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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베링해협이 넓어지던 시기, 황해도 주민 수백명 익사

베링해 주변의 육지가 급격히 침식되던 때, COREA의 역사기록은 황해도..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9/24 [15:07]

18세기 베링해협이 넓어지던 시기, 황해도 주민 수백명 익사

베링해 주변의 육지가 급격히 침식되던 때, COREA의 역사기록은 황해도..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입력 : 2015/09/24 [15:07]

 

[홍익/역사/통일=플러스코리아타임즈-김종문] 1700년 이전에 제작됐다는 영문세계지도들의 대부분에 MONGAL(몽골, 蒙古)는 현재의 Bering Strait(베링해협)서쪽에 위치하였다. COREA의 韓半島(한반도)는 몽골의 동쪽에 위치하여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미대륙이었다. 현재 ASIA(아세아, 亞細亞)와 별개의 대륙인 美大陸(미대륙)은 16세기에는 아세아와 하나였고, 18세기 초에도 매우 가까웠으나 18세기 베링해협에 의해 급격히 침식되어 분리되었다. 1780년경이 지나면 중간의 육지는 지반들까지 침식되어 현재와 비슷한 형상의 Bering Sea(베링해)가 된다. 광활한 지역이 침식되어 바다가 되면서 전 지구적인 海水面(해수면) 上昇(상승)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라진 중간의 육지는 역사상 蒙古沙漠(몽고사막)과 遼東半島(요동반도)였다. 해당지역을 다스리던 大朝鮮(대조선)의 역사기록들에는 해수면 상승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들이 많이 있다.

 

참조기사: '몽골', 17세기까지 1만리 떨어진 북해 근처에 있었다

참조기사: '발해는 압록강 하류였다', 현재 동북아로 이동시킨 이유?

  

▲ A: 1531 Orontius Finnaeus, B: 1795 Pinelli (1559 Hajji Ahmed), C: 1781 Jean Lattre, D: 1559 Hajji Ahmed 지도로 그린 지형, 1: MONGAL(몽고, 蒙古), 2: Hudson Bay(허드슨만), 3: Florida(플로리다), 4: Pucatans(유카탄), 5: California(캘리포니아), 6: 요동반도(遼東半島) 16세기의 영문세계지도들은 현재의 지구의 형상과 전혀 다른 지형으로 그려졌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위 사진 설명: 미대륙은 몽골사막으로 아세아와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한반도였다. 세계사에서 신대륙발견(1492) 후 몇십년 지나지 않는 시점인 1531년 지도에는 그린란드, 플로리다, 쿠바, 유카탄등 현재도 동일하게 사용되는 지명들이 가득하다. 현재는 바다가 되어있는 베링해와 베링해협 주위는 16세기 지도들에 몽골사막과 육지로 명기되었다. 아세아와 미대륙 사이의 몽골사막과 요동반도는 18세기 베링해협의 강한 물살에 급격하게 침식되었다. 1780년 이후 베링해를 육지로 그린 지도는 보이지 않는다. 1559년 Hajji Ahmed지도로 1795년 제작됐다는 B지도의 중미지형은 다른 16세기의 지도들 보다 18세기 지도들과 더 유사하다. B지도의 6번 지역은 현재의 베링해, 북태평양, 알래스카만이 육지로 그려졌다. 해저지형의 강줄기들을 몇 개만 표시해보면 현재의 강들이 해저로 연결되어 과거 넓은 지역이 육지였음을 알 수 있다. ]

 

18세기 이전 해서(황해도)지방은 수해로 수십명 사망

 

고지도상에 베링해지역의 지형이 급격히 변하였던 시기는 18세기였다. 현재 베링해의 수심은 1600m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18세기 베링해의 육지가 바다가 된 이후에도 해저에 잠긴 육지는 계속해서 침식되었을 것이다.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했을 시기는 18, 19세기초였을 것으로 판단되는 부분이다.

 

세계문화유산인 대조선COREA의 역사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많은 자연재해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 18세기 이전 압록강과 발해에 위치한 양서(관서(평안도)와 해서(황해도 해주))지역에 수해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중종 10년(1515) 7월 18일(계묘) 1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신 등이 듣건대, 평안·황해도에 수재(水災)가 있어서 익사한 인물이 1백여 인에 이르고 떠내려간 인가도 또한 많다 하니, 이는 근래에 있지 않던 재변입니다."

 

1515년 평안·황해도 두 도의 익사자가 1백여 인이니 한 도에서 수십명씩 죽었다는 것인데도 근래에 없던 재변이었다고 한다

 

명종 5년(1550) 윤6월 20일(임오) 1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황해도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이번 윤6월 초이렛날 큰비가 내려 우봉현(牛峯縣)에서는 산밑에 사는 박순동(朴順同) 등 3호의 남녀 14명이 모두 표몰(漂沒)하였으며, 이손(李孫)의 집에서는 여자 1명, 아이 1명, 큰 소 1마리가 압사했으며, 박산(朴山)의 집 등 13호가 사태에 휩쓸렸고, 평지에 있는 가산(家山) 이 모두 침수되었습니다."

 

1550년 황해도의 물난리 익사자는 14명 떠내려간 집이 13호였다. 보통 지방관이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는 소 1마리도 보고될 정도로 상세하였다.

 

인조 12년(1634) 7년) 7월 28일(임자) 4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평안도 산군(山郡) 일대의 강가 여러 고을에 홍수가 졌다. 맹산현(孟山縣)에서는 남녀 36인이 물에 빠져 죽었고 절의 중 1백여 인이 산사태로 압사하였으며, 개천(价川)·덕천(德川)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자가 40여 인이었다."

 

1634년 평안도에서 홍수가 들어서 익사한 사람은76인 이었다.

 

효종 3년(1652) 8월 5일(갑진) 1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평안도에 큰물이 져서 빠져 죽은자가 50여 인인데, 휼전(恤典)을 특별히 베풀라고 명하였다."

 

1652년 평안도 익사자는 50여인이었다.

 

현종 4년(1663) 6월 15일(신해) 3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황해도에 큰물이 져 29명의 익사자가 발생했는데, 상이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토록 하였다."

 

1664년 황해도의 익사자는 29명이었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16, 17세기 황해도와 평안도에 큰물이 들었을 때에 보통 수십명이 익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들만 본다면 현재의 남북의 한반도 평안도와 황해도의 기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외의 기록들을 보면 현 남북한 한반도의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수해지역은 남북한 한반도가 아니었다

 

현재 COREA의 한반도는 미대륙에서 동북아의 동서 오백리의 남북의 한반도로 이동되었고 그 지명들 또한 이동되었다.

 

연행기사(燕行記事) 문견잡기(聞見雜記) 잡기(雜記)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지나다가 망해정(望海亭)에 올라 바라보니 금주(金州) 개주(蓋州)는 저 위에 있고 등주(登州) 내주(萊州)는 아래쪽에 있으며, 앞의 남쪽은 바라보아도 끝이 없다. 건너편 언덕은 곧바로 우리나라의 양서(兩西) 연변인데 한 바다가 서로 연하였기 때문에 물빛이 같고 조수도 왕래한다."

 

渤海(발해)를 사이에 두고 大朝鮮(대조선)의 明(명)이 다스리던 지역과 東國(동국)인 COREA(고려, 高麗)의 兩西(양서, 황해도 해서와 평안도)지역은 마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서지역을 건너편언덕이라 부를 정도로 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황해도는 발해가 아닌 서해에 위치하여 요동이나 등주와는 수백km나 떨어져 있다, 

 

효종 3년(1652) 6월 28일(무진) 2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황해도에 큰 물이 졌다. 서흥(瑞興) 등 수십 읍이 육지가 바다가 되었고, 재령(載寧) 바닷가의 시골집 30여 호가 떠내려갔으며, 주민가운데 노약자 15인과 우마 30여 마리가 빠져 죽었다.”

 

서흥(瑞興)등 수십 읍이 육지가 바다가 되었다는 것은 지대가 낮은 지역이었으며 재령(載寧)은 바닷가에 위치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서흥과 재령을 찾아보면 위의 기록과 전혀 다르다.

 

▲ 역사기록상에 COREA황해도 載寧(재령)은 바닷가에 위치하였으나, 현 동북아 남북의 韓半島(한반도)의 재령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다. 1652년 6월 바다가 되었다던 수십읍 중 하나인 瑞興(서흥)은 현재 내륙으로 산에 둘러 싸인 높은 지역이다. 지대가 높은 현재의 서흥이 역사기록 상의 바다가 되었다는 수십 읍 중 하나라면 서흥의 하류인 재령은 바닷가 시골집이 떠내려가는 차원이 아니라 망망대해가 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황해도 서흥과 재령은 역사기록 속의 지명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원래의 서흥(瑞興)은 都護府(도호부)가 있을 정도로 커다란 지역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瑞興(서흥)은 지대가 높고 주위로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땅이 너무나 협소하다. 서쪽으로 크게 트여 載寧(재령)으로 통하여 큰 물에 바다처럼 잠길 리도 없는 지역이다. 현재의 서흥이 원래의 서흥인지 조선왕조 세종실록지리지를 살펴보면 지명들이 서로 불일치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들이 서로 다르다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황주목 서흥 도호부(瑞興 都護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나장산(羅帳山)【부의 서쪽에 있다. 】백서산(白鼠山)【곧 백서도(白鼠島)이니, 부의 서쪽에 있는데, 나장산에 합제(合祭)한다. 】부연(釜淵)【부의 동쪽에 있다. 모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신은(新恩)에 이르기 21리이요, 서쪽으로 봉산(鳳山)에 이르기 37리이요, 남쪽으로 평산(平山)에 이르기 14리이요, 북쪽으로 수안(遂安)에 이르기 32리이다."

 

"땅이 메마르고, 산이 높고 뽕나무와 산뽕나무가 많아서, 백성들이 누에치기로 생업을 삼는다."

 

원래의 서흥은 서쪽지역에 높은 산이 있었으나 현재의 서흥에는 높은 산이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서흥과 주위의 지명들의 설명을 보면 지리지 안의 다른 기록들과 크게 다르다. 단적으로 수안(遂安)이 위치했다는 서흥 북쪽 32리는 산들이 밀집하여 郡(군)이 있을 수 없는 지역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황주목 수안군(遂安郡)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곡산(谷山)에 이르기 35리, 서쪽으로 서흥(瑞興)에 이르기 34리, 남쪽으로 신은(新恩)에 이르기 18리, 북쪽으로 평안도(平安道) 삼등(三登)에 이르기 68리이다."

 

서흥도호부에서 수안은 북쪽으로 32리였으나. 수안군편에서 서흥은 남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34리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방향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 A: 1700 Yŏjido(Library of Congress Catalog Number 83675017), B: 현재의 황해도, 1: 瑞興(서흥), 2: 平山(평산), 3:載寧(재령), 4: 遂安(수안), 5: 谷山(곡산), 6: 新恩(신은)   황해도의 지명들은 대부분 현재의 남북의 한반도에도 있으며 수많은 한문고지도들에는 현재의 위치에 지명들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표기되었다. 그러나 역사기록들에 지명의 방향과 거리는 현재의 지명들과 불일치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서흥도호부에 수안은 서흥 북쪽으로 32리(약 15km)거리에 있었으나 현재의 서흥북쪽 32리는 산들이 밀집하여 도시가 있을 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 수안군에 서흥은 고산서쪽 35리(약 16.4km)이며 서흥동쪽 34리(약 16km)에 있었다. 그러므로 서흥은 곡산에서 66리(약 31km)이상 서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서흥은 곡산에서 남서쪽으로 50km가까이 떨어져 있다. 방향이 전혀 틀리며 거리 또한 완전히 틀린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현재 남북의 한반도에 서흥에서 북쪽으로 32리는 산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방향도 틀리며 도시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지역이다.

 

그럼 서흥 동쪽 21리 수안 남쪽 18리라는 新恩(신은)을 살펴보자.

  

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황주목 신은현(新恩縣)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곡산(谷山)에 이르기 32리, 서쪽으로 서흥(瑞興)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평산(平山)에 이르기 20리, 북쪽으로 수안(遂安)에 이르기 35리이다."

 

앞서의 新恩(신은)과  瑞興(서흥)의 거리는 21리와 30리로 기록들이 다르며 新恩(신은)과 遂安(수안)의 거리도 18리와 35리로 크게 다르다. 위의 세종실록 지리지로는 지명들의 위치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서흥 도호부(瑞興 都護府)는 황주의 유일한 도호부였다. 그런데 현재는 삼면이 산으로 막힌 좁은 땅에 위치하였다. 현재의 서흥이 바다에 잠긴 서흥이라면 수십읍은 주위에 높은 산들이라는 말인가...이러한 것은 대조선COREA의 역사기록들을 현재의 남북의 한반도에 대입할 때 자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의 조선왕조실록이 JAPAN열도에서 KOREA로 넘겨진 것은 2006년 7월 7일이었다. JAPAN에 있는 동안 실록이 고이 보존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의 재령과 서흥은 현재의 동북아에 동국조선을 표기한 여러 한문고지도들과는 일치하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과 불일치한다. 그러한 차이는 현재의 지명들이 COREA의 한반도를 미대륙에서 현재의 남북의 한반도로 이동된 지명들이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Bering Sea(베링해)가 육지에서 바다로 변하던 18세기에 들어서면 COREA 양서지역의 수해로 인한 익사자와 가옥의 표몰이 비교할 수 없게 증가한다.

 

▲ A: 1716 Johann Baptist Homann, B: 1757 Buache Philippe 1700년 이전의 영문세계지도들의 대부분에 몽골은 현재의 베링해협서쪽에 있었다. 위의 지도들의 지형은 현재의 세계사에서는 언급자체가 안되는 부분이다. 18세기초 베링해는 대부분 육지였으며 미대륙과 아세아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베링해지역은 원래 COREA의 양서인 관서(평안도)와 해서(황해도 해주)그리고 요동이었다. COREA의 해서지역인 원안의 지역은 18세기초 극심한 지형의 변화가 있었다. 육지가 침식되어 바다가 되고 베링해협으로 내려오는 북해에 의해 발해의 수위가 상승하여 범람하고 육지가 잠기는 강력한 수해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18세기초 兩西(양서)지역 익사자 수백명으로 급증

 

현종대왕(동국조선 제18대 임금, 1659년 ~ 1674년)까지도 큰물에 죽은 사람의 수는 보통 수십명이었다. 그런데 숙종대왕(동국조선 19대 임금, 재위 1674∼1720)으로 가면 兩西(양서)지역에 수해가 집중되고 사망자 수가 수백으로 급증한다. 양서지역의 수해기록이 너무나 많으므로 큰 것만 몇가지 살펴보면

 

숙종 38년(1712) 7월 13일(갑오) 1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평안도(平安道) 안주(安州)에 큰 홍수(洪水)가 나서 인가(人家) 4백 여호가 침몰(沈沒)하고, 개천(价川)과 영변(寧邊)에서는 떠내려 간 인가가 2천여 호를 넘었다.”

 

청천강지역인 안주는 4백 여호 압록강지역에서는 2천여 호로 도합 2천 4백 여호의 가옥이 떠내려갔다. 압록강과 청천강은 발해와 연결된 강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인명피해가 없다는 것이다. 동시기 영변(寧邊)남쪽 30리에 희천군에서 190명이나 사망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몇배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숙종 38년(1712) 7월 22일(계묘) 1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평안도(平安道) 희천군(熙川郡)에 큰 홍수(洪水)가 나서 정은지(丁銀知) 등 1백 90여 명이 물에 빠져 죽고 혹은 압사(壓死)하였다.”

 

熙川郡(희천군)에서만 1백 90명이 사망하였다.

 

숙종 45년(1719) 7월 15일(병술) 2번째기사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황해도(黃海道) 각 고을에 6월 그믐부터 7월 초3일까지 밤낮으로 큰 비가 쏟아져 평지(平地)가 바다를 이루고 홍수(洪水)가 하늘까지 닿았는데, 익사(溺死)한 사람이 2백 17여 명에 이르고 표몰(漂沒)한 인가(人家)가 2천 4백여 호에 이르렀다.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니, 세자가 특별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이 해에 경기(京畿)의 물가 고을과 관동(關東) 일로(一路)에서 모두 수재(水災)를 입었는데, 해서(海西)가 가장 혹심하였다.”

 

황해도는 평지가 바다를 이루었으며 익사자 2백 17명, 인가가 2천 4백여 호가 표몰되였다. 어마어마한 수해였던 것이다. 황해도는 바다가 되었다는 기록들이 유독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지대가 낮은 지역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해에 여러지역에서 수해가 발생하였는데 해서지역이 가장 혹심하였다는 기록은 앞서의 기록들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조선왕조 세종실록지리지의 황해도 지명들은 방향과 거리가 서로 다르며 현 남북의 한반도의 지명들과도 크게 다르다. 그것은 미대륙 COREA의 역사를 현재의 남북의 한반도로 이동시키면서 이루어진 지명조작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문고지도상에 베링해의 육지가 급격히 침식되던 18세기초 대조선COREA의 역사기록들에는 황해도와 평안도에 가공할 수해가 반복되었다. 18세기 이전 수십명의 익사자가 발생했던 양서지역은 18세기초 수백명으로 급증하였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영문고지도들을 공부하다 우연히 고지도들의 중요지명들이 이동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 현재의 중요지명들의 위치가 세계사조작을 위하여 이동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2년여간 지명이동사례들을 탐구하여 정리하였습니다. 2014년 7월부터 고지도조작의 사례들을 모은 ‘고지도의 진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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