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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70)

광란속의 프랑스혁명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4/09/03 [09:56]

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70)

광란속의 프랑스혁명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4/09/03 [09:56]
 [민족/통일/역사=플러스 코리아타임즈-안재세] * 서세동점 이후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 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 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 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自蔑史觀)을 떨쳐버리고, 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더 많은 연구와 보충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골격 정비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 [좌]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우]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로 상징되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타도한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7월28일’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4. 프랑스혁명, 광란의 전개과정

  프랑스혁명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소위 계몽사상은 초등교육 보급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광범위하게 퍼져갔으나, 계몽사상 자체는 크게 과격한 사상이 아니었다. '법의 정신'을 발표하여 계몽사상의 선두에 선 몽테스키외는 탁월한 사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주제도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단지 권력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한 철저한 삼권분립만을 강조했고, 볼테르도 군주를 계몽시켜서 올바른 개혁에 이르게 할 수 있기를 주장했다. 이상적 군주를 통한 철인정치(哲人政治)의 이념은 짧은 유럽지방의 역사에서도 결코 낯선 것이 아니며, 플라톤의 주장과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룻쏘에 의해 제기된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이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바탕을 둔 절대왕권을 부정하기는 했으나, 그가 이상적으로 삼은 사회도 소규모 토지사용자들이 상호계약에 의해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였을 뿐이며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몽테스키외의 탁견대로 군주제나 공화제 같은 정치체제의 문제보다도 부의 집중이나 사치같은 악덕을 제거하는 것이 이상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는 것은, 유럽지방을 비롯해서 혼란한 근대이후의 세계가 증명해 오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계몽사상의 핵심은 접어두고, 개인의 물질적 '자유'추구라는 측면만은 부르조아들의 생리와 맞아 떨어졌다. 물질적 '평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한 부르조아들에게는 한가지 공식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물질적)자유와 (신분적)평등을 결합한 공존불가능한 언어의 장난에 불과한 '자유·평등'이라는 구호였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지고한 인간 존재의 목표가 엉뚱한 '돈벌이의 자유'로 둔갑한 것은, 문명한 인류를 위해서는 최대의 비극이 그 막을 올렸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소유관계에 있어서의 빈부차를 없애야 한다는 목적에서의 평등이 아닌 단순한 신분상의 평등추구는, 그 논리적 귀결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경제적 계급'이라는 불평등을 낳고 심화시킴으로써, 총체적으로는 인류의 야만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한가지 요소를 덧붙인 꼴이 되고 말았다.

  서기 1783년에 프랑스의 재무총감으로 임명된 깔론느(Calonne)가 심각한 재정상태를 솔직하게 루이 16세에게 보고하자, 루이 16세는 깔론느의 주장대로 국정 전반에 걸친 대개혁을 추진하기로 했다. 개혁안 중에는 왕국의 모든 혼란과 낭비와 모순을 제거하는 방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이 16세의 결연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고등법원과 명사회의(名士會議)에서는 오히려 개혁안에 반대하고 깔론느를 파면시키려 하는 반동이 일어났다. 이미 절대왕정의 왕권이란 존재하고 있지도 않음이 이로써 드러나게 되었다. 루이 16세와 깔론느의 개혁 방침은 '특권 신분에 대한 면세특권폐지'를 위주로 한 것으로서, 일반 서민들에게 주로 떠맡겨져 있다시피 한 조세부담을 경제력이 있는 귀족들이나 부르조아들에게도 실질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하층민들의 부담을 벌어 주려던 것이었다. 그 개혁 방침으로 보건대 루이 16세는 유럽지방에서 그 누구보다도 앞서 가는 계몽군주의 하나였음이 명백했다.

  그처럼 '진보적'인 루이 16세의 방침을 묵살한 자들은 다름 아니라 돈을 거머쥐고 있던 부르조아계층 자본가들과, 신흥부르조아화한 타락한 귀족들과, 부정·부패의 온상인 주제에 국민의 대표라고 허풍치고 있던 고등법원 등이었다. 고등법원과 명사회의에 소속된 귀족들은 엉뚱하게도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하여 귀족들의 봉건적 권리를 부활시키려 했을 뿐 전체 국민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었다. 당시에 왕이 제시한 개혁안의 성실성에 대해서 부르조아들도 신뢰를 보내고 있었던 사실과 비교해 볼 때, 부르조아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이해하기 힘든 일면이 있었다.

  애써 마련한 개혁안이 실패로 돌아가자 루이 16세는 보다 타협적인 방법으로라도 재정 적자만은 줄여 보려 했으나, 고등법원은 그 정책마저 반대하고 나섰다. 그에 실망한 루이 16세는 아무 쓸모도 없는 고등법원을 폐지하는 대신에 개혁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국왕전권재판소를 신설하려고 했다. 반역자 집단이나 다름없는 고등법원은 이에 항거한답시고 파업·무질서·폭동 등을 선동했는데, 이에 선동된 무지한 대중이 큰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심지어는 군대마저 그에 가담하기도 하는 등 전반적인 혼란상태가 야기되고 말았다. 그러한 사태진전은 루이 16세의 개혁정책에 의해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게 된 옹졸하고 욕심많고 어리석은 귀족들이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혼란상태가 계속되자 마침내 부르조아들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속물다운 근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어 이들과 합류하고 나섰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루이 16세는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모든 귀족들의 주장을 따르기로 하였으므로 일단 프랑스왕국은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프랑스왕정에 대한 반역행위, 즉 프랑스혁명은, 기묘하게도 그 누구보다도 충성을 다해 왕정을 지켜내어야 할 귀족들에 의하여 그 불길한 봉화가 타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반왕(反王)반란에 귀족들과 합류했던 것으로 보이던 부르조아 개혁가들은 사실은 귀족들의 봉건권력까지 다 태워 없애려고 했고, 자신들에게만 매우 유리한 금권정치(金權政治)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었으며 역시 고대 그리이스에서 실시된 바 있던 참주정치의 부활을 뜻하는 것에 불과했다. 빠뜨리오뜨(Patriotes)라고 불리운 저들 부르조아 개혁가들은 그 명칭이 가리키는 대로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이 진실한 애국자였다면 우선 루이 16세의 대개혁운동에 기꺼이 동참하고 볼 일이었을 것이었다. 그들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나 미국식 민주공화제를 꿈꾸고 있었으므로 곧 귀족들과도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다. 삼부회소집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복잡한 권력투쟁 과정을 통해서 시종 관용과 양보로 일관한 루이 16세는 심지어,

 "모든 백성이 자기의 소원과 요구를 짐에게 상신할 것을 윤허한다."

라고 까지 하면서 민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민중은 이러한 왕에게 오히려 큰 호의를 느꼈으며 왕을 민중의 편으로 확신했다.

  '국민의 대표'로서 삼부회에 소집된 제3신분 대표들은 약 절반이 법률가였고, 실제로 민중의 대다수인 노동자·농민의 대표는 거의 없었으므로, 그들이 진정한 민중의 의지를 대표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자신들의 부르조아적 이해관계에 보다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모든 어거지를 다 동원한 파행적인 방법으로 제3신분 대표들은 소위 '국민의회'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고, 국민의회는 대단히 강경하게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려고 시도했다. 우여곡절 끝에 루이 16세는 다시 제3신분의 의견을 대폭 수용하는 관용을 보여서, 서기 1789년 6월 27일에 제1신분(고위성직자), 제2신분(귀족)들을 모두 제3신분에 합류하도록 했다. 제3신분 대표들의 편집광적인 강경한 주장에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빠리 시내에서는 온갖 악성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어 가는 가운데 식품값이 폭등했고, 마침내 증권거래소가 문을 닫았다. 과격한 선동가들은 무정부 상태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군중을 선동했고, 마침내 폭도화된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하고 정부기관과 정부관리들을 습격했다. 당시 빠리에서 벌어진 광란을 목격한 한 관찰자는,

 "온갖 종류의 처형! 사지를 찢어 죽이고, 수레로 찢어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고, 목 매달아 죽이고, 갖가지 고문으로 죽이는 등 도처에서 행해지는 이러한 사형은 지난날 (지배자들이) 우리에게 만들어 준 아주 나쁜 습관이다. 지배자들은 우리를 야만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들 자신도 결국 야만이었으니까.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뿌린 씨를 거두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거둘 것이다."

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신약성서의 황금률(黃金律)에 굳은 신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이 관찰자는 그러나 크리스트의 진정한 뜻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으로 집약된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명실상부한 '야만인'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지방의 문명중심지임을 자타가 공인하던 빠리에서 문명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대학살 광란이 폭발하여 프랑스 전국으로 퍼져갔다.

  빠리의 폭동사태에 대처하는 루이 16세의 자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연할 뿐이었다. 그는 빠리를 포위했던 군대를 철수시키고 직접 빠리를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빠리의 폭도들이 임명한 새 시장과 국민방위대사령관 라파이예트를 그대로 승인하였으며, 새 시장이 건네 준 혁명의 상징인 삼색휘장을 순순히 받아서 자신의 모자에 꽂음으로써, 스스로 반역적인 부르조아들의 혁명을 인정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전 유럽지방의 부르조아들은 바야흐로 자기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알고 환희에 젖었다.

  프랑스 전 지역에는 재빨리 부르조아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각종 위원회들과 국민방위대 등이 잇달아 조직되었다. 부르조아들은 민중을 선동하여 귀족·영주 등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을 자행하였고 전국은 공포의 도가니로 화해 갔다. 귀족 영주와 부르조아 영주들에게 똑같이 착취당하던 농민들의 폭동이 이윽고 귀족이 아닌 부르조아 자신들에게도 공격의 초점이 맞추어지기 시작하자, 부르조아들은 이번에는 각종 탄압조직을 총동원하여 농민들의 폭동을 진압하는데 나서는 반동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로써 소위 '혁명'의 본질은 명확해졌다. 이 모든 광란은 새로운 '자본귀족'이 되기로 마음먹은 부르조아들의 무한정한 축재본능과 명예욕의 발로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진정한 자유·평등·박애를 위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오직 돈벌이에 맛들이고, 명예욕에 신들리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에 충실하려 했던 이기주의적인 신흥 부르조아들의 광란이었다. 물론 이기주의라는 치사스러워 보이는 용어 대신 '개인주의'라는 듣기 좋아 보이는 용어로 채색에 채색을 거듭해 갔지만, 그것은 분명히 종교적인 명분에 의해서나마 억제되고 있던 탐욕과 이기적 본능들이 형식밖에 남아있지 않던 억압의 틀을 박차고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오는 또 한 번의 르네쌍스적 광란이었던 것이다.

  이기주의·탐욕·광란 등의 듣기 거북한 용어는 곧 개인주의·이성·혁명 등 향기로운 용어로 돌변해 갔는데, 그와 같이 혼돈에 빠진 용어들은 그 용어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고상한 이념'으로 받아 들여져서 유럽지방을 혁명의 격정으로 휩쓸어 갔다. 마치 혁명이라는 명분하에서라면 어떠한 패륜이나 반역이라도 얼마든지 미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르조아들은 민중에게 타협과 배신을 거듭해 가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를 굳건히 쌓아 갔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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