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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88) -성명회(聲明會)와 권업회(勸業會)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2/17 [14:52]

대한정통사(88) -성명회(聲明會)와 권업회(勸業會)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2/17 [14:52]

4243(1910) 8월 초로 접어들면서 조국이 강제로 합방 당하게 되리라는 소식에 접하게 된 해삼위의 애국지사들은, 강제합방을 막고 국권회복투쟁을 보다 폭넓게 거족적으로 전개해 나아가기로 결의하여, 4243(1910) 823일에는 해삼위의 신한촌 한인학교에서 대규모 한인대회를 열고 성명회를 조직했다.그것은 헤이그에 많은 밀사들을 다시 파견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데 대하여 크게 영향 받기도 했지만, 이미 국권을 강탈당한 이상 13도 의군을 정비하는 것만으로는 민족적 수난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책에 미흡하고, 어떤 방향으로든 외교적 노력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인식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 옛 신한촌.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카야 5번지(독립기념관 제공)     © 편집부

 

성명회의 명칭은 성피지죄 명아지원(聲彼之罪 明我之寃:저들(일제)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원한을 밝힌다)’에서 따 온 것이었다. 성명회를 주도한 이상설의 뜻은 광복을 위하여 대한인의 모든 역량과 수단을 모아서 항일투쟁에 나설 때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고 독립의 영광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었다. 국권강탈의 비보가 전해지자 한인학교에 모이기 시작한 대한인들은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계속 증가하여 7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새벽 2시 반까지 열린 회의에서는 모든 대한인이 동맹하여 국권회복을 도모하기로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저 아름다운 삼천리 강산은 우리들의 시조 단군이 전하는 바이고, 신성한 우리 이천만 동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냐? 우리의 존중하고 경애하는 바는 이 반도이다. 잊으려 하여도 잊을 수 없고 버리려 하여도 버릴 수 없는 바다. 어시호(於是乎), 우리는 차라리 두로()를 끊을지언정 오천년래의 조국은 버릴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을 바칠지언정 남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저 간악무도한 외적은 만근(輓近) 수천 년 래 일시의 강력을 방패로 삼아 우리 황제를 핍박하고 우리 정부를 위협하여, 한 번 외교권을 빼앗고 두 번 내정을 간섭하여 우리의 독립권을 침해하고, 우리의 부모형제를 학살하고 우리의 가옥전토(田土)를 강탈하였다. 우리들과 하늘을 같이할 수 없는 원수이다. 누가 통심절치(痛心切齒)치 않겠느냐.

 

우리가 금일까지 인묵(忍黙)의 태도를 취한 것은 일면 우리의 실력을 함양하고 일면 저들의 회개를 기대한 것으로, 결코 저들 관천영지(貫天盈地:하늘을 뚫고 땅에 가득 참)의 죄악을 용서한 게 아니다. 정의인도(正義人道)를 무시한 왜적은 다시 그 악을 키워 소위 합병의 의()를 창()하고, 우리의 국기를 뽑고 우리의 역사를 불사르고 우리의 민적(民籍)을 저들의 노안(奴案:노비문서)으로 만들려 한다.

 

오호, 우리는 금일에 이르러서도 상저인묵(尙且忍黙)하여야 하는가, 금일지사(今日之事) 우리의 최후의 역사가 아니냐, 우리 동포는 무장할 날이 금일이고 피를 흘릴 날도 역시 금일인 것이다. 대저 일에는 차서가 있고 때에는 전후가 있다. 20세기 국민의 행동은 세계열강의 여론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열국 중 우리나라와 일찍이 친교동맹을 체결한 각국에 대하여 왜적의 불법무도한 사실과 아울러 합병반대의 의견을 피력하여, 그 잘못된 믿음을 풀고 열강의 공명정대한 여론을 구하고, 그리고 왜적의 죄를 성토하는 것이다.”

 

성명회의 출범을 알린 이상설 등은 곧 각국 정부에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의 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의하는 한편, 그날 중으로 청년 50여 명이 결사대를 조직해서 일본인거류지를 습격하기 시작하였다. 다급해진 일제영사는 러시아의 군무지사(軍務知事)와 경찰서장에게 달려가서 왜인의 보호를 요청해서 간신히 화를 면하고자 하였다. 결사대는 점점 증가하여 다음날에는 천여 명이 되었고 부인들까지도 가담하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그 다음날인 26일부터는 러시아군경의 감시에 의하여 해삼위 내에서는 모임을 갖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에 따라서 작전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애국지사들은 해삼위 북쪽 2키로 미터 지점에 있는 친고재라는 곳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에서는 성명회의 주요인물 50여 명이 빗속에서 광복결의를 다짐하는 한편 이범윤의 제의에 따라,

두만강의 결빙기를 기다려서 의병을 이백 명 단위의 부대들로 나누어 국내진군작전을 벌여 총병력 1만 명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한다.”

고 의결까지 하였다. 그와 같은 성명회의 취지에 공감한 대한인들에 의하여 성명회의 활동은 대폭 확대되어 갔다.

 

성명회에서 각국 정부에 보내는 선언문들은 대부분 이상설이 작성했는데, 그 선언문들은 일관하여 열강으로 하여금 대한인들이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취지를 잘 이해시킴으로써, 극동정책에 있어서 대한인들의 입장을 지지해 줄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특히 다음과 같이 대한인들의 독립에 대한 결의를 밝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한국인은 일본과 투쟁하기 위해 의무를 다할 것이며, 대한인의 역량과 수단을 모두 규합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성명회를 조직했고, 세계 속에서 우리는 대한국(大韓國)’의 이름을 간직하고, 대한인은 대한국민인(大韓國民人)’이라는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정한 것이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의 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한 것이다. 어떤 일이 장차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대한인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성명회의 강제합병 반대를 알리는 전문(電文)이 미국 정부에 도착한 것은 4243(1910) 826일이었는데, 그에 비해서 성명회의 선언문이 도착한 것은 101일이었다. 그것은 이상설의 시종일관하는 주장대로 성명회에 많은 동지들이 참가하고 있음을 열강에 드러냄으로써 외교 전략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무려 8,624명에 달하는 러시아 및 간도 등의 열렬한 애국지사들의 서명을 첨부하는 데 1개월여의 기간이 걸린 때문이었다. 선언문들은 당시에 국제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던 프랑스어로 대부분 작성되었고, 러시아 정부에 보내는 것은 러시아어를 사용하였다. 선언문에 대표로 서명한 사람은 유인석 의병장이었는데, 거기에는 항일독립투쟁의 대선배이자 대학자인 유인석을 중심으로 광복운동을 통합시키려는 이상설의 사려 깊은 배려가 있었다. 이상설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아는 유인석 의병장은 그 자신이 위정척사의 최우두머리로서 상투까지도 간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미각국에 보내는 선언문에 서양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알파벳으로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는 융통성을 보였다.

 

성명회의 활동이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어 가자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는 일제는 주무 대신(主務大臣)인 계(:가쓰라)가 러시아에 직접 가서 러시아당국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고, 노일 양국 간 체결한 범인 인도(引導)에 관한 조약에 의거하여 이상설유인석이범윤이규풍 등 성명회의 주동 인물들을 체포하여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공산혁명전야의 복잡한 국내사정 때문에 일제와의 분쟁을 원치 않던 러시아당국은 이상설을 비롯하여 성명회 및 13도의군의 간부 20여 명을 체포하고 투옥하는 한편 러시아에서의 대한인들의 일체 정치활동을 금지해 버리고 말았으며, 이상설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당했다. 그리하여 모처럼 결성되려던 13도 의군은 물론 성명회마저도 발족한 지 불과 한 달도 채 못 되어 해산지경에 이르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성명회와 13도 의군에 대한 러시아당국의 탄압조처에 크게 실망한 도총재 유인석은 4244(1911) ()1월에 유정구(柳亭口)로 이동했다가 다시 2월에는 운현산(雲峴山)으로 거처를 옮겨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러시아당국자들로서는 대한인들과 직접 다툴 이유가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심으로는 일제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대한인들을 이용해서 만일에 발생할지도 모를 일제와의 전쟁 때 연합전선을 펴려는 속셈도 있었기 때문에, 간부들을 일제에 인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다음 해인 4244(1911)부터는 대한인들의 민족운동에 대해서 묵인 내지 방조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여 투옥했던 간부들을 일찌감치 석방하는 등 호의를 보여주었다. 이에 힘을 다시 얻은 애국지사들은 4244(1911) 519일에 이종호김익용강택희엄인섭 등이 발기하여, 그 다음날인 520일에는 성명회의 이념을 계승한 보다 강력한 항일투쟁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해삼위의 신한촌에서 발족시켰다. 그리고 그동안 은둔하고 있던 유인석을 권업회의 수총재(首總裁)로 추대하여 진용을 재정비했다.

 

애국지사들은 권업회 활동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하여 러시아당국의 공인을 신청했으며, 마침내 극동총독인 곤닷지의 허가를 얻어내기에 이르러서 합법적인 활동에 들어감으로써 노령에서 대단히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해 갈 수 있게 되었다. 권업회는 그 이름대로,

 

일자리를 잃은 동포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직업에 충실토록 하고, 생활상 저축을 장려하고, 동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는 마음을 견고하게 하여 문명스러운 행동을 도모함에 있다.”

라고 하여 일견해서 일종의 경제주의적 단체인 것 같았으나, 그것은 합법단체로서의 등록을 위하여 표면에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초대 총재로 추대된 최재형4245(1912) 초의 권업회 발회식(發會式)에서,

우리 동포는 한갓 국권회복을 부르짖으나 자활의 길이 서지 않으면 하등의 공을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각자 일하여 재력을 만들고 상당한 준비를 하여 일조에 기회가 도래하면 일거에 대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

라고 역설한 바와 같이 본격적 광복투쟁을 위한 준비기관이자 노령과 간도에 있어서의 광복운동의 총본산이었던 것이다.

 

극동총독 곤닷지는 그러한 내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권업회의 명예회원으로 자진하여 추대되었고, 그 후 일제로부터의 항의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일제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권업회를 비호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권업회는 이상설 등이 주동이 되어 약 3년간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많은 활동을 하면서, 대한국인들이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도록 민족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갔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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