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소개]민문연, '전범이 된 조선청년' 발간민족연구소 발행, 이학래 전범 회고록12월 1일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을 발간했다. 이 책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 되어 타이에서 포로감시원으로 복무하다 전쟁 종료 후 BC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되어 수년 간 감옥 생활을 했던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고 있다.
특히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일제가 자행한 여러 유형의 강제동원 가운데서도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분야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범이 된 조선청년들-한국인 포로감시원의 기록’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여 한국 사회에 이 문제를 환기한 바 있다.
이학래 선생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의 출판으로 다시 한 번 한국 사회에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가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일제는 1937년부터 1945년 패전하기까지 아시아 태평양 일대를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조선인들도 대거 동원됐다. 군인, 군속,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은 무려 800만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오랫동안 외면당하고 잊혀진 사람들이 바로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국 포로의 감시를 맡았던 민간인 군무원, 포로감시원이었다.
이때 ‘모집’된 조선 청년은 3,000여 명. 형식상으로는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후 각 지역의 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었다.
이학래는 타이에서 1만 1천명의 포로들을 대면했다. 후일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죽음의 철로’, 타이·미얀마철도 건설현장에 투입된 포로들이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등병보다 못한 일본군의 최말단이었다. 그들에겐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은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자행된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을 묻기 위해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 결과 5,700명이 BC급 전범으로 판결되었는데, 그중 148명이 조선인이었다. 그들 중 2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25명은 무기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졌다. 조선인 148명 중 129명이 이학래와 같은 포로감시원이었다.
포로감시원의 죄목은 포로 학대였다. 무리하게 노역을 강요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의 명령과 포로 감시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로 정책 수행자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가운데, 그 책임은 일상적으로 포로를 직접 대면해야했던 최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지워졌다.
이 책에는 역사의 격동기에 휩쓸려 인생이 뒤틀려버린 한 ‘역사 희생자’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담겨있다.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앞에 놓인 한 개인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저자는 뒤틀린 인생을 바로잡기 위해 평생을 반성하고 배우고 싸웠다. 그의 삶을 보면 한 개인의 힘이 역사 앞에 그리 미약하지만도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소개
책소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군사력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부문에 걸쳐 국가의 총력을 총동원하는 전쟁이었다.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조선인들도 대거 동원됐다. 군인, 군속,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까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은 약 800만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진 사람들이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국 포로의 감시를 맡았던 민간인 군무원, 포로감시원이 그들이다.
‘지원’을 빙자한 강제동원, 포로감시원
징병제 시행이 발표된 시점에서 조선의 청년들은 언젠가 징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했다. 이때 포로감시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포로감시원이 되면 월급도 주고 가족도 보호해준다고 했다. 집안 살림에 보탬도 되고,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는 것도 피할 수 있다면 포로감시원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들은 그렇게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열일곱 최연소의 나이로 포로감시원이 된 이학래
포로는 감시와 감독의 대상일 뿐, 포로를 인도적으로 처우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포로에 맞서려면 폭력밖에 없다고 배웠다.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포로보다 우월하게 보이려면 협박과 구타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으면 포로들이 너희들의 머리 위에 올라서게 될 거라고 배웠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각지로 파견되어 13만 5천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감독했다. 이학래도 타이에서 1만 1천명의 포로들을 만났다. 후일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유명해지는 ‘죽음의 철로’, 타이·미얀마철도 건설현장에 투입된 포로들이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등병보다 못한 일본군의 최말단에 자리했다. 이학래는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인 A급 전범 18명 사형, 한국인 BC급 전범 23명 사형
포로감시원의 죄목은 포로 학대였다. 무리하게 노역을 강요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의 명령과 포로 감시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로 정책 책임자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가운데, 그 책임은 일상적으로 포로를 직접 대면해야했던 최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지워졌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떠맡아야 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범이 되어야 했을까? 이학래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워왔다. ‘조선인 BC급 전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은 동료와 평생 동안 그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고함만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평생 동안 일제의 침략전쟁에 자신의 한 손을 빌려주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과 각성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한국에서 이 책을 출판하는 것을 끝까지 망설였다. 한국의 독자들이 ‘전범’이 되어야했던 자신의 삶을 이해해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한국의 여러분도 이해해 주신다면 좋겠다”고.
여기 ‘역사의 희생자’가 겪은 파란만장한 삶이 있다. 그가 내민 손을 잡을 것인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책을 내기로 결심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를 움직이는 무언가를 반드시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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