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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3)-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임오란과 제물포늑약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7/01 [00:46]

대한정통사(13)-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임오란과 제물포늑약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07/01 [00:46]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1945년 8.15 이후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 역사서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정도에 이르건만, 민족정통성의 시각에서 집필된 것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관련 역사서는 물론이고, 논문들의 대부분도 정통성의 맥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화사관(開化史觀)'이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 민족의 존립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사적 정통성을 떠나서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대단히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통성에 대한 민족구성원들간의 의견차이나 충돌로 인하여 민족적 구심력이 깨어지고, 민족분열과 허무주의적인 민족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현대사가 스스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서문 중에서]

 
▲ 서구 열강들의 영토분할 점령     © 편집부

임오란과 제물포늑약

  고종은 세계사적 대세의 흐름에 따라서 의욕적으로 국제통상을 추진했으나 그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 첫 째 이유는 근대적 통상의 첫번째 상대국이 조선으로부터 부를 탈취하려는 야욕에 가득찬 일본이었고, 조선측에서 선린우호국으로 대하려고 성의를 보인 것과는 달리, 일본측은 틈만 보이면 조선으로부터의 일방적 이익만을 추구하려 했기 때문이다. 강화조약에 내포된 교활한 음모를 알지 못한 채 오직 이웃나라와의 신의 하나로 대하고자 했던 조선측은 그 후 수년간에 걸쳐서 막대한 국가적 손실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고, 고종을 중심으로 총력을 기울여서 조약개정을 추진하는 중에도 국가경제는 악화되어 갔다.

  특히 서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식량의 부족현상이 뚜렷해져 갔고, 그에 따라서 일반 물가도 앙등을 거듭하면서 민생고가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민생고는 뜻있는 재야선비들을 분격시켰고, 그와 함께 위정척사를 외치는 목소리도 민중의 불만과 함께 고조되어 갔다. 사태가 절박해짐에 따라서 고종은 일본측과의 조약개정을 더욱 서둘러서 식량과 금등 국부의 유출을 최대한 막으려고 애썼고, 그 결과 우선 미국과의 비교적 공정한 조약체결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년간에 걸친 민중생활의 악화는 미국과의 평등조약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쉽사리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민중생활의 궁핍화와 함께 국가재정도 빈약해져 가면서 공무원(관리)들에게 지급할 봉급도 제 때 주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부기구 개편의 최우선적인 대상이 된 구식군대의 하급군인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열악해져서 불만이 커져 갔다. 대부분의 하급군인들은 서울의 하층민중에서 충원된 일종의 직업군인이었는데, 그들은 근무하는 날 이외에는 다른 생계수단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강화조약 체결후인 서1877년에 정부의 시책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인 적이 있고, 그 후 서1882년 초에도 그와 비슷한 저항운동을 일으켰으나 무마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날로 열악해져 가는 근무조건으로 인하여 그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민중의 불만을 이용해서 고종을 폐위시키고 민씨척족 중심의 정권을 타도하려는 모의도 벌어졌다. 즉, 전직 승지인 안 기영과 권 승호가 유생 30여명과 함께 대원군의 서자 이 재선을 추대하여 척족권신들및 척족정권에 깊이 관여한 중신들을 살해하고 일제공사관을 습격하려다가 4214년(서1881) 1월 28일에 이풍래의 고발로 전원 체포당하고, 이 재선등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과 사건들로 인하여 국방강화와 더불어 고종의 신변위험을 막기 위한 궁성호위력의 강화도 시급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일찍이 운양호사건으로 구식무기체계의 한계와 결함을 심각하게 느낀 고종은, 서양식 신무기와 훈련으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에 따라서 그는 서1881년 4월에 화방이 추천한 일본군 소위 굴본(堀本禮造,호리모또 리에조)을 훈련교사로 채용하여 별기군(別技軍)을 조직하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훈련용으로 쓸 구식 양총도 일본으로부터 2천정 구입하는 등, 빈약한 국가재정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도내에서나마 군비를 강화하고자 했다. 구식군대로부터 신식군대로의 전면적인 전환은 물론 시급한 국가적 사업이기는 했으나, 빈약한 국가재정이 감당해 내기에는 벅찼던 것이다.

  그래도 기왕에 의욕적으로 추진한 별기군만큼은 적절한 수준의 보급과 대우를 해 줄 수 있었으나, 재정악화로 기본적인 보급이 딸리는 데다가, 하급군인들에게 봉급을 나누어 주는 선혜청의 말단 관리들의 부정이 심해서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쌓여 갔다. 특히 다른 생계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군인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만 하여 분노가 폭발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구식군인들은 그 모든 고난의 책임이 민씨척족 일부를 포함한 부패한 관리들과, 불평등조약으로 막대한 국부를 빼내어 가는 교활한 일본인들에게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교활을 극한 국제사기적 수법으로 조선의 경제와 정치를 좀먹어 간 일본인들의 수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강화늑약이후 매년 수백만석의 쌀을 헐값에 일본열도로 반출했다.

  둘째, 매년 수백만원(당시 화폐, 4329년 기준 수백내지 수천억원 이상)에 상당하는 금,은,보화등을 일본열도로 반출했다.

  셋째, 조선조정내에 매국적친일파들을 양성하여 조정대신들간에 대립갈등을 일으키고, 관세를 철폐시켜 조선정부의 수입이 되어야 할 수백만원의 세금을 수탈하고, 소위 '신사유람단'의 모든 경비와 일제공사관의 경비일체도 조선정부가 부담하게 함으로써 국고가 거덜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넷째, 그와 같은 악랄한 침탈에 의하여 민씨정권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고, 황준헌의 '결일연미(結日聯美)'책략을 조선조정에서 채택케 함으로써 항일감정이 고조되고 민씨정권에 대한 불신임도가 높아져서, 마침내 대원군의 세력이 다시 대두하도록 조장하였으므로, 4228년(서1895)에 을미왜란이 발생하게 되기까지에 이르는 정쟁의 요인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 가운데 4215년(서1882) 6월 5일에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의 군사들에 대해 배급쌀을 지급했다. 명치일본의 경제적 침탈등으로 인하여 국가재정이 곤핍한 정부에서는, 한 사람당 6말씩 급료로 지급하기로 한 쌀을 13개월만에 우선 1개월분씩만 지급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혜청 창고지기들의 농간으로 그나마도 배급량이 부족했으므로 분노한 무위영의 군사들은 쌀의 수령을 거부했고, 여러 포수들이 창고지기들을 구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선혜청당상(堂上)이었던 민 겸호가 군관들을 시켜서 구타사건과 관련된 포수들을 체포하여 극형에 처하려고 했는데, 그 사실을 안 군사들은 더욱 노해서 무위대장 이 경하를 방문하여 그간의 사연을 호소하였다. 

  이 경하대장은 곧 민 겸호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부하들을 석방해 줄 것과 쌀배급을 원만하게 실시해 줄 것을 부탁하는 한 편, 군사들로 하여금 민 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하였다. 사기가 오른 무위영의 군사들은 민 겸호의 집으로 가던 도중 선혜청 창고지기들을 만나게 되자 분노가 폭발하여 창고지기들을 혼내주려고 쫓아 갔고, 놀랜 창고지기들은 민 겸호의 집으로 도망쳐 들어 갔다. 군사들은 민 겸호를 찾았으나 민 겸호는 대궐에 들어 가고 없었으므로 집만 부셔 버리고는 대원군에게 몰려 가서 호소했고, 대원군은 그들을 위로하였다.

  사기백배한 군사들은 6월 9일에 무기를 탈취해서 포도청에 갇혀 있던 동료들을 구출하고 경기감영을 급습했고, 한 무리는 강화유수 민태호의 집을 습격했는데, 또 한 무리는 그간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시달리며 원한이 맺혔던 성난 민중과 합세하여, 서대문 밖에 있던 일제공사관을 습격해서 청사를 불지르고 일제공사 화방(花房)의 도당과 맞서 싸워서 7명을 죽였다. 화방의 도당 23명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인천으로 도망갔는데, 인천까지 쫓아 간 무위영의 군사들은 인천의 군사들과 합세해서 인천부아(府衙:관청)에 숨은 화방도당을 포위공격해서 다시 6명을 죽였다. 화방의 잔당은 다시 도망 가서 제물포에 이르러 영국측량함에 승선하여 황급하게 일본열도로 쫓겨 갔다.

  이후 왜별기군(倭別技軍)까지 합세한 병력은 왕십리와 이태원 방면에서 봉기한 민중과 함께 6월 10일에 영돈령부사 이 최응을 살해하고 창덕궁에 난입해서 '민중전을 잡으라'고 외치며 수색을 벌였다. 이에 민중전은 궁녀로 변장하여 간신히 궁궐을 빠져 나가 여주,장호원,충주등을 전전하며 목숨을 건졌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감을 우려한 고종은 난군의 지지를 받는 대원군에게 당분간 실권을 맡길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운현궁에 칩거하던 대원군에게 입궐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은 대원군과 무위대장 이 재황을 뒤따라 입궐한 난군은 민 겸호와 김 보현을 때려 죽이는 등 살기가 등등했다. 명에 의하여 입궐한 대원군은 고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일단 폭풍전야의 사태를 수습하는 데 큰 능력을 발휘했다. 대원군에 대한 군사들의 신뢰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씨척족의 가옥 40여채는 대부분 파괴당했으며, 고종의 친정정권에 중용되었던 김 홍집을 위시한 모든 대신과 관리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피신하거나 잠적했다. 대원군은 군란의 기회에 힘입어서 정권을 다시 쥐게는 되었으나, 대신들은 상황의 급변을 우려하여 대부분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며 관직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치 실무를 맡아 줄 담당자가 크게 부족하여 대원군은 매우 곤란을 겪게 되었으며, 몇 안되는 심복들과 친족들로서 많은 업무를 다 담당하려니 한 사람이 몇 개씩의 관직을 동시에 맡게 하는 등, 국정수행상에 커다란 난맥상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청국에 가 있던 영선사(領選使) 김 윤식은 군란을 빌미삼은 왜군의 대거 침략을 우려하여 청국에 원병을 청했는데, 이미 독자적으로도 그러한 명치일본측의 기미를 탐지하고 있던 청국측에서는 즉시 그 요청을 받아 들였다. 북양대신 이 홍장은 북양제독 정여창과 외교부장격인 마건충에게 병력 4,000여명과 군함등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하도록 했다. 이미 제물포쪽으로 상륙해 있던 왜군과의 마찰을 피해서 남양부 마산포에 상륙한 청군은 7월 13일에 대원군을 운현궁으로 예방하여 '군사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국태공께서 청군진영에 왕림해 주시기 바란다'고 전했고, 그 제의를 쾌히 응락한 대원군은 오후에 남대문밖에 있던 청국의 친영을 방문했다. 그러나 대원군과 몇 마디의 필담을 나눈 청국대표들은 졸지에 대원군을 납치하여 남양만을 통해서 천진으로 호송했다.

  청국의 의도는 왜족들처럼 음흉한 조선침략 저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으며, 대원군을 임오봉기의 배후로 잘못 판단한 데다가, 당시의 청국내외적 정세로 볼 때 일본과의 불필요한 정치군사적 마찰을 피하려는 저들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청국의 보정부(保定府)에 연금되었다가 수년 후에 환국할 수 있었지만, 다시는 자신의 세력을 만회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심한 박해속에서 파란만장한 말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쫓겨 갔던 민중전은 대궐로 되돌아 왔다. 당시 생이별을 당했던 민중전과 고종사이에서 목숨을 걸고 긴밀한 연락을 맡았던 충직한 이 용익은 중용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로써 한달 남짓했던 대원군의 재집정은 수포로 돌아 갔고, 군란관계자들은 물론 이태원과 왕십리에서 봉기했던 많은 사람들도 청군에 의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당했다.   

  이처럼 청국은 고종과 민중전등 집권세력을 비호하고 대원군을 납치해감으로써, 청국의 양무운동을 본받은 고종의 동도서기적인 개방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이 우발적인 사건을 빌미삼아서 결국 조선측과의 사이에 굴욕적인 제물포늑약을 강요했다. 돌발적인 군란으로 인하여 일본공사관이 방화되고, 공사관원들을 비롯한 일본인 다수가 살상당했기 때문에 전쟁위협을 들먹이는 일본측에 대해서, 조선측에서는 그들의 과다한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적절치 못했던 것이다.

  제물포늑약에 의하여 이제 왜족들은 도성 한가운데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남산중턱에서 궁궐을 건너다 보며 총뿌리를 들이대는 형국이 되었고, 양화진과 용산에 왜상인들의 거류지를 확보했고, 공사관원이라고 칭하며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는 왜인들이 조선팔도를 활보하게 되었고, 부산과 인천및 원산등 세 항구의 사방 백리까지의 지방에서 왜상인들이 멋대로 통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외에 쌀, 금?은, 인삼등 조선의 특산물들을 무한정 반출하는 횡포를 마음껏 자행하게끔 되었다.

  그와 함께 왜족중에서도 악질들인 무뢰배들이 대거 조선으로 건너 오면서 소위 '대륙낭인(大陸浪人)'이라는 패거리로 숱한 문젯점들을 야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는 일찍이 신미양요때 미군을 격퇴한 대원군이 전국 방방곡곡에 건립했던 척화비들을 일체 제거해 버리도록 강요함으로써 저들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왜인들의 과중한 침탈로 인하여 도탄에 빠져 들고 있던 민중의 반일감정은 더욱 거세어져 갔다.
 
  한편, 군란진압과 조선의 질서회복을 명분으로 조선문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 청국은, 조선이 여전히 청국의 종속국이라는 관념을 고수하면서 조선의 통치기구를 청국방식대로 고치도록 하고, 원 세개로 하여금 조선감국(監國;즉,조선의 시정을 감독하는 직위)의 역할을 맡도록 하는 등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청국의 조선에 대한 입장은 일제와는 판이한 것으로서, 아편전쟁과 태평천국난에 시달린 청국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자신들의 속방으로 간주하고 있던 조선에도 일으킴으로써, 조선 스스로의 능력을 배양하게 하여 왜,양의 침탈에 공동대처하려는 대국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청국은 조선의 정치제도는 물론 군비시설등에 대해서도 현대화를 도모하였으니, 상해에서 영국제기계들을 도입해서 삼청동 북창(北倉)에 기기(機器)제조공장을 설치하고 청국인 기술자 4명을 배치하여 각종 군사장비들의 제조에 관한 기술및 지식을 전수하였다. 그리하여 4216년(서1883) 10월에 이르러서는 인천과 상해간에 기선의 정기항로가 열리고 4217년 3월부터는 두 나라사이에 우정국(郵政局)이 개설되어 조선과 청국의 유대관계가 크게 강화되고 발전적인 개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양새를 갖출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서 청국측에서는 조선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으로 양국간의 경제교류협정인 '조청상민수륙통상장정;朝淸商民水陸通商章程(이하 '장정')'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다. 그 장정에 의하여 청국상인은 조선의 지방관이 발행하는 호조(護照;통행허가증)를 발급받으면 조선의 내지까지도 드나들며 통상할 수 있는 권리를 다른 열강보다 한 발 앞서 얻게 되었다. 따라서 청국은 조선에서의 상업적 우위를 선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국상인들의 대거 진출은 조선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는 등 경제적문제를 야기했고,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국 의식은 청국병사들이 조선인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반청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한 일부 청국인들의 기고만장한 태도는 군란당시 왕십리와 이태원에서 청군이 취했던 과격한 진압방식에 의한 피해자들의 원망과 함께 반청기운을 고조시키는 데 커다란 상승작용을 하게 되었다.

  또한 청국의 그러한 독점적 권한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조선이 1년후에 영국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당시 자타가 공인하던 세계최강국인 영국측은 일본과 청국이 얻어낸 권리를 같이 인정해 주기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모든 대외조약 체결때도 열강 각국은 모두 같은 권리를 주장하여 얻어내게 되었으므로, 조선천지는 바야흐로 세계 자본주의의 한 부분으로 급속히 편입되어 가게 되었다.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자본주의 열강의 국제무역 내막을 경제적 침탈을 통해서 뼈저리게 느끼게 된 조선인들은, 어떠한 외세의 간섭도 받지 않는 진정한 독립을 더욱 열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극도로 열악한 내외적 환경속에서 국제적 생존경쟁에 나선 조선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우선 국제간의 활발한 교류에 대비해서 관세업무에 능통한 관리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미 체결된 조미통상조약으로 관세징수가 급박하게 되었는 데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그러한 국제간 통상을 맡을 수 있는 전문가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고종의 고민은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고종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이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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