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 기록은?

<고구려사초.략>과 많이 다른 <삼국사기>의 고구려 쿠데타 기록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10/15 [10:18]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 기록은?

<고구려사초.략>과 많이 다른 <삼국사기>의 고구려 쿠데타 기록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10/15 [10:18]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3부)입니다만, 고구려에는 정변이 많아 워낙 장문이 되므로 추가로 몇 장으로 나누어 연재되겠습니다.
(1부) 단군조선의 쿠데타와 허구의 기자조선
(2부) 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
(3부) 고구려의 쿠데타는 누가 어떻게 했나?

(3부 1장)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의 기록은 옳은가? 

지금까지 (1부)와 (2부)에서는 단군조선과 북부여 때 일어난 쿠데타를 조명함으로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허구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고구려 때 발생한 쿠데타에서는 나라가 바꾸지 않고 황제만 바뀌는 정변이 몇 차례 있었다.

고주몽에 대한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다른 기록
▲  23세의 즉위는 북부여 7대 단군으로의 즉위로 봐야한다
북부여 6대 고모수단군의 사위가 되었다가 B.C 58년 23세의 나이로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등극한 고주몽은 B.C 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말하는 고구려인 것이다. 즉 고주몽으로 인해 북부여가 자연스럽게 고구려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고주몽의 후손인 광개토태왕 비문에서도 분명히 고주몽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라고 새겨 놓았으며, 17세손을 언급함으로서 고구려가 북부여로부터 내려왔음을 확실히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주몽과 북부여와의 관련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년도와 나이를 B.C 37년에 22세의 나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단칸셋방에서 시작하여 자수성가하는 것으로 기록하면서도, “혹은 주몽이 졸본부여에 당도하니 마침 왕이 아들이 없다가 주몽을 보고서 범상한 인물임을 알고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함으로서 <한단고기>의 내용이 틀리지 않음을 시사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주몽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기록하였으며, 모든 고구려의 왕들이 자체 년호를 썼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영락’이라는 년호와 중원고구려비와 근처 사찰에서 발견된 불상(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장수열제(장수왕)의 연호가 ‘건흥’이라는 것이 발견되어 <삼국사기>의 년호에 대한 기록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한단고기>에는 고주몽이 다물(多勿)이라는 년호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성왕 2년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그 땅을 다물군(多勿郡)으로 만들고 송양을 봉하여 지주를 삼았다. 고구려 말에 구토를 회복하는 일을 다물이라 한다.”고만 기록하였다.

그런데 청송 김성겸선생이 번역한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려사초.략>에는 추모대제(고주몽) 원년 년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다고 기록함으로서 고주몽이 북부여 시절에는 다물(多勿)이라는 년호를, 고구려 시절에는 동명(東明)이라는 년호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주몽을 ‘동명성왕’으로 작명함으로서 고구려의 년호 사용을 교묘히 숨겼던 것으로 보인다.  

시조 추모대제(고주몽)의 의문의 죽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19년(B.C 19년) 여름 4월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은 기뻐하여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죽으니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서는 다르면서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17년 해소(유화와 금와의 아들)가 예후와 유리를 보내주었다. 19년 정월 유리를 동궁으로 삼았다. 4월 임금께서 서도(西都)에서 죽고 동궁이 즉위하였다. <선기(仙記)엔 “임금이 보위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 동궁에게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었고, 9월에 용을 타고 상천하였으며 옥 채찍을 버려둔 곳이 용산릉(龍山陵)이 되었다.”고 기록하였고,

또 사신(史臣)이 논하길. “동명은 세상에 다시없을 뛰어난 군주였다. ...(중략)... 나라를 창업하는 일이 급하였기에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앞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아버지인 추모대제(고주몽)와 유리태자 사이에 뭔가 석연치 않은 정치적 암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리가 오자마자 태자가 되고, 곧바로 추모대제가 승하하고, 찬자가 논하길 추모가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뭔가 당시 조선왕조 때의 왕자의 난과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고구려사초.략>를 번역한 김성겸선생은 추모대제의 능이 있던 용산(龍山)을 현재 북경 서남쪽 방산(房山)으로 비정하고 있다. 중국에서 龍(용)-->龐(방)-->房(방)으로 은폐시켰다고 보면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이중재선생은 산동성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용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산동성 용산은 한자는 같으나 백제의 영역이고, 유리묘(琉璃廟)가 북경 북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용산은 북경 근처가 유력하다 하겠다.
 
▲   북경 북쪽에 유리왕의 사당인 유리묘가 있고, 북경 서남쪽에 방산구를 흐르는 유리하가 있다.
▲  현 주일대사인 권철현의원이 답사한 유리묘가 있던 자리. 문화혁명 때 다 파괴가 되었다고 한다.
 
5세 폭군 모본제의 죽음.
모본제는 대무신제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는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2년(A.D 49년) 봄  장수를 시켜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케 하다가, 요동태수 채동이 신의와 은혜로서 대하므로 다시 한과 화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 대해 <고구려사초.략>은 달리 기록하고 있다. 모본왕 2년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의 습격 기사를 대무신제 22년(A.D 49년)으로 적고 있으며,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을 공략하고 그곳의 보물.노리개.예쁜 계집.비단.진미 등 다수를 빼앗았다. 년 중 내내 이런 일이 잦았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크게 두려워하며 매년 조공하기로 약속하며 화친을 구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일어난 년도는 같으나 모본왕의 업적이 아니라 대무신왕의 재위 중이란 기록이다. 이는 두 사서의 역대 년표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두 사서의 년표를 서로 비교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삼  국 사  기

      고  구  려  사  초  .략

 시조

동명성왕

  BC37 ~ BC19

 19년

 시조

추모대제

  BC37 ~ BC19

  19년

  2세

유리왕

  BC19 ~ AD18

 37년

  2세

광명대제

  BC19 ~ AD28

  47년

  3세

대무신왕

  AD18 ~ 44

  27년

  3세

대무신제

  AD28 ~ 64

  37년

  4세

민중왕

     44 ~ 48

  5년

  4세

민중제

     64 ~ 68

   5년

  5세

모본왕

     48 ~ 53

  6년

  5세

모본제

     68 ~ 73

   6년

  6세

대조대왕

     53 ~ 146

 94년

  6세

신명선제

     68 ~ 112

  40년

 

 

 

 

  7세

태조황제

    112 ~ 146

  35년


* (주) 명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왕조와 일제의 손을 많이 탄 <삼국사기>에는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대조대왕(大祖大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클 태(太)를 큰 대(大)로 점까지 없애면서 역사왜곡을 자행한 일제의 만행이 역겹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대조대왕을 태조대왕이라 적는다. 

<삼국사기>보다 <고구려사초.략>의 광명대제(유리왕)가 +10년, 대무신제가 +10년이고, 대조대왕이 신명선제와 태조황제로 나뉘면서 -20년이 되어 있다. 태조황제 이후의 년표는 두 사서가 일치한다. 왜 위 두 년표가 서로 다른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모르겠으나,

여하튼 모본제의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습격은 분명 모본제의 시대가 아닐 것으로 생각되며, <삼국사기> 기록대로 대조대왕이 7세에 즉위하여 치세가 94년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두 왕으로 나뉘는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  모본왕(또는 대무신제)이 습격한 곳은 하북성과 태원까지 내려갔으니 산서성 전체이다.


그리고 요동태수 채동과 화친하는 방법에 대한 기술이 두 사서가 상당히 다르다. <삼국사기>의 위 기록은 뭔가 어패가 있는 기록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요동태수는 서로 전쟁을 한 사이인데 갑자기 신의와 은혜로서 대하므로 화친했다는 영국신사(紳士 ?)와 같은 기록은 뭔가 이상한 기록으로 보여 진다. 이것도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여하튼 모본제는 즉위하자마자 대무신제와 민중제가 쓰던 연호인 ‘대무(大武)’를 ‘모본(慕本)’으로 바꾼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이 더하여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으며, 사람이 움직이면 용서 없이 죽이고, 신하 중에 간하는 자가 있을 때는 활을 당겨 쏘았다. 6년 겨울 11월 두로(杜魯)가 왕을 죽였다”고 기록하면서 간단히 그 시해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가 동생인 민중제에게 보위를 전하면서 아들인 모본을 태자로 삼는 과정과 모본제가 제위에 오르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태자 시절부터 황음했던 모본은 재위 중에도 황음을 계속했으며, 사치했고 술 마시기와 음란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사람 죽이기를 예사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궁중의 작은 황제로 불렸던 두로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두로는 낙랑국왕이었던 최리의 딸 니만(尼滿)의 말을 듣고는 모본제를 시역할 마음을 먹는다. 두로는 모본을 죽인 후 스스로 보위에 오르려 했다가 결국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모본제의 죽음은 두로에 의한 실패한 쿠데타의 작품이었다. 결국 황제를 시해한 두로는 자결하고 대무신제의 서자가 즉위하니 이분이 <삼국사기> 기록에 없는 신명선제(神明仙帝)이다. 
 
▲  박정희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중정부장은 모본제를 시해한 두로처럼 결국 죽고 만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모본제가 시해 당하고 태조대왕이 즉위하는데 이상한 기록이 하나 있다. “태조대왕은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고, 모본왕이 죽고 태자는 불초하여 사직을 맡을 수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태조대왕을 맞아들여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나이 7세인 까닭에 태후가 섭정을 했다”는 기록이다.

즉 태조대왕이 유리왕의 손자로 왕손이기는 하지만, 유리왕의 아들인 대무신왕의 아들들도 분명 여럿 있었고 게다가 민중제의 아들도 있었을텐데 이런 왕위 계승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대무신왕은 태자인 모본이 어리므로 동생인 민중왕에게 전위하며 모본을 태자로 세운다. 그런 모본이 죽었다면 과연 다음 보위는 누구에게 가야 상식적으로 마땅하겠는가?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비록 모본왕이 잔인한 폭군이긴 했으나 한의 요동을 공격해 승리하는 등 특별한 실정(失政)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조금 죽였다는 이유로 두로에게 시해 당했는데, 모본왕의 태자가 불초하다는 이유로 왕위가 계승 안되고 할아버지 유리왕의 왕손을 다음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법도상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신명선제는 휘가 재사(再思)로 대무신제의 별자(別子=서자)이다. 친모는 갈사태후이고, 태후의 부친은 해소로 유화부인과 소생 금와(동부여 2세 왕)의 아들이다. 동복형은 호동(好童)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두 기록이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에서는 태조대왕을 재사(再思)의 아들이라 했고, <고구려사초.략>에서는 신명선제가 재사의 아들이라 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왕통 승계의 원칙으로 보아 재사의 아들은 태조대왕이 아닌 신명선제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2명의 선대왕(대무신, 민중)이 지나갔고 모본왕까지 직계왕통이 내려왔는데 유리왕의 손자인 방계 혈통의 왕손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조선왕조로 치면 <삼국사기>의 태조대왕은 XX대군(大君)도 아닌 그냥 XX군(君)이다. 대군이 있는데 어떻게 XX군이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신명선제는 년호를 신명(神明)으로 하여 40년 동안이나 제위에 있었던 엄연한 황제이거늘 <삼국사기>에는 왜 생략이 되어 있고 대신 태조대왕이 94년간이나 재위했다고 되어있는지 그 이유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신명선제 29년(AD 101년) “신라가 월성(月城)으로 이사했다. 월성의 둘레는 1,023보가 된다고 했다.”는 중요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신라는 천도한 적이 없이 금성(金城) 한군데에서 천년간 왕업을 이어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식민사학계는 그 금성을 현 경북 경주라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 (BC 37년) 경성(京城)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 

그런데 38년 기록에 보면, “예전에 중국 사람들 중 진(秦)나라의 난리에 시달려 동쪽으로 건너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자리 잡아 진한과 더불어 살았다.”고 하면서 식민사학계는 마한(백제)은 충청.전라 지역이고 신라는 경상도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진나라의 상징인 만리장성은 어디까지 왔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진시황의 장성은 황하를 넘지 않았으며, 위의 이론대로라면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경상도까지 왔다는 말이다. 위만에게 패한 번조선왕 기준이 남하한 곳인 마한 역시 서화 동쪽임을 알 수 있다. 식민사학계의  이론대로라면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경상도까지 왔다는 말인데 이걸 믿으란 말인가?  

▲   북경대학교재에 나와있는 진시황의 장성은 황하를 넘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의 수도인 금성은 진시황의 장성이 끝나는 곳에서 동쪽 마한 근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신라가 AD 101년 월성으로 천도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월성은 안휘성 합비 근처로 보여진다.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에서 보듯이 양자강 중류가 최적관측지로 나타나고 있다.

▲   천하고금대총편람지도와 대청광여도로 본 경주 팔공산의 위치는 안휘성 합비 근처이다.
▲ 상대신라의 일식관측지는 양자강 중류로 나와있다. 사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태조황제의 죽음과 명림답부에 의한 차대왕의 죽음
차대왕(A.D146 ~ 165년)은 20년 동안 제위에 있었으나 <삼국사기>와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는 차대왕을 고구려 7세왕으로 적고 있는데 반해, <고구려사초.략>은 차대왕을 폐주(廢主)로 적으면서 아예 역대 왕통에 넣지 않고 있다. 즉 7세 태조황제--> 폐주 차대제 --> 8세 신대제로 적고 있다. 어떤 황제이기에 역대 왕통에서 빼버렸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차대제는 휘는 수성(遂成)으로 태조황제의 동복아우인 것은 두 사서가 서로 기록이 같은데, 즉위에 대해 <삼국사기>는 “태조대왕의 추앙을 받아 76세에 즉위하였다. 용장(勇壯)하고 위엄이 있으나 인자심(仁慈心)은 적었다.”고 젊잖게 기록하였고, <고구려사초.략>은 “태조를 위협하여 양위를 받아내고 제위에 올랐다.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군권을 장악하고 세운 공도 많았지만 성품은 음란하고 포악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차대왕 수성은 형인 태조대왕 때 맹활약을 한다. 수성은 요동(하북성)을 쳐서 빼앗는 등 혁혁한 무공을 세우자 태조대왕이 군국대사(軍國大事)를 통섭케 하였다. 주위에서 수성더러 늙기 전에 왕이 되라고 부추기는 세력이 있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이를 신하로부터 전해들은 태조대왕은 오히려 자신이 늙음을 이유로 양위를 결심하게 된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수성은 왕이 되어서는 2년(147년) 3월 태조대왕의 가까운 신하를 베어 죽였다. 3년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을 죽이니 그 아우 막덕이 두려워하며 목메어 죽였다. 가을 7월 흰 여우에 대한 길흉을 설명하는 무사(巫士)를 죽였다. 그리고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 간신들의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20년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죽으니 향년 109세였다. 겨울 10월 연나조의 명림답부가 백성들이 견디어 내지 못함을 이유로 차대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신대왕(新大王)이 즉위하는데 태조대왕의 막내아우로 당초 차대왕이 무도하여 백성이 따르지 않으므로 왕제(王弟)는 화란(禍亂)을 피하여 산 속으로 도망하였다가 76세에 왕으로 추대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전두환은 군인으로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쥐고는 나중에 최규하대통령을 밀어내고 대통령에 오른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기 전 최대통령을 협박해 물러나게 만든 것은 수성(차대제)와 비슷하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태조대왕이 109세에 죽을 때 신대왕이 76세의 나이로 즉위하는데 태조대왕의 동복아우라는 것이다. 33살의 차이가 있는데 동복아우라는 기록은 솔직히 믿기 어렵다. 과연 태조대왕의 모후는 도대체 신대왕을 몇 살에 낳은 것인가? 이게 생물학적으로 가능한지 궁금할 뿐이다.

아무리 빨라도 50살이 다 되거나 넘어서 신대왕을 낳았다는 얘기인데 이걸 믿으려면 믿을 수도 있으나 솔직히 아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 대해 <고구려사초.략>에는 신대제가 태조황제의 별자(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삼국사기>가 정사서가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차대제 수성의 성격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태조황제 10년(121년) 한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수성이 등후(鄧后)의 나이를 묻자 사신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수성이 이르길

“지난날 여후(한고조 유방의 처)는 평성에서 허리띠를 풀고 모돈(흉노의 선우)을 즐겁게 하였는데, 너희들은 왜 등만(후한의 5세 상제의 처)이 내게 허리띠를 풀고 어육(魚肉)이 되게 하지 않는가? 호(후한의 6세 공종)의 애미가 내게 첩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낙양(후한의 수도)은 잿더미가 될 것이야!”

하였더니 사신들이 가만히 있자 태조황제가 이 말을 듣고 수성을 꾸짖자 수성이 아뢰길“저는 한나라를 초개와 같이 여기는데, 제가 어찌 그들이 두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심하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솔직히 참으로 보기에 통쾌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덕은 부족하나 용맹과 기개 하나는 천하제일이었던 수성이었다. 이후 수성은 대추가가 되어 병권을 위임받는다.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주위에서 황제가 늙어도 죽지 않으니 쿠데타를 권하게 되고 수성은 결행하려 한다. 이를 알게 된 황제는 수성의 위협으로  79세에 양위하고 물러났다가, 차대제 20년(165년) 태조황제는 전처인 상후(태조의 처였으나 수성에게 준다)가 위로하러 온 자리에서 마지막 통정을 나누고 98세를 일기로 붕어한다.

태조황제가 보위에서 물러나 다음 황제의 재위 20년 동안이나 살았던 것으로 보아, 태조가 수성(차대)에게 보위를 전달한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정상적인 양위를 거친 것이 아니라 <고구려사초.략>의 기록대로 동생인 수성에게 위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쿠데타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수성에 의한 보위찬탈이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차대왕이 시해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차대제가 상후에게 “백고(후에 신대제로 상후의 아들)가 누구 자식이오?”라 물었고, 상후가 거짓으로 대답을 하자 차대제가 상후를 윽박지른다. 위급함을 느낀 상후는 명림답부에게 연통하여 도움을 청해놓고 차대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였으나 죽지 않고 오히려 갈래창을 집어 들고 상후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명림답부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차대제를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였으며 차대의 심복 장사들을 체포하기를 열흘이나 계속하여 마침내 모두를 척살하였다. 이런 연후에 상후의 아들인 백고를 맞아 즉위시키다.

▲  독재체제였던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가 전두환에게 체포되지 않았다면 명림답부 같은 명재상이 되었을까?

명림답부는 차대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자신이 직접 보위에 오르는 역성혁명을 하지 않고 신대왕을 추대하여 황제로 세운다. 명림답부는 군권을 총괄하는 등 고구려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어 명목상 황제는 아니었으나 실질적인 황제로서 그리고 명재상으로 그 명성을 남긴다.

또한 명림답부는 신대제 10년 한나라 대군이 쳐들어오자 이를 좌원에서 대파하여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는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좌원대첩(坐原大捷)을 남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한나라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는 이 좌원대첩을 잘 알지 못한다. 식민사학계가 안 가르쳤기 때문이다.

명림답부는 신대제와 같은 해인 15년(179년)에 죽는다. <삼국사기>에서는 향년 113세라 하였고, <고구려사초.략>에서는 52세라 적고 있어 차이가 난다. 이건 명백한 <삼국사기>의 오기라고 본다. 어떻게 명림답부가 100살이 가까운 나이에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3부 2장에 계속됩니다)  

김성겸 08/10/15 [20:08] 수정 삭제  
  성훈 님, 저는 아직 의 위치를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곳이 아래와 같다는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있다는 곳으로 추정이 가능한 곳들은
(1) 동남방 즉 남린
(2)・간 또는지역
(3)서쪽 인접 지역.
(4)남방 지역.
(5)서남남방 25Km지경 .
(6)⇔?⇔?지역
ASDFA 08/10/15 [22:31] 수정 삭제  
  1.북경유리묘하고 유리왕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가요.
제가 알기로는 아무관계가 없는것으로 나오고 있으며 유리묘의 이름은 황제가 상으로 준 황색유리기와 3개하고 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그리고 유리묘에는 관우상을 모섰다고 합니다.아니다고 생각하시면 근거를 좀 봅시다.
2. 저 북경대학 교재에 나오는 지도는 전국시대형세도라 나오는고 보이지 않습니까.(눈이 좀 문제가 있나?아니면 글을 모르나.)즉 진시황이 통일을 하고 만든 장성이 아니라 그겁니다.역사상 진장성이란 진시황이 통일을 하고 만든 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저 지도에 나오는 진장성하고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진장성하고 같은 개념이 아니라 그것입니다.

아에 소설이라고 하면 욕이라도 않먹을 턴더 이건 왜이러는지 몰라.
ASDFA 08/10/15 [23:11] 수정 삭제  
  아무리 뒤져도 고서에 그런 책이 없은거로 나오기에 그럽니다.
머털도사 08/10/16 [14:15] 수정 삭제  
  "고구려사초"는 박창화라는 분이 일제시대에 일본의 황실도서관에서 근무할때 베꼈다는 책이오.... 지은이가 누군지도 없고... 사람들은 박창화가 만들었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교보문고에 나와있으니 사서 보시구려...

진장성은 당신 말이 맞소이다. 글쓴이가 좀 헷갈렸구만... 산해관에서 끝나는 燕장성을 저리 말도안되게 요동반도까지 燕장성이 그려져있는 지도를 올리면서 秦장성은 태행산맥을 넘지 않았다고 말을 하고 있으니... 흐미 한심혀라....

그리고,
ASDFA는 유리묘가 황제랑 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유리묘가 황제헌원이 상으로 준 유리랑 관계있다는 근거좀 봅시다.
저 부근에는 유리하, 유리묘, 유리창... 유리관계 지명이 많은 이유가 참 궁금하던 참에 잘됐구려...

저 유리묘를 발굴한 자료가 있다면 공개하시지요. 발굴자료 없이 헌원이 준 황색유리기와 관계있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 역시 근거가 너무 부족하지요.
국편위 08/10/16 [15:21] 수정 삭제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고인 '사료'들을 읽고 싶으시면 국사편찬위원회사이트를 방문하셔서 원문제공서비스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PDF화일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역사학도라면 누구나 다 아는 기본 상식입니다. 다른 자료들도 많이 공개되어 있으니 사료 원문제공서비스 많이 참조하세요.
국편위 08/10/16 [15:24] 수정 삭제  
  남당 박창화선생이 유고로 남긴 다른 사료도 많지만 일단 이것만 소개드립니다.
많은 사료들이 인터넷으로 공개되어 있으니 찾는 것은 구하는 자의 몫입니다.
여기까지만 소개해드리니 나머진 목마른 분이 조금이라도 노력해서 찾아야겠지요.
다 알려드리면 찾는 재미가 반감됩니다.

http://mf.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마이크로필름 목록원문서비스

MF0020000 7.高句麗史略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32.pdf
MF0020000 8.高句麗史略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42.pdf
ASDFA 08/10/16 [17:16] 수정 삭제  
  북경지역에 유리(琉璃)묘 유리하등 유리(琉璃)가 들어간 곳이 아주 많습니다.제가 말한 황제가 어느황제인지는 기록에 나오는것이 아니고 그동네 사람들의 전설이다 그겁니다.단 소설(그럿게 밖에 이해할수가 없어서요)쓴 사람이 고려 유리왕하고 그동네 하고 딱 무슨 관계라도 있는것 처럼 쓰길래 한 소리입니다.아시다 싶이 중국에 유리(琉璃)제품이 나온지 2500년 좌우 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과연 저동네 이름하고 유리제품하고 관계가 있을가요 아니면 유리왕 하고 관계가 있을 가요.단 그동네 지명에 유리두글자가 들어가 있다고 그걸 근거로 하면 정말 너무한거 아닙니까.龙---庞----房으로 해석을 하면 천년지나서 후손들이 대한민국을 대한(汉)民国------대한(韩)민국으로 해석을 할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지 모릅니다.아무 근거 없이 저렇게 해석을 하고 그걸 밑으라고 하면 말이 된다고 하는지?
고구려략초에 대하여 어는정도 믿음성이 있는지는 베낀 사서부터 찾아서 연구를 하든지 하여야 하는것 아닙니까.일단 역사 연구를 할려면 사서와 고대 발군을 결합하여 연구를 시작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산해관에 대하여 서는 명나라 장성으로 나오고 있습니다.단 진장성이 산해관에서 끝나다는 말도 있고 요동 지역에서 끝낮다는 말도 있습니다.도대체 어느것이 맞는지는 계속 연구하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글쓴이가 역사학자라는 생각이는데 무책임하게 이런식으로 문장을 발표하면 너무 한심 한거 아닙니까.

머털도사 08/10/16 [20:15] 수정 삭제  
  * ASDFA의 말을 지금 보니,
黃제가 아니라 皇제가 준 유리기라는 말이군요.
다음부턴 헷갈리는 것들은 한자로 명시해주시길.



* 천년뒤 대韓민국을 대漢민국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볼수있다고 했으나...
유리왕과 유리묘의 관계와는 한참 다르군요.

발음만 같을 뿐만 아니라 한자도 똑같습니다.

琉璃明王과 琉璃廟, 琉璃河, 琉璃廠
琉璃라는 한자가 똑같죠. 그러니 의심될 수 밖에요.

또한,
고구려가 일어난 졸본부여는 북부여에서 남쪽이라고 했으니...
동부여는 만주이고,
북부여는 몽골과 내몽골의 동쪽이역이므로
북부여 남쪽 즉 졸본부여가 북경부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자가 같고, 북부여 남쪽지방이 되므로 琉璃廟가 琉璃明王의 무덤으로 의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이런 구절이 있죠.
高句麗始居中國北地則漸東遷于浿水之側

글자만 같다고 하여 저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생각에 졸본부여는 저 유리하 지역보다는 한참 북쪽이라고 생각되지만..., ASDFA가 이유가 궁금하다기에 한번 써봤소이다.)



* 그 동네 사람들 전설이라고 하였는데

직접 들은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서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유리묘 이야기에 대해 출판된 책이라고 본 것인가요?

만약 출판된 것이 있다면 소개좀 해줄래요?



아....그리고 성훈은 역사학자 아님. 자기자신의 말로는 다른 사람이 써놓은 것을 짜집기하여 글을 쓴다고 함...
조재범 08/10/16 [20:58] 수정 삭제  
  나 또한 태조왕 때부터 신대왕까지의 형제 나이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속시원하게 풀렸습니다. 태조왕이 죽을 때 나이가 119세였는데 동생 차대왕이 95세였고 막내 동생인 신대왕이 77세였습니다. 첫째와 둘째의 나이 차이가 24살, 첫째와 막내의 나이 차이는 42살인데 이것이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가 의심스러웠습니다.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再思)는 왕위는 안 물려받고 늙어서까지 자손 번성에만 열을 올렸는가 싶었죠. 그런데 이제 말끔히 해결되었습니다.
asdfa 08/10/17 [00:03] 수정 삭제  
  머털도사//
1.유리묘 유리하 이름의 출처에 대하여서 북경시 정부 유관부문에 부탁을 하면 답이 어느정도 나올거라 생각을 합니다.아니면 북경TV에 "여기는 북경이다"라는 프로가있는데 거기에 부탁을 해도 될것입니다.유리창은 유리제품을 만드는 공장이라는 말인데 유리명왕하고 아무관계가 없는거 아니겄습니까.
2.유리모가 유리명왕의 무덤이라고 합시다.그럼 유리명왕이 죽을때 까지는 북경지역이 고구려 땅이라고 봐야 정상이지요.유리명왕이 기원 28년에 죽었습니다.근데 삼국사기도 좋고 고루려초.략도 좋고 기원 49년 한나라의 북경지역을 공격한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그럼 고구려땅인 북경지역이 무슨 원인으로 한나라 땅이 되였을가요.그리고 한나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할정도로 고구려가 강하다면 자기땅인 북경지역을 달라고 해야 하는 기록이 남아있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3.고구려시초에 현 길림성 지역을 벗어 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며 주몽의 무덤도 길림성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훈님이 역사자 많든 아니든 간에 다른사람을 글을 짜집기하여 글을 쓰드래도 짜집는 글이 문제가 있는지 아닌지 생각을 좀 하시고 발표를 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아무리 짜집기 한다고 해도 저런식으로 하면 너무 무책임 한거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영어 일어 한국어가 동시에 발표되는 데서 짜집기 한다는 한가지 이유로 책임감 없이 문장을 발표하면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역사에 별로 관심도 없는 상인입니다.제가 봐도 저렇게 문제가 많은데 학자들이 이 글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가요?
머털도사 08/10/17 [01:32] 수정 삭제  
  1. 결국 유리하와 유리묘의 지명의 출처는 자신도 모르면서 지어낸 것이구만요... 내가 어디서 들었냐고 물어왔는데 그 대답은 안하고 북경시에 물어보라고 하면 어찌해야하는거요? 아무런 근거없이 황제의 황색유리기 이야기를 꺼냈구만요.....

나야 유리하에 관심이 없으니, 반론을 제기하려는 당신이 북경시 정부에 물어봐서 반론을 하시오....



2. 난 고구려 졸본부여가 유리하 지역보다 한참 북쪽이라고 저 위에 말했소이다.
그러니 모본왕때에 북평과 어양을 공격하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지요.



3. 고구려가 어찌 길림이요? 하하. 길림지역은 동부여땅이오. 역사공부를 다시해야겠구만요.

내가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초기에 중국 북쪽에 있었고 점차 동으로 이동하여 패수에 머물렀다"는 것을 보여줘도 고구려가 초기부터 길림지역이라고 하면 어쩌자는것이요?
길림지역 영토는 고구려 초기영토가 아니오.... 알겠소?
고구려가 동부여를 멸망시키고, 관구검에 공격당하여 불내성 환도성이 허물어지고, 도읍을 동쪽으로 옮겼을때에 비로소 길림지역에 고구려 도읍이 있게되는 것이외다.

길림성에 길림시 서쪽에 "부여"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齊齊哈爾 근처에 역시 "부유"라는 지명이 남아있소.
ASDFA 08/10/17 [14:40] 수정 삭제  
  예 정답입니다.개가 웃습니다.그러면 고구려 주몽 유리왕북경지역에서 활동을 하였다고 개가 지나가다가 정답이라고 합니까?웃지 않고 ?아무리 봐도 똑같이 무식한 놈인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증명을 하여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증명을 하여야 하는거 아님니까.유리묘에 대한 얘기는 인터넜이서 검색한 자료이니 신임성이 떨어지니 관심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 그겁니다.
저도 아무 근거 없이 말을 좀 해봅시다.얼마나 말도안되는 소리가 나오는지.
서울이 고서에 한(汉)성이라고 하였은니 한(汉)나라 땅이 였다。서울이란 대한민국이 그걸 감추기 위하여 조작한거다. 이소리 들으면 개가 지나가다 미칠것 같으데.


mimesis 08/10/18 [05:01] 수정 삭제  
  좋은 토론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아쉽군요.
실상 써놓고도 과했음을 스스로 아실 듯이 보여지네요. 근거가 확실치 않으면 질문하는 것이 합당한 방법 같습니다. 그리고...일단 지나 측의 주장과 같은 궤도를 갖는다면 그것은 그릇된 파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사항이 아닌가 합니다.
머털도사 08/10/18 [13:42] 수정 삭제  
  난 글쓴이와 고구려 초기 위치의 입장이 다르며,
고구려 졸본부여의 위치가 북경에서 한참 떨어진 북쪽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유리묘가 유리왕의 묘인지, 아니면 유리기가 있는 묘인지 ASDFA가 알아보셔요.
상식적으로 유리묘라고 하면 유리라는 사람의 묘이지... 유리기를 줬다고 하여 유리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명일통지를 보니 룡산이 순천부에 있더군요. 명국의 순천부는 북경지방이죠. 따라서 북경의 유리묘는 유리왕의 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반론은 어설프기 그지없습니다.
반론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확실하지도 않은 유리묘 이야기를 꺼내서 반론을 합니까?

漢城이란 "흰성"을 말하는 것이지, 漢國의 城을 말하는게 아니네요.
계림유사에 白을 漢이라고 한다고 했네요.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쯧쯧.
ASDFA 08/10/18 [15:17] 수정 삭제  
  아무리 봐도 글쓴사람이 알아봐야 하는거 아닙니까.
순천부 룡산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그 룡산하고 2000년전 룡산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 가요.아무리봐도 아무관계가 없을것 같습니다.룡산에 대하여 좀 조사를 해보시지요.흑룡강성 길림성 료녕성 북경시 하북성 호남성 광동성 해남도 신강자치구 등등 지역에 모두 용산이란 곳이 있습니다.그걸 근거로 북경 유리묘 하고 유리왕 하고 연계를 하면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자 그리고 중국이나 조선 역사에서 어느 황제나 왕의 묘가 있었는지 좀 조사 해보시지요.별로 없을 겁니다.
저도 제가 무식한건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역사에 대하여 소설식으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근데 왜 유식하도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런 소설도 아닌 글을 쓰고 난리를 피움니까.
무식하면 저처럼 댙글이나 달면서 살지.왜 무식하다는거 전선을 하면서 삶니까.중국말로 못생긴건 당신 잘못이 아니지만 못생겨가지고 나와서 사람놀라게하느것은 당신잘못이라고 합니다.
한성에 대하여서는 제가 이미 말은 했는데.아무근거 없이 좀 쓴다고.그래서 지나가던 개가 듣고 기가막혀 미친다고.
머털도사 08/10/18 [18:26] 수정 삭제  
  난 졸본부여가 북경보다 훨씬 북쪽이라고 생각한다고 몇번을 말해야 합니까?



그리고 글쓴이는 룡산이 북경근방에 있고, 유리묘라는 지명과 유리하라는 지명이 그곳에 있으니...
유리묘는 유리왕의 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에게 반론을 하려거든 당신이 찾아서 하시오...
반론의 근거도 없으면서 딴지 걸지 마시고...
당신이 하는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지나지 않소이다.
유리묘가 유리왕의 묘가 아닌 근거가 무엇이오? 아무것도 없잖소?
ASDFA 08/10/18 [19:00] 수정 삭제  
  글쓴사람이 근거를 내놓튼지 해야 반론을 하든지 말든지 할거 아닙니까?
당신도 저글은 못밎으시는거 아닙니까.
인터넛에서 검색하면 제가 쓴 내용이 나온다 그겁니다.글쓴사람이 나와야 토론을 하든지 말든지 할거 아닙니까.
자기주장을 할려면 근거 내놓고 하든지 해야지 글자가 같다고 저렇게 글을 써도 된다는 겁니까?글중에 룡산을 방산이라 중국에서 은페시컸다고 하는데 좀 무식합니다.북경지역에 아직 룡산이란 곳이 남아 있습니다.(이거 가지고 다시우기는지 모르겄네).그건 왜 은페를 안하였을까요?
그냥 답이다라고 우기면 다되는가 합니까?
전국시대 지도 놓고 진장성 얘기할 정도로 무식한 글에 내가 왜 자꾸이러는지 몰라.
한국사람이 저걸 밎든지 말든지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참 저글 중국 싸이트에 퍼가면 또 중국에서 날조 했다고 중앙일보나 조선일보가 보도를 할라나?
1 08/10/18 [20:03] 수정 삭제  
  정신병동같다
머털도사 08/10/20 [10:28] 수정 삭제  
  근거도 없으면서 아니라고 하면 반대를 하기 위한 반대인거다.
알겠냐?
유리묘라고 하면 유리라는 사람의 묘인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너는 유리기라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알겠냐?
중공인이 하는 짓이라곤 말도안되는거 만들어서 진짜인냥 만들어내는 것이지...
네가 바로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08/10/20 [12:20] 수정 삭제  
  傻B一群
ASDFA 08/10/22 [18:35] 수정 삭제  
  무이산 백운묘(白云庙)가 백운이란 사람의 묘인것이고
서울동묘는 동이라는 사람의 묘로 해석해야 합니다.
제가 한말인 중공인이라서라면 당신이 한말은 자본인이라서 입니까?
누가 근거 없이 우기고 않아 있는지 몰라.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울주군, 제5회 작천정 벚꽃축제 개최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