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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 127]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80

제12대 아한(阿漢) 천왕(天王)의 역사, 제12대 아한(阿漢)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12/14 [16:56]

[홍익인간 7만년- 127]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80

제12대 아한(阿漢) 천왕(天王)의 역사, 제12대 아한(阿漢)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12/14 [16:56]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서기전1813년 무신년(戊申年)에 용가(龍加) 소속 내량(內良)을 파견하여 하(夏)나라 걸(桀)왕을 도와 상(商)나라 탕(湯)을 치다가 탕이 사죄하므로 내량이 군사를 돌렸다. 이때 내량이 염이(厭夷) 때문에 관중(關中)의 기주(岐周)에 살게 되었다.

 

단군조선 시대에 삼사오가(三師五加)에서 나아가 팔가(八加) 구가(九加)라고도 부르는데, 팔가는 삼사오가를 합칭한 것으로 되기도 하고, 구가는 팔방과 중앙을 합친 구방을 직책으로 분류한 것이 되는데, 용가(龍加) 또는 호가(虎加)가 총괄직에 해당한다.

 

단군조선 초기에 팔가구가(八加九加)로 기록된 것을 나열해 보면, 호가(虎加)는 용가(龍加)라고도 하며 태자부루(太子扶婁)가 맡았던 직책이고, 마가(馬加)는 신지씨(神誌氏)가 맡았으며, 우가(牛加)는 고시씨(高矢氏)가 맡았고, 웅가(熊加)는 치우씨(蚩尤氏)가 맡았으며, 응가(鷹加)는 부소(扶蘇)가 맡았고, 노가(鷺加)는 녹가(鹿加)라고도 하는데 부우(扶于)가 맡았으며, 학가(鶴加)는 주인씨(朱因氏)가 맡았고, 구가(狗加)는 여수기(余守己)가 맡았으며, 봉가(鳳加)는 아밀(阿密)이 맡았다.

 

웅가(熊加)는 국방군사 담당으로서 목숨을 담당한 마가(馬加)에서 파생된 것이 되며, 응가(鷹加)는 형벌 담당으로서 구가(狗加)에서 파생된 부서가 되고, 노가(鷺加)는 질병(疾病) 담당인 저가(?加)에 해당되며, 학가(鶴加)는 선악(善惡)을 담당하여 양가(羊加)에 해당하고, 봉가(鳳加)는 재정(財政) 담당으로서 부루단군 천왕 때 신설된 부서가 된다.

 

단군왕검 천왕 시대에 오가(五加)의 업무 중에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는 명칭을 그대로 두고, 양가(羊加)는 배달나라 시대 때에는 계가(鷄加)라고도 하였던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는 학가(鶴加)라 별칭한 것으로 되며, 저가(?加)를 노가(鷺加)로 별칭하고, 마가(馬加)에서 웅가(熊加)를 별도로 두어 치우(治尤)의 별칭이 된 것으로 되고, 구가(狗加)에서 응가(鷹加)를 별도로 두고, 총괄직으로서 용가(龍加) 또는 호가(虎加)를 신설하였던 것이며, 부루천왕 때 저가(?加) 또는 노가(鷺加)에서 별도로 봉가(鳳加)를 신설한 것이 된다.

 

호가 또는 용가는 태자부루가 맡아 진한(眞韓)으로 봉해졌으며, 마가 신지씨는 숙신(肅愼)에 봉해지고, 우가 고시씨는 청구(靑邱)에 봉해지고, 웅가 치우씨는 남국(藍國)에 봉해지고, 응가 부소는 단군왕검 천왕의 둘째아들로서 구려(句麗, 九黎)에 봉해지고, 노가 부우는 단군왕검 천왕의 셋째아들로서 진번(眞番)에 봉해지고, 학가 주인씨는 개마(蓋馬)에 봉해지고, 구가 여수기는 예국(濊國)에 봉해졌는데, 여기에 단군왕검 천왕의 넷째아들인 부여(扶餘)가 부여에 봉해지고, 그 외 옥저(沃沮)가 봉해져 모두 기본 9군후국(君侯國)이 되며, 그 외에도 졸본(卒本), 비류(沸流) 등 소국들이 많았다. 

 

내량(內良)은 단군조선의 팔가(八加) 중 총괄직인 용가(龍加)에 소속된 인물로서 하(夏)나라 걸(桀)왕을 도우라고 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것이며, 상(商)나라 탕(湯)을 치다가 탕이 사죄하므로 군사를 돌렸던 것이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서남방이 되는 서이(西夷)에 속하는 염이(厭夷)의 소란 때문인지 내량(內良)이 단군조선 본국으로 복귀하지 아니하고, 서기전1766년 이후 은(殷)나라 시대에 백작(伯爵)의 제후국인 주(周)나라가 소재하였던, 관중(關中)의 기주(岐周)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은 견이(?夷)와 가까운 곳인데, 백이(白夷)에 해당하는 서이(西夷)와 더불어 하은주의 서쪽 변방을 다스렸던 것이다.

 

내량이 활동한 역사는 서기전1767년에 신지 우량(于亮)이 견군(?軍)을 이끌고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기(?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는 역사와 연관된다. 빈기는 빈(?)과 기(岐)의 땅이며 은나라 제후국으로서 은나라를 멸하고 세운 주(周)나라의 제후국시절 주무대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하(夏)나라의 제후국이던 은나라의 제후 탕(湯)이 서서히 군사를 일으킨 것이 되는데, 서기전1766년에 은나라를 세우기까지 최소한 약 50년간의 준비기간이 있었던 것이 된다. 은탕(殷湯)은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삼아 하(夏)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잡았는데, 은(殷)의 원래 국명이 상(商)이므로 상탕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단군조선이 정식 천자국인 하(夏)나라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소위 반란군이 되는 은탕(殷湯)의 군사를 진압한 것이 된다. 아직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인정 즉 천명(天命)을 받지 못한 것이 된다.

 

[욕살을 한(汗)으로 승진시켜 봉하다]

 

서기전1806년 을묘년(乙卯年)에 청아(靑莪) 욕살(褥薩) 비신(丕信)과 서옥저(西沃沮) 욕살 고사침(高士琛)과 맥성(貊城) 욕살 돌개(突蓋)를 열한(列汗)으로 봉하였다.

 

욕살은 지방장관에 해당하는데 이들 비신, 고사침, 돌개를 봉하여 욕살 윗 단계가 되는 한(汗)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욕살은 원(原)이나 성(城)의 책임자이며, 한(汗)은 지방의 왕(王)인 제후(諸侯)에 해당하는데, 소위 제후라는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의 한(汗)은 소위 천자(天子)격에 해당된다.

 

서기전108년 북부여 시대에 위씨조선이 한(漢)나라에 망하자 졸본(卒本)의 한(汗)이었던 고두막(高豆莫)이 의병을 일으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며 한나라와 전쟁을 하였는데, 이 고두막한(高豆莫汗)이 곧 북부여의 제후인 천자(天子)인 것이다.

 

고사침은 그 성씨가 고씨임을 알겠으나 ,비신과 돌개는 그 성씨가 불명이나 아마도 단군조선의 종실로서 한(桓)씨일 가능성이 많은데, 한편, 단기고사에서는 한불배(韓不倍), 신돌개(申突蓋)라고 적고 있어 비신의 성씨가 한(桓,韓)씨이며, 돌개의 성씨가 신(申)씨임을 나타내고 있다. 불배는 아마도 필사과정에서 비신을 잘못 쓴 것으로 되는데, 비신(丕信)이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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