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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와 열국시대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 서기전 12세기 요서에 위치한 단군조선 거수국이였다

최태영 박사 | 기사입력 2010/09/02 [22:00]

올바른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와 열국시대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 서기전 12세기 요서에 위치한 단군조선 거수국이였다

최태영 박사 | 입력 : 2010/09/02 [22:00]
윤내현 단국대 사학과 교수(사진)의 ≪고조선 연구≫라는 책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문헌이나 고고학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한, 철저한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이 책자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 시대의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만든 앞선 시대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잘알고 있는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우리 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수적입니다.

지금부터는 윤내현 교수와 '단군조선'에 대해 학설을 같이하는 부분으로, 1990년 《한국상고사》를 낸 이후로 1998년 현재 맥을 같이 하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라고 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가야ㆍ백제·신라 등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를 말합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 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훨씬전인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요서지역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에서는 제후국이라 부름)이었고, 그 위치는 후대의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에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습니다.

이 두 고구려는 그들의 존재시기와 지리적 위치는 달랐으면서도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서기전 12세기는 단군조선 중기이고, 서기전 37년은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이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옛 문헌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周)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에는 서주(西周)가 성주(成周, 지금의 낙양(洛陽))에서 개최한 성주대회에 고구려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회에는 서주가 건국된 후 제(齊)에 봉해졌던 태공 망 (望)도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망은 주족(周族)이 상(商), 은(殷))나라를 칠 때에 선봉장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던 인물입니다'

-망(望)이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서주초인 서기전 12∼11세기 경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의 중심지역은 대체로 한민족의 아이콘인 온돌.청동검.고인돌이 분포된 지역이다



 
단군조선은 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고죽(孤竹)·예(濊) ·맥(貊)·추(追)·진번(眞番)·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 玄 )·숙신(肅愼)·청구(靑丘)·양이(良夷)·양주(楊州)·발( 發)·유(兪)·옥저(沃沮)·기자조선(箕子朝鮮)·진(辰)·비류( 沸流)·행인(荇人)·해두(海頭)·개마(蓋馬)·구다(句茶)·조 나(藻那)·주나(朱那)·한(韓, 삼한(三韓)) 등의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부여·고구려·고죽·예·맥·추·진번·낙랑·임둔·현도·숙신·청구·양이·양주·발·유·옥저·기자조선 등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비류·행인·해두·개마·구다·조나·주나·한 등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겠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과 관련을 갖지 못한 거수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단군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로부터 북쪽은 어르구나하(額爾古納河), 동북쪽은 지금의 흑룡강을 국경으로하여, 즉 한반도와 내몽골 자치구 동부와 재중동포들이 살고 있는 동북3성(흑룡강성·길림성·요령성)을 비롯한 만주 전지역을 차지하고, 때로는 재러동포들이 살고 있는 연해주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국(서기전 16세기부터 단군조선말까지 대체로 이러한 강역이 유지됨)이었습니다. 그 리고 '제주도'도 단군조선의 영토였습니다.
 
단군조선은 2300년간 실재했던 동북아 최강국가였으며, 중국의 최초국가인 하(夏)나라보다 1백여년 앞선 나라였습니다.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한 단군조선의 존속 기간에 중국에서는 하(夏)·상(商, 은(殷))·서주(西周)·춘 추(春秋)·전국(戰國)·진제국(秦帝國)을 거쳐 서한제국(西漢帝國)이라는 왕조와 시대의 변화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단군조선 말기(서기전 3세기 이후)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彌生)문화가 있었습니다.

단군조선은 중국 전국(戰國)시대 연(燕)나라(서기전 323∼222) 와의 전쟁에서 일시침공을 받았으나 그것을 격퇴하고, 오히려 연나라의 동부의 땅을 빼앗아 침략에 대한 응징을 하였고, 서한제국은 단군조선과의 국경을 지키지 못해 뒤로 물린 바 있 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군조선의 강한 국력(군사력)을 알게 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국력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단군'은 각 지역의 거수(渠帥)들만을 통솔하고, 각 거수국(渠帥國)의 주민들은 거수들에게 위임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거수들은 '단군'에게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 면서 단군을 그들의 공주(共主)로 받들었습니다. 해모수는 우리말의 해머슴아가 한자화된 것으로 '단군'에 대한 다른 칭호였습니다.

단군조선인들은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체제와 경제 상황속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인, 지금의 중국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하(河) 동부유역에는 일찍이 서기전 12세기경에 기자 일족 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기전 195년에 위만(衛滿)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 부터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서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게 되었고, 이런 와중에 요서지역에 있었던 거수국들의 지배층과 주민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곳에 정착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요서지역에서는 또 한번의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였는데 중국의 서한(西漢) 무제는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서지역 을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켜 그곳에 {낙랑(樂浪)·임둔 ·진번·현도(玄 )} 등 4개의 군(郡)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단군조선의 서부영토였던 지금의 요서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아직까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일부 단군조선인 들은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두번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지금의 요하 (遼河)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뒤 단군조선이 통치능력을 잃게 되자 그들은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동부여·고구려(지금의 요동과 평안북도 지역)·읍루(연해주 지역)·동옥저(함경도 지역)·최씨낙랑(평안남도 지역)·동예 (강원도 지역)·대방(황해도 지역)·한(삼한; - 지금의 경기도 ·충청남북도·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 등이 그런 나라들입니다.이렇게 해서 열국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부여(扶餘)는 원래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북부유역에 있었습니다. 난하 동부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자, 다소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한(西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자, 동으로 이동해 지금의 중국 길림성 북부에 도읍하고 내몽골자치구 동부와 흑룡강성 전부를 영토로하여 이를 부여 또는 '동부여'라 하였습니다.어떤 사람들은 이(동부여)를 북부여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단군조선 거수국였던 북부여가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입니다.

이 시기에 지금의 요하 서쪽과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동일한 명칭이 병존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서한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대부분 단군조선에서 사용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고구려현, 옥저 등과 후에 낙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단군조선 인들이 세운 최씨낙랑, 고구려, 동옥저, 대방 등의 나라가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를 혼동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던 이러한 국명 들을 중국의 군현 명칭으로 해석해 중국의 군현이 만주와 한반도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예컨데 요서지역에는 고구려현이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고구려국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곳과 새로 나라를 세운 곳에서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즉 서기전 37년에 요동에 세워진 고구려국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입니다. 이 나라는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과 그 집단에 의해서 건국되었는데 이들은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추모왕(주몽)을 포함한 건국 주도세력이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옛 고구려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군조선은 후기에 단군의 후손을 각 지역의 거수(渠帥)로 봉하여 혈연조직을 강화한 바 있는데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그 때 거수가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에 의해서 지금의 요동에 세운 고구려는 난하 동부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하나인 옛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인 것입니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에서 재건된 후 주변에 있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비류·행인·해두·개마·구다·조나·주나 등의 나라를 병합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그 후 계속해서 중국 북경근처의 난하 유역에서 중국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줄기차게 지금의 요서 서부로 진출하던 고구려는 미천왕 때인 서기 313년부터 315년 사이에는 난하 동쪽에 있었던 한사군을 난하 서쪽으로 축출하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A.D 49년에 고구려가 점령한 지역 ©편집부

지금의 '요서지역'은 원래 단군조선의 영토였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원래는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고토 수복이었던 것입니다.


▲ A.D 55-57년 태조태왕때 고구려가 요서지역에 쌓은 10성 - 1.풍성 2.안시성 3 건흥 4.요동성 5.건안 6.석성 7.한성 8.옥전보 9.요택 10.택성 11.용도성 12.백암성  © 편집부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던 시기에 백제는 바다를 건너 지금의 중국 북경과 천진(天津) 지역에 진출하여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활동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고,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과 중국의 단군 조선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A.D 398년 광개토태왕의 토욕혼 및 숙신 정벌로(굶은 검은선 영역은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을 통한 고구려 직간접 지배영역 추정도)  © 편집부
 
고구려의 소망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그 위광이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미침으로써 일단 성취되었습니다.


1995년 SBS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최인호(崔仁浩; 1945∼)씨의 '고구려, 그 중에서도 광개토대왕의 영광에 관한 역사물'인 {왕도(王都)의 비밀}을 제작· 방영했는데〈제4부 정복의 길〉에서 표현했듯이,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 단군조선의 영토 수복에 그 목표가 있었습니다. {왕도의 비밀}을 흥미있게 보았는데 잘 만들었더군요.

광개토대왕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과 그 거수국인 옛 고구려의 단순한 영토 수복에만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군 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극동(極東)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변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재중동포가 살고있는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요하(遼河)는 오랫동안 만리장성 부근 난하를 가르켰는데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날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또는 요수(遼水))의 동쪽을 지칭하는데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지금의 '난하( 河)'가 요하(요수)로 기록되어 있고, ≪사기≫에는 난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碣石山) 지역이 요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아 고대의 '요하'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였고, 고대의 '요동'은 '난하 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곳은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으로서 고대에 중국 영토 가운데서 가장 동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당시의 서한의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하류유역에, 즉 요서 서부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당시에 고구려가 진출한 요동군은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중국 북경 근처였던 것입니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에는 가장 강성했던 시기의 고구려 영토가 북경 근처가 아닌,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지금의 요하(遼河)까지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대의 '요동'을 지금의 지명과 동일한 곳으로 잘못 인식한 결과가 빚어낸 오류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행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의 역사는 물론 단군조선의 영토도 축소되어 있더군요. 단군조선의 후계세력인 동부여·고구려·한 등에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추는 춤이 있었습니다.이러한 춤들은 단군조선의 춤을 계승한 것들입니다.

▲ 광명 한민족의  강강술래  ©편집부

1997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과 정월대보름을 맞아 전국서 정통농악과 강강술래 등 민속놀이를 비롯 세시풍속들이 펼쳐져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는데 오늘날의 '풍물(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바로 단군조선시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력설'은 우리민족이 역사이래 줄곧 지켰던 순수한 '우리 설날'입니다.

 
단군조선은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이자, 우리민족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왜곡·말살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한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며, 한민족 '사회와 문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가 그간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한국사' 전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았을거 아닙니까?  
 



한민족 문화의 원형은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있으므로 그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한민족의 정체(正體)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습니다. 즉 단군조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민족 본래의 모습을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현재 윤내현 교수와 대부분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  최태영 박사

(고)최태영 박사는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5년에 별세하신 법학자이자 사학자로 1919년 메이지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법학부에서 수학하여 법철학 및 상법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수 및 강사로 일하면서 경신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변호사 자격을 인증받은 뒤, 1946년부터 부산대학교 교수 겸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1947년 12월 16일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겸 학장이 되었다.
 
1949년부터 1962년까지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동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는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냈고, 1957년부터 1968년까지는 청주대학 교수 겸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술활동에도 열의를 보여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7년부터 1972년까지는 한국상사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저술로 국내 최초로 상법과 관련된 《현행 어음·수표법》을 집필하였고,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977년에 출간한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대사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단군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하였다. 《삼국유사》의 ‘환인(桓因)’은 ‘환국(桓國)’의 조작이라는 주장을 통해 잘 알려졌다.
 

최태영 박사는 1900년 생으로 3·1운동에 가담해 옥고를 치른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구한말부터 새천년이 들어서는 오늘날까지 3세기 동안 근현대사를 산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최 박사는 법학자로서 반세기, 또 상고사 연구자로서 사반세기를 꼿꼿하게 살아왔다. 해방 후 대한민국법을 제정하고 서울대 초대 법대학장을 지낸 법학계의 원로이자, 일제에 훼손되지 않은 우리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서재에서 씨름했던 학자였다.
 
최태영 박사는 구한말 황해도 장련에서 태어나 신문명과 신교육운동의 세례를 듬뿍받으며 강한 민족 자존의 분위기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외국 선교사들의 교육활동과 김구의 민족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함께하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도쿄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조선인 최초로 법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6·25 이후 정인보, 신채로, 안재홍, 손진태 등 민족사학자들의 맥이 끊기고 일제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한 실증주의 사학자들의 사관이 우리 사학계를 지배하게 되자 정년 퇴직 후 역사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삼국유사> 정본과 <세년가>연구를 통해 단군이 실존인물이라는 것과 환국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1988년에는 일본 후지산 아래 비밀 서고에 숨겨진 문서 <미야시타 문서 : 신황기>를 답사했으며, 단군의 자손이 일본의 진무 천황이 되었다는 <상기> 기록을 확인한다.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단군에 의한 국가 건설은 신화가 아닌 사실'이라는 내용의 「한국상고사」(1990)를 발간하기도 했다.


▲죽음직전 이병도의 자백-"단군은 신화아닌 우리 국조" © 편집부

■식민사학자 이병도에 대한 최태영 박사 증언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서관보가 되어 ‘조선사 편찬’이라는 거대한 역사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조선사』 편집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기여하였고, 일제가 유포시킨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사학계에는 직접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요지의 이른바 반도사관론을 대량 유포시켰으며, 우리 역사 사료들을 전부 빼앗아 가고 불태우고서는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스스로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도는 죽기 직전,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발표한다. 그간 최태영 박사, 송지영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등의 설득으로 과거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어떤 이는 ‘노망 드셨네’ 하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때 그와 더불어 『한국상고사입문』(1989년)을 발간했던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이나 ‘세종실록’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서울대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 2000년 1월 3일자 문화일보 특별대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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