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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찾기]광개토태왕의 '아리수(압록강)'는 어디인가?

(1부) 대제국 고구려의 초기 강역으로 본 동북공정의 허구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1/20 [14:41]

[역사찾기]광개토태왕의 '아리수(압록강)'는 어디인가?

(1부) 대제국 고구려의 초기 강역으로 본 동북공정의 허구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1/20 [14:41]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4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고구려의 초기 강역으로 본 동북공정의 허구
(2부) 두 무덤(이제묘)이 밝혀준 고구려의 강역

(3부) 광개토태왕 비문의 염수와 토곡은 어디?
(4부) 덕흥리 고분으로 본 광개토태왕의 강역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들은 중국에서 대대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게다가 일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역사왜곡 사업인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우리의 위대한 역사인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이 엄청난 음모에 이론적으로 전혀 대항을 못하고 있다. 

단지 우리 정부나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동북공정에 대해 욕하고 울분을 토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 이유는 이 나라 사학계의 이론이 일제의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의 역사교과서 이론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고 막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밝히고 새롭게 조명해야만 중국의 역사 침탈을 막을 수 있다 하겠다. 그 위대한 고구려 역사 회복의 핵심에 광개토태왕이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의 강역을 제대로 밝힘은 고구려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일이요, 우리 역사의 진실의 전부를 제대로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 광개토태왕 이전의 고구려 강역

우리는 흔히 광개토태왕을 동양의 알렉산더대왕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 표현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은 알렉산더대왕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기 때문이다. 후에 몽고의 징기스칸이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단군과 광개토태왕의 후예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실체를 밝힘에 있어 가장 애로사항은 사료의 부족이라 하겠다. 중국은 얼마나 광개토태왕에게 초토화 되었는지 관련 기록이 전무하다. 아예 두려움의 대상인 광개토태왕에 대한 기록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업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에서 고의로 그 기록을 지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인이 쓴 고구려의 사서도 현재 전하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 고구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삼국사기>에서도 광개토태왕의 진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500년과 일제 강점기 36년을 거치면서 관련 기록들이 많이 변조 왜곡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광개토태왕 시절의 최대 강역을 밝히려면 그 이전의 고구려의 강역을 알아야 한다. 
 
▲   교과서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의 영토. 일제가 그려준 그 지도 그대로 아직까지 우리 교과서에 실려있다.
 


1. 고구려의 초기 강역 확장

고구려는 B.C 58년 북부여의 7대 단군이었던 추모대제(주몽)가 B.C 37년 고구려로 국호를 바꾼다. 추모대제(주몽)은 년호를 ‘다물’로 하여 활발한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황제들은 추모대제의 뜻인 다물정신을 이어받아 고토였던 광활한 단군조선의 강역의 회복을 국가의 기치로 내걸었다.  

2대 유리명제를 거쳐 3대 대무신제로 오면서 단군조선의 옛 강역을 상당히 회복한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의 치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 모본왕 2년(A.D 49년) 기사로 나와 있는 한의 북평, 상곡, 태원, 어양을 습격하였다는 기록이고, 개마를 토벌하고 동부여와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동쪽의 옥저와 낙랑군의 정벌이다.  

<삼국사기>에 대조대왕 3년(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漢兵)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생략되어 있다. 이 요성 10성의 지명에 대해서는 한단고기가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식민사학의 이론을 따라 이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아래 한단고기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안시(安市)는 개평(開平) 동북 70리,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석성은 건안의 서쪽 30리,
건흥은 난하(灤河)의 서쪽,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남쪽,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
(이 지명들은 수양제와 당태종과의 전쟁 시 다 나온다)
* 당태종이 도망가다 빠진 요택은 현 하남성 제원시 근방의 현 황하습지로 보인다.

▲   현 지명대로 민족사학계가 그린 북경 동쪽 요서 10성의 지도. 이것도 중국의 지명조작에 완전히 속은 지도이다.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 28년(65년) 개마(盖馬), 구려(句麗), .... 서안평(西安平)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위 요서 10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추가로 쌓은 성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서안평이라는 중요한 지명이 있다. 서안평(西安平)은 한과 고구려가 국경을 이루는 중요한 요충지로 사서에 숱하게 나타나 서로 뺏기고 빼앗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8대 신대제 때는 “한나라 대군(10만)과 싸워 말 한 필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명림답부의 좌원대첩과 고국천제 때에는 “베어버린 적군의 머리가 산더미같이 쌓였다”라는 좌원친전이 있었다.  

<고구려사초.략> 13대 서천대제 5년 기록에 “진(晋)이 유주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平州)로 삼았다. 일설에 범양, 상곡, 북평과 요서를 말하고, 또 일설에는 창려, 요동, 대방, 낙랑, 현도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진의 땅이 아니었다. 교위, 태수, 참군을 허설하였으니 역시 웃을 일 아니겠는가?”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진(晋)나라는 실제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고구려 일부 영토의 행정구역 개편과 관리를 임명했다는 역사왜곡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하겠다.  

2. 고구려의 불우한 시기

고구려에 화려한 과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양대제(동천왕 19년 AD246년)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도성인 환도산성이 함락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고구려는 미천대제의 중흥기를 맞이하다, 고국원제가 41년(AD371년)에 백제의 영웅인 근초고/근구수왕에게 평양성에서 전사를 당하는 비극을 맞기도 한다. 

▲   1906년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관구검기공비.  이 유물로 인해 집안 근처가 고구려의 도읍지로 변조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다르다. 관구검은 집안까지 오지 않았고 산서성 남부에 있는 환도산성을 함락시킨다.  관구검기공비는 고의로 중국이 옮긴 것이 확실하다.
 

백제 근초고/근구수왕에게 남쪽의 많은 강역을 잃고 북으로 밀려난 고구려는 소수림제와 고국양제의 중흥기를 거쳐 드디어 민족의 대영웅 광개토대제가 나타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즉위하자마자 처음 치르는 전투가 그 유명한 관미성 전투이다. 백제의 진사왕은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사냥터에서 듣고 놀라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3. 신당서 열전 145-동이전에 나타난 고구려의 기록

高丽,本扶馀别种也。地东跨海距新罗,南亦跨海距百济,西北度辽水与营州接,北靺鞨。
고려는 본 부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땅 동으로 바다를 건너면 신라가 있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면 백제가 있다. 서북에서 요수를 건너면 영주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이 있다.  

其君居平壤城,亦谓长安城,汉乐浪郡也,去京师五千里 而赢随山屈缭为郛, 南涯浿水,王筑宫其左。
그 나라 임금은 평양성 또는 장안성이라 일컫는 곳에 기거하며 한나라 낙랑군 땅이었다. 경사(장안)로 부터 오천리(? 과장)를 가면 산을 따라 굴곡지게 휘감으며 성곽을 이루고 남쪽 끝에는 패수가 있다. 왕은 북쪽(좌)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又有国内城、汉城,号别都。
또한 국내성,한성이 있는데 또 다른 도읍이라고도 한다. 

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위의 기록을 압축해서 지리비정을 간단히 하면 압록수는 마자수라고도 부르며, 그 동쪽에 국내성이 있고, 서남쪽으로 안시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즉 압록수변에 국내성, 평양성, 안시성, 서안평이 모두 위치해야 지리비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사학은 압록수를 현 압록강, 국내성을 집안, 평양성을 평양,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 단동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국내성(집안)은 압록의 북에 있으며, 평양성(평양)은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변에 있고 안시성은 요동 요하 강변으로 비정하였으므로 이 지리비정은 틀리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압록수가 어떤 강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분하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으로 검색을 하면 이상한 기록이 나타난다.

汾河 : 源出河南商水县西,东流龙项城至沈丘县西入濄河。汾水亦曰汾河。
분하 : 하남 상수현 서쪽에서 나와 용정성으로 동류해 심구현 서쪽의 과하로 들어간다. 분수는 옛 분하이다.

 
▲ 산서성의 주 강인 분하가 원래 하남성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는 고금지명대사전. 그렇다면 현 분하의 원래 이름은? 그것은 바로 압록수(아리수)인 것이다.


이 기록은 현 산서성의 주 강인 현 분하가 옛날에는 하남성에 있었단 말이다. 상수현, 심구현, 과하를 검색해도 모두 하남성으로 나타난다. 즉 산서성에 있는 현 분하는 옛날에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른 이름이란 다름 아닌 '압록수(아리수)'인 것이다.  

압록수를 현 분하에 가져다 놓고 위 신당서의 지리비정을 하면 아래의 지도와 같아진다. 희한하게도 신당서의 기록과 딱 맞아 떨어진다. 즉 서안평을 운성시 하진시로 보이며, 안시성은 여량산맥의 남단으로 보이며, 그리고 산서성의 주 도시들인 후마, 임분, 평요, 태원 등이 모조리 압록수의 바로 동쪽에 있으니, 고구려의 평양성과 국내성도 이 도시들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한서지리지에 압록수는 2,100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현 분하의 길이인 716Km와 크게 차이가 없다. 즉 중국과 일제는 이러한 지명 조작을 통해 우리의 역사 강역을 축소시키고 왜곡하는 작태를 부렸던 것이다. 이것 뿐 만이 아니다. 

▲  압록수는 현 분하이다.  고죽성이 압록수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희한하게도 압록수를 현 분하로 비정하고 나니 신당서의 기록과 완전 일치한다.  고대인들은 황하를 바다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죽성이 그 근거를 밝히는 열쇄이다.
▲고구려의 핵심강역은 산서성이고, 그 후방인 하북성, 내몽고, 동북삼성, 한반도까지 모조리 고구려의 초기강역이다. 중국 대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큰 강은 벼로 없다. 그 강이 현 분하로 원래 압록수인 것이다.
 다음 주에 " (2부) 두 무덤(이제묘)이 밝혀준 고구려의 강역"이 연재됩니다.
 
[성훈 칼럼니스트는 지난 2008년 9월부터 12월까지 3개월이 넘도록 중국현지에서 역사탐방취재를 하고 귀국하였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행 강단사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우리 역사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회수를 거듭할 수록 밝혀질 것입니다.  본지에서는 더욱 확실한 증거와 사료 및 자료를 발굴하고 찾기 위해 2차 역사탐방 기획취재 할 예정입니다. 편집국]

견해 09/01/20 [22:26] 수정 삭제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

국내성이 현 압록강지역이여도 마자수는 국내성 서쪽으로 있는 강은 맞는 것이고, 바다는 황하가 아니라 그냥 황해로 흘러 간다가 맞다 봄. 황하였으면 황하라고 표현했을 것임. 바다와 강하나 구분못하는 고대인들이 아님.

▲1906년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관구검기공비. 이 유물로 인해 집안 근처가 고구려의 도읍지로 변조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다르다. 관구검은 집안까지 오지 않았고 산서성 남부에 있는 환도산성을 함락시킨다. 관구검기공비는 고의로 중국이 옮긴 것이 확실하다.

==> 자신들의 논리에 안 맞다고 부정하고 의심하는 것도 문제가 있음. 현재 출토되는 백제유물들도 그럼 믿을 수 없는 조작? 역사는 근거없이 주관적인 해석으로 지나치게 과장시켜도 문제고,지나치게 왜곡축소시켜도 문제임. 그래서 객관성이 중요하며, 모든 역사학자들의 치열한 논쟁과 합의가 중요함. 고구려사를 중국화하려는 중국정부도 고구려유적유물이 발견되면 마땅히 공개할 것인데, 만주.한반도.내몽골.요서지역외에 크게 발견되어 공개된 것들은 없음.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광개토태왕이 개척하고 다물한 영역이 다 나옴. 대략 한반도.일본열도(대마도.구주지역).만주.내몽골.요서.산동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음. 농경.수렵생활을 하는 고구려와는 달리 북방 유목민들인 흉노의 피를 받은 징기즈칸은 초원사람이기 때문에 동서무역을 연결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흉노제국의 부활을 위해서 말을 달릴 수 밖에 없었음.
성훈 09/01/21 [12:43] 수정 삭제  
  강단사학계가 비정한 국내성(집안)은 압록수 북서에 있으므로 압록수 동에 있어야 한다는 신당서의 기록과 안 맞습니다. 그리고 평양성이 압록의 동남에 있어야 하는데, 대동강변에 있습니다. 안시성도 압록수 북에 있어야 하는데 요하 강변에 있으니 이 지리비정은 완전 엉터리라고 봐야 합니다.

압록수를 현 분하로 보면, 서안평은 산서성 운성시 하진시이고, 안시성은 여량산맥 남단, 평양성과 국내성은 압록수(현 분하) 동쪽에 거의 붙어있는 후마, 임분, 평요, 태원 중 하나일 겁니다.

고구려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백제 유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말을 흐리려는 의도이며, 현재 발굴된 백제 유물이 거기서 나왔다고 그곳이 백제의 핵심 강역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물은 모조리 고구려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한, 위, 진, 당의 유물로 둔갑이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나 흉노나 몽고나 다 단군의 후손인 동이족입니다. 이들의 피가 서로 다른 민족으로 만든 것이 바로 중국의 수법입니다. 동북공정은 동이족을 서로 다른 민족으로 만들어 분열시키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수도문제 09/01/22 [20:29] 수정 삭제  
  강단사학이든 재야사학이든 누가 진실에 근접하느냐의 문제이다. 강단사학을 매도할 것도 아니고, 재야사학도 매도할 것도 아니다. 문제는 과장이나 왜곡이 혼란을 부추기는 근원인 것이다.
 
중국의 [사서]나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초기수도 명칭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고,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골본(忽本)으로 적혀 있다. 졸본(卒本)은 수도라는 뜻으로 원래 명칭은 골본(忽本)이다. [고리는 골,코리,구리.구려.고을이다...산골짜기에 온기종기 동네를 이루어 수렵생활을 했고, 당시 최첨단 산업기술인 제철기술을 가지고 있어 여기저기에서 나라을 세우는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종족이라는 의미다] 중국의 사서에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는 것은 중국의 사가들이 고구려가 다시 일어나 강국이 되지 못하도록 기원하는 마음에서 원래 명칭대로 골본(忽本)으로 적지 않고 병사'졸'로 표기하여 졸본(卒本)으로 적었기 때문이고, 신라사관론자였던 김부식의[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는 것은 [삼국사기]를 기술할때 중국의 사서를 그대로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내용을 100%부정해서는 안되며, 한중일 사서들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비교분석하여 내용의 사실여부를 확인해야 한다.사서들을 보면 고구려는 대략 총 14번 수도를 이전한다.
 
고추모가 남하하여 개국한 고구려 첫 수도는 비류수위의 골본성이다.
 
1986년경에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면서 고구려 유적으로 인정되었다
 
"주몽은 오이,마리,협보와 졸본천(비류수)에 이르렀으며 비류수가에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했다"  (삼국사기권13 )
 "비류곡의 서쪽에 있는 산성위에 수도를 정했다."   (광개토태왕비문)
 "주몽이 오이,마리,협보와 흘승골성(오녀산성)에 이르러 살며 고구려라 국호를 정했다."  (위서 권100,열전88)
 

고구려 첫 수도-비류수 위의 골본성(오녀산성)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요 휘는 주몽(추 혹은 중해라고도 함)이다..중략..졸본천에 이르러 토지가 비옥하고 강산이 험고함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 위(골본성)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 始祖 東明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一云衆解)..中略..至卒本川(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皇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東明聖王) 3-4년조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35년에 골령(골본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다음해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동명성왕3년(B.C 35년) 봄 3월 골령에 황룡이 나타났다. 三年 春三月 黃龍見於골嶺」
「동명성왕4년(B.C 34년) 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四年 秋 七月 營作城郭宮室」 
위 “골”은 고을 또는 수도를 뜻하는 "골(忽)"을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으로 골령은 산 위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황(黃)은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고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위 문구는 나라 기틀이 잡히자 졸본천(卒本川)에서 방위하기 쉬운 인근 산 위로 수도를 옮겼다는 뜻이다.
 
 고구려에 마자수가 있는데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물의 색이 기러기 머리색이라서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을 지나 염난수와 합쳐 서남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有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淥水 歷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西南 至安市 入于海」新唐書 高句麗傳
「서개마현 마자수가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쳐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른다. 2개 군을 지나가는데 길이가 2천 1백 리이다. 西蓋馬 馬訾水 西北 入鹽難水 西南 至西安平 過郡二 行二千一百里」前漢書 地理志 玄菟郡 西蓋馬縣 위 문구에 의하면 마자수(馬訾水)를 일명 압록수(鴨淥水)라고 불렀고, 이 마자수는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와 합쳐 서남으로 흐르며 길이가 2,100리이다. 압록수라 불리운 강 중에서 위 요건에 맞는 강은 동요하이다. 위 문구에 의하면 마자수(馬訾水 : 동요하) 방면에 있는 국내성은 마자수가 염난수(鹽難水 : 서요하)를 만나기 전 서북으로 흐르는 곳의 동쪽에 있다. 마자수가 서북으로 흐르는 곳은 동요하(東遼河) 상류이므로, 위 문구에 나오는 국내성은 동요하 상류 동쪽에 있다. 이곳은 위치상으로 요원시(遼原市) 방면이다. 고구려가 유리왕(琉璃王) 22년에 수도를 장춘 방면에서 요원시 방면으로 남천한 것은, 유리왕 13년경부터 기근과 질병으로 마음 고생이 심하였고, 유리왕 14년에 인근 길림 방면의 동부여(東夫餘) 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왕자를 인질(人質)로 잡히라고 요구하는 등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註 유리왕 13년조의 "봄 정월 형혹성이 심성을 지켰다. 春正月熒惑守心星"는 문구는 기근과 질병으로 마음 고생이 심하였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으로, 고대인들은 형혹성(熒惑星)이 질병과 기근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琉璃王) 27년조에 의하면 고구려가 장춘 방면에서 요원시(遼原市) 방면으로 남천하였을 때 장춘 북쪽에는 황룡국(黃龍國)이 있었다. 「유리왕(琉璃王) 27년(A.D 8년) 봄 정월 왕태자 해명이 고도에 있어 힘이 세고 용맹을 좋아하는지라 황룡국왕이 그 소문을 듣고 사자를 보내 강궁을 선사하였더니..二十七年 春正月 王太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註 위 황룡국은 삼국사기를 지을 때 뒤에 붙여진 명칭으로 적은 것이다. 요사지리지 용주 황룡부조에는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는 본래 발해의 부여부(夫餘府)였다. (요)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돌아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죽었다. 황룡이 나타나 명칭을 바꾸었다..중략..개태(開泰) 9년에 성을 동북쪽으로 옮겨..중략..다시 설치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그 뒤 금 나라는 그 곳에 융안부(隆安府)를 설치하였는데, 대청일통지에 의하면 융안은 뒤에 농안(農安)으로 음이 바뀌었다.]위에서 북옥저(北沃沮 : 長春 방면) 일명 눌현(訥見)이 고도(古都)로 적혀 있다. 이는 고구려가 요원시(遼原市) 방면으로 남하(南下)하기 전 고구려의 수도가 장춘(長春) 방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왕(琉璃王) 27년조 문구는 고구려가 장춘 방면에서 요원시 방면으로 남하하였을 때, 태자(太子)가 유리왕(琉璃王)을 따라 오지 않고 고도(古都) 장춘 방면에 남아 있으면서 힘 자랑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네번째 수도 국내성 
 
고구려는 유리왕(琉璃王) 28년경 수도를 요원시(遼原市) 방면에서 혼하상류(渾河上流) 방면으로 다시 남천(南遷)하였다. 
「유리왕(琉璃王) 28년(A.D 9년) 가을 8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망하여 가로 대, "우리 선왕이 선군 동명왕과 서로 좋은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하를 꾀어 이곳으로 도망하여 인민과 성곽을 완취하여 국가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무릇 나라는 대소가 있고 사람은 장유가 있으니, 소로써 대를 섬기는 것은 예요 유로서 장을 섬기는 것은 순이다. 이제 왕이 만약 능희 예와 순으로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 국운이 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전키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라를 세운 시일이 얼마 되지 아니하고 백성과 병력이 아직 잔약하니 형편상 부끄러움을 참고 후일을 기다려야 된다 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와 상의한 끝에 答하기를 "나는 해우에 떨어져 있어 예의를 듣지 못하였더니 이제 대왕의 가르침을 받으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 讓王曰 “我先王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禮也 以幼事長者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難矣”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  ” 乃與群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註 "나는 해우에 떨어져 있어" 문구는 동명성왕 본기에도 나오는데, 그 위치는 비류수 상류 방면이다.]

▲ 골본성(오녀산성)에서 바라본 혼강(비류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琉璃王) 37년조에는 물(비류수)에 빠진 왕자를 비류(沸流) 사람이 찾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면 고구려의 수도는 그때까지도 비류수(沸流水:혼하) 상류 방면에 있었다.
 
「유리왕(琉璃王) 37년(A.D 18년) 여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으니 왕은 애통하여 사람을 시켜 그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뒤에 비류 사람 제수가 발견하여 알리니 예로써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을 주었다.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田十頃.」
 
고구려는 유리왕(琉璃王) 37년에서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A.D 21년) 사이에 수도를 비류수(沸流水:혼하) 상류 방면에서 집안(集安)으로 남천(南遷)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수도를 다시 남천한 것은 동부여왕(東夫餘王) 대소(帶素)가 유리왕 28년(A.D 9년) 8월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복속을 강요하였고, 유리왕 32년(A.D 13년)부터 고구려를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백제바로알기 09/01/22 [22:00] 수정 삭제  
  고두막의 북부여(골본부여)후손 구태가 후한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배후에서 공격하는 과정에서 대방고지(황해도)에 나라를 개국한다. 그것이 구태백제다. 구태백제세력은 남하하여 온조세력을 통합하고 마한지역과 일본열도까지 영향권안에 둔다. 호남-오사카-한강변의 전방후원분 무덤들이 바로 구태백제세력의 지배권을 나타내는 흔적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처럼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구태백제는 왜(=백제세력의 남하로 인하여 단군조선시대에 마한영역이였던 일본열도로 이주한 마한세력)와 함께 고구려를 자주 공격하나, 결국 장수왕때 한성백제(서울)를 빼앗이고 고마(곰나루=공주)로 수도를 이전한다. 중국문헌에 구태세력의 중심지가 고마로 기록된 배경이다. 백제황족들은 시조 구태에게 제사지냈다는 것이 중국문헌의 기록내용이다. 구태백제는 근초고왕때부터 구태백제세력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에 진출한다. 마한의 선박.항해술을 이용하여 이후 일본-중국-동남아-인도를 연결하는 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한다. 한반도 서남해지역(백제멸망이후 해상을 장악했던 백제의 후예 장보고와 후백제 견훤세력의 중심지)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드디어 고두막의 후손 구태가 동이강국이 되었다고 중국사서들이 기록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백제가 지배하는 중국동남해안 지역을 서백제라고 하기도 한다. 신라 김춘추가 당고종을 꾀여 결국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대가 산동을 출발하여 백제본국 수도(부여)를 정벌하고 부여 정림사지5층 석탑에 소정방이 백제정벌문을 남긴 것이다. 이후 중국지역의 백제세력은 대부분 고구려로 흡수되었고, 일본열도의 왜(마한)세력이 백제부흥군과 연합작전으로 금강유역에서 나당연합군과 전쟁을 벌였으나 바람이 왜(마한)수군쪽으로 불어 결국 패배하고 백제는 문을 닫고 의자왕과 백제황족들은 당나라로 끌려가 의자왕은 북망산에 묻혔던 것이다. 자꾸 백제중심지를 중국에 설정하려는 자들은 문헌공부를 다시 함으로써 중국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논리를 펴지 말기를 바란다.
라디오 09/01/22 [23:11] 수정 삭제  
  광개토비문에 나오는 비류곡 西成山은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추모가 즉위하기전에는 東成, 南成등에서 살다가..즉위한 후로는 西成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개토비문에 나오는 문구는 '비류곡 서성산'이라고 말해야 옳아요.

라디오 09/01/23 [05:50] 수정 삭제  
  요즘 한순근씨가 자기 글 허락도 안 받고 퍼 간다고 길길이 날뛰면서..고소,고발을 즐기던데..
위의 '고구려 수도문제'라는 사람은 한순근씨 본인이 아니라면 글을 퍼 왔으니..
저 사람도 고소하라고 알려 줘야겠군요.
이병도손자이건무 09/01/24 [10:23] 수정 삭제  
  언제나 많은 역사정보를 주시는 성훈선생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어우름 09/02/01 [02:22] 수정 삭제  
  이만주가 차지한 올라산성은 원래 현재의 요동 개원일대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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