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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

북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했고, 위만은 번조선을 무너뜨렸을 뿐이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9/28 [14:26]

'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

북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했고, 위만은 번조선을 무너뜨렸을 뿐이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9/28 [14:26]
본 글은 아래와 같은 3부작의 (2부)입니다.
(1부) 단군조선의 쿠데타와 허구의 기자조선
(2부) 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
(3부) 고구려의 쿠데타는 누가 어떻게 했나?

지난 (1부)에서는 단군조선의 쿠데타로 본 기자조선의 허구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B.C 2333년 건국된 단군조선은 강역이 넓어 진한(진조선), 마한(막조선), 번한(번조선)으로 나누어 통치되었으며, 진한(진조선)은 단제께서 직접 다스렸고 마한과 번한은 왕을 임명해 다스렸다.

대륙 동부에 있던 번조선의 땅에 은나라 사람 기자가 들어와 살게 되었고, 약 770년 후 그 후손이 되는 기후가 쿠데타로 번조선왕이 되어 6대를 내려가다 마지막 왕 기준 때 위만이 쳐들어와서 번조선의 도읍을 점령하게 된다. 기준은 도읍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번조선의 남쪽(산동성과 강소성의 海 지방)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운다.

기준은 기자를 문성대왕으로 추존하고 기자와 기후로 연결되는 직계 조상들을 전부 왕으로 추존하여 41대의 왕계를 만든다. 그래서 실제 왕위에 있지도 않았던 기자 이하 35명의 기씨 조상들이 추존왕이 된다.  참고로 마지막 6대는 실제로 번조선에서 왕 노릇을 했다.

명나라의 속국이 된 조선왕조와 일제의 앞잡이가 된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41대의 왕계(35명 추존)를 기자조선이라 하여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로 만들었다. 즉 47분의 단군에 의해 2,096년간 다스려졌던 단군조선을 반토막낸 것이었다. 그런 기자조선이 위만에게 멸망하여 위만조선이 섰고 그 위만조선이 한사군(漢四郡)으로 바뀌었고 그 위치가 대동강 평양이라는 것이 이 나라의 정신을 썩게 한 조선왕조와 일제의 이론이었다. 

▲ 명나라의 속국 조선왕조에 의해 반토막이 난 단군조선. 조선왕조는 단군조선의 후기 1/2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일제는 전기 단군조선을 신화의 나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이 이론이 2008년까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내려오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을 몰아내고 위만이 집권한 것을 두고 기자조선이 무너지고 위만조선이 섰다고 하는 한국의 사학자들은 사대모화사상에 오염되어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럼 북부여는 어떤 과정을 거쳐 단군조선을 계승하게 되는지, 또 북부여에는 어떤 쿠데타가 일어났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단군조선의 종국(終國)과 북부여의 계승

B.C 2333년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어 47분의 단군에 의해 2,096년간 통치된 조선은 드디어 B.C 238년 마지막 단제이신 고열가단군 때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참고로 단군조선의 폐국(閉國) 1년 전인 B.C 239년 해모수에 의해 북부여가 생긴다. 

고열가단군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말씀하기를

“옛 우리 선조 열성조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랫동안 잘 다스려졌지만 이제 왕도는 쇄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하건데 그대들 오가(五加)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고 하시고 이튿날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이 되니 이에 오가가 나라를 함께 다스리기(共和政)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참고로 단군조선의 폐국 1년 전인 B.C 239년 해모수는 몰래 수유(기비)와 약속하고 옛 도읍인 백악산을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으며,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삼고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번조선왕 기비는 해모수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나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서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아마 기비 때문일 것이다. B.C 232년 해모수는 마침내 오가들을 회유하여 마침내 6년간의 공화(共和)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고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해모수의 등장을 정변 즉 쿠데타로 집권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5가에게 추대되어 공화정을 폐하고 제위에 오르는 단군으로 봐야 할지 그건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그런데 고열가단군이 물러나기 전인 B.C 239년 해모수가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는 백악산을 점령하고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고,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삼은 것은 분명 일종의 쿠데타적 사건이 아닌가 한다. 

나약한 고열가단군이 물러나고, 5가에 의한 6년간의 공화정이 실시된 후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해모수가 단군으로 추대된 것으로 보아서는, 비록 해모수가 단군조선의 일부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키긴 했어도 6년간이나 5가가 공화정치를 하는 등 상당히 민주적으로 진조선이 운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B.C 232년 해모수가 무리를 이끌고 5가들을 회유하니 마침내 공화정치를 철폐하게 된다. 이에 만백성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이 과정을 액면 그대로 회유로 봐야 하는지 무력시위를 앞세운 강압으로 정권을 뺏은 것으로 봐야 하는지는 역시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여하튼 해모수의 등장은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북부여의 시작이었다. 비록 국호는 조선에서 북부여로 바뀌었지만 단군이란 제호(帝號)는 그대로 썼다. 

▲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단군. 김산호화백의 작품이다.  

이렇게 시작된 북부여는 다시 고구려로 이어진다. “고구려는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한다 했다.”고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라는 국호는 해모수의 고향 지명에서 기인되었음을 알게 된다. 

해모수단군은 B.C 221년 기비가 죽으니 그의 아들인 기준을 번조선의 왕으로 봉한다. B.C 195년 연나라 출신 위만이 북부여의 해모수단군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런데 번조선 왕 기준이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받아들이고 상하 운장을 떼어서 봉지로 준다.

이렇게 단군조선의 핵심인 진조선을 계승한 해모수의 북부여를 식민사학계는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그 이유는 단군조선--> 북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끊기 위함일 것이다. 단군조선을 반토막내고 또 적장자인 북부여를 우리 역사에서 지우고, 대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등장시킴으로서 조선왕조는 고구려를 단군조선과는 아무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단칸 셋방에서 시작된 초라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고구려가 만일 단군조선과 북부여를 계승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조그마한 단칸 셋방에서 시작된 개인회사라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동북아 최대의 재벌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고구려가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분명 광개토태왕 비문에도 “시조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오고 천제의 아들이다.(出自北夫餘天帝之子) ”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하늘의 임금인 천제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북부여의 단제인 것이다. 이러한 북부여를 역사에서 지워버린 조선왕조와 식민사학계는 민족의 역사 앞에 오강들고 벌서고 반성문을 써야한다.  

▲  위만이 기준을 공격했을 당시 엄연히 북부여와 낙랑국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를 일제는 우리 역사에서 지운다. 그리고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으로 내려간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 동부 평야지대이다. 여기도 번조선의 강역이었다. 海는 바다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 이름이다.

위만조선은 나라인가? 도적집단인가?

계속해서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따르면, “북부여 2세 모수리단군 원년인 B.C 194년 결국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해(바다가 아니고 산동성의 ‘海’라는 지방)로 들어가고, 3세 고해사단군 42년 B.C 128년에 위만의 도적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4세 고우루단군 원년 B.C 120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고, B.C 118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북부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한다. 결국 B.C 108년 한나라가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한단고기 북부여기>는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잇는 북부여는 위만과 우거를 국가가 아닌 도적집단으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기준은 엄연히 번조선의 왕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북부여는 위만/우거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북부여는 위만을 도적집단으로 불러 ‘토벌’과 ‘침략’이란 용어를 쓴다. 

▲   우리나라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위만조선에 대한 설명.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도적집단인 위만과 우거를 우리나라 사학계는 고조선과 기자조선을 계승한 위만조선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우거를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라 부르며 위만조선을 한껏 추켜세우고 있다. 한국 사학계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아래와 같이 홈피를 통해 위만조선을 찬양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인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이래가지고서야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인용) 위만조선은 위만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중국 망명 집단과 다수의 토착집단의 결합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기에, 처음부터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나중에는 중국 망명인 출신들 또한 고조선인으로서 완전히 토착화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정권을 빼앗긴 준왕은 뱃길로 서해안 일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교역과 중개를 통해 실력을 배양시켰고, 이렇게 하여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과 진번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위만조선의 성장은 당시 북방의 강자인 흉노와 대치 국면에 놓여져 있던 한나라로 하여금 불안감을 야기시켰고, 결국 기원전 109년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50,000여명에 달하는 대군을 발동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하였는데, 위만조선의 군사력은 한나라가 근 1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내분을 유도하여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강성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인용 끝)

우리 사학계가 치켜세우는 위만조선은 3대에 걸쳐 겨우 약 90년 동안 존재했던 도둑집단일 뿐이다. 위만과 우거가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라의 체제나 제대로 잡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위만조선이 ‘한나라와의 교역으로 실력을 배양했고, 이렇게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과 진번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의 광고의 말을 믿어야할지....  이건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 아니겠는가?

위와 같이 우리나라 식민사학계는 단군은 신화이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아직도 철저한 반도사관을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강단사학계는 아직도 일본천황을 섬기는 일제치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민족사학계는 <한단고기>를 인용해 북부여가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말하고 있다. 누가 옳을까???

▲  아직도 단군을 신화라고 알리고 있으며, 위만조선을 찬양하고 심지어는 고조선의 건국년도인 B.C2333년까지 믿기 어렵다고 말하는 동북아역사재단에 정부는 수십원억을 지원하고 있다. 참으로 정신나간 정부 아닌가???

북부여 5세 고두막단군에 의한 쿠데타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따르면 “고두막은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에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동명국을 세우고 즉위한다. 한나라가 4군을 세우고저 사방에서 침략함에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B.C 97년 10월 동명국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에게 사람을 보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여기서 옮겨 가시오”라 하니 고우루단제가 매우 곤란해 했다. 마침내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했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어 즉위하였는데  고두막한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B.C 87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해부루왕을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忿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마침내 해부루왕은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역대 왕력


위와 같이 동명국왕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쓰러뜨린 행위는 확실한 쿠데타라 하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고두막한은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해부루를 분릉으로 옮기고는 도성에 들어와 국호를 쓰는데, 왜 그는 종전에 쓰던 ‘동명국’을 버리고 ‘북부여’라 칭했을까?

그 이유는 북부여가 위대한 대제국 단군조선의 적통을 계승한 적장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지 않았다면, 고두막한이 굳이 해부루를 쫓아내고 자기가 쓰던 국호(동명국)까지 버리면서까지 북부여란 국호 사용에 집착을 했겠는가?

북부여란 국호를 강제로 빼앗은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5세 단군으로 등극한다. <한단고기 북부여기>에는 고두막의 재위기간이 이원화 되어 있다. 재위(在位) 22년은 고두막한이 동명국의 왕으로 있었던 기간이고, 재제위(在帝位) 27년은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단제였던 기간이다.

강력했던 고두막단제가 붕어하자 태자인 고무서 단군이 등극한다. B.C 58년 고무서단군이 재위 2년 만에 붕어하면서 사위였던 고주몽더러 대통을 이으라고 유언하여 23세의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이 분이 바로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시는 고추모(주몽)이다.

이렇듯 분명히 북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했고, 또한 도적 위만과 우거가 활동할 때 분명 어엿한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북부여는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연결된다. 역사가 이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북부여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북부여의 역사를 지워버린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신화로 만든 일제와 같은 종자가 아니겠는가!!!  


▲  주몽의 북부여 7대 단군으로의 즉위를 <한단고기>는 B.C 58년이라 한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B.C 37년은 고구려로 국호를 바꾼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소서노는 6대 고무서 단군의 딸이 아니고 연타발의 딸로 보인다.  

<한단고기>에는 B.C 58년을 고구려의 건국년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청송 김성겸선생이 번역한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고집인 <고구려 사초.략>에는 고구려의 건국을 B.C 37년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두 종의 사서가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서로 다르게 적었다고 해서 한 사서가 위서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고 본다.

필자는 B.C 58년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등극한 고주몽이 B.C 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한 사서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제로 등극한 B.C 58년을 고구려의 건국으로 본 것이고, 한 사서는 북부여에서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년도인 B.C 37년을 고구려의 건국년도로 보고 있는 차이일 뿐이다. 즉 견해의 차이일 뿐이다.

<한단고기 삼성기전>에 기록되어 있기를, “B.C 58년 봄 정월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주몽)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년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사용한 자체 년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한단고기>는 고구려 황제들의 연호를 몇 개 언급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고주몽 성제(聖帝)가 사용한 ‘다물’이라는 년호이다. (고구려 황제들의 자체연호 사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종합해서 별도의 글을 올리기로 한다.)

참고로 <한단고기>의 고주몽 성제(聖帝)를 <삼국사기>에서는‘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고 있으며, <고구려 사초.략>에서는 추모대제(芻牟大帝)라 쓰며 년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자체 년호를 사용한 어엿한 황제국이었음이 밝혀졌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자체 년호를 사용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명성왕, 유리명왕, 대무신왕 이란 왕명으로 위장하나, 이는 정식 황명(皇名)이 아니라 자체 년호였음이 남당 박창화 유고집인 <고구려 사초.략>에 의해 밝혀진다.

1세 추모대제는 ‘동명(東明)’이란 년호를, 2세 광명(光明)대제는 ‘유리광명(琉璃光明)’이란 년호를, 3세 대무신제는 ‘대무(大武)’라는 년호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부식(또는 아마 조선왕조?)이 왕명을 기막히게 작명해 고구려가 자체 년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긴 것으로 보인다. 

▲  고구려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 남당 유고집 <고구려사초.략> 청송 김성겸선생 번역

이처럼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에서 발생했던 쿠데타를 돌이켜 보면, 정변을 일으킨 자가 제위에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던 것이 고구려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동부여의 건국과 쿠데타와 멸망

참고로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의 동생인 해부루는 고두막단군에 의해 B.C 86년 동쪽으로 옮겨와 가섭원(동)부여를 세워 39년간 통치한다. <한단고기>에는 이어 2세 금와(41년)--> 3세 대소(28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대소왕은 A.D 22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구려의 장수 괴유(怪由)에게 죽음을 당한다. 

대소의 죽음에 대한 이 기록은 <삼국사기>와도 내용과 년도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대소왕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동부여는 당시 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단고기>는 동부여의 멸망에 대해 자세한 언급이 없고, <삼국사기>는 동부여가 대소가 전사한 해와 같은 해 결국 항복한 것으로 적어 놓았으나 그 이후에도 부여 관련 기록이 몇 개 있어 그 기록이 이상해 보인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명대제 33년 (A.D 14년) 대불이 ‘대소’를 죽이고 보위에 섰다. 즉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것으로 봐야 한다. 대불은 A.D 32년 전쟁 중에 전사하고 이어 여왕 고야가  통치하다, A.D 51년 고구려 대무신왕 때 평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부루-->금와-->대소-->고야를 거치면서 4대 110년을 이어오다가 나라의 문이 닫혔으며, 중간에 대불이 19년간 보위를 훔친 적이 있다고 적어 놓았다. 대소왕의 동생은 “갈사(曷思)‘라는 나라를 세우나 3세 47년 만에 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갈사라는 나라는 동부여에서 갈라져 나간 지류(支流)로 봐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에 동부여 정벌에 대해 상세히 나오고 왕대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동부여의 가지인 갈사까지 언급하면서도, 북부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단고기>의 내용대로 “B.C 58년 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꿨다.”는 기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  KBS 사극 '바람의 나라'에서 동부여의 3대 대소왕으로 분한 한진희
 
삼국사기에는 북부여를 한번 언급하고 있다. “유리명왕 29년(A.D 10년)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더불어 떼지어 싸워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빛이니 북부여(北夫餘)가 파멸될 징조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는 같은 년도에 같은 기록이 있으면서 “오지인이 대소(동부여)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부여라고 언급하면서 북부여 이야기는 전혀 없고 동부여 이야기만 적고 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북부여가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 기록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기록은 사관(史官)들이 분명 북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그리고 북부여와 고구려가 전쟁을 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유리왕 29년의 <삼국사기> 기록은 누군가가 확실히 조작한 기록으로 보인다. 또는 부여(동부여)의 북쪽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북부여라는 나라는 있었으나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않은 이유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가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즉 고구려와 북부여는 같은 나라로 서로 공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따라서 <한단고기>의 B.C 58년 고구려 건국 기록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한단고기 북부여기>는 위서인가?

일제의 식민사학을 고수하는 강단사학계는 우리 민족의 성서인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까지 그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지 두고 보기로 한다. 본 글은 북부여와 관계된 글이기에 <한단고기>의 일부인 <북부여기>가 과연 위서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정본 한단고기에 포함되어 있는 북부여기 상, 하, 가섭원 부여기의 저자는 휴애거사 범세동장(休崖居士 范世東)선생으로 일명 범장(范樟)이라고도 한다. 범세동선생은 금성 범씨 대동보에 의하여 실존인물임이 증빙되었고, 대동보에 “북부여기 약초(略抄)”가 기록되어 있어 북부여기 실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 휴애거사 범장(休崖居士 范樟)
휘(諱) 세동(世東), 호(號) 휴애(休崖) 또는 복애(伏崖), 자는 여명(汝明)이다. 선조가 금성인(錦城人)으로 본관은 금성이다. 통찬(通贊) 후춘(後春)의 아들이며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 말기의 대학자이다. <한단고기>에 합본된 <북부여기 상, 하>와 <가섭원부여기>를 편찬하였고,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편집화해사전(編輯華海師 全)을 편찬하였다.

일찌기 공민왕 18년인 1369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郎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義大夫)를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표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광주직할시 광산구 덕림동에 묘소가 있으며, 북구 생룡동에 사우(祠宇, 龍湖齊)가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국가만세에 마땅히 범세동 선생과 운곡 선생의 말을 쫓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당대의 대석학이었다.

<한단고기 태백일사>에 이르기를, 행촌(杏村) 이암선생(단군세기 저자)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 가서 태소암(太素庵)에 기거할 즈음에 한 거사가 있었는데 이름이 소전(素佺)이었다. 그는 많은 기이한 옛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더불어 같이 신서(神書)를 얻게 되었는데 모두 옛 한단시대(桓檀時代)로부터 전수된 진결(眞訣)이다. 

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이여!
이렇듯 엄연한 실존 인물이었고, 범세동선생이 <북부여기>를 저술했다고 금성 범씨 대동보에 명확히 실려 있거늘 어떻게 <한단고기>를 함부로 위서라고  말하는가!!!  금성 범씨 대종회에 가서 이 사실을 확인해 보고, 만일 그 앞에서 <한단고기> 위서 운운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군세기>를 저술하신 이암선생과 <태백일사>를 편찬하신 이맥선생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고성 이씨 문중에 가서 <한단고기> 위서 운운하면 거기서도 몰매 맞아 죽을 것이다.  

▲  금성 범씨 4세인 범세동(장)선생의 기록. 이런 분이 가공의 인물일 수는 없다.
▲  금성 범씨 대동보에 실려 있는 <북부여기>에 관련 내용. 오른쪽에 퇴계 이황의 말이 실려 있다.
 
다음 주에 (3부) “고구려 때 쿠데타는 누가 어떻게 했나?”가 연재됩니다.

구산 08/09/28 [20:15] 수정 삭제  
  하도 억측이 심하여 정석대로 반론을 제기하기는 너무도 거리가 멀군요. 해(海)를 바다인지 육지인지 조차 구분이 안되는 글을 쓰고 계시니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풀러스 코리아 에 글을 올릴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좀더 상세하게 반론을 제기하겠습니다.
구산 08/09/28 [20:32] 수정 삭제  
  위만조선 위치를 북경 지역에다 설치를 하면 연나라가 조선을 동쪽으로 밀어내고 세운 5군 즉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은 어디에 있는것입니까? 진나라의 동쪽 국경이 바다에 미쳤다는 글은 보셨을텐데 위만조선이 연나라의 중심인 북경위치에 머무르게 된다면 바다 밖으로 밀려난게 아니지요.기왕에 참고하고 있는 의 기록을 가능하면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중국의 사서라지만 그들의 기록을 함부로 무시하고 임의대로 글을 쓰게 되면 소설이 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실례의 말씀을 드리게 된것은 성훈님의 글을 몇차례 읽었기 때문입니다.
08/09/28 [21:11] 수정 삭제  
  39세의 한가정을 가지고있는가장입니다.우리역사의비밀및플러스코리아를 통해서 저의정체성을 확인하고있읍니다.한학자와같지않고 한문실력이 너무짧아 저의 근본이나마 겨우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 선생님들과같은 우리민족의 등불이되어주신분들이 있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처음 우리의 역사를 접할때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는데 근 1년이되어가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제대로 정립이되어집니다.제 주위의 모든 분들께도 우리의 참역사를 알기위해 많이 이야기하고 미력하나마 사이트 소개 많이하고 있읍니다.역사와 관련된 서적도 많이 구해 공부하고 있고요.저의 두 아들에게도 우리의 뿌리를 가르칠수 있게 이러한 진실을 가르쳐 주시는 애국하시는 분들에게 작으나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본 사이트및 여러관련된 부분에서 말도 안되는 매국의길을 걷고 있는 배움이 충만한 지식인 여러분들 당신들의 후손들을 생각해서도 많은 지식을 갗추어으면 제발 옳은 길로 배움을 풀어주십시요.
08/09/28 [21:18] 수정 삭제  
  교육제대로 받으신분들 말문이 막히면 한자 몇자 댓글 달고 무식하다고 육두문자 달기전에 자기자신의 양심부터 제대로 한번 되 돌아보고 대한국인을 위해서 배우신 지식을 널리 베풀어 주십시요.제2.3의 매국노 이병도가 되지마십시요.
지오 08/09/28 [22:09] 수정 삭제  
  그간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대체 뭔가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정확히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김성겸 08/09/28 [22:52] 수정 삭제  
  구산 선생님?의 질책에 감히 한 말씀 올린다면;
"海"라는 글자를 보기만 하면 자동으로 "洋"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심각한 역사기록 오독 및 오해를 야기합니다.
고지도들과 지난18~20세기에 발간된 군사지도들을 들여다보면
엄청나다고 할만큼의 "海"자가 들어간 지리명이 현금 서쪽 중공땅에 깔려있음을
인지하시고 계시길 희망합니다.

의 시국 년도와 관련하여서는
, , , 등의 휘호와
및 이라는 년호가 뒤엉켜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어느 누구도 아직은 확정하여 오지 못하였던 문제입니다.
두 사람을 한 사람으로 오인한 것 등의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다소 성급하셨지 않았나 하는 느낌입니다.
구산 08/09/28 [23:42] 수정 삭제  
  >>海"라는 글자를 보기만 하면 자동으로 "洋"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심각한 역사기록 오독 및 오해를 야기합니다.
고지도들과 지난18~20세기에 발간된 군사지도들을 들여다보면
엄청나다고 할만큼의 "海"자가 들어간 지리명이 현금 서쪽 중공땅에 깔려있음을
인지하시고 계시길 희망합니다.

***요즘 너무도 고생을 많이 하고 계시는 김성겸선생과 이런 문제로 승강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시면 역으로 바다를 바다로 해석하지 않고 내륙의 평원등으로 해석하는것이 옳다는 말씀인지요? 저는 반대로 어떤 사서에서 바다를 海로 표시 하였는데도 풀기가 어려울때 내륙이나 해변등지로 또는 대하등지로 해석을 하고 바다해자를 해석하는 방법을 다르게 제시한 예를 많이 보았습니다. 번역을 하신 고구려사초에서 대무신왕이 태자시절에 신라로 가는 얘기가 나오던데 배를타고 바다를 통해서 간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압니다. 이런 기록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시 바닷길이란 50프로는 죽는다는 각오를 해야 할땐데 안전한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바닷길을 택해서 갔다는것으로 해석한다면 잘못된 해석일까요. 만약에 뱃길로 간것이 사실이라면 불가피 했던 사실까지 알아야 합니다.
김성겸 08/09/29 [12:14]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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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자료:

○ 二十七年甲寅, 四月, 太子, 將兵東巡獵, 微行至新都(鴨口), 與女交好. {其}女, 爲之, 破鼓角, 而迎王師大軍. 自浮海而入拔其都, 虜夫妻而歸, 以其地爲. , 自, 四世八十餘年, 而國除.

- - - 삽화 그림 생략 - - - 이곳에 그림 올리는 방법을 모릅니다.- - -
그림17. 군사지도상의 랑랑궁{娘娘宮}・최가둔{崔家屯}・랑랑묘{娘娘廟}를 AD20세기
후반에 중공이 발행한 지도에 옮긴 것임.
근래 중공에서는 娘娘宮과 娘娘廟를 바닷사람들의 안전을 빌고 제사하는
海神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포괄적인 역사왜곡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역자는 娘娘宮과 娘娘廟는 水神과는 거리가 멀며,
AD6세기 이전의 북한지역은 남한지역은 으로 추정함.

○ 27년{단기2387년/AD54}갑인, 4월, 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을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하여 의 신도읍(압구){=남옥저}에 이르러 의 딸과 좋아지냈다. 그녀는 을 위해 북과 나발을 망가뜨려서 왕이 거느린 대군을 맞아들였다. 에서 대군을 이끌고 배로 물을 건너 들어가 그 도읍을 빼앗고, 내외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그 땅은 으로 삼았다. 은 로부터 4대 80여 년 만에 나라가 사라진 것이었다{=통째로 에게 거두어들여진 것이었다. 그림17}.

***위 인용글 중 ( )은 남당선생의 견해이며, 저의 지리비정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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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제가 번역한 글을 일부 옮겨놓았습니다.

이 번역에 있어서 전제한 것은;
이 시절 바다와 만나는 황하의 하구나 현금의 요하 하구는
고대지리에 관련한 학자들의 연구결과와 견해를 감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리의 락랑국, 옥저 및 고구리의 위치에 대한 비정에 있어서는
고구리의 동쪽인 대릉하하류 이동정도에서 현금의 요동반도지역에
이 시절의 락랑이 있었고, 락랑의 북쪽으로 {북}옥저가 있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호동은 육지로 빙 돌거나 하면서 {동}옥저 또는 {남}옥저 지역으로 순행하였고,
대무신제는 직전엔 락랑이 깔고 앉았던 옥저의 구지 남쪽에서 -지금은 해안저지대로 변한-
연해지역을 수군 또는 수군과 함께 빠른 속도로 건너서
동쪽 옥저땅이었던 현금의 요동반도 지역으로 도피하여 있는
최리를 잡으러 간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 시절, 대무신제의 고구리의 중심위치는 서도西都가 지금의 중공 북경 주변이었고
동도東都는 현금 중공 하북성 당산지진대 위에 얹혀있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따라서, 이 시절 대무신제가 浮海한 것은 육지 연안에서 배를 타고 현금의 요하 하구지역을 건넌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제하에 고구리사 초・략을 번역하였습니다.

이러한 이해의 저변엔 고구리 대제국의 시조 초모대제가 재위 10년에 서도를
옛 압수{현금의 영정하 중하류지역}변 저지대에 서도를 세웠고,
이곳 서도에서 추모가 죽고 제2세 유리가 보위에 올랐으며,
유리는 두곡의 별궁에서 죽고 두곡 동원에 묻혔다고 적혀있음을 적시하였으며,
아울러서 현금 거마하의 지류인 유리하 인근 유리하진 근처에
예태후{예씨}, 소황후{소서노}, 유리명제 즉 광명대제의 무덤들과 사당이 있었다는
권철현 전의원의 답사보고를 지리 비정에 [확실한 말뚝]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제가 얼토당치 않게 고구리사 초・략을 번역・해설하였거나,
구산 선생님의 연구결과에서 우러나온 말씀을 손상시켜 드렸다면,
해서하시고 후학을 옳바른 길로 바로잡아 인도하여 주시길 앙청하옵니다....

감사합니다.
ㅋㅋㅋ 08/09/29 [13:13] 수정 삭제  
  박정희-전두환이가 해모수라도 된다 이건가?ㅋ
공부하자 08/09/29 [13:21] 수정 삭제  
  기준은 도읍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번조선의 남쪽(산동성과 강소성의 海 지방)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운다.====>오류. 바다건너 한반도 땅으로 와서 나라를 세운게 맞음. 한이란 한반도를 표현한 용어임.

[후한서-東夷列傳 ]

韓種有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한韓의 종류로는 셋이 있으니, 그 첫번째를 마한이라 하고, 두번째를 변한이라 하며, 세번째를 진한이라 한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 等詣樂浪貢獻.[1] 光武封蘇馬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靈帝末, 韓 濊 盛, 郡縣不能制, 百姓苦亂, 多流亡入韓者.[애초에 조선왕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격파되자, 그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내빼서 사정없이 도망친 후(走入海)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즉위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 뒤로 멸망하여 단절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스스로 즉위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내용 중 "바다로 내빼 내달려서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한 건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마한)에 도착하여 마한을 공격했다"는 의미다. 단군3조선 중 마한을 중국으로 설정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직도 있다는 말인가?

단군3조선 중 한반도지역에 해당하는 마한땅인 한반도에는 동쪽에 서기전209년에 경주에 진한이 세워졌고, 서기전194년 번조선이 망하자 번조선의 유민들이 이동하여 한반도 남쪽에 변한이 들어섰으며, 번조선왕 기준은 배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가 토착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다시 한반도의 남쪽 금마로 가서 마한왕이 되었다가 왕통이 단절되자, 다시 마한사람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후한서-동이열전]이나[삼국지-동이지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때 마한이 한반도 남부지역의 실질적 지배권을 가지고 경상도지역의 진한과 변한을 통제하였다.

서기전238년 단군조선이 망할 때 만리장성 부근의 단군조선 유민들이 혹사를 피하여 대거 한반도로 유입되어 서기전209년에 진한을 건국하였던 것이다. 진한을 세운 사람은 소성(蘇城)에서 온 소백림(蘇백琳)이라고 한다. 이 한반도의 소씨가 진주소씨가 되었다.

[후한서-동이열전]의 기록이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 즉,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마한이 가장 크니 모두 함께 그 혈통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고,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모든 삼한三韓의 땅을 왕으로서 다스린다. 그 곳 모든 나라 왕의 선조들은 모두 마한 혈통의 사람들이다...진한辰韓은 늙은이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도망한 사람들로서, 고된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에 건너가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


아래 후한서에도 [한]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은 한반도지역을 의미한다.
고대 문헌을 제대로 이해하고 역사연구를 하자. 기본이 안되면 엉망된다.

[후한서-東夷列傳 ]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 等詣樂浪貢獻.[1] 光武封蘇馬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靈帝末, 韓 濊 盛, 郡縣不能制, 百姓苦亂, 多流亡入韓者.

애초에 조선왕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격파되자, 그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즉위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 뒤로 멸망하여 단절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스스로 즉위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後漢書 卷八十五 東夷列傳 第七十五




03〔韓-06/01〕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한韓은 세 종류가 있으니, 첫번째를 마한馬韓이라 하고, 두번째를 진한辰韓이라 하며, 세번째를 변진弁辰이라 한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이 낙랑과 접하며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고, 그 북쪽이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하고 있다. 무릇 78국이며 백제伯濟가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것은 1만여 호戶이고 작은 것은 수천 가家로서, 각기 산과 바다의 사이에 있으며, 땅을 합하면 사방 4천여 리로서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니 모두가 예전의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크니 모두 함께 그 혈통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고,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모든 삼한三韓의 땅을 왕으로서 다스린다. 그 곳 모든 나라 왕의 선조들은 모두 마한 혈통의 사람들이다.

03〔韓-06/02〕馬韓人知田蠶, 作 布. 出大栗如梨. 有長尾 , 尾長五尺. 邑落雜居, 亦無城郭. 作土室, 形如 , 開戶在上. 不知 拜. 無長幼男女之別. 不貴金寶錦 , 不知騎乘牛馬, 唯重瓔珠, 以綴衣爲飾, 及縣頸垂耳. 大率皆魁頭露 ,[1] 布袍草履. 其人壯勇, 少年有築室作力者, 輒以繩貫脊皮,  以大木,  呼爲健. 常以五月田竟祭鬼神, 晝夜酒會,  聚歌舞, 舞輒數十人相隨 地爲節.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天君]. 又立蘇塗,[2]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

마한馬韓 사람들은 밭농사와 누에치는 법과 고치솜과 피륙을 자을 줄 안다. 배만한 크기의 밤이 난다.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다섯 자나 된다. 읍락은 서로 섞여 거처하며 역시 성곽은 없다. 흙으로 집을 짓는데 모습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열어둔다. 무릎 꿇어 절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어른과 아이 및 남녀의 구별이 없다. 금과 보석 및 비단이나 담  등은 귀하게 여기지 않고 소나 말을 탈 줄을 모르며, 오직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 옷에 매어달아 장식으로 삼거나 목이나 귀에 걸어 드리운다. 대부분 모두 맨머리에 드러난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도포에 짚신을 신는다. 사람들은 건장하고 용감하여 어린 나이에도 집을 짓는 등 힘을 쓰는 자가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새끼줄을 등골 가죽에 관통시키고 큰 나무를 매어 달아 힘 있게 외치며 일하는 것을 건장하다 여긴다. 항상 5월이면 밭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 지내며 밤낮으로 술자리를 열고 무리지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데, 춤을 출 때는 번번이 수십 명이 서로 따르며 절도 있게 땅을 밟는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도 다시 이와 같이 한다. 모든 나라의 읍邑에는 각기 한 사람이 주관하여 하늘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한 소도蘇塗를 설치하여 큰 나무를 곧추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섬긴다. 그 남쪽 경계가 왜倭와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

【1】魁頭猶科頭也, 謂以髮 繞成科結也.  音計.
【2】《魏志》曰: [諸國各有別邑, 爲蘇塗,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蘇塗之義, 有似浮屠.]
【1】괴두魁頭는 과두科頭(관冠 등을 쓰지 않은 맨머리)와 같은데 머리칼을 둘러 얽어 묶음을 만든 것을 말한다.  의 음은 '計(계)'이다.
【2】《위지》에 이르기를 [모든 나라에는 별도의 읍이 있어 소도蘇塗를 두고 모든 도망자가 도피하여 그곳에 이르면 누구라도 그를 돌려보내지 않는다. 소도의 의미는 사찰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03〔韓-06/03〕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 , 次有殺奚, 次有邑借.[1] 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 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 倭 馬韓 從市之. 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飮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2]

진한辰韓은 늙은이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도망한 사람들로서, 고된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에 건너가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름하는 것에 나라를 일러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며, 도적을 구寇라 하고,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며, 서로 일컬을 때는 도徒라고 하는 등 진秦나라의 말과 비슷한 까닭에, 혹은 이름하여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성곽과 목책 및 가옥이 있다.

모든 작은 별도의 읍邑에는 각기 우두머리가 있는데, 가장 큰 자를 신지臣智라 이름하고, 그 다음으로 검측儉側이 있고 그 다음으로 번지樊 가 있으며, 그 다음으로 살해殺奚가 있고 그 다음으로 읍차邑借가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을 기르기에 알맞다. 누에치고 뽕나무 심는 것을 알고 목화와 무명을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부린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은 예절로서 한다. 행인은 길을 양보한다. 나라에서 쇠가 나는데, 예濊와 왜倭 및 마한馬韓 등이 모두 와서 사간다. 무릇 모든 교역은 모두 쇠를 통화로 삼는다. 풍속에 가무음주 및 북을 치고 거문고 타기를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평평하게 하고자 모두들 돌로 눌러 놓는다.

【1】皆其官名.
【2】扁音補典反.
【1】모두 관직 이름이다.
【2】扁의 음은 補典反이다.
03〔韓-06/04〕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其人形皆長大, 美髮, 衣服 淸. 而刑法嚴峻. 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변진弁辰은 진한과 섞여 거처하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에 차이가 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키와 몸집이 크고 아름다운 머리칼에 의복은 정결하며 깨끗하다. 죄인을 다스리는 법은 준엄하다. 그 나라는 왜倭와 가까운 까닭에 문신을 한 자가 제법 된다.

03〔韓-06/05〕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 等詣樂浪貢獻.[1] 光武封蘇馬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靈帝末, 韓 濊 盛, 郡縣不能制, 百姓苦亂, 多流亡入韓者.

애초에 조선왕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격파되자, 그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즉위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 뒤로 멸망하여 단절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스스로 즉위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건무建武(25∼56) 20년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 소마시蘇馬  등이 낙랑에 찾아들어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가 소마시를 책봉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고 낙랑군에 예속되게 하니, 철철이 예방하고 배알하였다. 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더불어 번성하니 군현郡縣으로는 능히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생활이 괴롭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많이 한韓으로 도망하여 흘러 들어갔다.

【1】廉斯, 邑名也.  音是.
【1】염사廉斯는 읍邑의 이름이다.  의 음은 '是(시)'이다.
03〔韓-06/06〕馬韓之西, 海 上有州胡國. 其人短小,  頭, 衣韋衣, 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貨市韓中.

마한의 서쪽 바다섬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작고 머리는 깎은 채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데, 위의 것은 있으나 아래의 것은 없다.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재물을 한韓에 내다팔고 산다.







晉書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馬 韓



05〔馬-03/01〕韓種有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한韓의 종류로는 셋이 있으니, 그 첫번째를 마한이라 하고, 두번째를 변한이라 하며, 세번째를 진한이라 한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

05〔馬-03/02〕馬韓居山海之間, 無城郭, 凡有小國五十六所, 大者萬戶, 小者數千家, 各有渠帥. 俗少綱紀, 無 拜之禮. 居處作土室, 形如 , 其戶向上, 擧家共在其中, 無長幼男女之別. 不知乘牛馬, 畜者但以送葬. 俗不重金銀錦 , 而貴瓔珠, 用以綴衣或飾髮垂耳. 其男子科頭露 , 衣布袍, 履草 , 性勇悍. 國中有所調役, 及起築城隍, 年少勇健者皆鑿其背皮, 貫以大繩, 以杖搖繩, 終日 呼力作, 不以爲痛. 善用弓楯矛櫓, 雖有鬪爭攻戰, 而貴相屈服. 俗信鬼神, 常以五月耕種畢,  聚歌舞以祭神; 至十月農事畢, 亦如之.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謂爲天君. 又置別邑, 名曰蘇塗, 立大木, 懸鈴鼓. 其蘇塗之義, 有似西域浮屠也, 而所行善惡有異.

마한馬韓은 산과 바다 사이에 거처하며 성곽이 없고, 무릇 작은 나라가 56개가 있으니 큰 것은 1만 호이며 작은 것은 수천 가로서 각기 우두머리(渠帥)가 있다.

풍습은 기강이 느슨하여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 흙집을 지어 거처하는데 형태는 마치 무덤 같으며, 출입구는 위로 향하여 두고 온 집안이 그 가운데서 같이 지내니 어른과 어린이 및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 소나 말은 타는 법을 알지 못하니 길러서 단지 장례를 치르는 데 쓰인다.

풍속에 금 은이나 비단과 모직 등은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나 옥돌이나 구슬을 귀하게 여기니, 그것을 옷에 꿰거나 혹은 머리에 장식하고 귀에 걸어 늘어뜨린다. 남자들은 맨머리에 밖으로 드러난 상투를 틀고, 무명옷과 솜옷에 짚신을 신으며 성격은 용감하고도 굳세다. 나라에 조세로서 부역할 일이나 성곽, 또는 황참隍塹을 건축할 일이 있으면 나이 어린 건장한 자들이 모두 등줄기의 가죽을 뚫어 큰 줄로 관통시키고, 몽둥이를 그 줄에 매달아 온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쓰고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

활과 방패 및 창과 큰 방패 등을 익숙하게 사용하며, 비록 전쟁이 있어 공격하여 싸우더라도 굴복한 자를 돌보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풍속에 귀신을 믿으니 항상 5월에 밭갈고 씨뿌리기를 마치면 무리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10월에 이르러 농사를 마치고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나라의 읍락마다 각기 한 사람을 세워 하늘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는데, 일컬어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 별도의 읍을 설치하여 소도蘇塗라 이름하고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 둔다. 소도의 의미는 서역西域의 부도浮屠와 유사하나 선악을 행하는데 있어서 차이가 있다.

05〔馬-03/03〕武帝.太康元年 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 八年 十年, 又頻至. 太熙元年, 詣東夷校尉何龕上獻. 咸寧三年復來,[3] 明年又請內附.

무제 태강太康 원년과 2년에 그들의 군주가 빈번히 사신을 들여보내 토산물을 바쳤으며, 7년과 8년 및 10년에도 또한 빈번히 들어왔다. 태희太熙 원년에 동위교위 하감何龕에게 찾아들어 물품을 바쳤다. 함녕咸寧 3년에 다시 들어왔으며, 그 다음해에는 또 내지內地로 붙좇기를 청하였다.





辰 韓



05〔辰-02/01〕辰韓在馬韓之東, 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 韓割東界以居之, 立城柵, 言語有類秦人, 由是或謂之爲秦韓. 初有六國, 後稍分爲十二, 又有弁辰, 亦十二國, 合四五萬戶, 各有渠帥, 皆屬於辰韓. 辰韓常用馬韓人作主, 雖世世相承, 而不得自立, 明其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也. 地宜五穀, 俗饒蠶桑, 善作 布, 服牛乘馬. 其風俗可類馬韓, 兵器亦與之同. 初生子, 便以石押其頭使扁. 喜舞, 善彈瑟, 瑟形似筑.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망명인들로서 노역을 피해 한韓에 들어오니, 한이 동쪽 경계를 나눠주며 거처하게 하기에 성벽과 목책을 세우게 되었다고 하며, 언어가 진秦나라 사람들과 서로 비슷한 점이 있기에 혹은 그들을 일컬어 진한秦韓이라 한다.

처음에는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그 후로 점차 나뉘어져 열두 나라가 되었으며, 또한 변진弁辰이 있어 역시 열두 나라이니 합하여 4,5만 호이며, 각각에 우두머리가 있고 모두 진한辰韓에 예속되어 있다. 진한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군주를 삼는데, 비록 대대로 그 보위를 이어간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리에 오르지를 못하니, 그 무리들이 다른 곳으로부터 옮겨 온 사람들이 분명한 까닭에 마한에 의해 통제를 받는 것이다.

땅은 오곡에 알맞으며 풍속에 누에치고 뽕나무 심기를 많이하여 비단과 베를 잘 자으며, 소를 부릴 줄 알고 말은 타는 것으로 이용한다. 그 풍속은 얼추 마한과 비슷하며 병장기 역시 그들과 같다. 처음에 자식을 낳으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평평하게 만든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며 가야금을 잘 타는데 가야금의 모습은 마치 축筑과 같다.

05〔辰-02/02〕武帝.太康元年, 其王遣使獻方物. 二年復來朝貢, 七年又來.

무제 태강太康 원년에 그 임금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2년에 다시 들어와 조공하였으며 7년에 또 들어왔다.



구산 08/09/29 [14:30] 수정 삭제  
  청송님,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있는 동행자들입니다. 고대로 가는길을 찾기가 쉬웠다면 무슨 고통이 있었겠습니까? 모르는길을 가다보니 동행자들 끼리도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것은 큰 허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목소리 큰사람을 따라가더라도 옳은길이 아니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는 없는것입니다.방향을 잘못 잡았다는것을 알았으면 바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기에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방향이 잘못되었다 싶으면 더 늦기전에 도움이 될수있는 조언을 하는것이 동행자의 도리라고 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공부를 한사람은 이의라도 제기할수 있지만 거의 초심자들은 맹목적으로 따를수 밖에 없는것이지요. 번역자는 비판없이 원문대로 번역을 하면 일단 의무는 다하는것 같지만,문제가 될만한 주제에 대해서는 역자의 주석이 필요하지요.기왕에 책이 완성되어 공급중에 있으니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하고 독자님들의 평을 기다리는것이 순서라고 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광나루 08/09/29 [21:50] 수정 삭제  
  여기 와서 웃을 일이 많아서 참 좋소이다. 누가 글을 쓰도 웃지 않고 못 배길 정도로 참 재미있게 써 놓았네요.

==기준은 도읍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번조선의 남쪽(산동성과 강소성의 海 지방)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운다.

참 명문입니다. 발상의 전환은 이럴 때 하는 말입니다. 海는 지명이지 바다가 아니다. 발상의 전환 꼭 필요(?)합니다.


==조선왕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격파되자, 그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내빼서 사정없이 도망친 후(走入海)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바로 [사정없이] 이 말이 중요합니다. 재치가 넘치는 표현입니다.

=韓種有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한韓의 종류로는 셋이 있으니, 그 첫번째를 마한이라 하고, 두번째를 변한이라 하며, 세번째를 진한이라 한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

아~ 진한의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 이 말 새겨들어야 합니다. 노트 가져와서 적어서 달달 외어야 합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코미디에 전혀 소질이 없을 것 같은 분이 코미디 경연에 참가하셨는지 언듯 이해가 안가네요

우두산(牛頭山)=지두산(指頭山
구천(狗川)=구수(狗水)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오환(烏丸)
비리국(卑離國)=비리군(陴離郡)

웃기는 소재로는 별로인데요.


웃기는 부분 노력점수는 아래 부분에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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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사고》
일찍이 어떤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미처 듣고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자(箕子) 만년에 국세(國勢)가 미약해진 데다 또 위만(衛滿)의 난(亂)으로 인해 남쪽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은(南殷)이다. 남은은 위만과 여러 번 싸웠으나 싸울 때마다 패하였다. 이때 방 장군(龐將軍)이란 자가 전사(戰死)하였는데, 그의 아내는 기와 굽는 사람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더욱 노기(怒氣)를 품고 출전하여 용맹한 적장(賊將)을 죽이고 크게 승첩(勝捷)하여 돌아왔다. 그 후에 남은무종(南殷武宗)이 한 무제(漢武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위만을 토평(討平)하였는데,..."남으로 이동한 나라 이름이 남은(南殷)이라고 하니 나라이름으로부터 우리는 그 위치가 산동 남쪽 부근임을 알 수 있다. 전라도땅에 나라를 세우고 남은(南殷)이라고 할리는 없기때문이다. 그리고 위만조선을 멸할때 마한도 같이 참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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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코미디 부문에 소질이 있네요.

요새 잘나가는 초0불 처럼 잡학다식한 분으로 조선 말엽에도 이규경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어느날 조선과 중국의 野談을 읽고 이것을 五洲衍文長箋散稿 經史篇 / 論史類 論史에 南殷辨證說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몇자 적고, 이 女 이바구나 저 男 이바구나 모두 짜가다 이렇게 몇자 설을 풀어놓았는데,

이 야사를 진찌 사서인양 둔갑시키는 놀라운 재주야 말로 남을 웃기는 부문에 탁월한 점수를 주어야 합니다.

kbs 역사 드라마 작가나 코미디 작가로 나가면 대성하실 것 같은데...
역사드라마나 코미디는 사서 문구 정도야 저리 던저버리면 됩니다.
끝부분은 과감히 꼬리를 잘라 버리는 저 재치!! 정말 논라운 재치입니다.

[嘗閱一書 則其語多世所初見聞者 有曰 箕子末年 國勢殘微 又因衛滿之亂 移都于南土 此所謂南殷 與衛滿累戰累敗 時有龐將軍者 死于王事 其妻瓦匠女 奮怒出戰 殺賊梟將 大捷而歸 其後 南殷武宗 請兵于漢武帝 討平衛滿 漢將來聞瓦匠女之勇壯 大驚異之 得其所用大刀曰 此重百餘斤 《五雜組》人有千斤之力 始能於馬上運三十斤之器 雖中國丈夫 未有如此勇力也 況女子乎 歎賞不已 龐氏子孫 浮海在東洋島中云 此與 荒史.路史 同 無足稽信 然其曰南殷二字甚新。故漫記之]

공부하자 08/09/29 [23:00] 수정 삭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4년

王作熊川柵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온조임금이 웅천책을 세웠다. 마한임금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분명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온조백제는 본래 대동강에서 남하하여 한강이남에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쌓고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한의 진왕이 있는 목지국(나주)에 도읍한 마한의 기준으로 보면 동북쪽이 맞는거다. 웅진(공주)는 구태백제세력이 중심지로 잡고 온조백제까지 통합한 후 근초고왕때 마한(충청.전라지역)은 물론이고 가야일부,일본열도을 정복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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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種有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한韓의 종류로는 셋이 있으니, 그 첫번째를 마한이라 하고, 두번째를 변한이라 하며, 세번째를 진한이라 한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

==>한문내용상으로도 쉼표가 찍혀있듯이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의 전체 주어는 진한이 아니라, [한]을 의미한다. 국어문법부터 공부하고 역사공부하자. 그리고,한반도 남부지역에 해당하는 3한[=마.번.진한]의 사방둘레를 의미하는 방 4천리라고 명확히 3한이 존재했던 당시 문헌[삼국지-동이지전]에 기록되어 있어 현재 지리적인 측정거리로도 거의 일치한다.

단군3조선 붕괴당시 상황파악,그리고 문장이 의미하는 종합적인 위치분석 등 차분히 분석하면 한반도 남부지역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한단고기에 나오는 단군3조선 중 마한은 한반도 지역이다. 이 마한지역으로 단군3조선 붕괴 후 북부지역으로부터 단군조선의 유민들(진한.번한)과 흉노족(김알지 세력)들이 유입되었던 것이다.

무조건 영토 뻥팅기로 자위하지 말고 영광스러운 역사, 시련의 역사 모두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인식해야 교훈을 얻을 수 있고 미래를 열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친 과장이 가미된 주관적인 관념에 기반한 역사연구는 객관적 역사토론에서 비웃음만 사는 일이 될 뿐이요, 시간낭비이고 자기만족적인 자위행위에 불과하다는 것만 알자.
머털도사 08/09/30 [01:40] 수정 삭제  
  * 고대에 방위측정이 아주 정확했나봅니다.
나주에서 서울이 동북이라....
이건 동북이 아니라 거의 정북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목지국이 나주라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한 것인지... 이병도는 충남 직산이라던데요...

* 東西以海爲限.
이게 왜 전라도를 지칭하는 구절인지 알 수가 없군요.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막혔다는 말인데...

삼한땅이 산동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전체라고 생가되는데...
산동하북 등의 동쪽도 바다로 막혔으므로 동쪽이 바다로 막혔고,
경기충청 등의 서쪽도 바다로 막혔으므로 서쪽이 바다로 막혔습니다.
東西以海爲限과 딱 맞습니다.

무조건 뻥튀기가 아니라...

1) 마한의 동북이 백제이고,
2) 백제의 동쪽이 낙랑이고,
3) 백제의 북쪽이 말갈이다...

이걸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마한을 전라도에 놓으면 위 1) 2) 3)은 하나도 설명 못하죠.
정사든 야사든 삼국사기 마한 백제 말갈 낙랑의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을 찾아야지..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것을 가지고 그게 100% 맞는것인냥 혼자서 자위하면 안됩니다.
삼국지 韓전이 100%맞다고 생각하고 위치를 따지니...
낙랑을 강원도에 비정하는 멍청한 짓을 하는겁니다...

지금까지 동서남북 따지지 않고
백제와 낙랑을 비정한 것이 맞다고 보는 것은
중고등학생때에 책에 나와있는데로 암기해버리는 잘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그때 그 버릇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입니다.

낙랑이 어딥니까? 평안도와 요녕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디한번 마한을 전라도에 백제를 경기도에 놓고 위 1) 2) 3)을 논해보시죠.
낙랑을 어디다 비정하는지 한번 봅시다.
노가다 08/09/30 [10:58] 수정 삭제  
  아래 구절 쓰신 분 윗분 말처럼 정말로 웃길려고 한 소리는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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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西以海爲限. 이게 왜 전라도를 지칭하는 구절인지 알 수가 없군요.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막혔다는 말인데...
삼한땅이 산동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전체라고 생가되는데...
산동하북 등의 동쪽도 바다로 막혔으므로 동쪽이 바다로 막혔고,
경기충청 등의 서쪽도 바다로 막혔으므로 서쪽이 바다로 막혔습니다.
東西以海爲限과 딱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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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이 산동에서 시작하여 요서, 요동을 지나 전라도까지 뻗었다?
그래서 삼한이 산동에서는 동으로 바다에 막혔고?
삼한이 전라도에서는 서쪽으로 바다에 막혔다?
삼한이 산동에서 시작하여 전라도까지 그렇게 거대한 영역을 가졌나요?

그럼 낙랑이 평안도와 요녕성에 있다면, 낙랑은 삼한 땅 안에 있어야 되지 않나요?
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요?

= = = = =

1) 마한이 동북쪽 땅 100리를 떼어 온조에 주었고,
2)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3)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살고 있었다(물론 동쪽에도 살고 잇었다).

이것은 삼국사기 온조본기에 나오는 내용이고, 강단사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는데, 강단사학자들이 머리가 모자라 이렇게 보고 있을가요?

이것은 백제와 관련된 어느 특정시점 즉 온조왕 시대 어느 시점의 백제와 낙랑, 말갈, 마한과의 관계를 적은 것임니다.

통설은 이 시기 마한의 위치를 직산 또는 예산이나 홍성 금마 또는 아산만 밀두리로 보고 있습니다. 마한이 온조에게 깨어지고 난 후 금강 이남 전라도 방면 마한 무리들이 중국의 사서에는 마한으로 나오지만 삼국사기에는 마한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온조가 한수 이북에서 5 맥족무리(虎)의 공격을 받아 위례성이 점령당하고 한수 이남으로 넘어오자 마한이 금마산에 온 온조에게 마한의 동북쪽 땅 100리(꼭 100리라는 측량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후국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의 넓이이다.)를 할양해 주었고, 온조는 그곳에서 십제국을 세웠는데 삼국유사에는 그곳이 직산 방면인듯이 적혀 있습니다.

마한이 온조에게 마한의 동북쪽 땅 100리를 할양해 주었다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그것이 어째서 마한의 동북쪽에 백제가 있다고 해석됩니까? 온조에게 준 땅도 원래는 마한 땅인데...
사서 문구 해석이 안되면 물어서라도 배워야죠.

그리고 기원 32년 이전에는 평안도 지방이나 옥저(함경도지방), 강원도 예 무리가 사는 곳이 최리낙랑의 영역이었고, 그 영역 안에 말갈 무리들이 이주하여 낙랑국으로부터 거주지를 받고 낙랑에 복속하며 살며 낙랑의 명령에 따라 온조백제를 공격하였는데,

온조백제 북쪽 낙랑국 지역에 말갈의 거주지가 있어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이 뭐가 이상하고, 온조백제 동쪽에 낙랑국이 있다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온조기 문구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공격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말갈은 낙랑 지역에 거주한 무리라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까?
이해가 안되면 공부를 더 하던가 아니면 아는분한테 배워야죠.

평안도 방면이 전에 낙랑국 지역이라는 내용이 나오고, 최리가 옥저를 순행한 내용이 나오고, 고구려가 37년에 낙랑을 공격하자 그 무리 중 일부가 신라로 넘어왔다는 기록을 읽어보고도 낙랑국의 영역이 이해가 안됩니까?

공부하자 분 말이 백번 지당합니다.

그분 말처럼 "공부하자" "공부하자".
머털도사 08/09/30 [11:27] 수정 삭제  
  공부할때 중고등학교때처럼 딸딸딸 외우지 마시고... 생각해보셔요.

말갈이 낙랑에 복속했다고 하여
동쪽에 있다고 기록된 낙랑은 말갈이고
북쪽에 있다고 기록된 말갈은 낙랑이라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낙랑이 말갈을 부려먹었더라도...
낙랑은 낙랑이고 말갈은 말갈입니다.
즉, 낙랑의 위치와 말갈의 위치가 바뀔수 없다는 말이죠.

황해도지사가 강원도백성을 다스린다고 하여
경기도 북쪽에 강원도백성이 있고 경기도 동쪽에 황해도지사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누가 이런 상황에서 경기도 북쪽에 강원도백성이 살고 경기도 동쪽에 황해도지사가 산다고 하겠습니까? 아무도 이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분명히 낙랑은 백제의 동쪽에 있다고 했습니다.
말갈이 낙랑에 속했기에 백제의 동쪽에 있는 말갈을 삼국사기에 낙랑이라고 표현했다는 님의 주장은 틀렸는데...

왜냐하면 ........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삼국사기는 분명하게 낙랑과 말갈을 구별해서 위치를 기록했기 때문이죠.
만약 낙랑에 복속된 백제의 동쪽에 있던 말갈을 낙랑이라고 표현했다면,
굳이 백제의 북쪽에 말갈을 말갈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말갈이 낙랑에 속했었으므로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는 낙랑은 말갈이라는 궤변은 늘어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동유낙랑과 북유말갈을 분명히 구별하여 적었습니다.

중고딩때 배운 것을 버리지 못하고 그 지식에 맞춰 삼국사기의 기록을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 끌어다 맞추는 이상한 궤변을 피지 마시고....
다시 백제와 낙랑의 위치를 논리적으로 비정해보시죠. .
노가다 08/09/30 [13:18] 수정 삭제  
  =말갈이 낙랑에 복속했다고 하여
=동쪽에 있다고 기록된 낙랑은 말갈이고
=북쪽에 있다고 기록된 말갈은 낙랑이라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한문으로 된 사서 문구만 이해 못하는 줄 알았더니 한글로 쓴 게시판 글도 이해를 못합니까?

위에 이런 내용이 어디 적혀 있습니까?

온조백제 동쪽에 낙랑국이 있고,
그 낙랑이 낙랑 지역에 사는 말갈을 시켜 온조백제를 공격했다.

온조백제 북쪽도 낙랑국 영역이고,
온조백제가 건국한 곳 북쪽 낙랑국 영역 안에 살고 있던 말갈이 온조백제를 공격했다.

이것도 이해가 안가나요?

이해가 안되면 공부 좀 하세요.
기초적인 한문 문구도 이해 못하면 고등학생에게서라도 배워야죠
구산 08/09/30 [19:25] 수정 삭제  
  공부합시다님께 질문입니다.

공부를 위한 질문이니 한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래에는 와 에 기록된 마한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통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보이네요. 첫째 진한이 대방의 남쪽에 있다는것이고, 둘째는 그 진한이 동서가 바다라는 얘기입니다. 이 중에서 두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을 "진한의 동서가 바다라는 뜻이 아니고 삼한의 동서가 바다라는 뜻이라고 설명을 하셨으니" 그럼 대방의 남쪽에 진한이 있다는 설명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 통설은 대방의 남쪽에는 마한이 있어야 옳은말이 아닌가요?

[후한서-東夷列傳 ]

韓種有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한韓의 종류로는 셋이 있으니, 그 첫번째를 마한이라 하고, 두번째를 변한이라 하며, 세번째를 진한이라 한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馬 韓

05〔馬-03/01〕韓種有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한韓의 종류로는 셋이 있으니, 그 첫번째를 마한이라 하고, 두번째를 변한이라 하며, 세번째를 진한이라 한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다.



구산 08/09/30 [20:36] 수정 삭제  
  >의 삼한조에는

한은 삼종이 있는데: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한이라고 한다.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개국이 있으며,그 북쪽에는 낙랑,남쪽은 왜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12개국이 있으며, 그 북쪽에는 예맥과 접한다. 변진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역시 12개국이 있다. 그 남쪽 역시 왜와 접한다.

***후한서의 삼한전에는 마한의 북쪽으로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통설과는 틀리는 얘기가 아닌가요? 마한의 북쪽에는 대방이 있어야 옳은 설명이 될텐데 대방의 북쪽에 있는 낙랑이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남쪽으로는 왜와 접한다고 합니다. 천리도 넘는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이를 접한다고 하고 있는것입니다. 또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고, 진한의 북쪽으로는 예맥과 접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변진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역시 그 남쪽으로는 왜와 접한다고 하였네요. 이거 어떻게 좀 해결 부탁합니다.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
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
亦與倭接。
구리넷 08/09/30 [22:21] 수정 삭제  
  한반도에다 모든 걸 가져다 놓고 억지로 끼워 맞추려면 전혀 앞뒤가 안 맞습니다.
그걸 대륙 동부에다 놓고 보면 모든 사서의 기록이 희한하게 맞게 됩니다.
www.coo2.net 에 들어가시면 좋은 좋은 역사 자료가 참 많습니다.
노가다 08/09/30 [22:27] 수정 삭제  
  마한 북쪽에 낙랑이 있다는 말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온조백제도 처음은 마한의 한쪽 땅을 할양받았으니까요.

대방의 남쪽에 진한이 있지 대방의 북쪽에 진한이 있습니까?

일본열도 외에는 사서에 왜라고 부른 지역이 없었나요?
머털도사 08/10/01 [01:31] 수정 삭제  
  대답하라는 대답은 안하고 이상한 궤변만 늘어 놓는데....
낙랑국은 동쪽이고 낙랑국영역은 북쪽으로 말갈이 사는 곳이다라는 궤변...

현재 통설로 평안도 지역이 낙랑이고 경기도 지역이 백제죠
그렇다면 낙랑은 백제의 북쪽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백제 북쪽은 말갈이고, 백제 동쪽은 낙랑이다"
라고 했죠.

노가다님은 위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계시군요.
위 기록대로 비정한다면 백제가 경기도에 위치했을때 낙랑의 위치는 강원도이고 말갈의 위치는 평안도군요. 이런 비정은 말도 안되죠. 따라서, 백제의 위치는 경기도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상한 궤변피지 말고 아래 3가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해보시죠.


1.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낙랑의 위치가 지금의 어디라고 보시는지요?

2. 백제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갈의 위치가 지금 어디라고 보시는지요?

3. 마한의 동북에 백제를 두었다고 했습니다.
마한과 백제의 강역을 각각 설명하여 왜 백제가 마한의 동북인지 말씀하시지요.


지금처럼 불분명하게 구랭이 담넘어가듯 말하지 말고,
낙랑 마한 말갈 백제의 절대적 위치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시죠.
명확하게 말 못하고 또 낙랑국은 동쪽이고 낙랑국영역은 북쪽이라는 흐리멍텅한 대답을 할 경우, 노가다님의 말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산 08/10/01 [10:29] 수정 삭제  
  낙랑을 마한의 북쪽이라고 한다면 읍루도 마한의 북쪽인것을,

노가다님! 답변에 감명받았습니다. 그것도 질문자에게 반문으로 답을 주시니 공부가 되네요.

>>마한 북쪽에 낙랑이 있다는 말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네요. 읍루도 마한의 북쪽에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요.

>>온조백제도 처음은 마한의 한쪽 땅을 할양받았으니까요.

***???

>>대방의 남쪽에 진한이 있지 대방의 북쪽에 진한이 있습니까?

***황해도의 남쪽이 경주던가요?

>>일본열도 외에는 사서에 왜라고 부른 지역이 없었나요?

***일본열도외에 한반도의 남쪽 어느곳을 왜라고 불렀다는 말씀인지?



노가다 08/10/01 [11:39] 수정 삭제  
  낙랑이 말갈을 시켜 온조국을 공격했는데, 이 경우 말갈이 독립된 국가로 볼 수 잇나요,

위에 중국놈인지 모르지만 한국에 정신병자 많다고 정신병원에 치료하라고 써 놓은 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온조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 그곳에 말갈이 살고 있었다. 낙랑이 말갈을 시켜 온조국을 공격하엿다.

온조가 터를 잡은 한수 이북에 말갈이살고 있었다. 댱시 대동강방면, 옥저 방면도 최리낙랑의 영역이었다.

뭐가 이해가 안됩니까. 안되면 중학교 교재ㅔ부터 배워 올라와야지. 자기 모르는 것 남이 어떻게 가르칩니까?
머털도사 08/10/01 [12:15] 수정 삭제  
  대체 뭔소리를 하십니까?

백제의 동쪽은 낙랑이 살고 있고.
백제의 북쪽은 말갈이 살고 있었습니다.

* 님은 지금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는데 그곳에 말갈이 살고 있었다는 궤변을 피고 있는 것입니다.
* 님은 또한 백제 북쪽에 말갈이 살고 있었는데 최리낙랑의 영역이었다는 궤변도 함께 피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분명 "말갈은 백제의 북쪽" 이고 "낙랑은 백제의 동쪽"이라고 분명히 구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노가다 08/10/01 [12:29] 수정 삭제  
  허 허 참 내!

온조백제 동쪽에는 말갈이 살고 있지 않았다?
말갈과 낙랑은 별개의 나라다?

[온조왕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쳐부수고 1백여 명을 죽였다. 가을 7월 독산, 구천 2책을 신설하여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拘川兩柵 以塞樂浪之路]

말갈이 강원도 방면 낙랑 지역에도 살고 있지 않았다면 강원도 방면 낙랑이 온조백제 북쪽에 살고 있는 말갈을 시켜 온조국의 동쪽인 독산, 구천 방면으로 오게 하여 온조국의 동쪽에서 처들어 갔나요?

말갈이 온조국을 공격한 후 물러간 대부현 방면은 온조백제의 정 북 방향인가요?

또 말갈과 낙랑이 별개 무리면 낙랑이 어떻게 말갈을 시켜 온조국을 공격할 수 있나요?
말갈 애들이 모두 정신이 훼가닥 했나요?

말갈이 온조국을 공격한 방향이나 온조국이 추격한 방향을 보면, 온조백제의 북쪽, 동북쪽, 동쪽 여러 방면으로 나누어 지고, 말갈은 낙랑의 복속세력으로 나오는데,

기초되는 지식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그렇게 하면 차라리 국민학생 데리고 가르치는 것이 낫겠어요.

공부합시다.
머털도사 08/10/01 [14:34] 수정 삭제  
  낙랑의 본거지가 어딘가요? 평안도 부근이죠.
말갈의 본거지가 어딘가요? 님의 말을 따르자면 강원도죠.

그렇다면 동유말갈 북유낙랑이라고 해야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동유낙랑 북유말갈이라고 명확히 두개를 구분해서 적었습니다.
말갈이 낙랑의 속국이라면 동유낙랑 북유낙랑 이렇게 말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주종을 바꿔서

말갈이 낙랑의 속국으로 있으므로 북유말갈이라 하고...
말갈의 본거지를 낙랑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동유낙랑이라고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죠.
님의 의견대로라면 다 같이 동유낙랑 북유낙랑이라고 적어야 합니다.

김부식이 싸이코라서 주와 종을 바꿔서 일부러 헷갈리게 하려고 했나보군요. 하하.
말도안되는 궤변을 피지 마십쇼.
김성겸 08/10/01 [15:46] 수정 삭제  
  초・략 기 중의 끝부분입니다. 관련한 기록입니다.

○三十一年壬午, ..., 議遠征, 曰;“本無定居. 故以之大猶置度外. 况我小國, 安可空國, 遠征哉. ・之伺欠, 一不可也. 所謂云者, 多・, 則與失和, 二不可也.”

○31년{단기2475년/AD142}임오, ... 가 원정을 상의하였는데, 이 말하길; “은 본래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아서, 같이 큰 나라도 오히려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같이 작은 나라가 나라를 텅 비우고 멀리 나가서 을 정벌할 수 있겠습니까? 와 가 항시 틈을 노리고 있음이 불가한 이유의 하나이고, 소위 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는 와 사람들이 많이 섞여있어서, 와의 화평이 깨질 수 있음이 불가한 둘째 이유입니다.”라 하였다.

위의 기록은 태자 즉 가 서도의 란대에서 즉위한 후의 얘기입니다.
의 西都서도에서 가까운 별궁에서 즉 가 서도에서 죽어, 동원에 묻혔는데,
근래에 [권철현] 전국회의원 등이 의 무덤과 사당이 있었다는
현금 북경 서남방 근지인 옛 [유리하진]이 있었던 [유리하]변을 답사하였고,
지난세기 육칠십년대에 있었던 얘기를 촌로로부터 듣기도 하였답니다.

이 이야기를 믿던 아니 믿든 각자의 자유이나,
직전세기 초반~중반에 간행된 [중국여도] 등과 직전세기 후반에 간행된 서토인들의 지도들에도
현금 북경 동북방 [순의]현 인근에 가 그려져 있고,
이 북경 서남방 서남방 인근에 도 그려져 있습니다.

저들의 본격적인 서남공정, 동북공정, 탐원공정 등이 시작되기 전의 지도들입니다.
손 몇 개로 하늘은 가려지지 않을 것이니, 참고들 하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노가다 08/10/01 [17:26] 수정 삭제  
  영 딴소리만 계속 하고 있네요.

온조왕 시대에 백제 바로 북쪽에 말갈이라는 나라가 있었나요?
온조왕 시대 온조국 남쪽에는(한수 이남으로 이동한 초기에는 온조국도 마한의 일부였음) 마한이 있었고,

온조국 동쪽에는 낙랑이 있었고,

온조국 북쪽에도 역시 최리낙랑이 있었고,

이 무렵 온조국 북쪽에 별도로 말갈이라는 나라가 있었나요?
온조기에 나오는 말갈은 낙랑지역으로 이주해서 거주하는 복속세력이라고 말해주어도 이해가 안되요?

온조는 북쪽에 거주하는 말갈 무리를 경계해서 건국한 해부터 말갈에 대한 대비를 하였고,

온조국 북쪽에 있는 말갈이 온조왕, 2년, 3년 연속해서 공격해오자 4년에는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인사를 닦으니 그제서야 말갈의 공격이 중단되어 8년 2월까지는 한동안 공격이 멈추었는데,

만약 온조국 북쪽에 있는 말갈과 평안도 낙랑이 별개 세력이라면, 온조국이 평안도 낙랑국에 사신을 보내 인사를 닦던 말던 온조국을 공격하지 8년 2월까지 가만 있었겠어요?

[온조왕 4년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인사를 닦았다. 四年 秋 八月 遣使樂浪修好]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를 분석해 보면 당시 낙랑국의 영역은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방면에 걸쳐 있었고, 평안도 함경도 방면은 32년에 고구려에 점령되었고, 고구려에 점령되지 않은 강원도 방면은 37년에 멸망되었으며, 그 유민 일부는 신라로 이주하였습니다.

고구려와 온조국 사이에 낙랑국이 있었는지? 말갈국이 잇었는지? 그것이 그렇게도 구별이 안되나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것 읽어보면 재미 있습니다.
성 훈 08/10/01 [18:30] 수정 삭제  
  http://pluskorea.net/sub_read.html?uid=10759

제목 :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 왕성인가?
머털도사 08/10/02 [00:13] 수정 삭제  
  동쪽에도 낙랑이고 북쪽에도 낙랑이면

東有樂浪, 北亦有樂浪

이렇게 써야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분명히 동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무리를 구분하여 기록하였죠.
이렇게..

東有樂浪, 北有靺鞨

즉,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있었다는 말이죠.
노가다는 계속 백제를 경기도에 비정하니까 백제 북쪽에 말갈이라는 별도의 무리가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이죠. 중고등학교때 배운 국사의 상식을 버리고 삼국사기를 다시 읽어야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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