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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족?

[넷칼럼]"민족의 정신과 에너지는 역사를 바로 아는데서 나온다"

민족시대 | 기사입력 2008/12/03 [10:59]

[역사추적]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족?

[넷칼럼]"민족의 정신과 에너지는 역사를 바로 아는데서 나온다"

민족시대 | 입력 : 2008/12/03 [10:59]

[네티즌칼럼]역사학자들은 아래와 같은 개요로 우리 민족사와 인류사를 큰 줄기로 인식할 줄 알아야 할 것이며, 언론방송은 아래와 같은 개요로 우리 민족사와 인류사를 역사다큐화하여 인류사의 주역의 실체를 밝힘으로써 한민족의 위상을 부각시키고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세계공용어는 세계 언어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듯이 가장 과학적인 대한민국의 한글일 수 밖에 없으며(세계인들이 한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면 세계문화가 한국화하여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의 중심지역인 한반도에 세계연방을 총괄운영할 수 있는 세계단일정부가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마고시대(모계사회)=>환(한)국 시대=>신시 배달국 시대=>부여->고구려->대진국(발해)->고려가 민족의 정통성을 부여받는 계보라 할 수 있겠습다. 민족의 정통성을 부여받았다면 먼저 자주성과 자립성이 강해야 하고 자주자립성을 전제로 개방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대매국노선은 정통성과는 무관하다고 해야 합니다. 

한반도는 고인돌과 공룡의 천국으로 가장 오래된 땅이며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한]의 발원지며, 동이의 고향입니다. 유라시아 빗살무늬토기문화가 발원한 지역입니다. 

서양언어인 인도-유럽어족의 뿌리가 중앙 아시아에서 인도유럽으로 이동한 아리안족들의 산스크리트어인데, 이 산스크리트어가 바로 고대 한국어입니다. 그러면 서양언어의 조상어는 한국어라는 의미가 됩니다. 즉, 한반도 언어가 세계언어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고급문명을 가진 민족의 이동과 함께 전파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 인더스 문명-로마문명을 낳은 그리스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뿌리가 슈메르 문명입니다. 슈메르인들은 바로 검은 머리에 키가 작은 몽골리언들(정통 동이족의 체형=훈족의 아틸라도 키가 작았다)이였음이 고고학적으로 드러났죠.  

잉카.마야.아즈텍 문명을 건설한 주역으로 백인들에게 거의 멸종당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동이족이죠. 한국문명을 낳은 우리 민족의 시원이 되는 마고성은 어디일까요? 2만년 전 지금의 서해는 황하와 대동강.한강이 만나는 아리수가 흐르는 대평원이였습니다(호주 시드니 지질학과 증명).그러나, 빙하가 녹으면서 바다가 된 거죠.이후 한반도 중남부지역으로 이동한 거죠. 중국 산해경에 무궁화꽃이 피고, 군자.대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기록한 곳이 한반도 중남부지역입니다. 고로 한반도가 마한으로 이름지은 역사적 배경이 다 마고성과 연관된 것입니다. 마고성이 바다에 잠긴 후 마한족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 거죠. 

박제상의 [부도지]기록에 따르면 이 때 북쪽 천산으로 이동한 족속이 황궁씨인데, 이 후손이 유인씨와 12한국연방을 건설한 한인씨죠. 그래서 한반도에서 발원한 환국문명의 중심지가 중앙 아시아 천산산맥지역으로 볼 수 있으며, 황궁씨.유인씨가 이동해 갔을 한강->대동강->압록강 주변에 고인돌 문명이 건설되었을 것임은 확실합니다. 그 흔적이 바로 압록강 주변에 존재하는 1만 5천기의 규모가 작은 피라미드 무덤군들이죠. 이 피라미드 무덤군들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 단군이전의 유적입니다. 이 피라미드가 중국문명의 시원이 되는 홍산문화의 피라미드 문화의 기원이 되었으며, 중국 서안지역과 티벳지역의 거대한 피라미드 무덤군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피라미드 무덤의 원형이 한반도 남부지역 고인돌 방식인 남방식 고인돌(땅을 파서 석관을 만든 후 시체를 묻고 흙을 덮은 후 고인돌을 올리는 방식)방식입니다. 세계 고인돌은 한반도에 70%가 분포하고 있으며, 한반도 중에서도 마고성으로 추정되는 서남해 지역과 가까운 호남지역에 대거 분포되어 있습니다. 진돗개는 유전학적으로 세계 개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미국 생물교과서:세계 개들의 조상은 유전학상 동북 아시아 개들이다.그러나 동북 아시아 개들의 조상은 진돗개다.) 또한 한자 [바다 해]의 원형인 갑골문자를 보면 여성 지도자를 의미하고 있다. 바다속에 묻힌 마고성을 문자로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역사추적]민족을 공멸시킨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족이었다?



[제1회]
2부작 [문무왕릉비의 비밀]
제1편: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방송 : 2008. 11. 22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고정훈 PD








새롭게 시작하는 ‘역사추적’
그 첫 번째 시간!

<문무왕릉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신라의 시조인 성한왕은 누구인가?
투후는 누구인가?
과연 신라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진실’이 비문 속에 숨어있다.



▲문무왕릉비 원형의 복원




1. 15대조 성한왕(星漢王), 그리고 투후(?侯)의 의미?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태조는 박혁거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무왕릉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일에 싸인 인물 성한왕. 그리고 문무왕릉 비문에 등장하는 또 다른 글자 <투후>와 <15대조 성한왕>은 비문의 주인공 문무왕의 조상에 대한 계보인가?
▲문무왕릉비 조각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투후’


2.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문무왕릉 비문에 기록된 ‘투후’. 한서에 의하면 투후는 한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의 태자 김일제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문무왕과 같은 김씨였다. 그는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김일제묘


3.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전7엽> <투후><전7엽><15대조 성한왕>등 암호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바로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과 흉노왕의 태자였던 투후 김일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암호들이다.
▲문무왕릉비문의 탁본
▲무위시 김일제 석상


4. 김알지는 정말 금궤에서 태어났을까?









계림의 금궤 짝에서 돌연 등장하는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정말 신라 김씨는 흉노족일까? 초기 신라 무덤과 흉노족 무덤은 모두 적석 목곽분이라는 동일 양식이고 동일한 오르도스형 흉노 동복(솥)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됐다.
▲적석목곽분
비문이 던지는 암호들. 그 화두에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따라 가는 역사적 ‘진실’의 추적! 미스터리 여행은 2편에서도 계속된다.


- 제2편 ‘왜 흉노의 후손이라고 밝혔나?



몰락한 흉노의 자손임을 내세운 신라 김씨 왕족. 북방의 오랑캐 족으로만 여겼던 ‘흉노족’의 후예들이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대제국을 세웠던 흉노의 후예들, 그들은 왜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 그 역사적 흔적들을 찾아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2편>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2편>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성훈 08/12/04 [14:06] 수정 삭제  
  위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초기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식민사관으로 보면 이상한 내용이겠지만,
초기 신라는 분명 흉노와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왜냐하면 초기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이 어디였는지 밝혀졌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08/12/04 [17:25] 수정 삭제  
  신라 문무왕릉비문에 시조는 김알지(김알제의 후손. 김알제는 흉노 휴도왕의 장자로 한나라 한무제에 투항하여 말들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신망을 얻음. 투국의 제후)로 기록하고 있으며, 태조 성한왕은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으로 드러났다. 문무왕릉비문에 왜 자신들을 흉노족으로 기록했으까? 당시 신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신라까지 삼키려드니 고구려.백제 유민들과 당나라를 물리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 신라 문무왕이 자신들은 중국을 굴복시킨 흉노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할 수 있다. 당나라에 온갖 사대를 한 후 결국 당나라를 끌여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사대매국매족노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여 동족인 북한을 멸족시키려는 행위다.

흉노족은 중앙 아시아를 지배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그러한 포부를 자부심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한반도에 갇혀서 주변 강대국들의 개가 되기를 자처하며 생존하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본래 북방 유목민족이였던 흉노의 기질을 상실한 반증이다. 즉, 한나라의 대대적인 소탕전과 분열작전에 사방으로 흩어져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을 지배한 훈족으로 성장하고, 일부는 한나라에 투항하여 한무제에게 충성하다가 신나라를 건국한 왕망(김알제의 증손과 친척관계로 김알제세력과 쿠테타를 도모했다가 실패하고 산동성으로 피하여 배를 타고 당시 해양루트를 타고 한반도와 일본의 무역항구인 김해지역에 도착하여 김수로세력은 김해지역에 가야를 세우고, 김알지세력은 경주로 이주하여 신라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중국과 한반도의 해양루트인 한반도 남부 해안지역에서 신나라 왕망이 주조한 화폐들이 발견되었다.

오랑캐라는 의미의 흉노(훈)는 중국인들이 부른 비하적인 표현이다. 중국문헌기록에 보면 흉노인들은 유럽인들이 훈족을 기록한 내용과 동일하게 키가 작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푹 들어가 있고, 사용하는 언어도 소란하다고 했다. 지금의 경상도 사투리도 들어보면 서로 싸우는 것 처럼 소란하다.

신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한반도3한 당시 기록한 [삼국지 동이위지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차로 중원을 통일하고 단군조선의 영토를 침략했던 진시황의 노역을 참지 못했던 단군3조선 중 진한유민들이 중국 함안.서안지역에서 한국(한반도)로 이주하자, 한반도의 토착세력이였던 "마한이 동쪽(경상도)땅을 떼서 살게 해 주었다." 같은 단군조선 사람들이니 살게 해 준 것이다. 경상도 지역에 정착한 진한 사람들은 6씨족을 중심으로 진한으로 성장하게 된다. 2차로 이 진한(경상도)땅에 부여(졸본부여 2대 단군 고무서의 딸로 추정. 고무서 딸은 3명. 둘째 딸은 고구려를 개국한 고추모와 결혼. 고추모는 졸본부여의 3대 단군. 그러나, 졸본부여 토착세력에 의해 고추모는 쫓겨나 남하하여 연타발과 소서노의 도움으로 압로강변에 고구려를 개국하게 됨. 소서노와 결혼, 고추모는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어머니 예씨부인. 고두막한이 해모수의 북부여를 쿠테타로 무너뜨리고 개국한 졸본부여 2대 단군 고무서의 둘째 딸과 결혼. 남하하여 만주의 상인의 딸인 소서노와 결혼.....박혁거세의 어머니는 고무서 단군의 첫째 딸로 추정)의 공주는 아들을 데리로 옥저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땅에 도착하여 정착하게 되는데, 이 부여공주가 낳은 아들이 신라의 시조가 되는 박혁거세다. 3차로 진한땅으로 도착한 세력이 바로 배를 타고 김해지역을 걸쳐 경주로 들어온 흉노족 김알지세력인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바로 황금문화와 편두풍습인 것이다. 황금문화는 스키타이족의 특징이기도 하다. 즉, 북방유목민족의 기원인 스키타이족의 후예들이 바로 흉노(훈)족이다. 김씨는 황금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나라에 투항한 김알제세력이 개국한 투국의 수도가 금성이였고, 신라 김씨왕족의 수도를 금성이라고 한 것이다.

흉노족의 기질은 대륙을 누비던 유목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가야 맞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우물안 개구리들처럼 우물에 갇혀서 소아병에 걸려 있다. 이들이 북한을 동족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고 김대중과 호남을 친북좌파 빨갱이논리로 매도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기원이 고구려.백제와는 좀 이질적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으로 올라가면 흉노족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다. 그리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바로 해모수의 부여이고,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이고, 졸본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다. 고구려는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부대로 중국을 격파한 군사강국이였다. 핵무기로 미국을 굴복시킨 북한은 고구려 기질을 가진 나라다. 호남과 충청도와 경기도는 백제기질을 가진 지역이다. 경상도지역은 흉노족이 지배한 지역이라 흉노의 기질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군조선시대에는 모두 한 민족이다. 고인돌.청동기.온돌이 출토되는 한반도와 진한에 해당하는 만주는 전통적인 동이의 터전이다. 일본열도은 단군3조선에 해당하는 마한의 영토다. 화북.산동지역 등 중국북부지역은 번한에 해당하고, 산동반도아래는 동이족이 개국한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존재하는 지역이다. 이 처럼 거시적인 쥬신사로 보면 단군민족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열도와 중국,나가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지역을 지배한 군사.문화강국이였다. 이것을 분열시켜버리고 원한을 심어준 실체가 바로 한반도로 이주한 흉노족 김씨왕족이라 할 수 있다. 쿠테타로 석씨왕조를 일본으로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장악한 김씨왕조는 결국에는 선비족 당나라(흉노족 김씨왕족과 혈통적으로 보면 선비족은 가깝다고 할 수 있다)를 끌여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키고 백제를 일본열도로 몰아내었다. 그리고 한일관계의 역사적 원한과 전쟁의 배경을 만들고 만다.

영남지역이 몰아주는 이명박의 정당이름이 한나라당이다. 흉노족 김알제가 투항하여 충성을 맹세한 한족이 세운 한나라와 동일한 이름에 놀라와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 도망 온 이들 소수 흉노족이 생존하기위해서는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한 짓거리를 많이 했을까를 생각하면 이들의 유전자의 특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쉽게 강자들에게 굴복하고 머리숙여서라도 자신들은 살아남고 자신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온갖 음해로 매장하고 살해한 역사로 점철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겠다. 문무왕이 죽어서라도 왜를 막는 용이 되겠다고 한 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신라에게 멸망당한 백제가 일본열도로 이동하여 일본이란 국호로 개국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변경한 백제의 침략을 경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동아시아 평화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접근해야 한다. 신라의 김씨왕족은 일본황실(백제황실)에 백제를 공멸시킨 역사적 범죄행위에 대해 먼저 사죄하고, 백제에 해당하는 일본은 과거 한반도침략에 대해 사죄하고 위안부 문제 등 피해에 대해서도 정부차원에서 피해배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한일해저터널과 관련하여 한국이 부과한 관세를 납부하고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독도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전제조건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한일관계의 제정립이며, 상호 윈윈하는 외교다. 또한 고구려에 해당하는 북한에 대해서도 화해협력노선으로 변경하고 남북합의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대북관계로 전환하여 남북이 단군을 통일의 구심적으로 통일하여 만주를 회복하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단군3조선의 광역이였던 한중일의 구심점인 단군조선의 단군을 재조명하여 동아시아 평화의 구심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쟁이라는 방법보다는 동아시아 무역과 교류를 통하여 진정한 단군조선를 회복하고자했던 고구려의 다물정신인 것이다. 또한 유라시아 대륙을 경영한 고구려의 후예인 징기즈칸의 평화노선이였다. 또한 중앙 아시아 초원지역을 지배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에 불과했던 스키타이-흉노족의 유목정신일 것이다.[윤복현]


이들에게는 이질적인 민족의 피가 흐른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처럼 남북합의도 위반하고 북한을 자극하는 대북노선으로 동족끼리 전쟁하자는 자들은 한민족이 아니라, 이민족이 명백하다!

우리가 남이가하며서 지역감정과 지역패거리주의를 부추기는 넘들은 지네만 살겠다는,민주주의하고는 하등 무관한 자들이다!!

서민대중들의 복지를 외면하고 부정한 부유층들만 살리겠다는 자들은 정치경제하고는 하등 무관한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집단일 뿐이다.

미국과 일본.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에게 무조건 머리숙이면서 굴욕적인 방법으로 생존하겠다는 자들은 주인의식이 아니라, 철저히 노예근성으로 가득한 신라의 숭당사대주의자들의 유전자들이다.

그리고 폐기처분해야할 이러한 쓰레기들이 좋다고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지지하고 선택하는 정신나간 넘들도 스스로 주인의식없는 노예근성으로 가득한 천박한 자들이다!!
1 08/12/04 [19:56] 수정 삭제  
  김알지 신화(金閼智 神話)

김알지 신화는 고려 인종23년(1145)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의 신라본기(新羅本紀) 와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으며

고려후기 충렬왕 7년(1281) 일연(一然)이 편찬한 의 기이(紀異) <김알지탈해왕대 (金閼智脫解王代) 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다.

위 두 고서(古書)에서는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에 대해 부분적으로 조금 다르게 기술(記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 신라본기(新羅本紀) 에서는 ‘탈해왕(脫解王)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金)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國號)를 삼았다.’라고 적고 있다.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서는 왕의 선조 알지는 계림에서 나왔는데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뒤에 대보(大輔)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는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우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처음이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淸)나라 유연정(劉燕庭)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해동비고(海東碑攷)에 있는 문무욍비문(文武王碑文)에 문무왕의 15대 조(祖)가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이라 하였고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비문(金仁問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김인문의)15대 祖라 하였으며 문무왕의 9대 손(孫)인 흥덕왕 릉비문(興德王 陵碑文)에도 태조 성한왕(星漢王)이 (흥덕왕의) 24대 祖라 하였다.

또한 신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아들인 金仁問의 비문에 있으며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은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金氏로 姓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 라고 했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少昊之胤)이라"고 하였으며 "남가야 시조 수로(南伽倻 始祖 首露)는 신라(新羅)와 同姓"이라고 하였다. 또 김부식은 "김유신은 왕경인(王京人)이다. 12代祖인 수로(首露)는 하허인(何許人)인지 알 수 없다. 후한 건무(後漢 建武) 18년 壬寅(AD 42)에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가락9촌(駕洛九村)을 바라보고 그 땅에 개국(開國)하여 국호를 가야(伽耶)라 했다" 고 하였다.

점필제 김종직은 "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혹은 스스로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고 했으며 "신라고지(新羅古誌)에 이르기를 김알지도 금관국 수로왕의 후요 소호금천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고 하였다.

문정창(文定昌)씨는 그의 저서 에서 "동방의 김씨는 모두 소호금천씨의 후손이요 金日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김유신은 김수로왕 후손인데 그 묘비문에 "소호지윤 칙남가야시조 수로여신라 동성야(少昊之胤 則南伽倻始祖 首露與新羅 同姓也)"라 하였으며
김수로왕의 외손인 문무왕의 능비문에 "지재생 - - - 후 제천지윤 전7엽(枝載生 - - - 侯 祭天之胤 傳七葉)"이라 했으니 후(侯)자 앞에는 투자가 있었을 것이니 곧 투후 김일제의 후손은 7대에 걸쳐 영화를 누렸다는 뜻이다. 김알지는 김수로 보다 24년 뒤에 낳았으니 그 일족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김법민(金法敏), 즉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 파편이 있는데 이 비문 중에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 하였으며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侯 祭天之胤傳七葉」에서 (투)侯는 한무제(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郭去病)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金日제를 가리킨다.
金日제와 그 후손들의 생애는 전한서(前漢書)와 열전(列傳)에 있고 중국 서안(中國 西安)에 김일제(金日제)의 무덤이 있는바 실체가 분명한 김일제(金日제)를 문무왕의 비문에 『우리 조상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은 제천금인(祭天金人) 즉 金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손 김일제 일족이 漢나라에서 영달하더니 김왕망(金王莽)이 쿠테타로 한(漢)을 멸하고 신국(新國)을 세웠다가 17년 뒤 유수(劉秀)에게 패망하였다.(서기 25년)

이에 그 일족의 일부가 김해지방으로 왔고 김해에 정착한 김수로왕의 부친은 김해군 장유면 태정리 부근에 살면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형제 아들을 낳았다고 추찰된다.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출생) 태정리 부근 태봉(胎峰)에는 태대(胎臺)가 있는데 이것은 김수로왕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한다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발견된 중국 왕망시대의 화천(貨泉)은 김수로왕의 선친 또는 김수로왕 자신이 왕망의 신제국(新帝國) 출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방증(傍證)이 될 수 있다. 또 김해부근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과 중국화페인 오수전(五銖錢)등도 그 방증이 된다. 김수로왕의 이름이 청예(靑裔)인 것은 소호의 후손임을 암시한다. 소호금천씨의 호가 청양(靑陽)이기 때문이다.

또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존호(尊號)가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인 점은 중국의 보주(普州)와 어떤 연관(聯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경(漢鏡), 용봉환두대도(龍鳳環頭大刀)등이 유적지에서 발굴되고 있는 점, 그리고 은(殷)나라 사람들 처럼 좌지왕때 복사(卜師)가 점을 쳐서 괘사(卦辭)를 얻은 점 등은 연관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는 동이족(東夷族)

소호금천씨의 本고장은 남만주 봉천 요동지방이었는데 그는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 겨려다. 소호금천씨는 일찌기 산동반도에 진출하여 중국역사의 始源的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산해경( 山海經)이라는 중국사서에 "소호(少昊)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는 나라" 라고 하였다.

중국의 사학자 당란(唐蘭)은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산동성 곡부(曲阜)에 도읍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근년에 발굴된 ‘대문구문명 당시에 이미 소호(少昊) 나라가 있었으며 소호국은 산동성 곡부지방에 있었다’ 고 하였다.

여불위(呂不韋)가 지은 에 "그 날은 경신일(庚申日)이고 그 임금은 소호(少昊)다. 경신(庚申)은 금(金)의 날로 소호는 금덕(金德)으로 천하에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金天이라 하였다."
소호국의 국조 지(國祖 摯)가 등극한 날인 경신일(庚申日)은 우리의 민속에 이어오고 있으니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庚申年 庚申月 庚申日)이라고 기록하는 습관은 "이 방아도 소호씨가 왕위에 오른 날에 탄생했다."는 뜻이다.

소호의 나라는 고신씨(高辛氏)의 제(帝) 곡이 이어 받았는데 제곡은 은나라의 조상이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그 후 중국의 서북부 내몽고에 위치한 농서지방에서 흉노 모돈씨)(匈奴 冒頓氏의 한 후국(一候國)을 건설하였다. 기원전 120년 한나라의 포기장군 곽거병(郭去病)이 농서지방에 쳐들어갔을 때 휴도왕(休屠王)의 太子인 14세의 김일제가 그의 아우 윤(倫)과 함께 모친 알씨(閼氏)를 모시고 한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다. 휴도왕의 나라는 중국서북부에 위치한 지금의 무위군(武威郡)이다. 포로가 된 김일제는 부마도위 광록대부가 되었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가 두 아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으므로 일제의 모친이 사망하매 무제가 알씨의 화상을 감천궁(甘泉宮)에 그려놓고 친필로 "흉노왕비 알씨(匈奴王妃 閼氏)"라 하였다.

한나라 무제는 김일제를 후(候)로 봉(封)하고 일제가 사망하매시호( 諡)號를 경후(敬候)라 하였고 아들 상(常)을 투후로 삼았다. 이리하여 김일제를 비롯하여 國, 安, 常, 欽, 當, 遵, 등 후손이 투후의 벼슬을 하였다. 김일제에게 常과 建 두 아들이 있었는데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하므로 3인이 친하게 지냈으며 상이 소제의 봉거(奉車)가 되고 건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소제가 제위 13년만에 下世하고 선제(宣帝)가 등극하자 상이 광록훈(光錄勳)이 되었으며 상이 죽고 國이 투후벼슬을 이어 받았고 국이 아들없이 죽으니 일제의 둘째 아들 건의 손자 當에게 투후를 제수하였으며 그 후 當의 아들 성(星)이 투후를 계승하였다. 전한서 기록에 의하면 투후 當의 모친 南은 곧 왕망의 生母였다.

전한서(前漢書)의 왕망 전(王莽 傳)에 의하면 효원황후의 生父와 그 兄弟가 모두 원제(元帝)와 성제(成帝)때에 후(候)가 되고 보국(輔國)의 位에 올랐으며 또한 김씨가(金氏家)에서 봉(封)을 받은 侯의 수가 9명에 달한다 하였다.

김일제의 아우인 윤(倫)의 아들 안상(安上)은 선제(宣帝)때 궐내(闕內)의 후(候)가 되어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며 궁중과 부중의 실권을 장악했다. 안상에게 常, 岑, 敞, 明 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중낭장(中郞將), 광록대부(光祿大夫),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원제(元帝)가 8세에 태자(太子)가 되자 김창(金敞)이 중서자(中庶子 즉 太子師)가 되어 은총을 받았으며 원제(元帝)가 즉위할 때 김당(金當)의 딸을 왕비로 맞아드렸다.

김일제전에는 왕망과 김당이 다같이 그들의 모친인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아들이라 했으며 효원왕후전에는 효원왕후를 김당의 딸이라 하였다. 원제가 즉위한 후부터 김씨일문의 권세가 더욱 커졌다.

김창(金敞)은 涉, 參, 饒,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제(成帝)때 모두 시중기도위(侍中騎都尉), 영삼보(領三輔), 호도위(胡越騎)가 되었다.섭(涉)에게 탕(湯), 융(融)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다 제조장대부(諸曹將大夫)가 되었으며 또 섭(涉)의 종부(從父) 흠(欽)의 아우 천(遷)이 상서령(尙書令)이 되니 이제 한(漢)나라 왕실(王室)은 金氏의 권력하(權力下)에 있게 되었다.

전한서(前漢書)에 왕망(王莽)의 군형제(群兄弟 즉 六寸)는 모두 장군(將軍) 겸 후(侯)가 되었는데 오직 망(莽)의 부친 만(蔓)은 일찍 사망하였다. 왕망의 백부(伯父) 대장군 봉(鳳)이 병으로 누우매 망(莽)이 극진히 시탕(侍湯)하니 봉鳳이 천거하여 망(莽)을 황문랑교위(荒門郞敎尉)로 삼았다. 왕망이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일하니 크게 발탁되어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38세의 망이 보정(輔政)을 맡았는데 얼마 후 원제(元帝)가 사망하고 성제(成帝)가 즉위하니 제(帝)의 생모 김씨(生母 金氏)를 황태후(皇太后)로 삼았다. 태후의 영향으로 자신의 친정형제 5人을 모두 후(候)로 봉(封)하였다.

평제(平帝)가 나이 9세에 등극하니 김태황후가 섭정하였다. 김태황후는 망(莽)에게 서정(庶政)을 맡겼으며 서기 3년에 망(莽)은 11세의 평제(平帝)에게 자기 딸을 주어 황후(皇后)로 삼았으나 4년만에 평제(平帝)가 사망하였다. 왕망은 선제의 현손중 가장 나이 어린 2세의 유영(劉영)을 제위(帝位)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섭 황제(攝 皇帝)가 되었으며 서기 9년에 쿠테타를 일으켜 신(新)나라를 건국(建國)하였다. 왕망(王莽)은 영특하여 대혁신정책을 단행하였다. 侯제도를 페지하고 토지를 국유화 하였으며 노예매매를 금하였고 평형물가제도를 실시하여 상인의 농간과 중간착취를 방지하였으며 화페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동북방민족의 소요와 흉년이 계속되어 이로 인한 도적떼 등으로 민심이 흉흉한 중에 유수(劉秀)의 군대가 낙양(洛陽)을 공격하니 왕망의 시종 공손취(侍從 空孫就)가 왕망의 목을 베어 유수에게 바쳤다. 그 뒤 20여년간 전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들어 왔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 성봉.

출처 : http://www.kwangsankim.or.kr/bbs/zboard.php?id=a001&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404
자유인888 20/05/01 [18:20] 수정 삭제  
  신라가 흉노족의 후예라고 하더라도 한반도의 어떤 사람도 북방이주민임을 부인할 수 없으며 신라귀족이 아니라 신라인 전체를 보면 흉노족만이 아니라 북방의 여러 민족이 혼합된 민족이다. 이것은 백제나 고구려도 예외가 아니다. "민족주의"란 사람의 댓글을 보니 아마도 북한식 역사관에 입각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북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이 사람의 글 속에는 미국과 남한이 마치 북한을 먼저 기습하여 북한을 멸종시키려 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형적으로 북한의 거짓된 역사관이다. 1992년 소련의 비밀문서가 러시아에 의해 공표되면서 북한의 남침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입증되었다. 남한의 운동권이 따랐던 브루스커밍스의 견해가 6.25전쟁을 남북한 책임설이었는데 후에 소련의 비밀문서가 발표되자 브루스커밍스도 자신의 견해를 고쳐 북한에 의한 남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민족주의"로 닉네임을 쓴 사람은 이를 똑바로 알기 바란다. 또 이 사람이 닉네임을 민족주의로 표시하면서 사실은 남한 내 분열을 도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사람이 북한인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북한의 일방적으로 편드는 사람이라면 흉노족인 신라를 욕하는 것자체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식이 되던지 아니면 자신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김일성 일가를 욕하는 것이 되거나 혹은 김대중일가를 욕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흉노족의 일파인 신라김씨는 오늘날 한반도의 김씨의 원조상이다. 김일성의 김은 전주 김씨인데 전주김씨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9 세손 金台瑞(김태서)로 김일성은 전주김씨 32세손이다. 또한 김대중은 김해 김씨이므로 이들 모두를 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생각없는 인간이 남북한 지도자들을 뭉뚱그려 시궁창에 처박은 것이다. 당시의 신라인이 오늘날의 경상도인이라고 할 수 없고 당시의 백제인이 오늘날 전라도 충청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신라왕족이 흉노족이라는 것은 영광이고 또 한반도인의 영광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은 흉노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다.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자신의 조상 중에 김씨성을 가진 남자나 여자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전라도 지역의 광산을 본관으로 한 김씨는 김씨 중에서도 그 수가 손가락에 꼽힌다. 이 광산 김씨의 시조도 신라 왕족이다. 조그만 나라에서 "민족주의"라는 닉네임을 쓰면서 행동는 반대로 민족분열주의 행위를 하는자들이 없어지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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