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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건국한 '주원장'은 전라도 해남사람!"

고려인이라면 왜 한반도(해남) 떠나 '지나족'지역으로 갔나?

윤복현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10/03/08 [01:33]

"명나라 건국한 '주원장'은 전라도 해남사람!"

고려인이라면 왜 한반도(해남) 떠나 '지나족'지역으로 갔나?

윤복현 역사칼럼 | 입력 : 2010/03/08 [01:33]
일요일 오전에 방영되는 MBC프로그램'서프라이즈'에서는 원나라를 초원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설한 개국시조 "주원장은 고구려인가?"라는 논쟁에 대해 다루었다. 이에 대해 지나국의 사학자들은 한족출신이라고 주장하고,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고려인'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MBC'서프라이즈'방송화면 자료
 
한반도와 지나지역은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사실, 100년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지역에서 출생한 누르하치가 개국시조인 청나라가 지나역사상 가장 광활한 지나영토를 직접 통치했다.주은래는 지나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청나라가 만주족이라면서 한민족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했다.청나라는 또한 고려인 김함보(신라말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손자)를 시조로 삼는 금나라를 계승한 나라다. 마의태자집안의 족보상으로도 정확히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영화로도 상영된 바 있지만,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름이 바로 김부의다. 김부의는 일본제국주의가 지나지역을 지배하기위한 발판으로 삼기위해 만든 만주국의 황제를 역임하면서까지 청나라를 회복하고자했으나,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이용만 당하고 말았다.
 
지나지역에서 모택동세력과 함께 공동의 적이였던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며 무쟁투쟁을 벌이던 윤세주가 지휘했던 조선의용대의 경우도 지나국의 사회주의 혁명사에 있어  길이 빛날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다. 윤세주가 바로 일본과의 전쟁 중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지금의 지나국을 개방개혁으로 경제대국의 발판을 다진 등소평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다. 등소평에게는 조선인 윤세주가 바로 생명의 은인이며, 지금의 지나국이 남북한을 초월하여 한국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배경이며, 통일한국을 위해 적극 협력해 줘야 하는 당위성이기도 하다.
 
이 처럼 한반도와 지나지역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고로 한반도인들이 지나지역으로 가서 얼마든지 나라를 개국할 수 있으며, 지나사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며, 한반도에 개국한 나라들이 지나지역을 경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고구려의 개국성조 고추모를 부여에서 내쫓은 관계로 인하여 고구려와 원수지간이 되였던 부여의 왕 구태가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탁과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지역에 백제를 개국하여 한반도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서해와 남해를 장악하여 일본열도와 요서지역을 비롯하여 지나의 동남부지역을 장악하고 나가 동남아지역까지 장악한 해상제국을 건설했듯이 말이다.그리고 백제의 후신에 불과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하여 지배한 영역이 바로 백제의 영역과 동일했다는 사실또한 이를 입증한다.일본이 일제말기에 부여에 신사를 세우려다가 무산된 이유자체가 바로 일본왕실의 조상들이 백제황족이기 때문이다.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 주원장은 황후(고려인 한여비)뿐만 아니라 후처들도 조선여인들로 삼았다.그리고 조선의 환관들을 명나라 황실의 환관들로 삼았다. 주원장이 한반도출신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나인이라면 황실을 관리하는 환관(내시)들을 어떻게 조선인들로 채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명나라 황실은 조선을 각별하게 환대했다.
 
조선의 태종은 양녕대군이 세자시절인 1407년 양녕을 명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13살이던 양녕대군은 남경에서 영락제를 한달 간 3번이나 만났다.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수행한 35명의 사절에게 선물을 주는 등 조선에 공을 들였고 양녕대군이 남경에 머무는 동안 양녕대군을 남경 도처를 안내했다. 명나라의 예부상서는 양녕대군에게 연회를 배풀기도 했다. 


 양녕대군이 귀국할 때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다시 만나 언제나 “조선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양녕대군에게 여러 서적을 선물로 주는데 선물목록 중에는 영락제의 어머니인 마 황후(고려인 한여비)의 전기 150권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태종에 의해 양녕이 실각하고 세종이 왕위를 오른 뒤에도 영락제와 세종대왕은 밀접한 관계를 이어간다.  영락제와 세종은 자주 종교와 철학, 역사, 도덕, 과학, 기술과 관련된 서적 및 의견을 교환했다. 명이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 두 나라간 교섭은 더욱 늘어났다.


 
명나라 개국시조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주원장은 부인이 고려인이고, 1등 개국공신이 고려인이였고, 옆에 측근들이 고려인들이였다. 또한 이성계는 주원장의 승인을 받아 조선왕에 올랐는데, 주원장은 자신을 비웃는 한족관리들 때문에 조선에 많은 환관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해 와서 조선에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의 생가를 성역화하고 남한도 김대중.노무현.박정희 등 대통령의 생가를 성역화하는데, 주원장의 경우는  明이 망할 때까지, 아니 현재까지도, 지나국에서 주원장의 생가는 전혀 언급되지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단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원장이 한반도출신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원장의 황후는 고려인으로 고려인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로,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어머니가 된다. 주원장이 명나라 태조에 즉위하기 전 또 다른 고려여인을 왕비로 맞는데 석비(碩妃)이며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는다.또 주원장의 황후(고려인)의 동생 한계란(韓桂蘭)은 후에 명나라 선덕제의 부인이다.
 
이러한 주원장의 부인들에 대해 지나국의 사학자들은 고려가 보낸 공녀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나라 건국이 1368년이니 영락제(永樂帝)는 이미 명나라가 개국되기 8년 전에 태어났으며, 당시 원나라를 섬기던 고려에서 국가의 운명을 걸고 원나라의 반란군 홍건적의 두목 주원장에게 고려조정에서 공녀를 상납함은 있을수 없는 일이며, 더구나 영락제가 태어나던 1360년 이전의 주원장은 당시 황건적의 거대 세력 장사성(張士誠),진우양(陳友諒)등에 가려 별로 드러 나지도 않던 조그만 비적 무리에게 고려조정이 공녀를 조공 받았다는 것은 상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락제는 후에 티벳과 베트남과 남만주 등 지나국 최대의 영토를 넓히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훨씬 이전인 60년 앞서 환관 정화를 시켜 6회에 걸쳐 멀리 아프리카 까지 정복하여 지나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황제이기도 하다. 명나라 개국시기 환관들이라고 했을 때도 주원장이 지나인들을 믿지 못하여 조선에 많은 환관들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여 조선인들로 채웠기 때문에 결국 주원장이나 영락제 시기의 명나라 환관들은 조선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원장, 홍건적 우두머리로 명나라의 시조
 
늘상 동서고금을 통하여 나라가 망하려면 권력암투가 벌어지고 부패하는 법이며, 대응능력이 부재한 권력의 무기력함이다. 원나라 말기 권력암투와 부패로 인하여 지나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그 민란이 바로 농민들의 홍건적의 난이다.이에 원나라는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된다.이 때 투입된 무명의 장수가 이성계다. 홍건적의 진원지는 바로 고대 백제가 경영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해의 내륙 안휘성, 강소성에는 농민군을 포함해 약 60만의 반란군이 엄청난 속도로 북상을 하며 기승을 부리던 때로써, 그 험악한 60만명의 홍건적에 단지 2,000여명의 고려군사들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반란군을 1년여간 제압하게 된다. 그 만큼 농민들로 구성된 홍건적은 정규군이 아니였기 때문에 오합지졸이였던 셈이다. 주원장은 그래서 죽을 때까지 조선이 지나지역을 공격해 오지 않을까 염려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은 유능한 조언자들(고려인들)을 밑에 거느리고 효과적인 전술과 전략, 행정조치를 취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원에 대항하는 가장 강성한 지도자가 되었다. 주원장은 장사성의 세력을 제거한 후 북벌군을 편성해 사방에서 원으로 진격했으며, 북진에 성공하여 1368년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명나라를 세웠다.

몽골초원지역으로 쫓겨간 원나라와 조선(고려)군의 연합공격을 주원장은 죽기 전까지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요동(遼東)에 나가 있는 요왕에게 주원장은 조선이 20만대군으로 쳐들어 온다면 우리군대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하며 조선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철저히 대비하라 당부했다. 그러면서 만약 조선이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한다면 이는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걱정하는 대목이 『명실록』에 전한다.

 
주원장은 왜 한반도(전남 해남)를 떠나 상해지역으로 갔을까?
 
주원장의 출생과 관련하여 지나국의 기록[주원장전]에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펑양현(鳳陽縣)출신으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16세에 고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기근을 피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어 하북지방 일대에서 탁발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문제는[주원장전]의 발행시기는 한국의[조선기문]이 발행된 뒤라는 사실이다. 두 책을 비교해 볼 때 주원장의 어린시절 매우 가난했다는 점과 주원장이 절로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돌아다닌 시기가 비슷하다.[조선기문]에는 명태조 주원장과 이름이 같은 남자가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가난한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주원장전]이나[조선기문]의 내용은 유사하다. 고로 저술연대가 빠른 한국의 [조선기문]을 참조하여 후에 지나인들이 [주원장전]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술보다 더 그 진실성이 강한 것이 도깨비로 전승되는 치우천황의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민간 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지나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적혀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도리어, 주원장의 출생지로 회자되는 곳이 우리 나라의 전라남도 해남 마을로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당대 유명한 풍수지리가 '유현'으로부터 천하 명당이 전라남도 해남 바닷가 어딘가에 천하제일의 명당이 있음을 알아내고는 급히 찾아가 보았는데, 주원장이라는 사람이 3년전에 자기 부모를 모신 후 지나지역의 '안휘'라는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일은 주원장의 유언에 의해 그는 극비밀리에 한반도 해남에 묻혔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나국 화교들이 최고로 치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묘지라고 불리는 곳인 명효능이란 곳에는 터만 성대하게 궁궐같이 지어져 있을 뿐, 묘지가 없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나라 전래의 설화뿐이 아니라, 장백전(張白傳)이란 군담소설에도 주원장이 장백(張白)의 죽은 누이의 자부(欺夫)라는 것을 현몽하는 대목이 있고,조선의 대표적 판소리 춘향전에도 주원장이 등장한다.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이 뿌리내리는 조선시대에서 감히 부모국으로 섬긴 명나라의 태조가 조선의 전라도 해남에서 머슴이나 하던 상놈출신이었다고 기록하지 못했을 뿐, 호남 곳곳에서는 지나국의 황제가 된 주원장의 과거모습을 여기 저기서 나즈막하게 구전을 통해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청주 한씨는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마한 땅으로 들어온 기자조선의 마지막 기준세력의 후손들이다.[후한서]에 기록되기를 "기준은 바다를 건너 마한을 파하고 왕에 올라 한왕이라 칭했다.기준의 대가 끊어지니 다시 마한인이 왕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기준후손이 자신들의 성씨를 '한'씨로 정한 이유일 것이다.이러한 배경을 통해서도 한반도는 한민족의 본향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청주 한씨 문정공파 족보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麗妃 明 太宗 永樂帝 西成府院君永恭愼夫人 明 宣宗宣德帝上 同昭惠王后 德宗大王 西原府院君確丁巳誕降 甲子昇遐..."
 
주원장이 전라도 해남의 '한영정' 집안의 머슴이었을 때 주인집 딸인 한여비와 눈이 맞아 지나국으로 도피하였거나 주원장이 지나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은 후에 여비를 불러들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나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모친이며 주원장의 부인되는 여비를 낳은 문정공파 한씨의 족보에 고려 중엽에 왕후들(容信王后,容懿王后)를 배출한 고려 최고의 명문 대가다. 따라서 지나사학계가 주원장의 황후 여비에 대해 공녀 운운함은 이미 앞에서도 기술한 바 홍건족의 민란이 일어나던 시기에 해당함으로 오히려 원나라에 공녀를 바쳤어야 했던 상황에 비하면 이미 명나라를 개국하기 전에 혼인을 하여 자식(영락제)을 낳던 연대상 혹은 조건상에서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 주원장은 왜 한반도지역을 떠나 지나지역으로 갈 수 밖에 없었을까?

 
아마도 장보고처럼 청해진(완도)에서 태어나 신분상 출세가 어려운 신라시기에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지나지역으로 가서 뛰어난 무예솜씨로 당나라 무령군 소장에까지 올라 산동지역의 백제인들(신라방으로 호도됨)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백제의 후손답게 아시아 바다를 장악하여 해류상으로 보았을 때도 한반도와 지나국,그리고 일본열도를 연결할 수 있는 중간지점인 지금의 완도에 해상무역을 관장하는 청해진을 설치하였고, 부패해 가는 신라의 권력까지 위협하는 해상세력으로 성장했다.당시 장보고가 마음만 먹었다면 신라권력을 장악하고 나라를 열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먼저 겁을 집어 먹은 신라권력층이 염장을 시켜 장보고를 살해하고 청해진을 해체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장보고 군대는 신라의 토벌전으로 인하여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설화 역시 호남지역에 무수하게 흩어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주원장 역시 머슴출신으로 신분상 출세하기 어려운 고려에 사느니 능력있는 자들은 얼마든지 기용될 수 있다는 징기즈칸의 나라 원나라가 있는 지나지역에 사는 것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한반도지역을 떠나 안휘성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원나라 말기라서 원나라왕조가 권력암투와 부패로 이미 나라가 혼란에 빠진 상황이고, 마치 원나라에 의해 심하게 차별받은 한족이 중심이 된 홍건적이 백련교를 기반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이에 원나라와 고려군이 연합으로 소탕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홍건적의 소명왕이 잡혔다.이 때 주원장이 소명왕을 구한다.그뒤 주원장은 지나땅을 계속 정벌해나가던 중 1366년에 홍건적의 상징이었던 소명왕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홍건적의 무장임을 부정함에 따라 홍건적의 난은 표면적으로 종결지어졌다. 그리고 홍건적의 사상적 기반이 된 백련교에 입신했던 주원장은 홍건적임을 부정하면서 원에 부정적인 농민들을 기반으로 명(明)을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기서 주원장이 명확히 지나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한반도지역을 떠나온 주원장은 당시 혼란상황에서 홍건적을 이용하여 지나지역의 세력을 규합한 다음 농민을 기반으로 명나라를 개국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주원장이라는 인물은 상당히 머리가 좋고 무예가 뛰어난 인물임을 알 수가 있다.
 
주원장은 모국 고려인 추유를 자신의 오른팔이자 뛰어난 전략가로 세운 후에 명나라를 개국한 후에는 재무장관에 이른다. 그러나 지나국의 사학계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다.지나국은 추유대신에 유기를 내세우나, 유기의 저서나 직책 등을 살피면 그는 전략가가 아니고 단순한 서기나 행사를 기록하는 사관에 불과함을 알수 있다.
 
이러한 주원장의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자, 군대를 지원하여 돕는다. 청나라의 개국시조 누르하치도 자신의 시조가 고려인 김함보라는 사실을 알기에 조선에 벼슬하기를 원했고, 오랑캐라고 비웃음을 당하자 만주의 여진족(말갈.숙신.몽골)족을 규합하여 후금을 개국한 것이다.그리고 죽기 전에 조선을 침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지나문헌에 따르면, 주원장은 홍건적의 우두머리로 지나국 동부지역의 여러 읍과 성을 함락시킨 뒤 양자 강(揚子江) 유역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사대부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과 알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그는
지나어의 기본을 배웠고, 지나사와 유교경전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원장은 고려당시 한반도 사람(전남 해남)으로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였거나, '한여비라는 고려 한영정' 명문가문의 딸과 정을 통한 이유로 추방당해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지나지역으로 배를 타고 건너 갔고, 지나지역에서 일어나 홍건적의 무리에 들어가 활동하여 홍건적의 권력을 장악했고, 원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지나지역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지나어를 배우고, 지나의 유교이념을 배우면서 유식해 졌으며, 자신이 사랑한 해남의 한영정 집안의 한유비를 아내로 맞이하여 명나라 황후로 삼았으며, 고려인 추유를 전략가로 삼으면서 확실히 지나전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주변에 많은 고려인들을 측근으로 삼는 바람에 지나인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사기도 하자, 그들을 학살했으며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에 많은 환관들을 보낼 것을 요구해서 명나라 궁궐을 조선의 환관들로 채웠음을 알 수 있으며, 죽은 후에는 아들 영락제에게 황위를 물러 주고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 묻혔다고 볼 수도 있겠다.  결과적으로 몽골의 나라 원나라를 이어 지나전역을 통치했던 명나라는 주원장을 중심으로 고려인들의 나라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한반도사람 주원장 10/03/08 [15:23] 수정 삭제  
  명나라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지리서[대명일통지]에는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전설따라 삼천리]주원장은 수영을 잘 했던 해남의 털복숭이 소년이라는 전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고려당대 유명한 풍수지리가 '유현'으로부터 천하 명당이 전라남도 해남 바닷가 어딘가에 있음을 듣고는 전라남도 해남으로 와서 자신의 아들이 천자가 되는 천하명당자리를 찾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관을 안착시킬 묘터는 찾지를 못하고 한달을 내리 보내다가 마침 해남 마을의 털복숭이 소년이 헤엄을 잘치고 해남 이곳저곳 안가본데 없이 지리에 환하다 해서 그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다. 물론 명당을 찾는다는 목적은 숨기고 길안내를 부탁했다.

그렇게 또다시 한달을 명당을 찾아헤멘 끝에 마침내 천하제일 명당의 위치를 발견해냈다.

그 곳은 해남의 육지가 아닌 바다 한가운데의 바위섬에 위치해 있었다.

위치를 확인한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는 묘를 쓴 뒤에 혹시나 털복숭이 소년이 그 묘자리를 훔칠까봐 죽이려 했다.

그러나 길안내를 해준 뒤 그 털복숭이 소년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묘터를 쓰고 난뒤 털복숭이 소년을 죽여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며칠간을 그 소년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하늘에 벼락이 치고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는 드디어 자신이 쓴 천하제일의 명당의 기운이 움직였다고 생각하고 크게 기뻐 했으나 그 순간 저 멀리 털복숭이 소년이 나타나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 나는 당신이 천하 명당을 찾아 이 곳에 온 것을 알고 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이곳 어딘가에 천하제일 명당을 찾아 헤메고 있었는데 묘를 쓰는 정확한 위치와 시간을 몰랐던 것 뿐이다.

그런데 그대가 와서 마침내 묘의 위치와 방향 그리고 시간을 알게 되어 그 묘터에 나의 조상님의 묘를 썼다.그대는 묘의 위치를 알게 해주었으므로 그 옆에 그 보다는 못하지만 작은 나라의 왕이 되는 혈자리가 있기에 그곳에 당신 조상의 묘를 썼으니 그리알라.

"이제 나는 중원 대륙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나라를 세울 것이다." 하고 떠났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천고의 명당은 그 주인이 있기 마련이니 복연이 없는걸 어찌 하겠나?

" 이미 발동된 명당의 혈자리를 건들였다가는 오히려 화를 당하기 때문에 이성계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주원장의 출생지가 지나국 어디에도 없고 출생지가 밝혀지지 않음은 주목할 만한 처사이다.

대개 지나국의 황제가 지나지역 어딘가에 태아났다고 한다면 그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난다.

천자가 출생한 곳이라 하여 자손대대로 자랑을 하기 마련인데 주원장의 출생지는 지나대륙내에는 없고 무덤도 없다.

그것은 단군조선의 마지막 47대 고열가 대단군이 단군직을 버리고 산속(단군성전이 있는 묘향산?)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했듯이,

황위를 아들 영락제(永樂帝=고구려 광개토태왕 연호)에게 물려주고 유유히 배를 타고 고향 해남으로 와서 묻혔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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