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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역사.간도를 되찾아야 하는 법적 정당성

간도는 고래로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였다

편집부 | 기사입력 2010/08/29 [12:21]

간도의 역사.간도를 되찾아야 하는 법적 정당성

간도는 고래로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였다

편집부 | 입력 : 2010/08/29 [12:21]
 
동이(東夷)사상의 단군문화는 흑룡강 - 송화강 유역 북쪽의 본거지에서 잉태되어 요하 - 압록강 중간 대륙에서 발전한 후 동방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민족 이동을 하였으며, 서방으로는 만리장성 동쪽 대능하 유역의 양평(襄平)에 2차적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1. 이 지역에 최초로 환국(桓國)이 존재하였음이 나타난다(삼국유사 정덕본의 檀君古記에는 昔有桓國이라 하였다)  
 
2. 동이(東夷)사상의 단군문화는 흑룡강 - 송화강 유역 북쪽의 본거지에서 잉태되어 요하 - 압록강 중간 대륙에서 발전한 후 동방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민족 이동을 하였으며, 서방으로는 만리장성 동쪽 대능하 유역의 양평(襄平)에 2차적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3. 우리 민족은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이 나타난다. 단군고기의 “백산흑수(白山黑水)” 지역은 백두산과 흑룡강이다(환단고기)  
 
4. B.C. 3천년에 숙신(肅愼), 이(夷)이라 불렸으며, 산해경에는 ‘불함산이 있는 나라가 숙신국이며 동북지역의 국가원수들이 모두 숙신 출신이라 하였다. 주(周) 시기에는 이적(夷狄), 험윤이라 하였고, 춘추(春秋), 한 (漢) 시기에는 호(胡), 맥맥, 흉노(匈奴)라 하였으며, 이후의 위진(魏晋) 시대에는 예맥(濊貊), 한(韓), 오환(烏桓), 선비(鮮卑)라 하였다.  
 
5. 동이(東夷)에는 아홉 겨레(九夷)가 있는데, 황하 이북과 몽골 사막 이동의 만주지역과 흑룡강 일대 및 연해주 지역에, 황, 백, 현, 적, 남, 양, 우, 방, 견이라는 종족이 살았다.  
 
6. B.C.2333년에 고조선이라 부르는 단군조선을 건립하였으며 북만주지역의 송화강 유역에 위치하였다. 이후 남하하여 대능하, 요하지역인 발해 연안으로 도읍을 옮겼다.  
 
7. 고조선은 하-은-주시대에 하르빈-농안-장춘-봉천지역과 요하 및 압록강 부근의 진(眞)조선과 대능하와 요하 사이 지방에 존재했던 번(番)조선으로 발전하였다.  
 
8. 고조선시기의 발전된 문화는 창힐(蒼?)의 문자(漢字) 발명과 더불어 홍범(洪範)의 창제 및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으로 발전하였다.  
 
9. 고조선 문화의 우수성은 1970년대부터 발견되어진 대·소능하 유역의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 등의 유적 발견으로 입증되었으며, 중국의 황화문화 보다도 2천년 내지 천오백년 앞선 문화임이 밝혀졌다.  
 
10. 중국이 부르는 청구국(靑邱國)은 황제시대 이전에 산해관 북방지역인 번조선지역에 존재한 국가였으며, 동이문화를 심화 발전시킨 국가였다. 청구국 서쪽인 난하 맟 산해관 서방에 위치하여 동이민족의 서방 진출의 전초 기지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천년 가량 존속하였다.  
 
11. 위만조선이 B.C. 108년에 망하니 漢은 진조선과 대능하 유역의 번조선 지역에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4군을 설치하였다.  
 
12. 고조선 말기에 송화강 유역의 하르빈 지역에서 부여가 건국되었으며, 여기에서 동부여가 파생되었으며, 고구려의 지배층인 주몽이 동부여에서 이주하여 졸본부여를 압록강 유역에 세우게 되니 고구려의 시작이었다.  
 
13. 고구려의 역사는 왜곡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7백년 설을 통설로 알려져 있지만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김부식 자신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도 “고구려비기왈 불급 구백년(高句麗秘記曰不及九百年)”이라 하였으며, 당회요(唐會要)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이며 이를 근거로 북한은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277년으로 간주하여 고구려의 존속기간을 945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14. 고구려는 고조선의 찬란한 문화를 이어 동북아의 패자(覇者) 역할을 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발해 역시 “해동성국”의 칭호를 얻은 만큼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277년간 존속하였다.  
 
15. 발해 멸망후 동이족의 후예인 거란과 여진이 199년, 109년을 통치하였다, 그 후 몽골이 134년을 지배하였다. 한족인 명이 277년간 지배한 후 동이족의 후예인 청이 1912년까지 269년간을 통치하였다. 따라서 간도지역 반만년의 역사중 한족이 지배한 역사는 십분지 일인 5백년도 되지 않는다.  
 
16. 간도지역이 위치한 만주지역은 만리장성 이북 및 산해관 이동지역으로 명 이후로는 관외지역으로 불렸다. 만주(滿洲)의 명칭은 원래 만주(滿珠)라고 불렀다. 만주에 속한 지역을 주신(珠申)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후에 개칭되어 만주(滿珠)가 되고 한자의 모양이 와전되어 만주(滿洲)가 되었다. 만주족은 숙신족의 한 일파이며 근세에 와서 형성된 종족의 통칭이다. 여러 문헌을 고찰한 결과 만주는 대추장의 명칭이 종족의 총칭으로 와전되 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17. 현재의 만주지역은 청의 초기에는 길림지역을 오라(烏喇), 흑룡강일대를 영고탑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청 말기에 동삼성이라 부르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명칭으로 개칭되었으며, 1932년 만주국 성립 으로 이 지역은 더욱 세분화시켰다. 즉 안동성, 봉천성, 금주성, 통화성, 간도성, 길림성, 빈강성, 목단강성, 동안성, 삼강성, 북안성, 흑하성, 흥안 동·서·남·북성, 사평성, 신경특별시로 구분하였다. 이 중 간도성은 두만강 북쪽의 북간도 지역에 한정하였다.  
 
18. 만주지역에 공한(空閑)지대가 설치된 것은 명의 1469년 경 요동과 압록강 사이에 몽고와 여진을 방어하기 위해 변책을 세웠는데 청이 이 요동 변책의 기초위에 유조변책을 1643년부터 1661년 사이에 수축하였다. 이 변책은 봉황성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으로 노변 또는 성경변장으로 불렀다. 1670년에서 1681년 사이에 청이 개원 위원보에서 길림에 이르는 유조변을 신축하였는데 이를 신변이라 불렀다. 이러한 봉금지역이 무주지로서 19세기 초까지 존재하였다.  
 
19. 간도 명칭의 유래는 두만강 중간의 종성과 온성 사이에 있는 삼각주가 매우 비옥하였는데 1870년경부터 부근의 주민이 이곳을 개간하기 시작하여 간도(間島)라 불렀다. 그 후 무산, 온성 사이의 주민이 도강하여 백두산 동쪽 기슭의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여 이곳을 모두 일컬어 간도라 부르게 되었는데 모두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개간하였다 하여 간도(墾島)라 부르기도 하였다.  
 
20. 간도지역은 두만강 대안지역을 동간도라 부르고, 압록강 대안지역을 서간도라 부른다. 특히 동간도는 노령산맥 이동을 동간도 동부 즉 세칭 북간도이며 노령산맥 이서를 동간도 서부로 구분한다. 간도협약시 한·중 양국 민이 잡거구역으로 규정한 곳은 동간도 동부지역이다.  
 
21. 1909년 간도협약 이후 간도지역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22. 광복 이후 간도지역은 만주국 시기의 행정구분을 없애고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나누어서 통치하고 있다. 특히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 간도“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고 ”동북지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 간도지역을 동부지역으로 불러서는 안 되며 "고토회복지역” 또는 “북방지역”이라 불러야 타당하다. 
 

 
그 후 무산, 온성 사이의 주민이 도강하여 개간하는 자가 점차 급증하여 백두산 동쪽 기슭의 비옥한 토지는 개간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어 이를 모두 일컬어 간도(間島)라 불렀다. 따라서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지역의 개간지역을 자연스레 간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간도의 범위는 두만강의 조그마한 삼각주에서 시작하여 한민(韓民)이 개간한 곳은 모두 간도라 부르기 시작하여 점차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도는 백두산 동쪽과 두만강 대안을 동간도라 부르며, 압록강 대안지역과 송화강 상류지역의 백두산 서쪽을 서간도로 크게 구분된다.
 
동간도는 노령산맥 이동을 동간도 동부, 노령산맥 이서를 동간도 서부라 부른다. 동간도 동부가 소위 북간도이며 1909년 간도협약 체결 시에 한·청인의 잡거구역으로 규정한 곳이다. 그러나 간도분쟁 당시에 우리 선조들이 생각하는 간도 명칭의 개념은 동으로는 토문강에서 송화강을 거쳐 흑룡강 이동의 연해주를 포함한 지역을 의미하였고, 서로는 압록강 대안을 포함하여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양·심양 일대(소위 심요선)까지 확대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두만강 대안의 동간도와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지역이 접한 곳이 바로 청과 조선이 약정한 봉금지역이었다. 당시 청은 봉금지역에 대한 관할권이 미약한 상태였으며, 더구나 청 정부는 한족(漢族)의 산해관 이동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즉 요동 이동의 봉금지역에 대한 한족의 접근을 금지한 결과 무주지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 민족이 먼저 선점하여 개간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간도 범위는 산해관 이동에서 북쪽으로 유조변책을 따라 길림 북쪽의 송화강선으로 이어져 흑룡강 이동의 연해주를 포함한 지역이다.
 


한·중 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도분쟁은 봉금지역인 무인지대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임과 동시에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개입된 정치적 분쟁이다.
 
2차에 걸친 한·청 국경회담과 1909년 일·청간의 간도협약 체결 과정에 나타난 논쟁점을 분석하면 간도분쟁을 국경분쟁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점을 열거하면 첫째, 백두산정계비의 가치 둘째, 비문 내용의 해석 즉 토문강의 실체 셋째, 을유.정해 국경회담의 효력 넷째, 1885년 이후의 교섭서 및 선후장정에 대한 견해 다섯째, 역사상의 사실에 관한 쟁점이다. 한국과 일본은 정계비로서 인정한 반면, 청은 비의 내용에 분계의 문자가 없다고 해서 정계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 일, 청 3국은 비문중의 압록강은 인정하나 토문강에 대해서 의견을 달리하였다. 한,일은 토문강을 두만강과는 별개의 강으로 송화강의 원류로 보았으며, 청은 토문강이 도문강이며, 이것이 두만강이라는 것이다. 2차에 걸친 을유·정해 국경회담에서 한, 일은 당시 홍토·석을수의 합류지점 이상의 땅에서는 서로 싸우고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경선 전체에 관해 하나도 확정한 것이 없으며, 국경회담이 전부 무효된 것이다.
 
반면 청은 두만강으로 인정하였으며, 미정된 곳은 무산 이상 2백여 리의 두만강 상류라는 것이다. 1904년 한·청의 변계관리들이 임의로 약정한 변계선후장정의 제1조에서 백두산의 정계비가 국경선으로써 입증되며, 두만강이 양국의 확정 된 국경선이 아님을 명시하였다는 것이 한, 일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청은 선후장정에서 국경이 명백한 것은 두만강 하류지방이며, 추호도 두만강으로 국경선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역사상의 사실에 관한 쟁점에 대해서는 한·일은 두만강 북은 한국의 발상지이며, 그 지역 일대가 한국에 내부하였던 일이 있다. 지금도 한국인의 유적이 많으며 이주의 역사도 청보다 빨라고 한국인의 수도 청인보다 몇 배로 많다는 점이다. 이 지역은 청의 통치외의 지역이며, 정계비 건립 후에도 한국의 허락 없이는 개간하거나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또한 두만강 이북지역에는 청의 지명이 없었다. 반면 청의 주장은 다르다. 청이 처음부터 두만강 북을 청의 판도로 여겼으며, 정계비 건립 후에 청병을 파견하였다. 이 지역이 원 이전부터 청의 초기까지 중국의 역대 정권에 복종하였으며, 훈춘·둔화 등의 중국 지명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의 일본이 대청 교섭 시에 주장한 견해는 간도가 한국영토임을 전제로 하였지만, 일본이 청에 동3성 6안, 즉 신법철도 부설권문제, 대석교 영구간의 지선 문제, 경봉선 철도 연장문제, 무순, 연대 탄광 채굴권 문제, 안봉철도 연선의 광무문제, 간도귀속문제를 청에 제시함으로써 일본의 종래 입장을 변경하였다. 결국 일본은 1909년 9월 4일 일본은 간도영유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청은 동3성 5안건을 일본에 양보하기로 하여 간도협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때 한·중의 국경선은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두만강으로써 경계를 삼았다.
 
결국 이와 같은 간도분쟁의 쟁점들은 일본의 책략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고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1712년 목극등에 의해 세워진 백두산정계비를 조약으로 하는 국경분쟁으로만 간주하기엔 무리가 따르며, 봉금지역인 무주지에 대한 영유권분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하튼 백두산정계비가 한중 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 우리 땅 간도는 민족, 건국의 발상지이다.  

 
간도지역의 백두산·송화강·흑룡강 일대는 애초 우리 민족건국의 발상지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이 지역은 우리 민족 고조선·부여 이래로 재세이화(在世理化), 弘益人間의 건국이념을 실현시켰던 곳이다.특히 영문국명인 KOREA의 발원지인 고구려의 옛 도읍지가 서간도지역에 있으며 발해 옛도읍지는 북간도지역에 있다. 특히, 이 지역 반만년의 역사 중 우리 민족이 3,352년을 지배하였지만, 한족(漢族)의 지배기간은 5백년 정도에 불과하다.
 
 
2. 고래로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간도지역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서 수천년간 점유해왔던 곳이며, 근대 조선과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 무인지대인 상태에서 우리 민족이 먼저 들어가 피땀흘려 개간하였다.
 
- 만리장성 동쪽끝과 잇닿는 심요지역은 한족(漢族)의 진입을 엄금한 바 있다.

- 1909년 청일간 소위 간도협약은 무효이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간도는 분쟁상태에 있다.(간도협약의 근거인 을사늑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협약도 원천적 무효이고 1952년 중일간 평화조약에서 "중일 양국은 1941년 12월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1909년에 체결한 간도협약 역시 무효이다.)  
 
3. 민족의 역사, 문화 및 동질성의 회복 

  
간도회복은 남북통일과 재중동포는 물론 재외동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의미한다. 반세기 이상의 남북분단은 모든 분야에서 이질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간도지역에 거주하는 재중동포들도 지금까지는 우리의 언어와 전통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지만 3·4세 후손들은 중국에 동화되어 민족의식이 조금씩 이완되어 가고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 중의 하나가 간도영유권 주장이다.

출처
111 10/08/31 [13:25]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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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건 조선국만이 존재하고 잇다

통일되면 지워질 이름 대한민국 한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만이 존재한다

= 조선국

조상대대로 이어온 이름 조선
헛소리하는 111 10/08/31 [13:57] 수정 삭제  
  [한단고기]환국=>배달국=>단군한국조선(단군천황이 처음 나라이름을 한국이라 정했으나 22대 색불루천황때 조선이라 국호를 변경했다.조선이라는 국호가 여기에서 나온다:조선은 숙신을 의미한다)=>부여=>고구려(고고리)=>대진국(발해)=>고려=>조선=>대한민국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통일한국:고려연방공화국(김일성 제안),한국(나의 제안.. 본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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