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18C 베링해협이 넓어지던 시기, 발해에 연속적 대지진 발생

"깔려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고 기타 변괴도 이전의 역사에 없었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10/02 [10:40]

18C 베링해협이 넓어지던 시기, 발해에 연속적 대지진 발생

"깔려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고 기타 변괴도 이전의 역사에 없었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입력 : 2015/10/02 [10:40]

[홍익/역사/통일=플러스코리아타임즈-김종문] 현재 ASIA(아세아, 亞細亞))와 별개의 대륙인 美大陸(미대륙)은 원래 아세아와 하나의 대륙인 COREA의 韓半島(한반도)였다. 미대륙이 현재처럼 아세아와 분리된 것은 18세기 Bering Strait(베링해협)에 의해 蒙古沙漠(몽골사막)과 遼東半島(요동반도)가 침식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Bering Sea(베링해)는 16세기 육지였으며 18세기 초에도 대부분 육지였다. 베링해의 육지가 바다가 되어가던 18세기 대조선COREA의 양서(황해도 해서와 평안도 관서)에는 가공할 대홍수들이 반복되었다. 18세기 이전 兩西(양서)지역의 수해로 인한 익사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이후 수백 명으로 급증하게 된다.

 

참조기사: 18세기 베링해협이 넓어지던 시기, 황해도 주민 수백명 익사

  

▲ A: 1716 Johann Baptist Homann, B: 1757 Buache Philippe, C: 현재의 베링해, D: 1972 U.S. Geological Survey 1700년 이전의 영문세계지도들의 대부분에 Mongal(몽골, 蒙古)은 현재의 베링해협서쪽에 있었다. 18세기초 베링해는 대부분 육지였으며 미대륙과 아세아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베링해지역은 원래 COREA의 양서(관서인 평안도와 해서인 황해도)지역과 요동이었다. B지도에 발해(현 베링해)에는 Canal et Detroit du Nord(북해로 통하는 운하와 해협)로 명기되었다. 고지도상에 Detroit(해협)이 흐르던 지역인 1~2번 지역은 20세기의 해저지형도에서도 깊게 패여 있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지도설명: 이는 北京(북경)동쪽에 위치한 天下(천하)의 동쪽 大洋(대양)이라 불리던 渤海(발해)와 大遼水(대요수)의 흔적인 것이다. 17세기 말 이후 발해의 서쪽에 위치한 淸國(청국)의 北京(북경)과 通州(통주)는 가공할 大地震(대지진)들이 연속되었다. 18세기 초에도 좁고 길쭉한 바다였던 1~2번 지역은 18세기 급격히 침식되어 벌어지며 1780년 이후 베링해를 육지로 표기한 지도는 보이지 않는다. 1번에서 알래스카로 이어지는 3번 지역은 Aleutian Islands(알류산열도)로써 2천 미터에 달하는 화산들이 섬으로 남아 있다. 1번 지역에서 동쪽으로는 18세기 초에도 북미와 연결된 육지였다.]

 

17세기 淸國(청국)은 통주강을 천하의 항로로 만들었다.

 

역사기록상에 渤海(발해)는 遼東半島(요동반도)에 위치한 渤(발, 가늘고 길다란)의 형상을 한 바다였다. 발해를 경계로 大朝鮮(대조선)은 西方(서방)을 다스리던 MING(명, 明)과 東方(동방)을 다스리던 동국조선COREA(고려, 高麗)로 나뉘어졌었다.

 

通州江(통주강)은 북쪽의 몽골사막 너머에서 남쪽 발해로 흘렀으며 1644년에도 걸어서 이동이 가능한 강이었다. 그런데 1644년 明(명)의 갑작스런 멸망으로 西方(서방)을 차지하게 되었던 淸國(청국)은 通州江(통주강)의 강바닥을 50여 곳을 파내어 천하의 큰 배들이 다니는 항로로 만들었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통주강(通州江)은 일명 노하(潞河)라고 하고, 속칭 외하(外河)라고도 한다. 수원(水源)이 멀고 흐름이 빠른데 모래 웅덩이가 많다. 여름이나 가을만 되면 폭우가 내려 터지기가 가장쉽고 또 조금만 가물어도 얕아져서 배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냈다. 이것이 곧 천하의 항로(航路)이다. 통주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생긴것이라 한다.

““通州江一名潞河。俗又呼爲外河。源遠流駛。率多沙溜。每夏秋暴雨。最易衝決。少遇天旱。舟便淺澁。故設淺五十餘處。卽天下通漕之處也。通州之稱。亦以是云。”

 

강바닥을 파낸 후의 通州江(통주강)은 천하의 항로라 불렸으며 COREA(고려, 高麗)의 대강인 臨津江(임진강)보다 크고 수량이 풍부하며 유속이 빨랐다. 北京(북경)은 蒙古(몽골)의 지경에서 100리 거리인 몽골사막에 위치하였다. 북경(北京)의 동쪽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끊임없이 흘렀던 커다란 바다는 蒙古沙漠(몽골사막) 너머의 North Sea(북해, 北海)이다. 통주강은 변하여 Bering Strait(베링해협)이 되었으며 영문고지도상에 사막지대였던 알래스카서쪽지역은  지금도 곳곳에 사막들이 남아 있다. 

 

통주강(현 베링해협)의 강한 물살은 몽골사막과 요동반도를 바다로 변화시켰으며 수많은 영문고지도들에는 그러한 지형의 변화가 명기되어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발해지역은 대지진들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17세기말 이후 청국 발해지역은 연속적 대지진 발생

 

17세기말 이후 淸國(청국)의 通州江(통주강)과 발해인근은 가공할 대지진들이 연속되었다.

참조기사: 청의 북경과 통주는 '연속적 대지진으로 폐허', 현재의 북경은?

 

조선왕조실록의  淸國(청국) 지진기록은 현종 9년(1668)에 처음 보인다.

 

조선왕조 현종실록  9년(1668) 10월 13일(무인) 1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있다.

“담성(郯城) 한 주(州)에 지진이 일어나 깔려 죽은 자가 1천여 명이나 된다.”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여러 곳에서 깔려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고 기타 변괴도 이전의 역사에 없던 바입니다.”

“郯城一州地震, 壓死者千餘人矣。” 皆曰: “諸處壓死數千人, 其他變怪, 前史所無。”

 

1668년 청국은 지진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였다. 그것은 이전의 역사에 없던 대지진이었다. 이후 청국은 지진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된다. 수만 명이 죽는 대지진들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숙종실록 5년(1679) 11월 28일(기미) 2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있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중국의 사정은 사신(使臣)이 들은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마는,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고 인민이 깔려 죽은 일은 그가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깔려서 죽은 사람이 5만 7천에 이르며, 아직 조사해 내지 못한 사람도 얼마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許積曰: “中原事情, 使臣所聞, 雖未知信否, 而至於因地震, 室屋頹圮 人民壓死之狀, 乃其目見也。 壓死人至於五萬七千, 而未及査出者, 又不知其幾云。”

 

5만 7천이 죽었는데 확인을 다 하지 못한 수치라면 총 사망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영조 6년(1730) 11월 3일(무진) 2번째기사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이번 그곳의 지진(地震)은 옛날에 없었던 것으로, 성안의 인가(人家)가 무너진 것이 거의 4만에 이르렀다 합니다. 우리 나라는 저들 나라와 분야(分野)가 같기 때문에 재이(災異)도 매양 서로 비슷하게 되니, 이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洪致中曰: “今番彼地地震, 前古所無, 城內人家陷沒, 幾至四萬。 我國與彼國, 分野同, 故災異亦每相似, 此可慮矣。”

 

임금이 말하기를, “만승(萬乘)의 임금으로서 지진을 피하여 배를 띄워 막을 치고 거처한다 하니, 거조(擧措)가 해괴하다 하겠다.”

上曰: “以萬乘之主, 避地震設幕泛舟而居處云, 擧措可謂駭異矣。”

 

北京城(북경성) 안에서만 4만의 가옥이 무너져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는 것이다.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 이후 90여 년이 흘러 국력이 회복되었던 東國(동국)에게 淸國(청국)은 더 이상 上國(상국)이 아니었다. 東國(동국)의 영조대왕은 지진을 피해 배를 타고 생활하는 청국황제를 해괴한 임금이라 하였다.

 

18세기 초 북경대지진으로 태화전은 모두 무너졌다.

  

▲ A: 마지막황제(The Last Emperor, 1987) 포스터 속의 太和殿(태화전), B: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북경 자금성 태화전 현판들.  역사상 명, 청의 수도였던 북경의 태화전은 18세기 초 대지진으로 모두 무너졌다. 그런데 현재 동아세아에는 명, 청의 수도였던 북경이라는 도시가 있으며 태화전은 멋있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대지진으로 무너져 버린 태화전이 웅장하게 있을 수 있는 원래의 태화전이 아닌 건물을 세계사조작을 위하여 원래의 태화전인 것처럼 역사를 조작했기 때문인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조선왕조 영조실록 7년(1731) 4월 1일(계사) 3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있다.

“20일 정오에 갑자기 큰 풍우(風雨)가 닥치는 듯 앉아 있는 의자가 흔들리므로 급히 나와 면했습니다. 그날 지진으로 사망한 자가 2만여 명이라 하였고, 상명(常明)의 말을 듣건대 호황(胡皇)은 배를 타고 장막에 거처하여 붕압(崩壓)을 피했으며, 또 태화전(太和殿)은 바로 명(明)나라 때 건물로서 계석(階石)이 새로 쌓은 듯 말끔했는데, 역시 모두 무너졌다고 하였습니다.”

“二十日亭午, 忽然如大風雨, 掀動坐椅, 急出以免。 而其日以地震死者, 爲二萬餘人, 聞常明言, 胡皇乘船處幕, 以避崩壓, 且太和殿, 卽明時所建, 而階石之如新築者, 亦皆頹圯矣。”

 

원래의 紫禁城(자금성) 太和殿(태화전)은 1730년 대지진으로 모두 무너져 버렸다. 그런데 자금성은 1987년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무너지고 없어야 할 태화전이 너무나 멋있는 모습으로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북경이 원래의 북경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북경대지진 시기 COREA도 지진이 폭증했다.

 

淸國(청국)에 대지진들이 발생하던 시기 COREA도 지진들이 자주 일어났다. 특히 숙종대왕재위(1674∼1720)시기에는 지진들이 폭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국역되어 地震(지진)으로 검색되는 기록은 총 538건이다. 그중 숙종대왕(肅宗, 재위 1674∼1720) 시기가 164건이나 되어 COREA전역에서 지진이 폭증한 것을 알 수 있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조선왕조 숙종실록 7년(1681) 4월 26일(기유) 1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간방(艮方)으로부터 곤방(坤方)까지 지진(地震)이 일어났는데, 집이 몹시 흔들리고 창(窓)과 벽(壁)이 흔들렸으며, 길을 가던 사람 중에는 말이 놀라 떨어져 죽은 사람도 있다.”

“自艮方至坤方地震。 屋宇掀動, 窓壁震撼。 行路之人有所騎驚逸墜死者。”

 

숙종 10년(1684) 3월 23일(기축) 1번째기사

“평안도 창성부(昌城府)에서 이 달 4일에 소리가 뇌고(擂鼓) 같고 기와가 다 움직이는 지진(地震)이 세 번 있었고, 삭주부(朔州府)에서도 이 날 두 번 지진이 있었다.”

“平安道昌城府是月初四日地震, 聲如擂皷, 屋瓦皆動, 如是者三, 朔州府亦於是日再震。”

 

숙종 39년(1713) 3월 2일(기묘) 1번째기사

"평안도(平安道) 평양(平壤)에 지진(地震)이 일어나서 가옥(家屋)이 흔들리고, 마치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平安道平壤, 地震, 家舍掀動, 有若雷皷之聲。”

 

조선왕조실록에 地震(지진)으로 검색되는 국역기록 538건 중에 164건이 숙종대왕 시기의 기록들이다. 인조대왕에서 현종대왕까지 51년 동안의 기록이 이상하리만치 적은 5개인 것에 비해서 전국에서 지진들이 폭증했던 것이다. 지진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던 시기는 큰물이 들어서 익사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와도 거의 일치한다.

 

17세기말 발해에서 다섯 용(龍)이 싸웠다.

 

조선왕조 숙종실록 8년(1682) 1월 24일(임신) 1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있다.

"(淸國(청국)에서 돌아온 사신들이 말하길) 그 나라에는 변이(變異)가 많은데, 지진(地震)이 특별히 심하여 성곽(城郭)·궁실(宮室)이 무너지기까지 하였고, 다섯 용(龍)이 바다 가운데에서 싸웠습니다."

“其國多變異, 地震特甚, 城郭宮室至於傾圮, 五龍鬪於海中。”

 

발해지역에 대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시기인 1682년 풍운(風雲)의 조화를 다스리는 신적 존재인 용(龍)이 두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가 싸웠다고 한다. 이것은 발해에서 막을 수 없는 대재앙이 일어나고 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大朝鮮(대조선)에서 자연재해는 제왕의 不德(부덕)이 원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서 용들이 싸웠다면 대지진은 사악한 용들이 일으킨 재앙이므로 천하를 다스리던 황제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가 널리 퍼지길 바라던 사람들은 청국황제를 모시던 신하들 이었을 것이다.

 

보통 바다 속이나 근처에서 강한 지진이 발생하면 해안가에서는 tsunami(쓰나미, 津波)라 불리는 해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해일은 갑자기 큰물이 들어 육지가 잠기므로 보통의 태풍이나 홍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명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18세기 발해연안에는 가공할 수해가 반복되었다.

 

18세기 COREA 양서지역의 수해들을 보면 보통의 태풍이나 장마로 인한 수해로 보기에는 사망자와 가옥의 표몰이 너무 많다. 실록의 기록을 KOREA건국 후 전국을 초토화 시켰던 1959년 태풍 ‘사라(SARAH)’와 비교해 보자

 

"대한민국 KOREA의 건국 이후 사망자가 최초로 집계된 1959년의 태풍 ‘사라(SARAH)’의 인명피해를 보면 전국적으로 849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부상자는 2533명이 발생했다."

   

▲ A: 1959년 9월 15~18일 남부지방을 강타했던 제14호 태풍'사라(SARAH)'후의 모습, B: 2011년 3월 11일 일본의 한 마을을 덮치는 surge(해일, 海溢)  1959년 태풍 사라로 인해 전국적으로 849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부상자는 2533명이 발생했다. 전국이 황폐화 되었으나 사망자는 849명에 머물렀던 것이다. 열도 JAPAN에서 발생한 해일이 남북의 한반도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일부지역에서만 수백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1959년 KOREA를 초토화시켰던 ‘사라(SARAH)’는 사망자가 849명이었다. 근세조선의 인구보다 많았던 남한임을 감안하면 실록의 익사자 수는 사라보다 적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양서지역은 몇 개의 고을에서 수백명이 익사하고 수천채의 가옥이 물에 쓸려 사라졌다는 기록들이 많다.

 

조선왕조 영조실록 14년(1738) 6월 19일(경자) 1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해서(海西)에 큰 비가 내려서 배가 성(城) 위로 다니고, 익사(溺死)한 사람이 3백여 명이나 되므로, 휼전(恤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海西大雨, 行舟城上, 溺死者三百餘人, 命施恤典"

 

비가 많이 온 것만으로 배가 성 위로 다니고  해서지역에서만 3백여 명이나 익사할 리는 없을 것이다. 다음해인 1739년에도 황해도 해서지역은 大水(대수, 큰물이 져서)로 다시 수백이 죽었다. 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비가 오지 않았는데 큰물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15년(1739) 7월 23일 1번째기사

"황해도 해주(海州) 등 일곱 고을에 큰물이 져서 빠져 죽은 자가 거의 3백 인이고 표몰된 집이 6백여 호이었는데,"

“黃海道海州等七邑大水, 渰死近三百人, 漂沒六百餘戶。”

 

전국도 아니고 일곱 고을에만 3백 인이 사망하였다. 표몰된 집이 6백여 호인데 익사자가 3백 인이라면 표몰된 두 집중에 한집에 익사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아래 동일지역인 황해도 해서지역에서 1809년 2천 8백 17호가 표몰되었을 때 51명이 사망했던 기록과 비교해 보면 27배 이상의 인명피해이다. 이것은 해일로 사람들이 집과 함께 표몰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인명피해로 판단된다. 1739년 7,8월에 물난리의 기록은 黃海道(황해도)가 유일하다. 인근의 다른 지역은 기록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순조 9년(1809) 8월 23일(신해) 1번째기사

"전후 도계(道啓)와 선전관의 서계(書啓)에 의하면, 해주(海州) 등 11개 고을의 민가(民家)가 표퇴(漂頹)된 것이 2천 8백 17호이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51명이고 전답(田畓)이 물에 잠긴 것이 5천 9백 석(石) 영락(零落)이었다."

“前後道啓與宣傳官啓, 海州等十一邑民家漂頹二千八百十七戶, 人物渰死五十一名, 田畓沈墊五千九百石零落。”

 

순조 9년 8월, 9월의 수해기록은 위의 기록이 유일하다. 전국에서 해서지역 11개 고을만 수해가 있었을리는 없을 것이다. 황해도(黃海道) 해서(海西)지역 11개 고을에서만 2천 8백 17호가 물에 쓸려 사라질 정도로 대홍수가 발생했다면 인근의 평안도 또한 수해가 발생했었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는 실록의 기록들이 어떠한 이유에선지 삭제된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이다.

 

순조 10년(1810) 7월 14일(병인) 1번째기사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만수(李晩秀)가 의주부(義州府)의 민가 1천 8백 77호가 떠내려갔거나 무너지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2백 63명이라고 치계하니,"

“平安監司李晩秀, 以義州府民家漂頹一千八百七十七戶、人物渰死二百六十三名馳啓。”

 

1천 8백 77호라면 압록강과 발해에 가까웠던 의주지역은 거의 대부분의 인민들이 수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발해연안의 다른 도시들 또한 심각한 수해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평안도는 18세기 이전 수해로 인한 사망자가 수십 명이었으나 18세기 이후 수백 명이 사망하는 지역으로 변했다. 이는 육지였던 베링해지역이 바다가 되면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압록강에 대홍수가 자주 발생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 A: 1780 J.A. Dezauche, B: Berin Strait(베링해협)인근의 수심   蒙古(몽골)의 동남쪽에 요동반도(遼東半島)는 18세기 급격히 침식되어 바다에 잠기는 육지가 많아졌으며 1780년 이후 요동반도는 지도상에 바다로 표기되었다. 현재 베링해협주위의 수심은 대부분 50m미만으로 수심이 매우 낮다. 현재 베링해 남부의 평균수심은 1600m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베링해지역은 1780년 이후 근세기까지도 해저지형이 급변하며 해저지진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베링해 연안의 인민들은 계속되는 tsunami(쓰나미, 津波)로 고통 받았을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1700년 이전에 제작됐다는 영문세계지도들의 대부분에 MONGAL(몽골, 蒙古)는 현재의 Bering Strait(베링해협)서쪽에 위치하였다. COREA의 韓半島(한반도)는 蒙古(몽골)의 동쪽에 위치한 수만리 크기의 반도인 美大陸(미대륙)이다. 渤海(발해)는 원래 Mongal(몽고, 蒙古)의 남동쪽에 요동반도에 위치한 길쭉한 발(渤)의 형상을 한 內海(내해)였다. 역사기록상에 北京(북경)의 동쪽에 위치한 발해는 커다란 바다가 通州江(통주강)을 통해 흘러내렸다. 通州江(통주강)은 1644년에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얕은 강이었으나 淸國(청국)이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내어 天下(천하)의 航路(항로)로 만들었다. 통주강은 침식되어 넓어져 현재의 베링해협이 되었다.

 

通州江(통주강)은 COREA의 臨津江(임진강)보다도 컸으며 수량이 풍부하고 유속이 빨랐다. 통주강으로 내려왔던 커다란 바다는 蒙古沙漠(몽골사막) 너머의 北海(북해)이다. 통주강의 강한 물살은 蒙古沙漠(몽골사막)과 遼東半島(요동반도)를 강하게 침식시켰다. 그로인해 17세기 말 이후 淸國(청국)의 발해연안에서는 수만의 인민들이 사망하고 수만 채의 기옥이 무너지는 가공할 대지진들이 자주 일어났으며 COREA에서도 지진활동이 급증했었다. 그러한 대지진들과 함께 몽골사막은 급격히 침식되었고 요동반도는 베링해가 되어갔다. 발해연안은 급격한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홍수와 대지진들로 인한 쓰나미들이 빈번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베링해가 육지에서 바다로 변해가던 18세기 COREA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양서지역에 가공할 수해들이 기록되어 있다. 17세기 말 이전에 양서지역의 수해는 보통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백채의 가옥이 표몰되었었다. 그런데 이후에는 수백의 인민들이 사망하고 수천채의 가옥이 표몰되는 참사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특히 해서지역에는 1839년 600채의 가옥이 표몰되어 300명이 사망하였다. 무너진 두 집에서 한 명이 사망하였다는 것으로 그러한 기록들은 보통의 홍수가 아닌 발해지역의 지진으로 인한 해일로 판단되는 부분이다.

 

18세기 조선왕조실록에 지진과 수해의 기록들은 현재의 남북의 한반도에 기록들이 아니다. 앞서 여러 지명들을 통해 살펴보았듯 대조선COREA의 한반도는 몽골의 동쪽에 위치한 미대륙이다. 현 남북의 한반도에 지진이 적은 것은 이곳이 한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문고지도들을 공부하다 우연히 고지도들의 중요지명들이 이동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 현재의 중요지명들의 위치가 세계사조작을 위하여 이동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2년여간 지명이동사례들을 탐구하여 정리하였습니다. 2014년 7월부터 고지도조작의 사례들을 모은 ‘고지도의 진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미식 여행지 고흥, ‘녹동항 포차’에서 추억을 쌓아요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