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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북경과 통주는 '연속적 대지진으로 폐허', 현재의 북경은?

1730년 즈음 베링해는 급격하게 침식되어 십수배로 벌어져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4/25 [11:33]

청의 북경과 통주는 '연속적 대지진으로 폐허', 현재의 북경은?

1730년 즈음 베링해는 급격하게 침식되어 십수배로 벌어져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입력 : 2015/04/25 [11:33]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타임즈-김종문] 1700년 이전에 제작됐다는 영문고지도들의 대부분은 MONGAL(몽골, 蒙古)을 베링해협 서쪽인근 현대의 Sakha Republic(사하공화국)에 일관되게 명시 했으며 16세기 영문고지도들의 대다수에 미대륙은 ASIA(아시아)의 韓半島(한반도)였으나 현재 미대륙은 아시아와 분리되어 AMERICA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왜 일어난 것인지를 알려면 과거의 지형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처럼 변한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16세기 Orontius Finnaeus는 당시에 정확한 지도를 제작했다는 평가를 받았었으나 현재는 지형과 중요지명들의 위치가 크게 다르다는 이유로 신뢰할 수 없으며 미스테리라는 폄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Orontius지도와 유사하며 더 정확하게 그려진 지도가 후대에 제작된 것이 있습니다. 

▲ A: 1531 Orontius Finnaeus, B: 1795 Pinelli(1559 Hajji Ahmed), C: 1757년 Buache Philippe  1: Hudson Bay(허드슨만), 2: Florida(플로리다) 3: California(캘리포니아) 4: 遼東半島(요동반도)  Pinelli의 지도는 Orontius의 1534년 지도를 기반으로 1559년경 Tunis(튀니스)의 Hajji Ahmed(하지 아흐메드)에 의해 제작된 지도목판으로 1795년 Venice의 Pinelli가 인쇄했다고 한다. Hajji Ahmed지도의 외형은 1534 Orontius 지도와 유사하나 지형은 대체로 18세기 지도들과 더 비슷하다, 세 지도의 4: Bering Sea(베링해)지형을 보면 1559 Hajji Ahmed 의 지형은 Orontius지형이 Buache지형으로 변하는 중간단계로 보인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현재의 지형과 더욱 유사하게 그려진 1559 Hajji Ahmed지도를 통해 Orontius지도의 지형이 실제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으며 Orontius지도와 동일하게 베링해와 북태평양 지역을 육지로 그렸으며 세 지도를 비교해 보면 1559 Hajji Ahmed지도의 육지였던 지역 중 매우 넓은 지역이 1757년 Buache Philippe 지도에서는 바다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으며 1757년 Buache 지도의 4: 요동반도도 현재는 바다가 된 것을 알 수 있으며 16세기 이후 가장 많은 육지의 침식이 있었던 지역은 4: 요동반도가 있었던 북태평양북부과 베링해 지역이며 다른 지역들은 대부분 요동반도의 침식으로 인한 海水面上昇(해수면상승)에 인한 침수일 것입니다.

▲ 노란색: 16세기 Orontius Finnaeus지도, 녹색: 1757년 Buache Philippe지도  1: MONGAL(몽골, 蒙古), 2: Great Wall(만리장성, 萬里長城), 3: 大遼水(대요수), 4: 遼東(요동), 5: 北京(북경), 6: 通州(통주), 7: 通州江(통주강), 8: Bering Sea(베링해), 9: 북태평양 북부,  10: 北海(북해)  16세기와 18세기와 현대의 지형은 완전히 다르며 1:몽골의 동남쪽에 있었던 5: 北京(북경)과 6:通州(통주)는 7: 通州江(통주강)을 통해 내려오는 10: 북해의 강한 물살에 침식되었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이러한 대륙의 침식과 분리는 通州江(통주강)이 IESSO Canal(요서운하, 遼西運河)가 되고 ISEEO Strait(요서해협, 遼西海峽)이 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어떤 이유인가를 알려면 요서운하 전에 베링해협지역에 있었던 通州江(통주강)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淸國(청나라)가 通州江(통주강)을 天下(천하)의 航路(항로)로 만들었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 통주강(通州江)은 일명 노하(潞河)라고 하고, 속칭 외하(外河)라고도 한다. 수원(水源)이 멀고 흐름이 빠른데 모래 웅덩이가 많다. 여름이나 가을만 되면 폭우가 내려 터지기가 가장 쉽고 또 조금만 가물어도 얕아져서 배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냈다. 이것이 곧 천하의 항로(航路)이다. 통주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通州江一名潞河。俗又呼爲外河。源遠流駛。率多沙溜。每夏秋暴雨。最易衝決。少遇天旱。舟便淺澁故設淺五十餘處卽天下通漕之處也。通州之稱。亦以是云。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하
... 조그만 개천으로서 하(河)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역시 곳곳에 있는데, 옛날에 이른바 북쪽 지방에 흐르는 물의 총칭이라 한 것이 사실이다. (통주의)백하와 (심양의)요하가 가장 커서 거의 우리나라 임진강과 같고, 그 나머지 10개 물은 저탄(猪灘)만 하였다.
...而小灘之以河名者。亦處處有之。古所謂北方流水之總名者信矣。白河,遼河最大幾如我國臨津。其餘十水。只如猪灘。

通州江(통주강)은 북해인근의 몽골동쪽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으로 강의 근원이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로 멀었으므로 북해와 강이 닿았을 것이며 강바닥이 막힌 곳이 많아서 수량부족으로 배가 다니기 어려웠고 인조실록 22년(1644) 5월 23일 3번째기사를 보면 배 없이 건널 정도였는데 庚子燕行雜識(경자연행잡지, 1720)의 통주강은 조선에서 대강으로 불리는 臨津江(임진강)처럼 커졌습니다. 이것은 淸國(청나라)에서 통주강의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내어 북해의 바닷물이 원활하게 흐르게 된 것으로 강바닥을 팠다고 물이 생기지는 않으며 북해의 바닷물이 통주강으로 흘러내려 왔기에 임진강처럼 거대한 강이 빠른 속도로 흐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臨津江(임진강)처럼 거대한 강이 엄청난 수량으로 빠르게 흐르면서 몽골의 사막은 강하게 침식되었을 것이고, 지맥이 손상되었는지 淸國(청나라)의 北京(북경)은 17세기 후반부터 대지진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 1757 Buache Philippe  1: Bering Sea(베링해)를 보면 18세기 중반에도 매우 커다란 반도가 남아 있었으며 원안에 지역을 보면 Bering Strait(베링해협)이 매우 좁은 것을 알 수 있으며 아시아와 북미는 현재도 82km(공식적으로 85km)로 가깝지만 1780년경 까지도 거의 십수km로 매우 가까웠으나 1780년경 급격하게 침식되어 遼東半島(요동반도)는 바다가 되었고 베링해협은 현재처럼 벌어졌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17세기 후반부터 通州(통주)와 北京(북경)에는 대지진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숙종 8권, 5년(1679 기미 / 청 강희(康熙) 18년) 11월 28일(기미) 2번째기사.
중략…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중국의 사정은 사신(使臣)이 들은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마는,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고 인민이 깔려 죽은 일은 그가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깔려서 죽은 사람이 5만 7천에 이르며, 아직 조사해 내지 못한 사람도 얼마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上有咳水剌厭進之候, 藥房入診。 許積曰: “中原事情, 使臣所聞, 雖未知信否, 而至於因地震, 室屋頹圮 人民壓死之狀, 乃其目見也。 壓死人至於五萬七千, 而未及査出者, 又不知其幾云。

숙종 8권, 5년(1679 기미 / 청 강희(康熙) 18년) 11월 29일(경신) 3번째기사.
중략... “통주(通州)·계주(薊등은 완전한집이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통주는 물화(物貨)가 집결되고 인물이 매우 많은 곳인데도 지금은 성첩(城堞)이나 성문(城門)이 하나도 완전한 곳이 없고 좌우의 줄행랑도 모두 무너져서, 허물어진 성벽은 보기에도 참담하였습니다. 북경(北京)은 통주에 비해 조금 성하기는 하나 성문과 성가퀴 및 성 안팎의 인가(人家)가 많이 붕괴되어 있고, 궁전의 대문 한 곳 및 황극전(皇極殿)의 층루, 그리고 봉선전(奉先殿)도 무너졌으며, 옥하관(玉河館) 담장과 여러 아문(衙門)도 무너진 데가 많았습니다.
... “通州、蘇州等處, 無一完舍。 通州物貨所聚, 人物極盛, 而今則城堞城門, 無一完處, 左右長廊皆頹塌 崩城破壁, 見之慘目。 北京則比通州稍完, 而城門女墻及城內外人家, 多崩頹, 殿門一處及皇極殿層樓及奉先殿亦頹。 玉河館墻垣及諸衙門, 亦多頹毁, ...

1679년 5만 7천명 이상이 대지진으로 사망하였으며 통주(通州)·계주(薊州)는 거의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북경 자금성의 봉선전(奉先殿)과 여러 궁궐들도 무너졌습니다. 이후 淸國(청나라)에는 대지진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으며 通州(통주)가 먼저 폐허가 되고 세월이 흐르며 北京(북경)까지 폐허가 되어갑니다.

숙종 13권, 8년(1682 임술 / 청 강희(康熙) 21년) 1월 24일(임신) 1번째기사.

사은정사(謝恩正使) 창성군(昌城君) 이필(李佖副使) 윤계(尹堦書狀官) 이삼석(李三錫)이 청국(淸國)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그곳의 소식을 물으니, 윤계가 말하기를,
그 나라에는 변이(變異)가 많은데, 지진(地震)이 특별히 심하여 성곽(城郭)·궁실(宮室)이 무너지기까지 하였고, 다섯 용(龍)이 바다 가운데에서 싸웠습니다.
壬申/謝恩正使昌城君佖、副使尹堦、書狀官李三錫歸自淸國。 上引見, 問彼中消息, 堦曰: “其國多變異, 地震特甚, 城郭宮室至於傾圮 五龍鬪於海中

1682년 풍운(風雲)의 조화를 다스리는 신적 존재인 용(龍)이 한마리도 아니고 다섯마리가 싸웠다는 것은 바닷가에서 막을 수 없는 대재앙이 일어나고 있다는 표현이겠습니다. 

1730년 北京大地震(북경대지진)으로 북경은 폐허가 되었다.

영조 28권, 6년(1730 경술 / 청 옹정(雍正) 8년) 11월 3일(무진) 2번째기사.
중략...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이번 그곳의 지진(地震)은 옛날에 없었던 것으로, 성안의 인가(人家)가 무너진 것이 거의 4만에 이르렀다 합니다. 우리 나라는 저들 나라와 분야(分野)가 같기 때문에 재이(災異)도 매양 서로 비슷하게 되니, 이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만승(萬乘)의 임금으로서 지진을 피하여 배를 띄워 막을 치고 거처한다 하니, 거조(擧措)가 해괴하다 하겠다. 방금 그곳의 재이(災異)를 말하고 있으나, 어제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를 보니, 이것도 또한 재이이다...

... 洪致中曰: “今番彼地地震, 前古所無, 城內人家陷沒, 幾至四萬。 我國與彼國, 分野同, 故災異亦每相似, 此可慮矣。

중략... ” 上曰: “以萬乘之主, 避地震設幕泛舟而居處云, 擧措可謂駭異矣。 方說彼中災異, 而昨見金有慶之疏, 此亦災異矣。...

영조 8권, 6년(1730 경술 / 청 옹정(雍正) 8년) 11월 17일(임오) 2번째기사.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황성(皇城) 바깥도 또한 그러했다 하더냐?”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성 바깥도 또한 그러했으며, 원명(圓明)·창춘(敞春) 등의 궁궐도 수없이 무너지고 또 관동(關東)에는 큰 비가 내려 수천 리가 잠겼다 합니다.”
上曰: “皇城外亦然云耶?” 羽良曰: “城外亦然, 圓明、敝推船, 無數頹壓, 且關東大雨, 陷沒數千里

1730년경 淸國(청나라) 북경은 이전에 있었던 대지진들을 뛰어넘는 강력한 대지진이 일어나서 4만의 인가가 무너지고 원명(圓明)·창춘(敞春) 등의 궁궐도 수없이 무너지고 關東(관동)에 수천리가 물에 잠겼으며 옹정제(雍正帝, 강희(康熙))는 지진을 피하여 호수에서 배를 타고 생활을 했다고 하며 이후에도 대지진은 계속되었습니다.

영조 29권, 7년(1731 신해 / 청 옹정(雍正) 9년) 4월 1일(계사) 3번째기사.

“20일 정오에 갑자기 큰 풍우(風雨)가 닥치는 듯 앉아 있는 의자가 흔들리므로 급히 나와 면했습니다. 그날 지진으로 사망한 자가 2만여 명이라 하였고, 상명(常明)의 말을 듣건대 호황(胡皇)은 배를 타고 장막에 거처하여 붕압(崩壓)을 피했으며, 또 태화전(太和殿)은 바로 명(明)나라 때 건물로서 계석(階石)이 새로 쌓은 듯 말끔했는데, 역시 모두 무너졌다고 하였습니다.”...

“二十日亭午, 忽然如大風雨, 掀動坐椅, 急出以免。 而其日以地震死者, 爲二萬餘人, 聞常明言, 胡皇乘船處幕, 以避崩壓, 且太和殿, 卽明時所建, 而階石之如新築者, 亦皆頹圯。”

1731년 北京(북경) 紫禁城(자금성)에 太和殿(태화전)은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북경에는 멀쩡한 태화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태화전이라는 이름의 궁궐이지만 명나라나 청나라의 태화전과는 무관한 태화전일 것입니다.  
 
▲ 1: 奉先殿(봉선전), 2: 太和殿(태화전)  北京(북경)의 紫禁城(자금성)은 1987년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기사들을 보면 奉先殿(봉선전)은 1679년 지진으로 무너졌고 太和殿(태화전)은 1730년 北京大地震(북경대지진) 즈음에 무너졌다. 지금의 태화전과 봉선전이 청나라의 궁궐들이라면 분명히 다시 지은 것이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18세기초 북경대지진들이 일어나던 시기 영문고지도들에는 遼東半島(요동반도)의 지형에 급격한 변화가 기록되어 있으며 아래 1716년, 1737년 지도들을 보면 북경대지진이 있었던 1730년 즈음에 베링해는 급격하게 침식되어 십수배로 벌어졌습니다.
 

▲ 1: 1716 Johann Baptist Homann,  2: 1737  Jacques-Nicolas  18세기초 Bering Sea(베링해)는 대부분 지역이 육지였으며 수로도 좁았으나 북경대지진(1730)이 있었던 시기 원안의 베링해는 급격히 침식되어 십수배로 벌어졌다. 1740년경에도 베링해지형을 1716년 지도처럼 좁게 표시한 지도가 있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3: 1747 Jacques-Nicolas, 4: 1758 Gerhard Friedrich Muller, 5: 1764 Bellin, Jacques Nicolas, 6: 1775 Robert Sayer,1780 Dezauche, 8: 1784 William Faden 1780년경 遼東半島(요동반도)는 Bering Strait(베링해협)에 의해 급격하게 침식되어 사라졌고 Bering Sea(베링해)는 몇 배로 커졌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1780년경 Bering Sea(베링해)지역은 Bering Strait(베링해협)의 바닷물에 침식되어 완전히 사라지고 해안선은 급격히 바뀝니다.

1730년 北京大地震(북경대지진) 때 무너진 인가가 거의 4만으로 도시에 성한 집과 궁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문제는 그러한 대지진들이 계속되었고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었고 淸國(청나라)는 결국 폐허가 된 북경을 포기하고 북경은 이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淸國(청나라)의 滿洲封禁(만주봉금)은 大地震(대지진)으로 遼東(요동)과 北京(북경)이 폐허가 된 것을 인민들이 알 지 못하도록 하기위한 苦肉之策(고육지책)이었을 것입니다.

MONGAL(몽골, 蒙古)의 남쪽에 있었던 遼東半島(요동반도)는 Bering Strait(베링해협)의 강한 물살에 모래가 쓸리고 지반이 뜯기어 태평양 바다 속으로 사라졌으며 ASIA(아시아)의 韓半島(한반도)였던 미대륙은 ASIA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수십키로 떨어지게 되었으며 거대한 요동반도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후에는 驚天動地(경천동지)할 海水面上昇(해수면상승)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桑田碧海(상전벽해)...
 
참조로, 북경문제에 대해 우리는 식민치하에서 미국의 지원과 대통령제를 따른 상해임시정부만 중심적으로 배웠고 그래서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조선의 복권과 회복하려는 북경임시정부가 북경에 있었고, 가장 치열하게 조선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를 지향하는 모든 독립군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현재의 북경과 식민치하 북경임시정부를 연구해야 합니다. 


영문고지도들을 공부하다 우연히 고지도들의 중요지명들이 이동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 현재의 중요지명들의 위치가 세계사조작을 위하여 이동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2년여간 지명이동사례들을 탐구하여 정리하였습니다. 2014년 7월부터 고지도조작의 사례들을 모은 ‘고지도의 진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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