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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대한제국의 '간도통치' 전시하라!

간도(間島)와 독도 영유권을 확립하고 대한국 영광의 112년 역사를 바로세워야

김민수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10/22 [13:18]

고궁박물관,대한제국의 '간도통치' 전시하라!

간도(間島)와 독도 영유권을 확립하고 대한국 영광의 112년 역사를 바로세워야

김민수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10/22 [13:18]
▲ 요녕성 심양에 위치한 청태조가 머문 자금성 입구    © 플러스코리아

 
영토 주권을 결정할 때 그 지역에 누가 먼저 실제적인 행정권을 행사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중국은 중국의 세력 아래 있던 모든 지역이 자국의 통치 영역이라고 주장하며 부여-고구려-발해를 모두 중국 고대 국가에 포함시키고 있다. 비록 신라-고려-조선이 북진정책을 펴서 영토 확장을 꾀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국경을 유지했고, 원이나 명대에는 양국 국경이 기본적으로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를 오가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서조동화록(光緖朝東華錄)'에 의하면, 1881년 청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의 명령을 받은 지부(知府) 이금용(李金鏞)은 황무지를 답사하다가 중국인이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에 조선인이 이미 8구(區) 8,000여상에 달하는 땅을 개간하였고 함경도 자사(刺史)가 지권을 발급하고 등록하여 그 지역을 조선령으로 간주한 것을 발견하였다.
 
중국 진,한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을 축조하였고 당(唐) 태종은 만리장성 북쪽의 이민족국가를 침략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져 만리장성 북쪽의 돌궐(突厥)을 침략하는 등 위협적이었으므로 고구려는 당과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고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했다.
 
▲ 중국 당국에 의해 궁굴이 축소되었다.     © 플러스코리아



중국이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처럼, 고구려(高句麗) 연개소문 또한 외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인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는데 북간도 지역인 부여성(扶餘城:농안)에서 시작하여 서간도 지역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비사성(卑沙城:대련)에 이르는 1천리가 되는 장성이었다.

조선은 세종에서 성종까지 4군 6진을 확보하고 수차례 대규모로 여진족을 정벌하였고 효종은 북벌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철종 말에서 고종 초 사이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하며 각종 자원이 풍부한 간도(間島)를 개척하여 농경지를 만들었다.

1869년 조선에 파견되었던 일본 외무성 관리가 일본 정부에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를 제출했다. 이 내탐서에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조선 영토가 된 시말(始末)에 대해 조사하고 울릉도와 독도(獨島)는 조선령이라고 결론지은 내용이 나와 있다. 1877년 일본 정부 최고 권력기관 태정관(太政官)은 태정관 지령문(太政官指令文)을 통해 울릉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환구단(圜丘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광무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여 대한시대가 시작되어 대한제국의 국체 및 영토가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

▲ 황후의 침실 내부    © 플러스코리아


 
 
 
 
 
 
 
 
 
 
 
 
 
 
 
 
 
 
 
 
 
 
 
 
 
 
 
 
대한국(大韓國)은 한반도 간도(間島) 제주도 대마도(對馬島) 녹둔도(鹿屯島) 동해(East Sea)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북으로는 말갈(靺鞨:간도)에서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받은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일(統一)했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국 정부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독도(獨島)를 포함시키고 이를 대한국 관보를 통해 공포하였고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間島)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였으며 1905년 11월 17일 고종황제가 비준하지 않아 불법, 무효인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 9월 4일 간도의 이권을 얻기 위해 불법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대한제국령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불법 양도했다.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일제에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大韓國)은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한민족사 최초로 주권재민, 삼권분립을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되어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 광복(光復)을 하였고 대한국 국체 및 영토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1909년 11월 대한국(大韓國)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태극기(太極旗),애국가,경운궁,환구단(圜丘壇),국새,칙령(勅令),동해(East Sea), 독도(Dokdo),간도(間島)를 적극적으로 전시 홍보하여 역사적,국제법적 간도(間島)와 독도 영유권을 확립하고 대한국(大韓國) 영광의 112년 역사를 바로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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