 확실한 고증서와 유적물로 입증하라며, 소위 실증사학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 연재의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의 지명 유래] 하나로 입증하여 더 이상 고증서나 유물로 입증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만약에 한(韓), 중(中), 일(日)의 사학자나 탐독자 중에서 본 [전북 익산군의 정체]에 대해 납득 할 수 없다면 댓글로 의의(疑意)를 제기해 주시면 대응의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끝. 

다음 주는 [제 24편] 백제의 수도는 중국 하남성 위례성이다.] 가 연재됩니다. 

     박병역(朴炳譯) 위원 프로필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선양회(韓國精神文化宣揚會) 대표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세계적 대국 고조선
3.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4.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5. 인류의 기원역사
6. 1만년 한국사 절요(切要)
7. 격암유록의 해설
. 07/09/10 [17:06] 수정 삭제  
  역사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설텐데...조만간 그런 날이 오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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